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의 언덕, 몽 데자르
벨기에 브뤼셀 여행은 처음 계획보다 훨씬 바빴다. 당초 일정에 넣었던 브뤼헤에 가지 못해 하루가 비었지만, 막상 도시가 예상보다 넓고 볼거리가 많아 여유가 없었다. 낮에 다시 그랑플라스를 찾으려던 계획도 무산됐다. 대신 발걸음은 ‘몽 데자르(Mont des Arts, 예술의 언덕·네덜란드어로는 쿤스트베르크)’로 향했다.
이곳에는 벨기에 왕립도서관(KBR), 국립문서보관소, 브뤼셀 회의센터, 공원 등 다양한 명소가 모여 있다. 언덕 너머로는 브뤼셀 왕궁(Place Royale)이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에는 역사박물관(BELvue Museum), 벨기에 왕립미술관, 악기 박물관(MIM), 마그리트 미술관(Magritte Museum) 등 수많은 문화 기관이 늘어서 있다.

12세기부터 권력 중심지
몽 데자르는 브뤼셀의 윗도시로, 14세기까지는 유대인들이 정착해 살던 곳이었다. 당시 이곳은 ‘유대인 계단(Escaliers des Juifs, 네덜란드어로 Ioode trappen)’이라 불린 가파른 네 개의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앞선 12세기부터 18세기까지는 브라반트 공국을 비롯해 부르고뉴 네덜란드, 스페인·오스트리아 네덜란드의 지배자들인 백작과 공작, 대공, 왕, 황제, 그리고 주지사의 거주지이자 권력의 중심지였다.
당시 이 산에는 나사우 궁전(Paleis van Nassau, 1440년대~1750년경), 샤를 로렌 궁전(Paleis van Karel van Lotharingen, 1757년~현재), 그란벨 궁전(Granvellepaleis, 1555~1931년) 등이 세워졌다. 그 위쪽에는 14세기 중반부터 1731년까지 약 700년간 존속한 쿠덴베르크 궁전도 있었다. 이 궁전의 존재 때문에 이곳은 ‘법원의 언덕(Montagne de la Cour, 네덜란드어로 Hofberg)’이라 불렸다.
그러나 쿠덴베르크 궁전은 18세기 화재로 소실돼 폐허로 남았고, 이후 그 자리에 유대인들이 정착했다.

19세기 말, 레오폴드 2세의 재건 계획
이 지역이 본격적으로 재개발된 것은 19세기 말 레오폴드 2세(Leopold II, 1835~1909) 국왕 때다. 그는 이곳을 ‘예술 지구’로 만들겠다며 동네 전체를 매입하고, 다양한 건축가와 도시계획가에게 문화 기관을 수용할 건물 설계를 맡겼다.
반면 당시 브뤼셀 시장 카롤 불스는 오래된 지구를 가능한 한 보존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시의회에서 지지를 얻지 못했고, 1894년 11월 19일 의회는 결국 국왕의 구상에 손을 들어주었다. 불스는 5년 뒤 병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렇듯, 그랑프라스의 길드 하우스를 원형대로 복원했던 불스와, 콩고 식민지에서 얻은 막대한 부로 웅장한 프로젝트를 추진한 레오폴드 2세는 끝내 뜻을 같이할 수 없었다.

