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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공간의 미래를 탐구하고 걱정하는 ‘셜록’ 건축가 유현준

  • 기자명 이상문 기자
  • 입력 2022.05.08 08:00
  • 수정 2023.02.06 01:26
  • 댓글 0
  • 사진(제공) : 안규림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와 <알쓸신잡>으로 대중에 알려진 유현준은 갈수록 할 말이 많아진다. 공간의 미래가 걱정되고 사회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분간 말을 줄이겠다고 다짐한 듯하다. 건물을 짓듯 긴 싸움을 해야 하는데 지레 지쳐선 안 되기 때문이다. 설계와 강의에 집중하는 요즘 생활 그리고 유현준의 원형질에 대하여.

한때 ‘건축가 유현준’이라는 이름에 맹렬히 따라붙는 키워드는 ‘알쓸신잡’이었다. 건축계에서 꽤 알려져 있었지만 대중에겐 생소했던 그가 널리 알려진 게 이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대표 저술인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가 2015년에 출간돼 인기를 모으고 있었지만, 이름과 얼굴을 동시에 제대로 알린 건 아마 2017년 그때쯤일 듯. 시즌2에 합류해 출연진이 여행하는 각 지역의 유명 건축물과 관련된 지식을 매끄럽게 설명해 주목을 끌었다. 국내는 물론 세계 건축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풍부한 스토리텔링을 지닌 ‘선수’가 나타났던 것. 함께 출연한 유시민 작가는 “국대 선수가 동네 축구팀에 왔다”고 평했다. 

그동안 방송과 강연이 많긴 했지만 우리가 아는 ‘유현준’은 책을 통해서였다. 본인은 거북스러워한다는 ‘인문건축가’라는 수식도 여러 번 세상에 내놓은 책에서 비롯됐다. 건축과 세계, 공간과 사람, 그리고 관계와 욕망을 파헤친 솔직한 인문학적 담론이 대중의 구미를 당긴 것.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2015)를 시작으로 <어디서 살 것인가>(2018), <당신의 별자리는 어디인가요>(2019), <공간이 만든 공간>(2020), <공간의 미래>(2021)에 이르기까지, 그는 우리에게 필요한 혁신적인 공간설계와 생각설계에 대해 말해왔다. 

글 잘 쓰는 저자이자 말 잘하는 그가 무엇보다 잘하는 건 설계다. 2020년 국제건축상, 건축마스터상(AMP)을 비롯해 2018 독일 디자인 어워드, 2017 아시아건축가협회 건축상, 서울시 건축상, 2013 올해의 건축 베스트 7 등 국내외에서 40여 개가 넘는 상을 수상했다. 건축학도일 때는 세계 최고의 건축상이라는 프리츠커상 받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살다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고, 그는 주저 없이 말한다. 평생의 열정과 재능을 고작 심사위원 몇 사람의 구미와 맞바꾸는 건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꼭 상이 아니어도 많은 이에게 인정받는 마스터피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족하다. 

공교롭게도 그를 만나려 할 때쯤 언짢은 일이 벌어졌다. 청와대 이전 논란이 뜨겁던 중에 용산 이전의 이점을 말했다가 논란에 휩싸인 것. 늘 그렇듯 맥락 없는 기사폭탄에다 댓글폭탄이 넘쳐났다. 그로서는 정치적 프레임을 씌우는 이들이 매우 원망스럽고 피곤하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한다. 건축가로서의 의견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스스로 재확인할 뿐. 강남에 위치한 건축사무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스케줄 잡기가 조금 힘들었다. 바쁜가 보다. 건축설계라는 게 일을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새로운 요구가 계속 들어오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건축가는 퀄리티 컨트롤에 신경을 써야 되는 게 맞고, 아무래도 신경을 많이 쓰면 쓸수록 결과는 점점 더 좋아진다.

설계일 외에는 어떻게 지내나? 사무소랑 학교 오가는 게 기본이다. 학생들 가르치고, 2주에 한 번씩 한 3시간 유튜브 촬영을 한다. 방송은 고정프로 하는 건 없다. 지난 몇 주 동안 봄철 예능프로에서 불러서 잠깐 찍은 적은 있다.

