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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코비 광장의 바르샤바 왕궁

  • 기자명 이신화 작가
  • 입력 2021.11.11 18:04
  • 댓글 0
  • 사진(제공) : 이신화 작가
바르샤바 랜드마크로 통하는 잠코비 광장에는 많은 유적이 있다. 지그문트 3세 바사 왕의 기둥, 바르샤바 왕궁 등이 있다. 특히 이곳은 올드 타운의 관문이라서 오래되고 멋진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유서 깊은 잠코비 광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붉은 색 건물이 바르샤바 왕궁이다. 13세기 지그문트 3세 바사 왕은 크라쿠프 바벨 성에서 바르샤바로 천도하면서 개조한 바르샤바 궁전. 아픈 전쟁의 역사 속에서도 완벽하게 재건되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폴란드 전통 식당에서 해장
전날의 향연은 다음 날의 피곤으로 이어진다. 술 탓에 파김치가 된 바르샤바의 아침이다. 이미 장링은 숙소를 떠났다. 그녀는 독일로 간다고 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샤워를 하고 주섬주섬 장비를 챙겨 숙소 밖으로 나온다. 조식부터 먹어야 한다. 숙소와 거의 붙어 있는 자피에첵(Zapiecek) 식당으로 들어간다. 폴란드 전통음식점으로 유명한 체인점이다. 종업원들은 폴란드 전통 복장을 입고 식기는 표시가 확연한, 폴란드 그릇을 사용한다. 전통을 살려낸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실내가 있지만 대부분 손님들은 야외를 선호한다. 파라솔로 햇살을 가리고 꽃으로 칸막이를 만든 야외자리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피에로기.
피에로기.

 

피에로기와 스프.
피에로기와 스프.
전통식당.
전통식당.

 

일단 전날 마신 술독을 빼내야 한다. 한국처럼 해장국이 없으니 국물대용이 되는 스프(아마도 Zurek soup)로 대체해야 한다. 스프와 피에로기(Pierogi)를 주문한다. 피에로기는 동유럽 식 만두로 이미 폴란드 첫 여행 때 맛을 본 음식이다. 이 식당의 피에로기는 찜이 아니라 군만두 스타일이다. 스프는 맛있었으나 피에로기는 느끼해서 먹을 수가 없다. 남은 음식은 포장을 해서 잠코비 광장(plac Zamkowy, Castle Square)으로 걸음을 옮긴다.

잠코비 광장.
잠코비 광장.
잠코비 광장.
잠코비 광장.

 

지그문트 3세 바사의 오벨리스크
올드 타운의 시작점인 잠코비 광장이다. 세계대전으로 온 도시가 파괴된 후 1949년에 도시가 재건되면서 복원됐다. 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지그문트 3세 바사(1566~1632)의 기둥(Sigismund's Column, 22m)이다. 1644년 바사의 아들 블라디슬라브 4세 바사(Władysław IV Waza)가 아버지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기둥이다.

지그문트 3세의 오벨리스크.
지그문트 3세의 오벨리스크.

 

지그문트 3세 바사와 바르샤바는 연관이 아주 깊다. 바사는 1587년 8월 전임 스테판 바토리의 뒤를 이어 폴란드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스웨덴의 왕(1566~1632)이자 폴란드 왕(1587~1632)이었다. 그는 천도가 필요했다. 수도 크라쿠프는 남쪽으로 많이 떨어져 있었고 거기에 스웨덴 내부의 친척들이 그의 왕위를 자꾸 위태롭게 하고 있었다. 바르샤바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형성되기 전까지 두 국가의 수도였던 크라쿠프와 빌뉴스의 중간에 있었다. 때마침 1595년 크라쿠프 바벨성에 불이 나자 1596년 바르샤바로 왕궁을 천도했다. 바르샤바는 그때부터 실질적인 연방의 수도가 되었다.

