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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뉴타운 둘러보기

  • 기자명 이신화 작가
  • 입력 2021.12.22 15:37
  • 댓글 0
  • 사진(제공) : 이신화
바르샤바 메인 올드 타운은 바르바칸을 경계로 신시가지로 나뉜다. 신시가지라는 말의 뉘앙스와는 달리 마조셰프 공국 시절인 1408년부터 조성된, 유서 깊은 곳이다. 성문 밖 골목에는 오래된 연립주택이 즐비하고 신시가지 시장 광장에는 17세기에 만들어진 베네딕토회 수녀원과 수도원이 남아 있다. 강변으로 가면 오래된 고딕 스타일의 성 마리 성당과 그 언덕 끝에는 퀴리 부인 동상이 서 있다. 아스라이 비스와 강은 바르샤바를 휘돌며 적시고 발아래 멀티 레포츠 타운에서는 분수대가 힘차게 물을 뿜어댄다.
성 히야신스 도미니크 교회.
성 히야신스 도미니크 교회.

 

성 히야신스 도미니크 교회
올드 타운과 바르바칸 성곽을 벗어나면서 이어지는 골목부터 신시가지(New Town) 역사지구다. 성문 밖 동네이니 신시가지로 구분시킨 것일 뿐, 실제로는 올드 타운 버금가는 지역이다. 고풍스러운 멋진 건축물이 즐비한 유서 깊은 골목이다. 대로를 따라 걷다보면 성 히야신스 도미니크 교회(Church of St Hyacinth)를 지나친다. 언뜻 보면 흔한 교회 중 한 곳일 뿐이지만 마리 퀴리 박물관의 길 건너편에 있는 교회라서 꼭 보게 된다.

건축미가 예사롭지 않다. 많은 연립주택 사이로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교회의 종탑이 돋보인다. 히야신스 도미니크 교회는 17세기에 건축되었고 종탑은 교회 완공 후 약 2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교회 이름은 폴란드 수호성인인 히야신스(1185~1257)의 이름이 붙였다. 히야신스는 폴란드의 도미니카 사제이자 선교사였다. 그는 파리와 볼로냐에서 교육받은 종교 박사로 북유럽 전역에 신앙을 전파했다. 그는 고향인 폴란드의 여성 수도원을 개혁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일했다. 히야신스 교회는 2차 세계 대전 때 폴란드 군대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몇 차례 폭격을 당해 수천 명의 저항 세력이 사망했다. 1950년대 후반에 아름답게 복원되었다고 한다.

신도시 시장 광장의 역사
히야신스 교회 앞에 있는 마리 퀴리 박물관 관람은 일단 뒤로 미룬다. 시간이 필요한 공간이기에 주변부터 살펴볼 생각이다. 골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뉴타운 광장(New Town Square)을 만난다. 사람도 거의 없어 한적한 느낌을 주는 ‘신도시 광장’. 유니콘과 처녀(Maiden with Unicorn) 문장이 올려진, 독특한 펌프에서는 물을 쏟아낸다. 그 물에 더위를 식히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주변을 살핀다. 광장에는 옥빛 돔 지붕을 가진 성 카지미에시 교회(St. Kazimierz, 베네딕토회 수녀원)와 붉은 지붕의 수도원 건물이 일자로 늘어져 있다. 카지미에시 수도원 앞에는 가운으로 얼굴을 깊게 가린 성 베네딕토(Benedictus, 480~547)의 작은 동상이 서 있다.

베네딕토 수도사 동상.
베네딕토 수도사 동상.
베네딕토 수도원 건물 벽화.
베네딕토 수도원 건물 벽화.

 

15세기 초 독립된 역사 도시지구
이 신도시 시장 광장은 겉으로는 크게 특별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자료에 따르면 그 역사가 깊다. 신도시는 독립 도시로 형성되었다가 1408년 마조셰프의 공작, 야누스 1세(Janusz I the Elder, 1347/52~1429)때 공식적으로 구시가지와 분리되었다. 당시 신도시 시장 광장과 Freta, Kościelna, Koźla, Przyrynek, Stara 및 Zakroczymska 지역이 포함되었다. 자체 의회 및 시청을 갖고 있었다. 1411년 세인트 메리 교구 교회가 건립되었고, 1546년 자료에 따르면 204개의 부동산이 기록되어 있다. 또 1568~1573에 지그문트 아구스트 다리(길이 약 500m)가 있었으나 1603년에 유빙에 파괴되었다.

신도시 골목 전경.
신도시 골목 전경.

