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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만난 쇼팽

  • 기자명 이신화 작가
  • 입력 2021.11.10 17:17
  • 댓글 0
  • 사진(제공) : 이신화 작가
39세로 단명한 쇼팽은 죽을 때까지 고국 폴란드를 그리워했다. 그가 프랑스에서 죽자 관 위에는 고국에서 가져온 흙이 뿌려졌다. 봄철 꽃 속에서 향연을 펼치는 듯한, 몽환적인 아름다운 곡을 작곡한 쇼팽. ‘피아노의 시인’이라 일컫는 그의 음악은 클래식의 문외한이라도 그의 감성에 빠져 들게 마련이다. 그가 태어난 폴란드 바르샤바에는 ‘쇼팽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안내판.
박물관 안내판.
박물관 내부.
박물관 내부.

 

쇼팽 박물관에서 만난 폴란드의 음악 영웅 ‘쇼팽’
와지엔키 공원에서 시내를 향해 걷는다. 1818년에 만들어진 바르샤바 대학교 식물원을 거쳐 바르샤바에서 가장 고전적인 예술의 거리인 신세계 거리(Nowy Swiat)에 이른다. 17~18세기 지어진 많은 건축물들이 있는 그 거리 골목에서 쇼팽 박물관을 찾아낸다. 솔직히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쇼팽은 만나고 싶었다. 쇼팽이야 말로 현세에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불멸의 음악가이지 않은가. 쇼팽은 죽어서도 바르샤바의 음악 영웅으로 남아 고국을 빛내는 세계적인 음악가다.

쇼팽 박물관 외관.
쇼팽 박물관 외관.

 

바르샤바 음악원 근처에 있는 쇼팽 박물관 건물은 오스트로그스키 요새형 궁전(Pałac Ostrogskich)을 개조한 4층 건물이다. 17세기 초 루테니안 왕자인 야누츠 오스트로그스키(Janusz Ostrogski, 1554~1620)에 의해 지어졌다는 이 궁전은 가파른 절벽에 지은 요새형 성이었다. 쇼팽의 탄생 200주년을 맞는 해인 2010년 3월 1일에 쇼팽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일찍 어둠이 내린 바르샤바. 쇼팽 박물관을 보기 위해 들어서는데 매표원이 “오늘은 공짜”라면서 전자 카드 한 장을 건네준다. 공짜 관람이 믿기지 않지만 기분은 좋다.

안으로 들어서면 총 12개의 전시실이 있다. 1층은 쇼핑 일대기 전시관, 2층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체험실, 3층은 악보 전시실로 나뉘어져 있다. 젤라조바 볼라(Zelazowa Wola)에서의 어린 시절, 바르샤바에서의 청년 시절, 파리에서의 작품 활동 등을 볼 수 있다. 그의 자필 악보, 서신 교환, 손으로 쓴 메모들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쇼팽의 재현된 집 안에는 프랑스 플레옐(Pleyel) 사가 만든 옛 포르테 피아노가 놓여 있다. 쇼팽이 가장 아끼던 피아노는 마지막 순간까지 연주를 했다. 어린이를 위한 체험공간은 물론 지하에는 컨서트 홀이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너무 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쇼팽을 이해하기에 역부족이다. 쇼팽에 대해 설핏 아는 정보로는 박물관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 쇼팽에 대한 일생을 간략하게나마 알고 떠나야 한다.

쇼팽 초상화.
쇼팽 초상화.

 

8세부터 연주회, 피아노의 어린 신동 쇼팽
프레드릭 쇼팽(Frédéric, Francois Chopin, 1810~1849)은 수도 바르샤바에서 서쪽으로 46km 떨어진 젤라조바 볼라(Zelazowa Wola)에서 태어났다. 그림 같은 마조프셰(Mazowsze, Masovia) 풍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현재 그가 살던 집이 복원되어 그곳 또한 쇼팽 박물관이 되었다.

쇼팽의 모친.
쇼팽의 모친.
쇼팽의 부모. 
쇼팽의 부모. 

 

쇼팽의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1771~1844)은 프랑스 인으로 16세에 폴란드로 왔다. 프랑스 이웃에 살던 폴란드 귀족을 알게 된 계기였다. 처음에는 담배 회사에서 일하다가 나중에 가정교사가 되었다. 당시 유명한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프리데리크 스카르베크(Fryderyk Skarbek)가 살던 젤라조바 볼라로 이주해 가정교사가 되었다. 그 집에서 유모였던 폴란드인 주스티나(Justyna Krzyżanowska, 1782~1861)를 만나 결혼했다. 이 부부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누나 이후 두 번째로 태어난 프레드릭 쇼팽만 이 마을에서 태어난 것이다.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일찍부터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프레드릭 쇼팽은 네 살 때 엄마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아들의 천재성을 알게 된 어머니는 여섯 살 때 정식으로 피아노 교육을 시킨다.