20세기, 알베르 1세의 임시 공원 개장
1897~1898년, 오래된 건물을 헐어냈지만 자금이 부족해 언덕은 잠시 공터로 남았다. 1903년에는 브뤼셀 시와 벨기에 정부가 중앙역과 예술의 언덕 건설에 합의하면서, 오래된 생로크와 푸테리(Putterij) 지구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레오폴드 2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뒤인 1910년, 뒤를 이은 알베르 1세 국왕은 이곳에 공원을 열었다. 마침 브뤼셀 국제 박람회가 열리던 해였고, 국왕은 프랑스 조경가 피에르 바셰로(Pierre Vacherot)에게 언덕 위에 ‘임시 정원’을 설계하도록 했다. 이 정원은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녹지 공간이 되었지만, 1930년대 말 ‘예술의 언덕’ 프로젝트가 본격화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1956년부터 1969년 사이, 언덕과 주변은 크게 변모했다. 벨기에 왕립도서관(KBR)과 의회 궁전(지금의 브뤼셀 회의센터) 같은 거대한 현대식 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성조지 예배당을 제외하고, 오렌지 나사우(Orange-Nassau) 궁전은 완전히 사라졌다.
거센 반발이 일자, 1961~1962년 당국은 궁전의 일부를 도서관 단지 안으로 통합하기로 했다. 도서관은 1969년에 문을 열었고, 같은 시기 조경가 르네 페셰르(René Pechère, 1908~2002)가 설계한 기하학적 정원이 새롭게 조성됐다.
길고 긴 세월, 수많은 개발을 거쳐 오늘의 모습에 이른 몽 데자르. 지금은 언덕 위에 앉아 브뤼셀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저 멀리 그랑플라스 시청의 뾰족한 탑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알베르 1세의 승마 동상
언덕에 오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벨기에의 세 번째 국왕, 알베르 1세(Albert I, 1875~1934)의 기마 청동상(높이 1.5m)이다. 동상 뒤편에는 벨기에 왕립도서관(KBR)이 자리한다. 알베르 1세는 1차 세계대전에서 벨기에 군을 이끌고 독일에 맞섰으며, 전후에는 나라의 복원에 힘쓴 인물이다. 동시에 열정적인 등반가였는데, 1934년 2월 홀로 등반을 하던 중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향년 58세).
이 승마상은 그의 사후인 1951년, 조각가 알프레드 쿠르텐스(Alfred Courtens, 1889~1967)가 제작했다. 이 조각상에서 알베르 1세는 군복 차림의 ‘군인 왕’으로 표현됐으며, 손에는 헬멧을 들고 있다. 조각가는 헬멧의 그림자가 얼굴을 가릴 것을 우려해 맨머리로 표현했다고 한다. 첫 동상은 1943년에 제막됐으나 수정 과정을 거쳐 1946년에 최종 승인되었고, 현재는 벨기에 왕립도서관의 건축가 쥘 고베르(Jules Ghobert)가 설계한 받침대 위에 서 있다.

벨기에의 여왕, 바이에른의 엘리자베스 동상
알베르 1세 동상 맞은편에는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 가브리엘 발레리 마리(Elisabeth Gabriele Valérie Marie, 1876~1965)가 서 있다. 1980년에 세워진 이 작품은 벨기에 조각가이자 메달리스트인 르네 클리케(René Cliquet, 1899~1977)의 손에서 나왔다. 평범한 옷차림의 중년 여성으로 묘사돼, 왕비의 위엄보다는 소박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실제의 엘리자베스는 벨기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전선의 군인들을 찾아가 격려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수용소로 끌려가던 수백 명의 유대인 어린이를 구해냈다. 그 공로로 그녀는 ‘열국 중의 의인’으로 불렸으며, 왕비의 이름을 딴 초콜릿 브랜드가 있을 정도로 국민에게 널리 기억되고 있다.

몽 데자르 정원
벨기에 왕립도서관, 왕국 일반기록보관소, 브뤼셀 회의센터 광장과 나란히 자리한 곳이 몽 데자르 정원(Jardin du Mont des Arts)이다. 이 정원은 1910년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처음 조성되었고, 1950년대에는 대규모 도시 복합단지의 일부로 개조되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모습은 2001년에 복원된 것이다.
긴 세월 동안 숱한 변화를 겪은 끝에 남은 이곳은, 지금은 깔끔히 다듬어진 정원과 그 뒤로 우뚝 솟은 브뤼셀 시청의 탑이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자아낸다. 특히 붉게 물드는 석양 아래 정원을 바라보고 있으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로얄 광장의 고드프리 오브 부용의 동상
브뤼셀 왕궁 광장 앞에는 십자군의 영웅 고드프리 오브 부용(Godefroy de Bouillon, 1060~1100)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루이-유진 시모니스(Louis-Eugène Simonis, 1810~1882)가 제작한 청동 조각으로, 1848년 8월 15일 제막되었으며 브뤼셀을 장식한 최초의 승마 동상이기도 하다.
동상은 건축가 틸만-프랑수아 쉬스(Tilman-François Suys, 1783~1861)가 설계한 파란색 아르켄 석재의 높은 타원형 받침대 위에 놓였다. 1897년에는 조각가 기욤 드 그루(Guillaume De Groot, 1839~1922)가 만든 청동 부조 두 점이 받침대에 더해졌다. 하나는 ‘예루살렘 공격’을, 다른 하나는 고드프리가 제정한 ‘예루살렘 법령’을 형상화한 것이다.