 

1655~1660년 스웨덴-브란덴부르크 침공으로 뉴타운의 대부분 목재 건물이 불에 탔지만 그로 인해 18세기 후반부터 아름답고 영구적인 연립 주택들이 들어선다, 성 카지미에시 교회는 17세기에 건축되었다. 1878년, 시장은 폐쇄되고 광장으로 바뀌면서 19세기 말부터 1911년까지 지속적으로 건설이 이뤄진다. 5층짜리 연립 주택이 12개 정도 들어섰다. 대부분 소상인들과 노동자들이 살았다. 그러다 1944년 세계대전에 의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1947년~1955년 교회와 수도원이 재건되었다. 남쪽 정면과 시장 광장도 18세기 건축 스타일로 재건되었다. 1957년 주철 우물이 이전되었다.

17세기 베네딕토회 수녀원
신도시 광장의 가장 볼거리는 베네딕토회 수녀원(Monastery of the Benedictine Sisters)이다. 성 카지미에시 교회(St. Kazimierz)라고 부른다. 이 교회는 얀 3세 소비에스키(John III Sobieski, 1629~1696)의 부인인 마리아 카지미르(Maria Kazimiera, 1641~1716)가 자금을 지원했다. 마리아는 1688년 아담 코토브스키(Adam Kotowski, 1626~1693) 소유 궁전을 구입해 당시 궁전 건축가로 유명한 틸만 반 가메렌(Tylman van Gameren arch, 1632~1706)에게 설계를 맡겼다. 1688년~1692년 바로크 양식의 성 카지미에시 교회가 건축된다. 1715년 봉헌된 후 교회는 보완, 수정되었다. 1740년 당시 역량 있는 라지빌(Radziwiłł) 가족이 자금을 지원해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수도원이 된다.

성 카지미에시 교회.
성 카지미에시 교회.

 

1794년 교회는 무너졌다. 또 1855년 낙뢰로 인한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다. 1873 년부터 개조 공사를 1939년까지 원래의 아름다움을 유지했다. 그러나 세계 2차 대전을 피할 수 없었다. 1944년 8월 병원으로 사용되었지만 불이 났고 폭격 당했다. 34명의 수녀, 지하실에 머물던 4명의 사제, 성례전 수녀들이 보호한 아이들을 포함해 약 1000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1944년 9월 독일군은 교회를 다시 폭격해 완전히 파괴했다. 겨우 살아남은 수녀 9명은 폴란드 남부의 스타니아트키(Staniątki)의 수도원으로 갔다. 전쟁 후 개조 공사(1948~1952)를 했다. 1974년 11월 교회와 수도원에서 쓰러진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를 봉헌했다.

성 클레멘스 호프 바우어 동상과 인생
교회 앞에 성 클레멘스 호프 바우어(Klemens Maria Hofbauer, 1751~1820)의 작은 동상을 만난다. 1932년 토룬 조각가인 크르지스즈토프 마주르(Krzysztof Mazur)의 작품이란다. 고뇌하고 있는 듯한 베네딕트 수도자와는 다른 모습이다.

성 클레멘스 호프 바우어 동상.
성 클레멘스 호프 바우어 동상.

 

자료를 찾다보니 클레멘스 마리아 호프바우어의 이력이 독특하다. 그는 체코 남부 모라비아 지역인 즈노이모 지역 근처의 흘루보케 마슈브키(Hluboké Mašůvky)에서 정육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6살 때 돌아가셨다. 호프 바우어는 신학교로 가거나 종교 단체에 가입 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지역 교구 사제의 집에서 라틴어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수도자가 되는 호프 바우어의 긴 여정의 첫 걸음이었다. 그의 녹록치 않은 삶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14세였을 때 목사가 죽었고 그의 사제의 꿈은 끝났다.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던 그는 직업군으로 제빵 기술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사제의 꿈을 버리지 않았고 결국은 구속주회(Redemptorists)에 가입해 사제가 된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인 상황은 호프 바우어가 자신의 나라에 머무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1,000개가 넘는 수도원과 수녀원을 폐쇄한 황제 요셉 2세는 새로운 종교 기관이 자신의 영토 내에 기초를 세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폴란드에서 21년간 사제 활동
이를 깨닫고 두 구속주의자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현재의 폴란드)으로 이동했다. 1787년 2월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160개의 교회와 20개의 수도원이 있는 도시였지만 여전히 일할 기회가 없었다. 그곳을 불철주야 포교 노력을 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고아원과 소년 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결국은 폴란드에서 추방되어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가야만 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12년을 살며 일하게 되었다. 그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고백을 듣고 병자들을 방문하고, 권력자들의 조언자 역할을 하며, 도시의 모든 사람들과 자신의 거룩함을 나누며 ‘빈의 사도’가 되었다. 그의 최고 업적은 그가 사랑하는 도시에 가톨릭 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그의 노력으로 구속주회는 1820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알프스 북쪽에 굳건히 세워졌다. 현재 신도시 광장에 청소년 사회 치료 센터가 있는 것도 그의 영향이 아닐까. 1970년에 만들어진 청소년 사회 치료 센터 건물에는 고대에서나 봤음직한 벽화가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고딕 스타일 성 마리 교회
광장을 벗어나 마리 퀴리 동상을 찾으러 가는 길목에서 붉은 벽돌로 건축된 고딕 스타일의 교회를 만난다. 성 마리 교회다. 역사를 알지 못해도 그저 교회 건축물만 봐도 굉장한 연륜이 배어 있음을 알게 하는 곳이다. 아름다운, 유서 깊은 교회에 매료된다.

