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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지금, 여기, 마음 가는 대로...손미나의 순간들

  • 기자명 이상문 기자
  • 입력 2022.01.26 22:11
  • 수정 2023.01.07 12:42
  • 댓글 0
  • 사진(제공) : 손앤컴
줄잡아 대여섯 개의 업에 종사했고 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유업’이라 써도 무방하겠다. <스페인, 너는 자유다>를 쓴 뒤로 일과 업 사이를 여행처럼 자유롭게 오갔다. 마음 가는 대로 걷는 길, 그 위에서 만난 생각. 당신이 궁금할지도 모를 손미나의 순간들.

손미나의 첫 직업은 KBS 아나운서였다. 대표 직업이자 오직 하나인 직업이었다. 하지만 그 직업에 안주하기엔 적합지 않은 유별난 데가 있었다. 어딘가 뜨거웠다. 베스트셀러 여행 작가를 거쳐 알랭 드 보통의 ‘인생학교’ 서울 교장, ‘허프포스트 코리아’ 편집인, 손미나앤컴퍼니 대표, 소설가, 유튜브 크리에이터 등 수많은 이름을 가지게 됐다. 

이른바 ‘N잡러’다. 다재다능하다는 증거인데, 정작 본인은 그런 건 아니다라는 투. 겸손 같지만 스스로 진단한 솔직하고 냉정한 분석에 가깝다. 외국어 능력 덕분에 수많은 기회를 얻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삶에서 가장 큰 벽은 언어 장벽이었다. 이것을 뛰어넘는 순간, 수많은 기회와 성공의 문이 열렸다!” 

5개 국어 능력자 손미나의 외국어 공부 가이드 <손미나의 나의 첫 외국어 수업>은 이런 고백으로 시작됐다.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스페인 시청률 1위 시사토크쇼에서 유창한 스페인어로 한국의 방역 체계와 대응책을 소개해 화제에 올랐다. 지난해 7월 출간된 이 책은 그 일로 ‘민간 외교관’이라 불리며 화제의 중심에 섰던 그가 30년간 외국어를 공부하면서 터득한 비법과 노하우다. 100일 공부법이라는데 누구나 목적을 달성할지는 미지수다. 다만, 유학 경험 없는 ‘토종’이 10대부터 40대까지 한 나라씩 차근차근 언어를 정복한 이야기라니 솔깃하기에 족하다. 

지난해 하반기에 유튜브와 책 홍보에 에너지를 쏟았던 그는 지금 스페인에 체류 중이다. 새해 설계를 겸한 휴식에 연초 두어 달을 할애하기로 했다. 아쉽지만 부득이 비대면 인터뷰. 그래도 직접 만나 대화한 듯 속이 풍성하고 깊다. 치밀하고 열성적인 그의 성정 덕이다.

 

<어느 날, 마음이 내게 불행하다고 말했다>(2020)를 출간한 지 수년이 지났다. 그 무렵을 떠올리며 지금의 마음을 진단한다면 어떤가? 행복과 불행 사이 어디쯤 와 있는가? 그때와 지금은 큰 차이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매우 행복하다. <어느 날, 마음이 내게 불행하다고 말했다>에는 심한 번아웃을 겪을 당시의 내 상태가 상세히 묘사돼 있다. 그때의 난 마치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다. 책에도 썼지만 번아웃은 체력이 고갈된 상태가 아니라, 지나치게 일에 집중하고 살거나 경쟁이 심한 사회 분위기에 이끌려 가느라 마음을 돌볼 시간이 없어 생기는 증상이다. 감정이 말라버리거나 마음의 문이 닫히는 상태를 말한다. 평소 호기심도 많고 뭐든 재미있어 하고 새로운 걸 배우거나 낯선 사람들과 친구 되는 일을 즐기는 내가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는, 완전 무기력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런 자신이 너무 낯설어서 괴로웠다.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었나? 심리치료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고 조언을 충실히 따랐다. 단번에 벗어나긴 힘들었고 꽤 오랜 시간 노력했다. 이후로는 원래 내 모습보다 오히려 더 좋아진 것 같다. 어두운 터널에 갇히더라도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해졌다고 할까. 마음이 몽글몽글한 상태다.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으로 가슴이 다시 차올랐고 매 순간을 즐기고 있다. 전보다 훨씬 더딘 속도로 사는 것 같은데 오히려 더 생산적인 일상이 이어지고 있는 게 신기하다. 당시는 힘들었지만 결론적으로는 번아웃의 경험이 내 인생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됐다. 

