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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리 부인 생가와 박물관

  • 기자명 이신화 작가
  • 입력 2022.01.03 11:22
  • 댓글 0
  • 사진(제공) : 이신화 작가
‘퀴리 부인’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우리는 어릴 적 교과서를 통해 퀴리 부인이라는 이름을 수도 없이 듣고 성장했다. ‘폴로늄’은 몰라도 ‘라듐’은 귀에 익다. 물리학상, 화학상을 동시에 받은 여성 최초라는 것은 몰라도 노벨상 수상자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퀴리 부인이 폴란드 인이라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폴란드 바르샤바 신도시 골목에 퀴리 부인이 태어난 생가가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마리 퀴리 박물관.
마리 퀴리 박물관.

 

뉴타운 거리의 마리 퀴리 박물관
마리 퀴리 동상을 보고 왔던 길을 거슬러 되돌아온다. 마리 퀴리 박물관(Maria Skłodowska-Curie Museum)을 관람할 시간이다. 첫 번째 바르샤바 여행 때 올드 타운도 구경 못했는데 퀴리 부인의 생가가 있다는 생각을 할리 만무하다. 귀국 후 바르샤바 원고를 정리하면서 마리 퀴리의 집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통탄했다. 가슴 속에 뜻을 간직하면 언젠가는 실현된다. 필자의 두 번째 바르샤바 여행에서 마리 퀴리의 생가는 1순위나 다름없다.

마리 퀴리 박물관은 18세기에 건축된 멋진 연립주택이다.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가 이 집에서 태어났으니 생가다. 그러나 그녀는 이 집에서 겨우 1년 미만 살았을 뿐, 이듬해(1868년) 노볼리프키 거리(Nowolipki Street)에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그녀가 23세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젊은 추억이 담긴 노볼리프키 거리의 집은 세계 2차 대전 때 파괴되어 재건축되지 않았다. 1934년 마리 퀴리가 사망하자 이 집에 그녀의 명판이 붙었다. 바르샤바 봉기(1944)때 독일군에 의해 의도적으로 철거되었지만 명판은 살아남았고 세계 2차 대전 이후 집이 재건되었다. 박물관은 마리 퀴리 탄생 100주년인 1967년, 폴란드 화학 협회 주관으로 개관됐다. 박물관 개관식에는 마리 퀴리의 둘째 딸인 이브 퀴리(Eve Curie Labouisse, 1904~2007)가 참관했다. 이후 여러 번 개보수를 거쳐 현재의 박물관은 2018년 8월 1일에 개관했다.

마리 퀴리 박물관의 전시관과 전시품들
매표를 하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선다. 1층에는 마리 퀴리에 관련된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판매용인지 가격이 붙어 있다. 2층 계단으로 오르는 우측 벽에 마리 퀴리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이지만 그녀의 시선이 필자를 훑는 듯 강렬하게 쫒아온다. 2층 전시관은 크지 않지만 나름 볼만하다. 네 개의 전시실로 나누었다지만 구분은 안 된다. 크게 폴란드와 프랑스의 삶으로 나누어서 봐야 할 것이다.

마리 퀴리 박물관 내부.
마리 퀴리 박물관 내부.

 

그녀의 바르샤바의 삶을 볼 수 있는 가족들의 사진과 가계도를 보면서 어린 시절의 삶을 엿본다. 10대의 학창시절 사진 속의 그녀는 통통하다. 그녀가 돈을 벌기 위해 가정교사 생활을 했던 쉬추키(Szczuki) 마을의 집과 그녀의 첫 사랑의 남자, 카지미에시 조라브스키(Kazimierz Żorawski)의 젊은 사진도 걸려 있다. 그것 말고도 그녀의 친필, 요리서적, 안경, 줄자, 상장, 메달, 서류, 외투와 잉크병, 가죽 가방, 즐겨 입던 검은색 드레스 등 살아생전 마리의 손때가 묻은 기구와 책들도 볼 수 있다. 가죽 핸드백은 1921년 미국 폴란드 여성 협회에서 그녀에게 기증한 것이라는데 관람 때는 몰라서 눈 여겨 보진 않았다.

