
새벽 기차를 타고 오라데아로
클루지나포카에서 오라데아로 향하는 새벽 6시 40분 기차. 숙소에서 트램을 타고 기차역에 갈 수 있다고 들었지만, 운행 소식이 없어 결국 택시를 타고 기차역에 가야 했다.
아침 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바람 끝에 실린 가을 기운이 괜히 마음을 흔들었다. 휘어진 철로 너머로 번지는 여명, 흐릿하게 밝아오는 새벽과 역사의 도시명이 적힌 간판, 그리고 낯익은 음악. 이 순간이 언젠가 그리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자리에 앉아 더러운 차창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 사이, 옆자리의 젊은 여인이 스르르 잠들었다. 그녀의 얼굴도, 트란실바니아의 풍경도 아름다웠다. 아니, 트란실바니아가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오라데아에서 슬로바키아까지 가는 길
오라데아 기차역에 도착했다. 이곳을 목적지로 정한 건, 슬로바키아행 교통편이 있을까 싶어 마지막 희망을 품고 온 것이었다.
기차역 앞에서 택시 기사에게 숙소 방향과 슬로바키아로 가는 버스편을 물었더니, 그는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면 된다고 말했다. 내 짐을 실을 필요도 없는 상황인데도 친절하게 말이다. 덕분에 호텔엔 쉽게 도착했지만, 프런트 직원의 태도는 좋지 못했다. 짐만 맡기고 볼일이나 보라는 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슬로바키아행 교통편은커녕 여행 안내소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나왔다. 계속 물었더니 그제야 “센트럼으로 가보라”는 대답을 했다. 그 이상의 실랑이는 무의미했기에, 그냥 호텔을 나서기로 결심했다.
여러 사람에게 길을 묻던 중, 한 청년이 직접 안내해 주겠다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는 내 목적지가 아주 가깝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티미쇼아라에서 온 공대생이었고, 여자 친구가 치료를 받는 동안 몇 시간을 혼자 보내야 하는 처지였다.
문제는 의사소통이었다. 22세의 젊은이는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길도 이상하게 빙 돌아서 갔다. 겨우 메인 도로 근처에 있는 여행 안내소에 도착했지만, 안내소 직원들이 “루마니아 국내 정보 외엔 아무것도 모른다”는 태도를 보여 우린 다시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은 기차역에 가서 직접 물어보라는 말만 했다.
결국 얻은 결론은 하나. 오라데아에서는 슬로바키아로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 목적지는 자연스럽게 헝가리의 데브레첸(Debrecen)이 되었다. 이미 한 번 다녀온 도시지만, 선택지가 없어 어쩔 수 없었다.
안내소를 다녀오는 동안, 아까 길을 안내해준 청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마운 마음에 함께 점심을 먹었다. 여행 안내소에서 추천한 4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를 주문해 즐겼는데,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치료를 마친 그의 여자친구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짧았던 만남은 끝이 났다.

구시가지에서 유니리 광장까지
오라데아에 일찍 도착했지만, 다음 일정을 알아보느라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헝가리행 기차표는 일단 미뤄두고, 중심가(센트룸)에 섰으니 도시부터 간단히 둘러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오라데아 구시가지의 중심 도로 이름은 ‘공화국의 길(Calea Republicii, The Way of the Republic)’. 길이는 약 1km에 불과하지만, 궁전 같은 건축물과 교회, 극장, 동상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곳이다. 이 짧은 거리엔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여 활기가 넘친다. 나에겐 숙소로 가는 길목이기도 해서, 머무는 동안 몇 번이나 이 길을 지나쳤다.
구시가지를 빠져나와 크리슈 강(Râul Criș)도 건넜다. 다리 위에서 양쪽을 바라보면, 한쪽에는 시청사(The City Hall of Oradea), 다른 쪽에는 유대교 회당(Zion Neolog Synagogue)이 마주 보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조금 더 걸으면 시야가 훨씬 트이는 유니리 광장(Piața Unirii)이 펼쳐진다.
광장 중앙에는 루마니아 국왕 페르디난트 1세의 기마상이 서 있다. 그를 중심으로 사방엔 화려한 건축물과 종교 시설들이 둘러싸고 있는데, 동쪽으로는 검은 독수리 궁전("The Black Eagle" Palace)과 ‘달의 교회(Biserica cu Luna)’로 불리는 대성당이 나란히 서 있다. 거의 맞닿을 듯 가까운 두 건물은, 장식과 색감이 유독 시선을 빼앗는 매력이 있다.
광장을 기준으로 서쪽에는 화려한 외관의 그리스 가톨릭 주교궁(Palace of Greek-Catholic Bishopric)이 자리하고 있다. 그 반대편에는 성 니콜라스 성당(St. Nicholas Cathedral)이 조용히 시선을 끈다. 더 동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오라데아 요새(Oradea Fortress)가 모습을 드러낸다.