그런 류의 슬럼프는 예기치 않게 엄습한다. 이후엔 비슷한 우울감과 불행의 메시지를 접한 적 없나? 번아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인식하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해서 그렇지 아마도 수많은 현대인들이 번아웃을 겪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특히 한국처럼 경쟁이나 압박이 심한 곳에선 삶의 질이 무시되기 십상이다. 번아웃을 비껴가는 일이 쉽지 않을 거다. 아무튼 번아웃은 인지를 하는 순간부터 쉽게 떨쳐내기 어렵다. 일반적인 우울증처럼 약을 먹는다고 치료가 되는 것도 아니다. 무던한 노력이 있어야 하고 시간도 필요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도 있어야 한다. 삶 전체의 패턴을 바꾸고 자기 자신을 무한 애정과 따스함으로 돌봐야 한다. 나 역시 단숨에 번아웃이 사라진 게 아니다.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기분이 좀 나아진 듯하다가 다시 심장이 얼음장같이 느껴지기도 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때마다 치료사를 찾아야 했나?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 치유하는 법을 알게 된다. 내 경우엔 명상이 많은 도움이 됐다. 명상이라 하면 대개 거창한 것을 상상하지만 사실은 아주 단순하고 쉬운 자기 성찰의 시간이다. 정말 중요한 건, 간단하게라도 고요하고 차분한 환경에서 큰 기대나 욕심 없이 내 마음 상태를 관찰하는 일을 매일 또는 틈틈이 반복하는 거다. 마치 식물을 가꾸듯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애정으로 들여다보고 보듬어주는 것, 갑자기 상태가 좋아지지 않는다 해도 참을성 있게 노력을 이어가는 것, 그게 비결이다. 

공황을 극복한 후 다짐했다던 ‘마음 가는 대로 살기’, ‘하루 1시간 미니 휴가’는 잘 돼가고 있나? 어떻게 실천하고 있나? 매일매일 미니 휴가를 잘 실천한다. ‘매일 미니 휴가’의 매력은 하루 중 언제든, 어디에 있든, 심지어 단 5분의 시간이 있더라도 실천 가능하다는 것이다. 강의 시작 전 대기실에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집에 돌아와 운동 직전 잠시 짬이 났을 때 등등 하루 중 언제라도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무조건 눈을 감고 정신을 쉬게 한다. 꼭 한 번으로 제한하지는 않는다. 짬이 여러 번 나면 미니 휴가를 몇 번이고 갈 수 있다. 처음엔 순간적으로 정신의 스위치를 끄고 쉬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실천이 어렵다. 하지만 훈련하기 나름이라 누구든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마음 가는 대로 살기’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구도 하고 싶은 일만 골라 하며 살 수는 없고 나도 그렇다. 영 내키지 않는 일 또는 내 마음을 불행하게 할 가능성이 있는 일의 경우엔 욕심이 나거나 누군가 억지로 강요해도 정중히 거절하거나 과감하게 포기한다. 행복하게, 마음의 소리를 따라 사는 비결은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포기하는 능력 또는 용기’에 달렸다.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일은 늘 약간의 두려움을 안겨주지만, 신념을 갖고 원하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항상 그 선택이 옳았음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스페인, 너는 자유다> 이후 15년이 흘렀다. 당시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도 함께 나이 들었다. 예를 들어 마누엘, 로베르토, 조르디 같은.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사는가? 아직도 교류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 친구들과는 끈끈한 우정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이제 나이가 지긋해져서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된 경우들도 있고, 부모 중 한 분이 세상을 떠났거나 본인이 생사를 오가는 병을 앓기도 하는 등 모두 인생의 크고 작은 굴곡을 겪었다. 그런 중에도 서로에게 변함없이 힘이 돼주면서 우정은 더 단단해졌고 함께 성숙해진 것 같다. 책에 등장하는 친구들 대부분 여전히 연락하고 가끔 보는데, 그중에서 베네수엘라 출신 기자 다비드, 페루 기자 이야, 스페인 친구인 로베르토와 조르디는 아주 가까이 지낸다.