방송을 즐기는 것 같다. 재미있다. 사람이 여럿 모여 하나의 목표를 갖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현장이 재미있고, 좋은 에너지를 가진 출연자를 만나니 더 좋다. 분위기 좋으니까 긴장도 안 하고 말도 잘 나온다.

요즘은 방송에서 어떤 얘기를 주로 요구하나?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은데 예전보다 공간에 대해 관심이 많아진 것 같다. 코로나 영향도 있겠지만 전반적인 추세가 대한민국 사회의 공간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는 있는 것 같다. 국민 대부분이 핸드폰에 카메라가 있다. 바깥에 나가면 인스타그램에 올릴 예쁜 공간을 찾는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집안 공간에 대한 관심도 늘었다.

<공간의 미래> 등 여러 책을 통해 공공건축 부문의 개선 아이디어를 줄곧 제안해왔다. 주장이 먹히고 바뀌기도 하나? 변화가 있다. 제일 달라진 거는 벤치다. 시민이 무료로 쉴 수 있는 벤치를 많이 놓자고 했더니 강남구청에서 벤치를 늘렸다. 도산공원 담장을 없애자는 얘기를 어디선가 했는데 내 그림대로 거의 비슷하게 고쳐놓았더라. 발코니 설계를 제안하는데 찾아오는 건축주들 중에 그걸 해달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시민의 휴식과 지역 간 소통을 위해 이 동네에서 옆 동네까지 이어지는 선형공원을 늘리자고 했더니 서울시에서도 관심 프로젝트라며 반응을 보였다.

민간건축과 공공건축 영역이 있다. 어느 쪽이 더 좋은가? 어떤 분들은 공공건축 쪽 얘기는 그만 떠들고 니 작품의 완성도나 높이라고 말한다. 난 그런데 딱히 그 경계를 나누고 한쪽만 선택하지 않는다. 둘 다 관심 있는 부분이고 사실은 내가 바쁜 이유도 거기 있다. 건축가로서의 만족감으로 보자면 민간건축이 더 좋긴 하다. 공공건축은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현실의 벽이 너무 높고 저항도 너무 많다. 건축가는 철저히 을이고 관공서는 너무 입김이 세다. 실망을 많이 하게 되는데 그렇다고 포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책임감 때문에 물러서긴 싫고, 싸우는 게 체질에 맞기도 하고.(웃음)

불합리한 법과 관행에 막힌다는 얘긴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바뀐 것 같다. 싸우나마나 아닌가? 한 30년 걸릴 거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단기간에 결과가 나오고 변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조그만 건물 하날 설계해도 구상 1년, 시공 2년 해서 최소 3년은 걸린다. 공공건축 분야는 30년 뒤를 보고 얘기하는 거다. 내가 쓴 책들을 고등학교 때 읽었던 친구들이 나중에 건축주가 되면 그때쯤 바뀌지 않을까? 혼자 힘은 미약하지만 구심점 같은 역할로 남고 싶다. 정치와 정치를 하시는 분과는 결이 안 맞는 이유가 그거다. 그분들은 자기들 임기에 뭔가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30년을 보고 간다.

하지만 정치가 아닌 것이 있겠나? 공공건축 문제도 법이 해결해야 한다. 용산 이전 발언도 정치적 프레임 때문에 곤욕 치른 것 아닌가? 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받는 스트레스다. 말씀대로 건축도 한 번도 정치적이지 않았던 적이 없다. 정치적인 의사결정들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다른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 한다. 완벽히 피할 수는 없다. 유재석 같은 예능인이 아닌 이상 모든 이에게 다 좋다고 맞출 순 없다. 정치적 프레임이 씌워지는 것도, 욕을 먹고 오른쪽으로 갔다가도 또 금방 왼쪽으로도 갔다 하는 것도 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한 10년 지나면 유현준 말이 정치적인 흐름에 편승하려고 했던 얘기가 아니구나, 그냥 자기 얘기 한 거구나라고 알게 될 것이다.