비호르 주의 주도, 오라데아
본격적인 여행에 앞서, 오라데아에 대해 간단히 짚고 가자. 이 도시는 루마니아 북서부 크리샤나 평원의 구릉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크리술 레페데(Crișul Repede) 강이 도심을 가로지른다. 헝가리 국경에서 불과 10km 떨어져 있어, 루마니아와 유럽의 경계선 같은 역할도 한다.
오라데아는 비호르 주(Bihor County)의 주도로, 경제·사회·문화 전반에서 북서부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루마니아 전체 도시 중 인구 규모로는 9위에 해당하고, 대학과 교육기관도 많아 학문 도시의 면모도 갖춘 곳이다.
과거에는 유대인 공동체가 도시 인구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컸고, 독일인·슬로바키아인·우크라이나인 등 다양한 민족이 공존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여러 문화가 얽혀 만들어진 도시답게, 걷다 보면 곳곳에서 그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오라데아의 역사
오라데아의 역사는 1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헝가리의 성 라디슬라스 1세(Ladislaus I, 1040~1095)가 이곳에 주교령 정착지를 세우며 도시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 시작이다. 1113년에는 ‘바라디눔(Varadinum)’이라는 라틴어 명칭이 문서에 처음 등장했다.
13세기, 오라데아는 헝가리 왕국의 일부로서 경제적·문화적으로 번성했다. 이 시기 몽골의 침략(1241년)을 계기로 오라데아 성채가 세워졌고, 이후 여러 차례 파괴와 재건을 거쳤다. 14~15세기는 도시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로 꼽힌다.
도시는 오랫동안 헝가리의 지배를 받으며 ‘너지바러드(Nagyvárad)’로 불렸다. 독일어로는 ‘그로스바르다인(Großwardein)’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이후 오스만 제국이 1660년부터 1692년까지 점령하면서 ‘바라트 에얄레트(Varat Eyalet)’라는 명칭으로 독자적 행정 구역이 되기도 했다.
1692년부터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가 탈환해 트란실바니아 공국에 편입했고, 1711년부터는 합스부르크 지배가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19년부터는 루마니아령이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년에는 잠시 다시 헝가리로 넘어갔다. 종전 이후 현재까지는 루마니아에 속해 있다.
이렇듯 수차례의 지배 세력 변화 속에서도, 오라데아는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는 도시로 자리 잡았다. 루마니아인, 헝가리인, 오스트리아인, 유대인, 슬로바키아인, 루테니아인, 터키인까지. 각기 다른 문화가 이 도시의 역사를 쌓아 올린 셈이다.

건축의 보고
오라데아는 루마니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의 도시다. 18세기 바로크 양식 건물부터 20세기 초의 아르누보 건축물까지, 다채로운 시대의 건축이 한 도시에 공존한다.
17~18세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지배 시기에 도시 정비가 본격화됐다. 건축가 안톤 힐레브란트(Anton Hillebrandt)는 도시를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했고, 1752년부터 로마 가톨릭 성당과 크리슈 지방 박물관(Muzeul Ţării Crişurilor) 같은 상징적 건축물이 들어섰다. 이후 19세기와 20세기 초에는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이 오라데아 전역에 퍼졌다.
현재 오라데아에는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과 기념물만 89개, 역사기념물로 지정된 장소 26개, 예정된 장소도 25개에 이른다. 덧붙여, 건축적으로도 탁월하다고 평가받는 명소는 38개에 달한다. 이 외에도 바로크, 고전주의, 절충주의, 역사주의, 분리주의, 낭만주의, 신루마니아주의 등 일곱 가지 양식이 어우러져 있어, 도시 자체가 살아 있는 건축 박물관처럼 느껴진다는 평을 받는다.
다만, 오라데아에 직접 도착했을 때 받은 인상은 조금 달랐다. 건축물은 분명 아름답고 웅장했지만, 도시 전반이 현대화되어 있다는 느낌은 덜했다. 루마니아보다는 헝가리에 더 가까운 분위기였다. 실제로 현재 오라데아 인구의 4분의 1은 헝가리계라고 한다. 관광객도 많지 않은 편인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트란실바니아 지역이 루마니아령으로 편입되며 오라데아가 ‘국경 도시’로 남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음 편부터는 본격적인 오라데아 여행기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계속)
Travel Data
오라데아 중앙역:주소:Strada Republicii 125, Oradea, 루마니아
카니발(Carnival) 호텔:주소:Strada Republicii 55, Oradea, 루마니아/전화:+40726244734/웹사이트:https://www.hotel10.net/hotelul-carnival/
아스토리아(Astoria) 호텔:주소:Strada Teatrului 1-2, Oradea 410020 루마니아/전화:+40359101039/웹사이트:https://astoriaoradea.ro/
오라데아 웹사이트:https://www.visitoradea.com//https://ro.wikipedia.org/wiki/Oradea
오라데아 교통편
열차편:비엔나-오라데아-클루지나포카 노선이 매일 운행한다. 티켓은 https://tickets.oebb.at/en/ticket에서 구매할 수 있다. 루마니아의 주요 철도 운영사인 CFR Călători에서도 오라데아행 기차표를 구매할 수 있다. https://bilete.cfrcalatori.ro/ro-RO/Itineraries.
항공편:오라데아 국제공항은 도심에서 매우 가까운 곳(6km)에 위치한다. 2024년 6월부터 LOT 폴란드 항공은 오라데아와 바르샤바 간 주 4회(월·수·금·토요일) 항공편을 운항한다. 엠브라에르 항공기로 운항되며, 티켓은 www.lot.com과 여행사에서 구매 가능하다. 오라데아는 LOT 폴란드 항공을 통해 뉴욕, 토론토, 이스탄불, 파리, 오슬로 등의 도시로 연결되며, 바르샤바에서 환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