다비드는 바르셀로나의 신문사 일을 그만두고 마드리드로 일터를 옮겨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챠베스에 관한 책을 두 권 썼다. 크게 성공을 거둬서 국제적으로 책 관련 활동도 하고, 스페인 방송에서 정치 토론 프로그램 패널도 한다. 소셜 미디어에서도 활발하게 일하고 있다. 이야는 페루에 돌아가서 본인의 뿌리라고 느끼는 쿠스코에 정착, 역사가들과 함께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함께하면서 연구, 조사,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다. 그녀는 인디오들의 역사, 전통, 인류학 등에 관심이 많고 대학 때 인류학을 전공하기도 했다. 그 사이 몸이 많이 아팠다가 잘 극복했고, 그런 일을 겪으며 철학자처럼 깊은 성찰을 하는 사람이 됐다. 조르디는 여전히 스포츠에 관련된 일을 하는데 기자가 아니라 마케터로 일한다. 스포츠 관련 비즈니스에서 뒤늦게 재능을 발견한 것 같다. 조르디 가족과는 지금도 여름이면 메노르카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로베르토는 석사 과정 이후로도 꾸준히 친하게 지내는데, 변함없이 본인의 자리에서 성실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 로베르토와 나는 둘 다 결혼과 이혼,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일을 비슷한 시기에 겪었고, 그때마다 서로에게 큰 힘이 됐다. 10년 전 지금의 와이프를 만났는데 그녀는 나와 완전 베프다. 지금은 모두가 수시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랑하는 가족처럼 지낸다. 그들이 한국에 대여섯 번 왔고, 나도 스페인에 가면 늘 그 집에서 같이 지낸다. 지금도 그렇다. 여름휴가는 당연히 같이, 떨어져 있을 땐 일주일에 한 번씩 영상 통화를 할 정도다. 

2022년 벽두인 지금, 손미나의 머릿속을 가장 크게 차지하고 있는 생각은 무엇인가? 코로나 팬데믹이 최악의 고비를 넘기고 우리 삶이 아주 조금씩이나마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올 한 해를 보낼 것인가를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어떤 프로젝트들을 통해서, 쓸모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개인적인 행복도 돌볼 수 있을까, 누군가를 탓하지 않고 미래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은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등을 고민하고 있다. 2년 넘게 이어진 초유의 상황 속에서 모두 지치고 힘든 상태다. 그럼에도 어떻게 하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지, 나뿐 아니라 모두들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시기 같다. 