프랑스 생활도 볼 수 있다. 남편 피에르 퀴리(Piotr Curie 1859~1906)의 실험실을 재현했다. 낡음이 고스란히 남은 실험도구들. 그러나 그들의 연구실과 사진들은 과학 분야라서 머리가 지끈하다. 그래도 눈길을 끄는 것은 파리에서의 사진들이다. 자전거를 타고 신혼여행을 갔던 사진, 어린 딸 둘과 찍은 사진 등이다. 각종 과학자 학회에 참여했던 사진 속에는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얼굴도 눈에 띈다. 사진과 거의 흡사한 부부의 흉상도 있다.

규모는 작지만 퀴리 부인의 이모저모를 많이 보여주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전시관이다. 특히 사진 자료가 많아서 되도록이면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촬영을 해둔다. 나이 든 마리 퀴리의 사진 속 얼굴에서는 그녀의 험준한 인생사가 그려진다. 바르샤바의 얼굴과 파리에서의 얼굴의 분위기는 구분이 될 정도다. 늙어가는 그녀의 얼굴에는 강한 고집과 슬픔이 한 가득이다.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세기적인 여류 과학자의 얼굴에는 삶의 고뇌와 무게가 덕지덕지 배어 있다. 위대한 마리 퀴리는 그렇게 힘겨운 삶을 살다 간 것이다. 자꾸만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얼마나 힘들어보이던지, 박물관을 빠져 나오면서 끄적인 방명록에는 그녀의 지친 모습과 여행자의 피로가 가정이입이 되어 표현 된다.

바르샤바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나
박물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일단 자료를 통해 그녀의 67년의 삶을 되돌아봐야 한다.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과학자인 마리 퀴리(1867~1934)의 폴란드 이름은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폴란드어:Maria Salomea Skłodowska). 마리아는 23세 파리로 이주하기 전까지 불리던 이름이다. 마리아의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스크워프도프스키(Władysław Skłodowski, 1832~1902)는 수학과 물리학 선생이었다. 어머니 마리아나 브로니슬라바(Marianna Bronisława, 1835~1878)는 바르샤바에서 가장 유명한 여학생 기숙학교 책임자였다. 둘 사이에서 1남(Josef, 1863~1937) 4녀(Sophia(1861~1876), Bronislawa,(1865~1939) Helena(1866~1961))를 낳았고 마리아가 막내다.

마리아가 7세(1876년) 때 15살 큰 언니 조피아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2년 후(1878년) 어머니는 결핵으로 죽는다. 마리아 10살 때다. 이때부터 마리아는 종교에 등을 돌렸다고 한다.

생가 입구.
생가 입구.

 

마리아의 10대
어린 마리아는 1877년~1882년까지 어머니가 일했던 시코르스카(Sikorska) 기숙학교를 시작으로 중고등 학교에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다. 마리아는 성적이 뛰어났다. 그녀는 1883년(16세) 중등 교육을 마치고 모든 형제 자매들과 마찬가지로 금메달을 받았다. 그녀는 공부를 더 하고 싶어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당시 여성은 불가능했다. 여자는 대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기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 갈 결심을 한다. 하지만 학비가 없었다. 가세는 이미 기울어졌고 설상가상 아버지는 실직상태였다. 그녀와 언니(Bronisława Dłuska)는 서로 조율한다. 언니가 먼저 파리 소르본느 대학 의대에서 공부를 하면 마리아가 학비를 마련해주기로 했다. 마리아는 1886년(19세), 쉬추키(Szczuki, 바르샤바에서 약 100km 지점)라는 시골의 부유한(설탕공장을 가진) 농가의 가정교사로 3년간 일한다.

이때 그녀는 그 집의 장남 카지미에시 조라브스키(1866~1953)와 첫사랑을 하게 된다. 마리아보다 1살 그는 1884년부터 바르샤바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 과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결혼을 약조할 만큼 깊은 사이였지만 남자 집안의 강력한 반대로 1년 간의 연애는 끝났다. 조라브스키는 후에 유명한 수학자가 되어 바르샤바 기술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노년의 그는 ‘바르샤바의 라듐 연구소’에 서 있는 마리아의 동상 앞에서 시선을 오랫동안 멈췄다고 전한다. 첫 사랑의 쓴 맛은 그렇게 끝났지만 남자의 마음속에는 평생 남았다.