성 제임스 예배당
왕궁이 있던 옛 쿠덴베르크(Coudenberg) 궁전 자리는 지금 벨기에 감사원, 18세기 루이 16세 양식으로 지어진 왕실 예배당(1760~1761), 샤를 로렌 궁전 등 여러 건물이 모여 있는 곳이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신고전주의 양식의 성 제임스 예배당이다.
성 제임스 예배당은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명인 성 야고보에게 헌정된 가톨릭 교회로, 1776년부터 1787년까지 지어져 인근의 두 예배 장소를 대신했다. 이후 19세기에 들어 돔과 종탑, 채색 프레스코가 더해졌다. 1959년에는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오늘날은 왕립 본당 교회이자 1986년부터는 벨기에 군사 직속 대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브뤼셀 왕궁
브뤼셀 왕궁(Palais de Bruxelles)은 국왕의 행정 거주지이자 주요 집무 공간이다. 현재 건물의 기초는 18세기 말에 마련되었으며, 부지는 원래 중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쿠덴베르크 궁전 단지의 일부였다. 지금 우리가 보는 외관은 레오폴드 2세 국왕이 1900년 이후 대대적으로 개축한 결과다.
궁전 내부에는 왕립 컬렉션의 중요한 부분이 보관돼 있다. 나폴레옹, 레오폴드 1세, 루이 필리프 1세, 레오폴드 2세의 국가 초상화와 귀중한 가구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은식기·도자기·크리스털은 지하실에 보관되어 국가 연회나 공식 행사에 사용된다. 파올라 여왕은 일부 국가실에 현대 미술을 더해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
왕궁은 국빈 방문 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외국 정상은 왕실 아파트와 스위트룸에서 머물고, 대사들은 이곳에서 영접받는다. NATO·EU 대사와 정치인을 위한 신년 리셉션도 열리며, 왕실 결혼 연회와 국왕 서거 시 시신 안치도 이루어진다. 다만 벨기에 왕가의 실제 거처는 브뤼셀 외곽의 라켄 궁으로, 왕궁은 상징적·공식적 공간에 가깝다.
왕이 궁전에 있을 때는 중앙 건물에 국기가 게양되고, 경비대가 입구를 지킨다. 또한 왕궁은 1965년부터 매년 7월 21일 국경일 이후 9월 초까지 여름마다 대중에게 개방되는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샤를 드 로렌 궁전
샤를 드 로렌 궁전(Palace of Charles of Lorraine)은 네덜란드 합스부르크 총독, 로렌의 샤를 알렉산더(Charles Alexander of Lorraine, 1712~1780) 왕자의 거처였다. 1757년, 오렌지-나사우 궁전(1744~1780)을 대신해 새로 지어진 건물이다. 샤를 알렉산더는 수도를 위한 웅장한 프로젝트를 구상했지만, 기존 궁전은 이미 황폐해져 당대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결국 건물은 헐값에 팔린 뒤 거의 전부 철거됐다.
벨기에 독립 이후인 1837년, 새로 설립된 벨기에 왕립도서관(KBR)이 이 건물을 인수했다. 그러나 1960년대 몽 데자르 단지가 들어서면서 궁전의 4분의 3 이상이 철거되었고, 그 과정에서 나사우 궁전의 흔적도 완전히 사라졌다.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당시 확장된 일부 구조뿐이다.
2001년 11월 22일 이후 이 궁전은 브뤼셀 수도권 기념물 및 유적지 관리국에 의해 보호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2017년 리노베이션을 위해 문을 닫았다가 2019년 다시 문을 열었으며, 현재는 18세기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궁전 안에는 예배당도 있었다. 1804년 법령에 따라 개신교 교회에 기증되었고, 이후 1816년에 확정적으로 양도되었다. 로렌의 샤를 알렉산더 왕자의 개인 예배당(왕실 예배당이라고도 불린다)은 1965년 몽 데자르·쿤스트베르크 신축 건물에 통합되었다.
궁전 앞에는 1848년에 세워진 샤를의 동상이 서 있다. 그는 1744년부터 1780년까지 오스트리아-네덜란드의 총독을 지냈으며, 과학과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집필한 백과사전의 감정가로도 참여했으며, 신비주의에 호기심을 보이고 열정적인 수집가로 활동했다.