스페인에서의 하루하루는 어떤가? 그곳에서 미나의 순간들은 무엇으로 채워지나? 일과 휴식 그 어느 쪽에도 치중하지 않고 밸런스를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곳엔 서울처럼 큰 도시가 없기 때문에 웬만하면 다 걸어서 가 닿을 수 있다. 생활 반경이 좁으니 거의 차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닌다. 당연히 아침 산책이 자연스럽다. 햇살 좋고 따뜻한 노천카페에서 점심을 먹는다. 영상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날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야외 테라스에서 먹는 일이 흔하다. 주말이면 산에 간다. 틈틈이 글을 쓰거나 유튜브 영상 촬영을 하고 회의도 한다. 차를 타지 않고 두 발로 걷고, 거의 매일 햇빛 아래에서 활동한다. 한국과는 퍽 다른 순간들이자 루틴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운동하는 틈틈이 글 쓰고, 회의하고, 영상 만들고, 방송하고, 강의한다. 그게 내 삶의 루틴인데 거기에 좀 더 활발한 야외활동이 있다고 보면 엇비슷하다. 한마디로 날씨와 접근성 덕에 보다 자연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근래에 국내 미디어에 많이 등장한 ‘손미나 뉴스’는 ‘50대 손미나, 상큼한 비키니 룩’, ‘50대 손미나 11자 복근’ 등 외모 관련 기사였다. 솔직히 어떤 기분이 드는가? 사실 참, 난감하다.(웃음) 자기 관리 못하고 엉망이 되었다는 뉴스가 아닌 건 다행이고 관심을 가져주시는 건 매우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단순히 외모, 특히 비키니니 애플 힙이니 하는 것들이 과연 나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알고 싶은 것일지 의문이다. 그런 것 외에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루고 있는 일들이나 사회적 의미가 있는 활동에 대해서도 비중 있게 다루거나 관심을 가져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대중이 호기심에 그런 기사를 클릭하긴 하겠지만 결국 매우 허무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요즘 인터넷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의 일상이나 외모를 가지고 만들어내는 자극적인 글, 사진으로 도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물론 그런 기사도 사람들에게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면 기쁜 일인데, 그런 기사만 노출되는 것은 본질이 가려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실제로 ‘건강미인’이라 할 만하다. 도움이 됐다고 느껴지는 생활 습관이랄 게 있나?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많이 노력하는 편이다. 인스턴트 음식이나 육류 위주의 식단은 멀리하고, 밀가루 음식은 거의 먹지 않는다. 밥도 집에서는 100프로 현미밥을 먹은 지 수십 년 됐다. 건강 때문에 안 되는 걸 억지로 하는 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 덕분에 좋은 식습관을 갖게 됐다. 운동은 워낙 좋아한다. 학생 때도 체육시간이 제일 좋아하는 수업 중 하나였다. 예전에는 헬스장에서 웨이트 트레이닝도 하고, 스쿠버다이빙이니 승마니 하는 것들도 배우고 열심히 했다. 그런데 요즘엔 아무 도구 없이 내 몸만 사용하는 운동을 배워서 여행 중에도 자유롭게, 꾸준히 운동하자는 주의다. 최근엔 필라테스와 태권도를 열심히 하고 있다. 도저히 운동을 할 수 없는 날은 하다못해 플랭크나 스트레칭을 하고, 그것도 힘든 날은 반신욕이라도 해서 몸의 독소를 뺀다. 

손미나 인스타그램(@minaminita1202)에 올라온 미나의 스페인 일상. 일과 휴식 그리고 등산과 산책, 운동, 식도락으로 가득하다. 
손미나 인스타그램(@minaminita1202)에 올라온 미나의 스페인 일상. 일과 휴식 그리고 등산과 산책, 운동, 식도락으로 가득하다. 

이른 바 ‘N잡러’다. 모든 일이 다 중요하겠지만, 의미를 나눠 이름을 붙여보자. 이건 내가 잘하는 일, 이건 내게 제일 쉬운 일, 이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일 등등으로 나눈다면? 방송 일은 대학 때는 전혀 생각도 안 했던 직업이었다. 그러다가 스페인에 언어 연수를 갔다가 외국인들 사이에서 어설프게 스페인어를 하는데 재미있게 듣는 것을 보고 잠재적인 재능을 발견해 아나운서 시험을 보게 된 거다. 한 번에 합격을 해버려서 오늘날까지 오게 됐다. 천직이자 운명적인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설가는 오랜 로망이자 가장 고통스러우면서도 가장 큰 희열을 맛보게 해준 일이다. 작가로서 글을 쓰는 시간은 명상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가 있어서 내게는 힐링이다. 강연은 내가 가장 신나게 하는 일이다. 말을 하면 할수록, 청중이 많을수록 에너지가 솟는다. 언론인은 사명감을 갖고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으니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일이다.