진영 논리가 지나치게 강하다. 토론은커녕 말 꺼내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너무 핫이슈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 하고 싶다. 그런데 자꾸 물어보니까, 나름 신중하고 완벽하게 답하려 하는데 내 뜻과는 달리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요즘엔 인터뷰를 거절한다. 

공간의 양극화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현실과 가까운 우려인가? 대형 아파트 단지와 한 동짜리 초고가 주택이 많이 만들어지면서 점점 사람이 섞이는 일이 없어진다.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그랬다. 그러면 서로 이해하기 어려워질 거고 그다음 단계에선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극단적인 그 지경까지 가기 전에 이 사회가 지속 가능하게 하려면 계층 간의 이동 사다리와 공통의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공간 구조를 만드는 게 필요하다. 사실 그런다 해도 양극화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속도를 좀 늦출 수는 있지만 어차피 뚜렷한 솔루션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대책이 있다면,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시에 사니까 1층에 공짜로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많아져야 된다. 땅을 많이 확보해서 공원을 많이 만들어야 하고, 가장 돈을 적게 들이는 대안으로 벤치를 확충하는 게 좋다. 작아도 좋으니 공공도서관 수를 더 늘리는 것도 방법이다. 정부만 해결할 일도 아니다. 부동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대형 교회 등 종교시설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사재가 많은 지주들도 공간 양극화 해소에 이바지할 수 있다.

그런 지식과 고민을 가진 전문가 그룹이 행정을 맡아야 하는 것 아닐까?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를 시켜야 된다고 아는 대로 떠들고 나면 ‘그러면 네가 가서 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어디로 진입해도 정당공천이 필요한데 그러는 순간 국민의 절반이 반대한다. 정책이 좋고 나쁜 걸 떠나서 진영에 묶여 평가되고 그렇게 말하게 된다. 정치적 진영을 떠나서 누구나 느끼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은 건축가로 살아야 한다는 얘기고 정치와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얘기다. 

생각하는 대로 솔직하게 말한다. 솔직해야 자유롭다고 했는데, 그러면 현실은 오히려 더 부자유스러워진다. 그래도 솔직해야 될 것 같다. 그런 사회를 만드는 노력을 하고 싶다. 되게 슬픈 게, 이 사회가 점점 내가 무슨 말을 하면서 이거를 딴 사람이 어떻게 느낄지를 너무 많이 생각하는 식으로 바뀌어간다는 점이다. 그러면 ‘나 자신’, 내가 없어진다. 인간의 가치 중 제일 중요한 게 자유다.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자유롭게 자기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되고 행동할 수 있어야 된다. 언제부터인가 너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인간들이 많아지고 그거를 다 자기 입장에서 판단을 내리니까 복잡해졌다. 잣대가 너무 많은 거다. 그거를 다 만족시키려면 유재석 씨처럼 살기 전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사회가 불편하다.

사회가 왜 그렇게 변해가는 걸까? 그걸로 돈 버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정치 양극화 현상을 통해 자기 밥통을 철밥통으로 만드는 정치가들과 극단적 미디어가 문제다. 그들이 사람들을 선동해 세상을 이렇게 조장해가는 것 같다. 과거에는 그럴 능력이 없었지만 지금은 소셜미디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작은 힘으로도 사람들을 선동할 수 있게 됐다. 모든 사안을 옳고 그름으로 포장해서 자신들만 정의의 편인 것처럼 덧씌운다. 나쁜 사람들이다.

반골기질이 있어 보인다. 꽤 있다. 저게 진짜일까, 하고 좀 삐딱하게 보는 시선이 있다. 관종 기질도 좀 있는 것 같다.  거창하게 사회를 위해서 일한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지만 나 같은 목소리도 필요하지 않나, 이런 시각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수의 시각일지라도 의미 있게 쓰일 수도 있으니까 일단 그냥 던지고 보는 거다.(웃음) 

학교 때부터 프리츠커상을 목표로 했다고 들었다. 이제 받을 때 되지 않았나? NO! 이제 좀 자유로워진 것 같다. 나이가 점점 먹으니까 심사위원들이 주는 상에 별로 관심이 없어지더라. 그래 봐야 심사위원들 대여섯 명 모여가지고 상 주는 건데 그거에 일희일비한다는 것 자체가 싫어졌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쥔 칼자루에 내 인생을 쥐어주는 것 같은 느낌? 솔직히 정 교수 되기 위해 학교에서 필요해서 상을 받았어야 했다.