마그리트 미술관과 왕립 미술관
마그리트 미술관은 벨기에 초현실주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벨기에 왕립 미술관을 구성하는 박물관 중 하나다. 이 건물은 1731년 쿠덴베르크 궁전이 화재로 소실된 뒤 새로 지어진 단지의 일부다. 이후 수세기에 걸쳐 호텔과 보석점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다가, 최종적으로는 박물관으로 개장했다. 현재 미술관에는 마그리트의 원본 회화, 드로잉, 조각 등 약 200점이 소장·전시되고 있다.
벨기에 왕립 미술관은 약 2만 점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15세기부터 21세기에 이르는 회화·조각·드로잉을 아우르며, 조형 예술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준다. 플랑드르 원시파를 비롯해 피터 브뤼겔, 피터 폴 루벤스, 자크 조르단스, 자크 루이 다비드, 오귀스트 로댕, 제임스 앙소르, 페르낭 크노프, 헨리 무어, 폴 델보, 르네 마그리트 등 거장들의 작품이 이곳에 소장돼 있다.
주변에는 예술적 명소들이 이어진다. 웅장한 아르누보 건물에 자리한 악기박물관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컬렉션을 자랑하고, 1992년 문을 연 얀 못(Jan Mot) 갤러리는 브뤼셀 미술 애호가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다음 회에 계속된다.(계속)
Travel Data
알버트 1세 동상(Roi Albert 1er-Alfred Courtens):주소:Mont des Arts 5, 1000 Bruxelles, 벨기에/전화:+3225138940/웹사이트:+3225138940
엘리자베스 여왕 동상(Elisabeth Statue By René Cliquet 1980):주소:Mont des Arts 5, 1000 Bruxelles, 벨기에
몽 데자르 언덕(Mont des Arts):주소:rue Royale 2-4, 1000 브뤼셀
성 제임스 교회(Church of St. James on Coudenberg):주소:Imp. du Borgendael 1, 1000 Bruxelles, 벨기에/전화:+32 2 502 18 25
브뤼셀 왕궁(Place Royale Bruxelles-Statue de Godefroy de Bouillon):주소:Pl. Royale, 1000 Bruxelles, 벨기에/전화:+32 (0)2 500 45 54/웹사이트:https://coudenberg.brussels/fr
로렌의 샤를 궁전(Palais de Charles de Lorraine):주소:Rue du Musée 1, 1000 Bruxelles, 벨기에/웹사이트:https://www.brusselsmuseums.be/en/museums
마그리트 미술관(Magritte Museum):주소Place Royale / Koningsplein 2 1000 브뤼셀/전화:+32 (0)2 508 32 11
벨기에 왕립미술관(Musées Royaux des Beaux-Arts de Belgique):주소:Rue de la Régence 3, 1000 Bruxelles, 벨기에/전화:+3225083211/웹사이트:https://fine-arts-museum.be/en
악기박물관(Musical Instruments Museum):주소:Rue Montagne de la Cour 2, 1000 Bruxelles, 벨기에/전화:+3225450130/웹사이트:https://www.mim.be/
얀 못(Jan Mot) 미술관:주소:Pl. du Petit Sablon 10, 1000 Bruxelles, 벨기에/전화:+3225141010/웹사이트:https://janmot.com/
클럽 프린스 알버트(Prins Albert kazerne(voormalig):주소:Rue des Quatre Fils Aymon 23, 1000 Bruxelles, 벨기에/웹사이트:https://ablhistoryforum.be/viewtopic.php?t=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