항상 딸을 믿어주셨다는 선친 이야기가 회자됐었다. 오래 남는 추억, 아쉬운 기억들이 있다면? 아버지는 자식들을 무조건 믿어주시는 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따뜻한 분이었다. 남동생이 한 명 있는데, 대개 사내아이들은 한두 번쯤은 아버지한테 매도 맞고 그러지 않던가. 그런데 내 동생은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들은 얘기지만, 한번은 친구들과 아주 고약한 장난을 치다 걸려서 모든 아이들의 부모가 불려갔는데, 다른 친구들은 다 매를 맞으며 집에 갔지만 동생은 아무 말씀 없는 아버지를 따라 조용히 집에 갔다고 한다. 오히려 더 잘 해주시는 덕에 마음이 불편해서 너무 힘들었다는 얘길 했다. 아무튼 아버지는 늘 친구같이 자식들을 대하셨다. 자식들을 데리고 낚시를 다니셨고, 잡은 물고기로 다 같이 야외에서 캠핑을 하며 저녁을 먹었던 추억이 있다. 다른 아버지들과 달리 휴일이면 앞치마 차고 직접 요리를 하기도 하셨다. 다 커서 서른 살이 넘어서도 잘 때가 되면 아버지가 오셔서 이불도 덮어주시고 잘 자라고 볼에 뽀뽀도 해주셨다.(웃음) 늦게 귀가하는 날엔 주차장을 서성이며 기다리시곤 했다. 그렇게 자상했던 분이어서 돌아가신 후에도 사소한 일상 구석구석 아버지의 빈자리가 커서 가족 모두 너무 힘들었다. 가장 놀라운 일은 40년 정도 아버지와 살았는데 단 한 번도 화내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거다. 거짓말 같지만 정말 그랬다. 한없이 인자하고 장난기와 호기심이 가득한 소년처럼 함께 장난을 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깊은 삶의 지혜가 담긴 따스한 조언을 해주시던 친구 같은 아버지, 그분이 지금도 그립다.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는 것 같다. 

한때 ‘결혼’을 선택했고 곧 놓았다. 50대가 된 지금, 내 인생에 있어 결혼은 어떤 의미였는지, 앞으로는 어떤 의미일지 말할 수 있나? 사회적 압박 또는 책임에 너무 억눌려 있었던 것 같다. 적절한 시기가 되면 해치워야 하는 숙제인데 혼자 못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래서 서두르다 보니 옳지 못한 선택을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 얘기를 또 할 수밖에 없는데, 짧은 결혼생활을 마무리해야겠다 결심했을 때 부모님은 정말 큰 사랑으로 딸을 품고 이해해주셨다. 특히 아버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런 선택을 안 해도 되면 더 좋았겠지만 살다 보면 의지와 상관없이 이런 일이 닥치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런 인생의 고비가 굴레가 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날개가 되게 할 것인가는 너에게 달렸다. 어쩌면 너에겐 이제 그 누구보다 더 큰 자유와 선택지가 주어진 것이고 그만큼 행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더 큰 세상으로 나가 인생을 즐기면서 나이, 국적, 직업에 구애받지 말고 사랑하고 행복해라 딸아”라고 하셨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나는 아직도 사랑을 믿는다.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되면 당연히 인생길을 함께 걸어갈 텐데, 결혼은 그 이후의 선택이자 옵션 같다. 사회적 시스템인 결혼에 크게 연연하고 싶지 않지만, 애써 반대하는 입장도 아니다. 일단 좋은 사람이나 만나고 나서 생각할 일이다.(웃음)

자신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 성향이라고 했다. 사랑과 연애에도 적극적인 편인가? 그다지 적극적이지는 못하다. 믿기 어렵겠지만, 보기보다 훨씬 쑥맥이고 shy한(수줍어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일단 사랑에 빠지면 열정적인 것 같긴 하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는, 그리고 사랑을 받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 아니겠는가. 다만, 사람의 인연이란 게 사랑의 크기나 노력 여하와 상관없이 결정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오래도록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인연을 만나고 싶다. 