건축과 공간이라는 주제를 늘 사람들의 ‘관계’로부터 풀어냈다. 관계에 천착한 건 언제부터인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다. 둘째아들로 태어나 보니 세상엔 이미 많은 등장인물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관계를 관찰하며 눈치를 많이 보게 됐다. 둘째들 기질이 그러기 쉽다고들 한다. 아무튼 관계에 예민했다. 30대 중반부터 건축을 하면서 사람들 간의 관계를 바꿀 수 있는 거구나라는 느낌을 확실히 받게 됐다. 그러다가 40대를 넘기고 10년 이상 흐르니까 나만의 시각이 완성이 된 듯하다. 개인적인 기질과 건축을 하면서 쌓은 오랜 경험이 끝에 가서 만난 것 같다.  

공유경제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했다. 가장 큰 허점이 뭔가? 공유경제를 너무 유토피아적으로 광고를 많이 하는 게 마땅치 않다. 내 직관으로는 좀 이상하다 생각했다. 허점을 단 한마디로 꼽는다면, 공유경제를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은 대자본가뿐이라는 점이다. 그래야 가능하다는 거다. 과거에는 구멍가게를 만들어서 사무실 임대를 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위 워크’ 같은 것들은 어마어마한 파이낸스 투자를 받아야 한다. 거대 금융시스템들을 이용할 수 있는 자만이 공유경제의 홀더가 될 수 있다. 뭐든 어디론가 집중된다는 건 안 좋은 거다. 소수에게 이익과 권력이 집중되고 대부분의 사람은 거기에 종속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결국에는 공유경제라고 하는 시스템에 편승해서 누구는 돈을 벌고 누구는 돈 벌 수 있는 기회를 오히려 빼앗긴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양극화를 부채질할 수 있는 요소다.  

기술과 본능에 대한 얘기도 많다. 기술의 진보와 인간의 욕망은 고리로 연결돼 있다는 설명은 꽤 옳은 것 같다. 인간의 본능과 욕구는 주로 어떻게 관찰하나? 그냥 나를 들여다본다. 내가 가장 좋은 실험쥐다. 사람들 성향이 다르더라도 공통점이 95%다. 정말 다른 점은 5%도 안 될 것이다. 결국 내가 나를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솔직함을 강조하는 이유도 사실 거기 있다. 나를 더 잘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옷을 많이 벗어야 한다. 내가 나를 솔직히 들여다보면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도 더 높아지고 그러면 사회에 대한 이해도 더 넓어질 거라 믿는다.

그러려면 강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럴 거다. 내 껍데기를 다 벗겨놓고도 상처받지 않고 끝까지 이해하고 대화하려면 약해빠져선 안 될 것 같다. 강해져야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 집사람이 뭐 그렇게 돈을 벌려고 애쓰냐고 물은 적 있다. 자유로워지려고 번다고 답했다.(웃음) 

유현준의 신상은 웬만큼 다 털려 있다. 하지만 가족들은 아직 공개된 적이 없다. 그가 미국 유학 시절에 맞선으로 만나 교제하다가 결혼한 사이, 두 아들을 키운 전업주부라는 답만 돌아왔다. 첫째아들은 삼수 끝에 한의대에 입학했다. 멀쩡히 대학에 다니면서 부모 몰래 반수를 했다고 한다.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따로 손 벌리지 않고 제 힘으로 이뤄낸 성과라 놀랍고 기특했다. 건축가가 직접 설계한 아름다운 단독주택을 상상하기 쉽지만, 네 식구는 도심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내가 되게 싫어해요. 예전 싸이월드 시절부터 자기 사진 절대 못 올리게 했죠.(웃음)”

‘내 인생의 공간’ 이야기를 해보자. 가장 행복을 느꼈던 공간은? 어렸을 때 양옥집 2층에 살았다. 그 집 옥상이다. 평상에 모여서 가족이 함께 수박 먹던 기억, 형이랑 놀았던 기억이 행복했다.