프랑스 파리 대학 입학
1889년(21세) 6월 마리아는 쉬추키를 벗어나 바르샤바로 돌아왔다. 실연의 아픔으로 거의 미쳐 버릴 상황이었지만 계속 과외를 하면서 2년의 세월을 더 보낸다. 다행히 아버지가 소년감화원 사감으로 취직해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마리아는 둘째 언니 브로니스와바와 형부 카지미에시 드우스키(Kazimierz Dłuski)가 의사로 일하는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1891년(23세) 11월,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입학해 물리학, 화학, 수학을 전공한다. 언니도 약속대로 여동생을 재정적으로 돕기 위해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파리 생활은 불을 보듯 고생길이었다. 처음에는 언니 집에서 신세를 지다가 대학과 가까운 라틴 지구에 다락방을 얻었다. 그녀는 추운 겨울이면 난방이 안되는 방에서 옷가지를 겹쳐 입고 지내야 하는 생활을 했다. 낮에는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과외를 하는 궁핍한 삶이었다. 그래도 먹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공부에 집중했다. 1893년(27세) 가장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물리학 학위를 받고 담당 교수였던 물리학자 가브레일 리프만(Gabriel Lippmann, 1908년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의 산업 실험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일을 하면서 대학에서 계속 공부했고 1894년에 2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파리에서부터 ‘마리아’는 ‘마리’로 이름을 달리 부른다(파리 생활부터는 ‘마리’로 부른다).

과학자 피에르 퀴리와 결혼
그해 8살 많은 과학자 피에르 퀴리((Piotr Curie 1859~1906)가 그녀의 삶 속에 들어온다. 피에르는 파리 산업 물리학 및 화학 고등 교육 기관(ESPCI Paris)의 강사였다. 1894년 마리는 여름 방학 동안 바르샤바로 돌아갔다. 그녀는 폴란드에서 일하기를 원했지만 성 차별주의 때문에 크라쿠프 대학교에서 일할 수 없었다. 피에르는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파리로 돌아와야 한다는 서신을 보낸다.

남편 피에르 퀴리.
남편 피에르 퀴리.
마리 퀴리의 드레스.
마리 퀴리의 드레스.

 

마리는 파리로 돌아와 1895년(28세) 3월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 사이 피에르는 학교의 교수로 승진했다. 마리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랑과 함께, 과학 협력자를 만났다. 그해 7월, 피에르와 쏘(Sceaux, 파리 남부 교외의 부유한 지역)의 행사장에서 결혼했다. 직계 가족과 몇 명의 친구들만 모인,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둘 다 종교적인 의식은 원치 않았다. 마리는 웨딩드레스 대신 평상복인 짙은 파란색 드레스를 입었다. 그 옷은 오랫동안 실험실 의상이 되었다. 그들은 두 가지 취미를 공유했다. 자전거 여행과 해외여행이었다.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났다. 마리는 이때부터 퀴리 부인이 되었다. 파리에 온지 5년 후다.

남편 피에르와 공동으로 폴로늄, 라듐 개발해 노벨상
환기가 잘되지 않고 방수도 되지 않는 개조된 창고(이전 의대 해부실)에서 연구 작업을 진행했다. 결혼 직후 1896년, 마리는 박사학위 논문주제를 찾고 있었는데, 당시 베크렐(Henri Becquerel)이 발견한 우라늄염에서 일어나는 베크렐선 현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계에 베크렐선 현상을 보이는 물질이 우라늄 외에도 더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그 물질들을 찾아 연구하기로 한다. 이후 퀴리 부부는 아예 공동으로 연구하기로 하고, 지루하고 긴 실험을 반복하며 피치블렌드의 성분을 분리해 1898년(31세) 마침내 베크렐이 연구했던 우라늄보다 감광작용이 4배나 강한 새로운 물질을 찾아내게 된다. 그리고 미지의 물질이 두 가지 원소의 혼합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그중 하나를 분리해내는 데 성공했다. 새로운 원소는 우라늄염보다 400배나 감광작용이 강했다.

젊은 시절의 마리.
젊은 시절의 마리.
신혼 여행.
신혼 여행.
신혼 시절 마리.
신혼 시절 마리.