손미나가 사랑을 확신하는 포인트는 무엇일까? 무엇에 매료되나? 글쎄… 가봐야 알겠지만 우선 떠오르는 건, 가치관이다. 공유하고 존경할 만한 가치관이 있어야 될 것 같다. 인간적으로 존중하고 존경할 수 있는 면이 없거나 그런 면에서 실망하면 사랑이 싹트기 힘들 테니까. 취미나 관심사, 식성은 달라도 되지만 인생의 방향은 너무 다르면 곤란하다. 그게 잘 맞아야 인생길의 동행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미나 공주’ 말고도 꽤 여러 가지 별명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별명은? ‘미나 공주’의 시작은 <도전 골든벨>이었다. 실수로 탈락하는 학생들이 안타까워 어떻게든 다시 기회를 주자는 차원에서 내가 패자 부활 코너 아이디어를 기획했다. 학생들에게 조금씩 인기를 끌기 시작하는데다 문제를 내는 사람이니 손미나를 활용하는 게 재미있겠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제작진이 코너 이름을 ‘미나 공주, 살려주세요’로 지었다. 그 이후로 미나 공주가 별명이 되었는데, 마침 당시에 김자옥 씨가 ‘공주는 외로워’라는 노래로 큰 히트를 치면서 ‘공주’가 유행했을 때였다. 비슷한 무렵에 <상상플러스>에서 노현정 씨를 ‘얼음공주’라고 부른 것도 그 영향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별명이 많다. 물을 많이 마신다 해서 ‘수녀’, 잠을 많이 잔다고 ‘코알라’, 나만 있으면 사람들이 꼬인다고 ‘자석’, 머리숱이 많다고 ‘사자’ 또는 ‘티나 터너’, 세상 이곳저곳을 막 돌아다닌다고 마르코 폴로를 따 ‘미나 폴로’다. 놀랍게도 초등학생 때 별명은 ‘교장선생님’이다. 너무 점잖다고 어른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이 밖에도 많지만 특별히 더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별명은 없고 다 좋아한다. 별명은 누군가가 나에게 관심을 갖고 지켜보다가 만들어주는 거니까 모두 애정이 묻어 있고 다정하게 들린다.    

‘스페인은 지금!’을 생생 리포트 한다면? 인터뷰 기사가 나갈 때쯤엔 얼마나 생생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선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코로나19 그중에서도 오미크론과 변이, 그에 따른 상황과 새로운 정책, 백신에 대한 찬반 의견 등이 뉴스의 중심이다. 카나리아 아일랜드의 화산 폭발 관련 뉴스, 지방선거가 하나 있어서 그에 대한 얘기, 그리고 국제 뉴스 중에는 호주 오픈대회에 참가하러 온 조코비치 선수의 추방 관련 뉴스와 영국 앤드류 왕자의 성 스캔들 등을 연일 보도 중이다.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여행마니아들이 갑갑해한다. 좌절하지 않고 미치지 않고 긴 터널을 견뎌낼 방법이 있다면?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 역시 너무 힘들다. 답답함이 느껴지는 큰 이유는 이 어두운 터널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는, 이게 끝나면 어디로 여행 갈까 생각하면서 비행기 티켓을 샀다가 환불한 적도 있는데 도움이 됐던 것 같다.(웃음) 잠시나마 꿈을 꾸면서 행복했다고나 할까. 쉽지 않지만 다음에 가고 싶은 여행지를 정하고, 그 여행지에 관련한 조사 또는 학습을 하면서, 나름의 즐거움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그 나라 언어를 배운다든지, 그 나라 요리를 먹어본다든지, 역사 공부를 해본다든지… 사실 여행은 그 자체도 즐겁지만 여행하기 전 꿈을 꿀 때의 만족감 역시 대단하지 않은가. 