지그문트 3세 바사 때 왕실의 거처가 된 바르샤바 궁전
잠코비 광장에서 가장 독보적인 건물은 바르샤바 궁전(Royal Castle in Warsaw)이다. 붉은 색의 거대한 궁전은 여행자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건물 벽에는 미술관처럼 옛 그림들이 걸려 있다. 일단 바르샤바 궁전에 대한 역사부터 이해해야 한다. 바르샤바 궁전은 마조프셰(Mazowsze, 마조비아) 공국의 것이었다. 1138년에 설립한 마조프셰 공국은 우여곡절을 겪은 후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에서 떨어져 나와 바르샤바에 터전을 잡았다. 무역과 수공업으로 부를 쌓아 점차 영역을 확장해 갔다. 1413년 바르샤바는 야누슈 2세(Janusz II, 1455/6~1495)때 마조프셰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1526년 마조프셰 공국은 대가 끊어졌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에 통합되었다. 1529년 폴란드 셰임(sejm, 폴란드 의회)이 통치했다.

성요한 교회 내부 마조프셰 동상.
성요한 교회 내부 마조프셰 동상.

 

1596년 바사 왕은 바르샤바로 천도 후 마조프셰 공국의 궁전을 대대적으로 개조한다. 왕실 건축가였던 이탈리안 산타 구치(Santa Gucci, 1530~1600)가 재건축을 맡아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하다 죽었다. 1611년 공사의 주요 부분이 마무리되자 왕들이 거처하게 되었다. 전성기 때 유럽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훌륭한 국왕의 처소였다. 이 무렵 새로운 도시 확장도 이뤄진다. 1648년, 통치권을 가진 귀족과 지주들은, 비스와 강 동쪽의 프라가(Praga)라는 구역에 둥지를 틀면서 따로 도시 특권을 부여받았다. 현재는 개발이 덜 된 지역으로 남아 있다.

17세기에 더 화려해진 바르샤바
하지만 성장하던 도시는 대홍수를 거치면서 큰 피해를 입는다. 1655~1658년 스웨덴군, 브란덴부르크군, 그리고 트란실바니아군에게 세 차례나 빼앗기고 다시 탈환되었는데, 이때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했다. 하지만 도시는 전쟁 전보다 더욱 화려해졌다. 고딕 양식이 첨가된 후기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들이 거리를 메웠고 뒤이어 귀족과 부자들에 의해 거대한 바로크 양식 건물들이 곳곳에 세워졌다. 1677년 폴란드 민족의 ‘군신’ 얀 소비에츠키 3세는 바르샤바 교외에 바로크 양식의 빌라노프 궁전을 짓기도 했다. 연방의 국운은 천천히 쇠하기 시작했지만 도시는 좀 더 번영하고 화려해져 갔다.

폴란드 분할과 바르샤바 왕궁의 마지막 왕
18세기에도 우여곡절을 겪었다. 1702년 바르샤바는 스웨덴이 장악했다. 1733년 아우구스트 2세가 사망한 후 폴란드 왕위계승 전장이 되었다. 1762년 러시아 예카테리나 여제는 남편 표트르 3세를 죽이고 차르에 올랐다. 그녀는 한때 정부였던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Stanisław August Poniatowski, 1732~1798)를 폴란드의 왕으로 추대했다. 1772년 예카테리나는 폴란드의 내정에 간섭하면서 폴란드 전체를 차지하려고 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러시아의 강대화를 경계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에게 함께 제1차 폴란드 분할을 제의했다. 결국 폴란드는 3차 분할을 통해 유럽 지도상에서 123년 간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가 퇴위했다. 그는 1798년 뇌졸중으로 갑자기 사망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성 카타쥐나 성당에 묻혔다. 그 뒤로도 바르샤바 봉기, 세계 2차대전 등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박물관이 된 바르샤바 왕궁
독일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던 바르샤바 왕궁은 복원돼 박물관이 되었다. 왕의 처소와 기타 여러 방이 전시관이 되었다. 폴란드의 마지막 군주였던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의 방은 옛 모습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포니아토프스키의 유품이 폴란드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1938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성 카타쥐나 성당이 폐쇄되자 비밀리에 그의 고향 보우친(Wołczyn, 현재 벨라루스)에 있는 성삼위일체 성당으로 유해와 유품이 옮겨졌다. 1939년 9월 붉은 군대의 점령으로 무덤이 파괴되어 방치된 채로 있었다. 1988년 그로드노(Grodno, 현재 벨라루스의 흐로드나) 박물관의 복원 전문가들이 그의 유해와 유품들을 폴란드로 가져왔다. 그의 유품들은 처음에는 와지엔키 왕궁에 전시되었다가 바르샤바 왕궁으로 옮겨졌다. 그의 방에는 렘브란트의 그림 두 점도 볼 수 있다.