 

퀴리 부부는 새로운 원소의 이름을 마리의 조국 폴란드를 기리는 의미에서 ‘폴로늄(Polonium)’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원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감광작용 능력이 우라늄보다 무려 250만 배나 강한 원소를 발견했다. 강력한 빛을 ‘방사’한다는 뜻으로 원소의 이름을 ‘라듐’이라고 지었다. 1903년(36세) 라듐 연구로 마리 퀴리와 남편 피에르 퀴리가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남편의 사망, 소르본 대학의 첫 여교수
1906년(39세), 남편 피에르 퀴리(47세)가 짐마차에 치어 사망한다. 폭우가 내리던 날 도핀느 가(Rue Dauphine)를 가로 질러 걷다가 말이 끄는 차량에 치여 바퀴 아래로 넘어져 두개골이 골절되었다. 마부는 음주 상태였고 종신형을 받았다. 그렇게 피에르 퀴리와의 11년 결혼 생활은 끝이 났다. 둘 사이에는 어린 두 딸이 있었다. 마리는 어린 아이와 함께 혼자 남겨졌다. 그녀의 과학 파트너가 인생에서 사라졌다. 남편의 죽음으로 그녀의 삶이 황폐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남편이 사고로 죽은 그해 5월 13일, 파리 대학의 물리학과는 피에르에게 줄 교수자리를 마리에게 주기로 결정한다. 그녀는 파리 대학의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된다. 1907년(40세) 라듐 원자량의 정밀한 측정에 성공하고 1910년에는 라듐 분리에 성공한다. 1911년(44세)에는 라듐 및 폴로늄의 발견과 라듐의 성질 및 그 화합물 연구로 마리 퀴리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다. 여성 최초로 노벨상 2관왕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보수성, 가십을 좋아하는 언론의 공세, 폴란드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여성이라는 성차별적 문제로 결국 화학 아카데미 회원이 되지 못했다.

불륜남 폴 랑주뱅
마리가 아카데미 회원이 될 수 없었던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마리의 숨겨진 사생활이 들통났다. 마리가 노벨 화학상을 받을 그 시점에 폴 랑주뱅(Paul Langevin, 1872~1946)이라는 과학자와 불륜 관계라는 기사가 언론에 실렸다. 이 기사의 여파는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엄청난 비난이 마리에게 퍼부어졌다. 심지어 “프랑스 여인의 남편을 빼앗아간 외국X”이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이 일들로 마리는 건강까지 나빠졌다. 자살까지도 시도했다. 그렇다면 마리가 정말로 바람을 피웠을까? 사실이다.

마리의 ‘불륜남’ 폴 랑주뱅은 남편 피에르의 수제자였다. 피에르와 함께 연구실에서 연구했고 소르본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당시 지도교수가 피에르였다. 1904년, 폴은 피에르 퀴리의 뒤를 이어 ESPCI의 교수가 됐다. 마리와 5살 연하의 폴이 가까워진 것은 남편 피에르의 죽음 이후다. 폴은 마리에게 행복하지 않은 가정사를 하소연했다. 어느 자료에 따르면 폴은 기혼남으로 부인 쟌느(Jeanne)가 상상을 초월하기 힘들 정도로 피곤한 성격이었다고 말한다. 모전여전이라고 쟌느 뿐 아니라 장모, 처제까지도 가세했다고 한다. 외로운 마리와 불행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폴. 서로 감정이 뒤섞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10년 여름, 남편 사후 4년 후, 마리와 폴은 연인이 돼 있었다. 남몰래 하는 연애가 비밀리에 진행되는 경우는 드물다. 둘의 불륜은 쟌느에게 들통 났다. 쟌느는 온갖 협박과 동네방네 소문을 퍼트렸다. 둘은 서로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남녀사이가 그리 쉽게 끝나겠는가. 둘의 밀회는 철저하게 비밀로 진행됐다.

마리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는 폴에게 더 연민을 느끼고 ‘아내와 헤어지는 전략’을 조언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폴의 부인 쟌느의 집착은 강했다. 쟌느는 사람을 시켜 서신을 입수하고 그 편지를 불륜의 증거자료로 보여줘 ‘뢰브르’ 신문에 ‘단란한 프랑스 가정을 파괴한 외국 여자’로 대서특필하게 된다. 파리의 아주머니들의 입방아와 수군거림은 공식화되었다. 이 여파는 당시 노벨상을 줄 스웨덴에서도 시상식 뿐 아니라 상을 거절하라고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마리는 “상은 과학자의 사생활이 아니라 업적에 주어지는 것”이라며 시상식에 참석했다. 그 뒤 스캔들은 가라앉았고 폴은 아내와 별거하기로 합의했다. 이 사건 이후 마리와 폴의 1년 정도의 로맨스도 끝이 났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폴은 1914년 다시 집으로 들어갔고 비서를 정부(情婦)로 삼았다고 한다. 마리의 말년의 얼굴에 우수가 가득한 것도 이런 스캔들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폴이라는 남자는 천하의 바람둥이에 비겁한 인간이었던 듯하다.