특히 스페인을 동경하지만 발 묶여 있는 이들에게 손미나만의 스페셜 팁을 던진다면? 스페인의 넷플릭스 시리즈 ‘종이의 집’을 아직 안 보셨다면 강추한다. 영화 중에는 최근에 ‘강박이 톡톡’을 봤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원래는 프랑스에서 초연된 연극 작품이었다는데, 스페인의 걸출한 배우들이 다 등장해 상상을 초월하는 유머를 선사한다.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들 역시 너무나 클래식한 스페인의 대표 영상들이다. 그리고 지금 후안 미로 전시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 번 가보시라고 권한다. 후안 미로뿐 아니라 스페인에서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예술가들이나 문학 작품이 많이 탄생했다. 쉬운 예로 피카소, 달리, 가우디 같은 인물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이들은 사실 드물다. 그런 인물들에 대한 다큐나 책을 가까이 하면서 지식을 쌓아둘 수 있다면 다시 여행길이 열렸을 때 몇 배 더 큰 여행의 참맛을 느낄 수 있을 걸로 확신한다.

작가 ‘샨샤’와의 만남에서 ‘씨앗’ 이야기를 들었다 했고, 감명 받았다고 했다. 손미나는 이제 과실과 잎이 풍성한 나무일까? 아니면 다른 씨앗이 또 있을까? 샨샤를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하면 나름대로 과실과 잎이 달렸겠지만, 나는 아직도 더 싹을 틔울 씨앗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 하긴 미리 다 알면 재미가 없지 않겠나. 연극 <19 그리고 80>에 등장하는 할머니처럼 여든 살 생일을 앞두고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그렇다면 그때에도 새로운 씨앗의 싹을 틔우고 있는 것 아닐까? 내게도 아직 여러 씨앗이 남아 있다고 믿고 싶다. 

인터뷰를 준비하는 중 인스타그램을 통해 들여다본 손미나의 일상은 내추럴하고 편안했다. 소통도 하기 전 ‘눈팅’만으로 적이 안정감을 느꼈다는 건, 그의 ‘스페인에서 겨울나기’가 마음 가는 대로 그리고 마음먹은 대로 착착 진행 중이라는 신호였는지 모른다. 이메일을 트고 안부 인사를 건네고, 인터뷰 플랜을 설명하고, 질문지를 건네고 답신이 몇 번 오가는 동안, 그 시그널은 더 짙어진 듯하다. 겸손과 여유는 차갑지 않고 따뜻했고 욕심과 열정은 뜨겁지 않아도 강했다. 아마도 번아웃 뒤에 비로소 찾았다는 마음의 새 길 덕분일 테다.       

“스페인은 겨울에 잠시 다니러 온 거라서 여기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제 삶의 터전은 서울인데 다소 긴 출장을 온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일단 올해 3월 초중순까지는 유럽에서 유튜브 콘텐츠도 만들고 업무상 미팅들도 하면서 보낼 예정이고요, 한국에 갔다가 5, 6월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여름 이후엔 아마도 산티아고 길 순례를 통해 깨닫게 된 것들, 새롭게 얻은 경험 등을 유튜브 영상, 다큐멘터리, 강연, 각종 이벤트와 행사 등을 통해 나누면서 보내게 될 것 같습니다.”

‘나눔’. 생각해보니 그는 늘 꺼내고 나누고 살았다. 혼자 가두어놓은 건 애저녁에 안 어울렸겠지 싶다. 어쨌거나 ‘나눔’은 산티아고 이후로 내내 손미나의 여정에 함께 있을 화두인 듯하다. 10년, 20년 뒤 로드맵을 물었을 때도 답은 같았으니.
Mina’s Moments, 손미나의 순간들은 상처와 의문과 도전과 공감이다. 그리고 나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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