우울하게 만든 공간은? 역시 어릴 때, 약간 슬프게 만들었던 공간이 있다. 할머니 방에 가면 왠지 슬펐다. 외로워 보였던 것 같다. 그리고 점점 약해지는 존재를 느끼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겐 아빠가 있고 내겐 형이 있어 두 명씩 페어(pair)인데 할머니는 조그만 방에 혼자 계셨다. 

경이로웠던 공간이라면? 건축을 공부했으니 경이로운 공간이야 원 없이 봤다. 굳이 하날 꼽으라면 마추픽추. 하늘 꼭대기에 그런 도시가 만들어졌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초현실적이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천공의 성, 라퓨타>라는 만화영화인데, 딱 그런 곳이었다.

불편하게 하는 공간도 있을까? 이런 얘기하면 좀 싫어할 텐데, 물론 그 방법밖에 없어서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길거리에서 집회하는 거 보면 불편하다. 학교 다닐 때 보면 막 뭐라고 뭐라고 해대며 겁박하는 친구들 무리가 있지 않나. 약간 그런 걸 보는 것 같다. 내가 그 사람 입장이 되지 못해서 화가 나는 건 아닐까 생각도 한다. 지난번 조국 사태 났을 때 한쪽은 광화문 집회, 한쪽은 서초동 집회 하는 걸 보고 언짢았다. 누가 더 많이 모였냐 갖고 싸우는 모양새였다. 더 많이 모였다고 과시하려고 카메라 앵글도 조작한 건 넌센스였다. 공간을 이용해서 권력을 만드는 전형적인 사례였다. 어느새부터인가 대한민국은 대화와 타협, 투표나 선거가 아니고 우리가 얼마나 센가를 보여주는 쪽으로 치닫고 있는 것 같다. 오프라인은 물론이고 온라인은 더 심각하다. 팔로워가 많고 댓글이 많은 게 기준이고, 그걸 무기로 상대를 압박해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한다. 합리적인 대화가 점점 안 통하는 사회가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건축가 유현준의 집이 궁금하다. 내가 제일 손댈 수 없는 게 우리 집이다. 전세 아파트라 인테리어를 할 수 없기도 하고 집안은 아내 몫이기 때문이다. 집을 산 지 얼마 안 됐다. 유학생활부터 계속 월세로 살았다. 그래서 자유롭게 내 집을 꾸밀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옷장과 베란다만 내 취향이 좀 섞여 있다. 내 취향이 제대로 반영된 나의 집은 건축사무소다.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면 살고 싶은 집은?  마당이 있는 집이면 좋겠고, 한강변에다 남향이면 좋겠다. 시골에 있는 남한강, 북한강 말고 서울 한강이다. 도시에 살고 싶다. 극장이 가까워야 해서. 혼자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웃음)  

돈이 많이 들겠다. 난 완전 도심 스타일이다. 도심에다 내 마음대로 집 짓고 살려면 너무 많이 들 거다. 길게는 10년, 짧게는 5년을 목표로 열심히 해볼 참이다. 5년 뒤를 지켜봐 달라.(웃음)

늘 바쁠 텐데, 나만의 휴식법이나 스트레스 해소법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거. 멍 때리는 게 제일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멍을…? 사무실 5층 꼭대기 내 방에 캠핑 의자가 있다. 거기 앉아 하늘도 보고 물도 본다. 옥상에다가 수반을 만들어놓았다. 가급적이면 뇌를 안 쓰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그게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필요한 것 같더라. 예전에는 막 엄청나게 바쁘게 살아도 별 문제가 없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누적이 되니까 퍼포먼스도 떨어지는 것 같다. 사람이 가장 창의적이 되려면 좀 빈둥거릴 때라고 하지 않나. 그래서 일부러 더 그래 보려고 한다.

‘뭔가 하는’ 휴식은 없나? 영화 보는 거 좋아한다. OTT 말고 극장에 가서 혼자 보는 걸 좋아한다. 천장이 높고 어두운 그 공간에 들어가야 몰입도가 높다. 극장 체질이다. 