그레이트 어셈블리 홀에는 ‘혼돈의 해방’이라는 제목의 멋진 천장화를 볼 수 있다. 궁정화가였던 마르첼로 바차렐리(Marcello Bacciarelli, 1731~1818)의 원작을 재현한 작품이다. 카날레토(Giovanni Antonio Canal(Canaletto), 베니스의 풍경화의 대가, 1697~1768) 방에서는 풍경화가이자 베두티스티(vedutisti, 사실적인 풍경화가), 에칭 판화가였던 베르나르도 벨로토(Bernardo Bellotto, 1721~1780)의 18세기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그는 카날레토의 조카이자 제자였는데 카날레토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1700년대 바르샤바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그의 그림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역사적인 기념물과 건물을 복원하는 데 아주 중요한 자료로 쓰였다. 폴란드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스테판 제롬스키(Stefan Żeromski, 1864~1925)가 머물렀다는 방도 있다. 현재 바르샤바 왕궁의 안뜰과 그레이트 볼룸에서는 정기적으로 고전 음악 콘서트가 펼쳐진다. 참고로 왕궁 박물관은 투어로만 관람이 가능하고 일요일은 무료입장이다.

광장의 마차.
광장의 마차.

 

긴 역사가 뒤섞인 성 요한 침례 대성당
바르샤바 궁전 반대편 골목으로 들어서면 성 요한 침례 대성당(Archcathedral Basilica of St. John the Baptist)을 만날 수 있다. 브릭 고딕 스타일의 고풍스럽고 웅장한 대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역사적인 인물들, 조각, 스테인레스 창 등. 볼거리가 아주 많다. 한 눈에도 깊은 역사가 느껴진다. 자료를 찾아보면 마조프셰 공국 시절인 1339년에 건설된 성당이다. 성당 내부에 마조프셰 인들의 동상이 있는 것이 그 이유다. 16세기 말에는 폴란드 공화국에서 가장 중요한 교회 중 하나가 되었다. 17세기 고딕 양식의 사원은 바로크 스타일로 재건되었고, 19세기 초반 영국 네오 고딕 양식으로 바뀌었다.

바르샤바 왕궁.
바르샤바 왕궁.

 

