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15일 오후, 경남 창원 진해구 해군사관학교에서 학사사관후보생 139기 입영식이 열렸다. 이날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풍경이 연출됐다.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의 장남 지호 씨가 해군 장교 후보생으로 입대하면서,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취재진과 시민들이 모였다. 군 관계자들이 현장을 정리할 정도로 재벌가 자제의 입대는 큰 화제가 됐다.
지호 씨는 이날부터 11주간 장교 교육 훈련을 받고 12월 1일 해군 소위로 임관할 예정이다. 총 복무 기간은 훈련 기간과 임관 후 의무복무 기간을 합해 39개월이며 보직은 통역장교다. 지호 씨를 포함해 이날 입영한 139기 해군 학사사관 후보생은 84명(남자 63명, 여자 21명)이다.
지호 씨를 향한 대중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2000년 미국에서 태어난 복수 국적자인 지호 씨는 해군 장교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미국 시민권을 스스로 포기했다. 일반 병사로 근무하면 복수 국적을 유지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호감도가 더 높아졌다. 온라인에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장교 복무를 선택한 건 쉽지 않은 결정”, “삼성 오너가의 새로운 모습”,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등 격려가 이어졌다. 일반 병사보다 복무 기간이 2배 가까이 되는 장교로 입대한 점에 놀랐다는 반응도 많다.
지난 2020년 이재용 회장이 “경영권 승계는 없다”고 선언한 상황에서, 장남이 장교 복무를 택한 것을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공정성과 책임의식,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을 직접 보여준 좋은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까다로운 심사를 거친 장교라는 직책에 담긴 함의도 훌륭하다. 책임감과 리더십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어서다.
# 가족 배웅 속 입대
이재용 회장은 불참
그간 언론에 거의 노출된 적이 없었던 터라, 이날 지호 씨의 입대 장면은 큰 화제가 됐다.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매를 한 지호 씨는 짧은 머리에 검은색 반소매 티셔츠, 청바지, 검은색 운동화 등 수수한 차림새로 현장에 나타났다. 의젓한 표정으로 더 좋은 점수를 얻기도 했다.
이날 입영식에는 이재용 회장의 전 부인이자 지호 씨 모친인 임세령 대상홀딩스 부회장과 여동생 원주 씨가 함께 간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에 따르면 임 부회장은 아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건강히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넸고, 원주 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가방끈을 정리해주는 등 애틋한 장면을 연출했다고 한다.
한편 이재용 회장은 다른 일정으로 인해 아들 입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이 회장의 불참이 불필요한 관심이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한 배려라는 해석도 있었지만, 삼성 측은 단순히 업무 일정상 참석하지 못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면제와 특혜는 옛말?
재벌가 자녀들의 군 복무가 늘어나는 이유
각종 병역 면제와 특혜 논란이 반복되던 재벌가의 군 복무 풍경이 바뀌고 있다. 최근에는 자발적 입대와 책임 있는 복무 사례가 늘고 있다. 장교 지원이나 시민권 포기를 감수하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사례는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차녀 최민정 씨다. 해군 장교로 자원해 해외 파병까지 다녀온 뒤 중위로 전역했다. 코오롱그룹 4세 이규호 씨는 미국 시민권을 내려놓고 육군 현역병으로 복무하며 ‘특권 포기’ 사례의 주인공이 됐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장남 김동관 부회장과 차남 김동원 사장도 각각 공군 통역장교, ROTC 장교로 군 생활을 마쳤다. 신세계그룹 정용진 회장의 장남 정해찬 씨 역시 미국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해 육군 현역으로 복무하고 만기 전역했다.
이렇게 재벌가 자녀들의 군 복무가 늘어나고 있는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사회적인 압력이다. 공정과 책임을 중시하는 여론 속에서 군 복무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상징적 의무가 됐다. 경영 승계를 앞둔 이미지 관리 차원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병역을 지도자로서 도덕성과 리더십을 검증받는 훌륭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부모 세대의 학습 효과다. 병역 논란이 준 타격을 경험한 부모의 자녀 세대는 “차라리 다녀오는 것이 낫다”는 의식이 전반적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