 성 마리 교회 입구.
 성 마리 교회 입구.

 

자료에 따르면 성 마리 교회는 1409년 마조셰프 공국의 야누스 1세 때 건축된 유서 깊은 곳이다. 오래된 거리 Kościelna에 있다. 비스와 강이 내려다 보이는 작은 언덕에 요새처럼 보이는 예배당은 어부와 장인의 사원이었다. 바르샤바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한 곳이다. 15세기 후반, 단일 본당 교회에서 사세가 확장되어 3개 본당 성당으로 변형되었다. 1518년에 멋진 종탑도 생겼다. 그러나 1656년 스웨덴과의 전쟁 중에 교회는 소실되었고 그 이후 재건과 파괴를 반복했다. 특히 세계대전 때 완전히 파손되어 20년(1947-1966)에 걸쳐 복원됐다.

교회 내부는 아치형 목재 받침대가 있는 천장이 아름답다. 교회의 탑은 파노라마 전망을 볼 수 있다. 또 ‘당신의 영혼을 구하십시오’라고 새겨진 나무 십자가와 1870년의 성모 마리아동상이 있다. 그것 말고 폴란드 장교이자 정치 운동가이자 작가인 발레리안 우카신스키(Walerian Łukasiński, 1786~1868)의 작은 동상도 있다.

마담 퀴리 동상
성 마리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담 퀴리의 동상(Monument to Maria Sklodowska-Curie)이 서 있다. 플레튬 원자 모델을 들고 있는 마리 퀴리의 동상은 매우 사실적으로 만들어졌다. 이 동상은 2014년 6월 4일, 마리퀴리(1934년 7월 4일)의 사망 80주년을 맞이해 만들어진 조각이다. 조각가 브로니스와프 크쥐시토프(Bronisław Krzysztof, 1956~)의 작품이다. 개막식에는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 폴란드 대통령,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 바르샤바 대통령 한나 그론키비츠-발츠가 참석했다. 이 곳에 마리 퀴리의 동상을 세운 데는 이유가 있다. 마리 퀴리의 생가와 멀지 않은 이 곳은 그녀가 좋아하는 장소였다. 성 마리아 교회와 비스와 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어느 누군들 이 풍치를 거부하겠는가.

마담 퀴리 동상.
마담 퀴리 동상.
 성 마리 교회와 종탑.
 성 마리 교회와 종탑.
멀티미디어 공원 분수대.
멀티미디어 공원 분수대.

 

마담 퀴리 동상이 있는 언덕 밑에는 멀티미디어 공원이다. 시원한 분수대에서는 물줄기를 품어낸다. 비스와 강 너머로는 성 플로리아노 대성당의 두 개의 종탑이 뾰족 올라와 있다. 살짝 모습만 드러낸 종탑이 첫 번째 여행때 숙소 가면서 봤던 그 성당이었다는 것을 그때 어찌 알았겠는가? 19세까지 바르샤바에서 살았던 젊은 마리아 살로메아 스크워도프스카(Maria Skłodowska)도 눈 앞의 한치 앞도 예측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다음 회에는 마담퀴리 박물관으로 여정을 떠난다.(계속)

Data
성 히야신스 도미니크 교회(St. Hyacinth's Church):
Freta 10, 00-227 바르샤바/ 전화 +48226354700/ 웹사이트 https://freta.dominikanie.pl/
뉴타운 시장 광장: 주소 rynek Nowego Miasta 1, 00-229 바르샤바/ 웹사이트 https://srodmiescie.warszawa.pl/ulica-214.html
성 카지미르 로만카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 Of St Casimir): 주소 rynek Nowego Miasta 2, 00-229 Warszawa/ 전화 +48228314962/웹사이트 https://www.benedyktynki-sakramentki.org/
특수 교육 센터 ‘시장 광장의 집’(Special Educational Center ‘House at the Market Square’): 주소 rynek Nowego Miasta 4, 00-229 Warszawa/전화 +48228315033/웹사이트 https://www.sow.waw.pl/
성 마리 교회(Church of the Visita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주소 Przyrynek 2, 00-219 바르샤바/전화 +48228312473/웹사이트 https://freta.dominikanie.pl/
마리 퀴리의 동상(Maria Skłodowska Curie Monument): 주소 Kościelna, 00-218 바르샤바멀티미디어 공원(Multimedia Fountain Park): 주소 Skwer 1 Dywizji Pancernej WP, 00-221 바르샤바/ 전화 +48228493286/웹사이트 http://park-fontann.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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