노년의 사진.
노년의 사진.
딸 둘과의 사진.
딸 둘과의 사진.

 

마리의 죽음과 방사능 노출
1912년(45세) 마리는 옛 아파트에서는 낯 부끄러워 살 수 없어 이사를 했다. 그해 바르샤바 과학 협회는 그녀에게 바르샤바의 새로운 실험실의 감독직을 제안했지만 1914년 8월에 완공될 파리 대학의 라듐 연구소와 피에르-퀴리 가(Rue Pierre-Curie)라는 새 도로에 집중해야했기에 거절한다. 1914년(47세), 파리 대학교 라듐 연구소의 퀴리 연구소 소장이 된다. 그 뒤로도 많은 연구를 했던 마리는 1934년(67세)에 사망했다. 사인은 백혈병. 사후 파리 외곽에 있는 남편 묘 옆에 나란히 묻혔다.

그리고 1995년 4월 사후 61년 만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여성 최초로 팡테옹(Panthéon)에 안장되는 영예를 안게 된다. 마리하고 남편 피에르의 유해가 팡테옹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이 발견된다. 그녀의 유해에서 상당량의 방사선이 방출되고 있다는 것. 당시는 방사성 물질이 암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암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마리는 30년 이상, 방사능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녀의 모든 것들은 현재 납으로 만든 특수 차폐용기에 넣어서 보관하고 있다.

파리의 마리 퀴리 박물관과 별장, 그리고 자녀들
현재 파리에는 마리 퀴리 박물관이 있다. 퀴리 연구소의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인 퀴리 파빌리온 1층에 있다. 이 연구소는 후에 큰딸 이렌(Irène Joliot-Curie, 1897~1956)과 사위 장 프레데리크(Jean Frédéric Joliot-Curie, 1900~1958)가 20년 가까이 인공 방사능을 발견해 노벨상을 받았다. 둘째딸 이브 퀴리((Eve Curie, 1904~2007)는 103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이 박물관에 백만 달러의 유물을 남겼다. 마리 퀴리 박물관은 2012년에 새 단장하고 재개장했다. 박물관에는 마리의 화학 실험실과 오리지널 장비가 있다. 그리고 마리와 피에르가 1904년~1906년까지 휴일과 주말을 보냈던 별장이 있다. 1890년 경에 지어진 별장은 파리 남서부 근교(Saint-Remy-les-Chevreuse)에 있는 120㎡(약 36평)의 돌집이다. 마리 퀴리는 연구를 하다가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이곳을 찾았다. 최근 이 집을 폴란드 당국에서 구입하려고 한다는 기사(2021년 5월)가 검색된다. 79만 유로(10억 정도)선이라고 한다.

2층 전시관 계단.
2층 전시관 계단.
실험실.
실험실.

 

2021년 기준해 마리 퀴리가 죽은 지 87년이다. 마리는 죽었지만 그의 이름은 지구가 사라지기 전까지 남아 있으리라. 참고로 프랑스 시대, 마리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 마리 퀴리(2019년 작)가 있다. 마리 퀴리 역으로는 로저먼드 메리 엘런 파이크(Rosamund Mary Ellen Pike)가 맡아 열연했다. 감독은 이란인이자 프랑스인인 ​마르잔 사트라피(Marjane Satrapi). 영화는 아주 잘 만들어져 마리 퀴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계속)

Data
마리 퀴리의 박물관((Muzeum Marii Skłodowskiej-Curie w Warszawie)
주소: Freta 16, 00-227 바르샤바/ 전화:+48228318092/ 웹사이트:http://www.mmsc.waw.pl/, https://wot.waw.pl/czlonkowie/muzeum-marii-sklodowskiej-curie-w-warszawie/

파리 마리 퀴리의 박물관 주소: 11 Rue Pierre et Marie Curie75005 Paris, 프랑스/ 웹사이트:http://himetop.wikidot.com/curie-museum

마리 퀴리의 프랑스 별장 주소: Rue Pierre Curie78470 Saint-Rémy-lès-Chevreuse(Yvelines),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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