1611~1618년 지그문트 3세 바사 왕이 자금을 지원했다. 당시 폴란드에서 가장 부유한 교회 중 하나로 내부에는 예술 작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1705년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 왕, 1764년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왕이 이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1791년 5월 3일에는 헌법의 맹세가 있었다. 이 헌법은 폴란드 분할의 시기에 국가 정신을 지지하는 큰 역할을 했다. 1798년 대성당이 되었고 1817년에는 아치 대성당(arch cathedral)으로 승격되었다. 바르샤바의 3대 성당 중 하나다. 그러나 이곳 역시 1939년 9월 폴란드 항쟁 기간에 폭격 당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는 저항 세력과 독일의 군대의 격렬한 투쟁장소였다. 이 시기에 건물의 90%가 파괴됐다. 1946년 5월 30일 폴란드 대주교 아우구스트 흘론드(August Hlond, 1881~1948)는 “바르샤바를 국가의 거룩함으로 재건하십시오”라고 설교했다. 1947년 그는 바르샤바 교회 재건 위원회를 설립했다. 1948년 그가 갑작스럽게 죽었지만 대성당 건설은 지속되었다. 폴란드 대주교 스테판 비신스키(Stefan Wyszyński, 1901~1981)가 재건 의장을 맡았다. 그는 수감된 동안에도 재건 일을 멈추지 않았다. 1960년 건축가이자 교수, 복원 전문가였던 얀 자화토비치(Jan Zachwatowicz)가 지휘를 맡아 마죠셰프 시절의 고딕 양식으로 재건했다. 이후 2012~2015년 광범위하게 성당 내부를 수리했다. 현재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전쟁 폭격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곳이 있다. 성당 지하실이다. 14세기의 예배당(Baryczka)과 묘비 및 비문이 남았다. 마조비안의 공작은 물론 왕들이 이곳에 묻혔다. 여러 명의 대주교, 유명인들의 무덤이 있다. 폴란드의 초대 대통령인 가브렉 바리티우츠(Gaburek Barytiwucz)은 취임 이틀 만에 암살당해 이곳에 묻혔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 6월 2일 이 성전에서 순례를 시작했고 1987년, 1999년에도 찾았다.

예수교회 문.
예수교회 문.
예수교회 경내.
예수교회 경내.

 

출입문이 예술적인 예수교회
성 요한 성당과 맞붙어 있는 곳이 예수교회(Church of Jesuits)다. 출입문이 세련된 현대적인 모습이어서 교회라기보다 미술관으로 착각하게 한다. 이 출입문은 폴란드 조각가인 이고르미 토라지(Igor Mitoraj, 1944~2014)의 작품으로 ‘천사 문’이라고 불린다. 현대적인 출입문 탓에 교회 역사가 짧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1609~1629년 지그문트 3세 통치기에 건립된 폴란드 최초의 바로크 양식의 교회다. 바르샤바의 마네리즘(Mannerism, 르네상스 미술의 방식이나 형식을 계승하되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유명하다.

성요한교회 앞 소녀. 
성요한교회 앞 소녀. 

 

내부에는 은으로 장식된 제단이 있다. 1640년 도난 돼 파손된 것을 1656년에 더 화려한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한 제단이다. 군사 지도자인 타를로(Tarlo)의 흑백 대리석으로 된 멋진 무덤 기념물의 유적도 있다. 성당을 나와 교회 앞 골목에서 아코디온을 연주하는 소녀를 만난다. 소녀의 연주 솜씨는 놀라울 정도로 실력파여서 절로 귀를 기울이게 되고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소녀에게 5즈워티(보통은 1, 2즈워티)를 쥐어준다. 놀라듯 쳐다보는 소녀에게 남은 피에르기를 건넨다. 소녀가 더 연주해준다. 주는 기쁨은 받는 즐거움보다 훨씬 크다.

성당 골목을 빠져 나가면 올드 타운 광장(리네크 스타레고 미아스타, Rynek Starego Miasta Warszawa)에 이른다. 번화한 관광 중심지에는 재건된 중세풍 건물들이 진을 치고 있다. 화려한 건축물들마다 긴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이야기는 다음 회에 이어진다.(계속)

Data
잠코비 광장 지그문트 3세 바사 기둥: 주소 plac Zamkowy, 00-001 바르샤바
바르샤바 왕궁: 주소 plac Zamkowy 4, 00-277 Warszawa/ 전화 +48 22 355 51 70
성 요한 대성당: 주소 Świętojańska 8, 00-278 Warszawa/ 전화 +48 22831 02 89/웹사이트 https://katedra.mkw.pl/
올드 타운 광장(리네크 스타레고 미아스타, Rynek Starego Miasta Warszawa): 주소 rynek Starego Miasta, 00-279 Warszawa
폴란드 전통음식점 자피에첵(Zapiecek): 주소 Krakowskie Przedmieście 55, 00-071 바르샤바/ 전화 +48 22 692 7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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