바르샤바에서 정식 교육을 받고
쇼팽이 7세 때 온 가족이 바르샤바로 이주한다. 8세 때부터 피아노의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바르샤바의 자선 음악회에서 공개 연주를 해 절찬을 받았다. 12세 때부터는 작곡가이며 바르샤바 음악원 원장이던 요제프 엘스너(Józef Elsner, 1769~1854)에게 화성학과 대위법을 배웠다. 쇼팽은 8년간의 배움을 끝으로 피아노 교습은 더 이상 받지 않았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모든 것을 음악 공부에만 집중시켰다. 15세 그는 최초의 작품인 ‘론도’를 출판한다. 3년 뒤 베를린에 가서 몇 가지 가극을 보고 귀국 한 뒤 작곡 활동을 활발히 시작한다. 1828~1829년 작품을 완성하고 오스트리아 빈에 가서 연주해 대단한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빈으로 연주여행을 떠났는데 그때 바르샤바 11월 봉기(1830~1831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는다. 쇼팽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빈에서의 두 번째 연주는 첫 번째보다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쇼팽 박물관 내부 포르테 피아노.
쇼팽 박물관 내부 포르테 피아노.

 

1831년 그가 파리로 연주 여행에 올랐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비행기 안에서 고국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날 이후 쇼팽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파리의 푸아소니에르 거리에 정착한다. 쇼팽이 빈이나 런던 행을 단념하고 파리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다른 나라보다 폴란드인들을 백안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쇼팽은 우아한 피아노 연주로 사교계의 총아가 되었다. 탁월한 실력으로 피아니스트, 교사 자리를 얻을 수 있었고 경제적인 여유도 생겨 작곡에 전념할 수가 있게 된다. 1836년(26세)부터 쇼팽은 자기 작품을 출판해 그 명성이 차차 높아진다. 이 즈음 그는 실연의 아픔을 겪게 된다.

실연의 아픔을 보듬어 준 조르주 상드
1835년 쇼팽은 드레스덴에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어엿하게 성숙한 여인으로 변한 친구의 여동생 마리아 보젠스카(당시 16세)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쇼팽은 그녀와 약혼까지 했으나 상대 집안의 반대 등으로 결혼은 무산된다. 실연의 아픔이 채 아물기 전인 26세(1836년)에 리스트의 소개로 조르주 상드(1804~1876)를 만나게 된다. 조르주 상드는 쇼팽보다 6살 연상녀이자 아이 둘이 있는 이혼녀였다. 상드는 선정적이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소설가였다. 조르주는 쇼팽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세기의 로맨스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이 둘의 관계(1837~46년)는 9년이나 이어졌다.

조르주 상드.
조르주 상드.

 

쇼팽과 상드 만화.
쇼팽과 상드 만화.

 

프라하 공연 때의 쇼팽.
프라하 공연 때의 쇼팽.

 

쇼팽은 상드와 헤어진 2년 뒤 39세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는 장례식에 모차르트의 ‘진혼곡’이 연주되도록 유언했다. 폴란드가 독립하면 심장이라도 고국에 묻어달라고도 했다. 쇼팽의 시신은 파리 근교에 안장됐고 1년 뒤에 폴란드에서 가져온 흙이 무덤에 뿌려졌다. 그의 심장은 1918년, 폴란드가 해방된 이후 바르샤바에 있는 성 십자가 성당에 묻혔다. 폴란드와 프레드릭 쇼팽은 현재까지도 살아서 효자 관광상품이 되었다. 두 번째 여행에서는 쇼팽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남아 있다.

코페르니쿠스 동상
쇼팽 박물관을 나왔을 때는 이미 사위는 어둠에 쌓였다. 신세계 거리를 터벅터벅 걸으면서 바르샤바의 초겨울을 느껴본다. 과학협회 거대한 건물 앞에 지구본을 들고 있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 동상이 있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이 천문학자는 수도원장이기도 했다. 그 건물을 비껴 조금만 더 걸으면 쇼팽의 심장이 묻혔다는 성 십자가 교회(Church of the Holy Cross)가 불을 밝히고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바르샤바 대학(1816년)이 있다. 나폴레옹이 주도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이 대학은 쇼팽이 바르샤바에서 처음 거주하던 자리이기도 하다. 성요셉 교회와 대통령궁을 지나친다. 성 요셉 교회 앞에 스테판 비신스키(Stefan Wyszyński, 1901~1981) 주교 동상이 있다. 생전에 폴란드와 교회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나치주의 및 공산주의에 맞서 싸운 공로로 오늘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더불어 폴란드의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코페르니쿠스 동상.
코페르니쿠스 동상.

 

쇼팽 생가.
쇼팽 생가.

 

지독하게 짧은 바르샤바 여행. 정작 완벽하게 복원했다는 올드 타운은 가보지 못했다. 퀴리 부인의 생가도 보지 못했다. 그렇게 발자국만 남기고 폴란드를 떠났지만 좋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는 것은 확실히 각인시켰다. 동유럽은 서유럽보다 훨씬 따사로운 느낌을 받았다. 아니, 사회주의에서 탈피한지 20여년 된 동유럽은 그때만 해도 사람들의 온기가 많이 남아 있었다. 어쨌든 폴란드 첫 번째 여행 덕분에 아주 많은 도시를 찾게 되는 계기가 된다. 다음 회부터 폴란드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 지에 대해 얘기해보자.(계속)

Data
프레데릭 쇼팽 박물관:
주소 Pałac Gnińskich, Okólnik 1, 00-368 바르샤바/ 전화 +48 22 441 62 51/ 웹사이트 https://muzeum.nifc.pl/en/ 개관일 화~일요일(오전 11시 ~오후 7시, 매표 마감 오후 6시 15분, 수요일 무료입장)/
코페르니쿠스 동상: 주소 Nowy Świat 69, 바르샤바
성 십자가 교회: 주소 Krakowskie Przedmieście 3, 00-047 바르샤바/ 전화 +48 22 826 89 10/ 웹사이트 http://swkrzyz.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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