공간과 건축 관련 영화나 책을 추천한다면? 공간과 건축이 나오는 정말 재미나게 볼 수 있는 영화는 단연 <건축학 개론> 아니겠나?(웃음) 책을 추천한다면 <총, 균, 쇠>가 가장 명저였던 것 같다.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 영화 <타이타닉>도 좋다. 공간적으로 되게 기획이 잘됐고 표현도 잘된 영화다. 

건축가는 도면에 선을 쓴다. 잘못 그은 선이 있을 땐 다시 그리나 계속 그리나? 그대로 두고 계속 그린다. 다 그리고 나면 큰 영향을 안 미치는 걸 알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말 중 하나가 대세에 지장이 없다면 Go!다. 완벽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 건축가들은 아마 대개 그럴 것 같다. 건물 하나가 완성되는 동안 수천 가지의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데 일일이 고치며 나아갈 순 없다. 어느 것 하나 완벽하게 내 마음에 드는 것도 없고 그래서 어느 정도는 그런 수용성을 가져야 한다. 어차피 한 방에 완성되는 일은 거의 없다.  

건축엔 구상과 설계, 시공, 감리, 준공이라는 주요 단계가 있다. 유현준의 인생을 건축 과정이라 본다면 어느 단계쯤일까? 이제 착공한 것 같다. 건축가 커리어의 시작은 보통 50세부터라고 얘기한다. 내 이름으로 된 첫 번째 작품 ‘플로팅하우스’가 사십 넘어서 나왔다. 젊은 건축가상을 받았다. 그래도 시행착오는 연속이다. 오십 넘어서야 비로소 나를 알고 찾아오는 건축주가 생겼다. 겨우 2, 3년 전쯤이다. 지난 30년은 필요한 경험이 누적된 시간이고 이제야 나와 파트너가 원하는 건축을 제대로 착공하게 된 것 같다. 

‘엘리시움’ 같은 우주의 공중도시 얘길 한 적 있다. 진짜 가능한 공간의 미래일까?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가 구상하고 있다니 절대 불가능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우주에 하나의 도시가 만들어질 정도면 얼마나 많은 물자를 공중에 띄워야 되는 걸까? 아마 지금까지 쏘아 올린 모든 우주선보다 더 많아야 할 거다. 그러니 에너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진 불가능하다. 우주 엘리베이터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도 양극화의 미래 아닌가? 초양극화인데, 사실 그 정도면 지구 멸망 수준 아니겠나. 그 시점이 되면 지구는 거의 망했다고 봐야 하니, 그런 게 현실화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웃음)

어디엔가 쓴 얘기 중 ‘미래는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한데 건축가 유현준이 창조하는 미래의 한 장면은 뭔가? 거창한 건 없다. 그냥 내가 하는 일 하나하나가 다 미래를 창조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설계하고 디자인해서 시공하는 것들이 다 미래를 만드는 일이다. 어마어마한 유토피아를 상상하지 않는다.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900개나 남겼지만, 보통 건축가라면 건물 100개 정도 남기면 많다고 본다. 나는 좋은 건물 10개 정도쯤 남기고 싶은 욕심은 있다. 흔히 말하는 마스터피스랄까.(웃음)

건축주를 위한 건축을 병행해야 하니 건축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품을 내기는 꽤 힘들 텐데…. 정말 훌륭한 건축가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사람이다. 건축주도 만족시키고 자기를 표현할 수도 있는 그런 철학과 요령이 필요하다. 내가 좀 유리한 지점은, 글을 쓰고 방송 하고 인터뷰도 하는 사람이란 점이다. 많이 노출되니 내 생각을 공감해주시는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이미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을 만한 분들이 찾아온다.

책들이 많이 팔렸다. 애독자들과는 어떻게 소통하나? 직접 만나거나 한 일은 없다. 그냥 교보문고에 들어가서 댓글 보는 정도다. 블로그를 통해 반응을 볼 때도 있다. 키워드를 치고 검색해보면 서평을 올린 독자들이 많다. 

원래 글 쓰는 재주도 없었고 쓰길 좋아한 것도 아니었다고 했다. 지금도 글쓰기가 피곤한가? 지금은 되게 즐기면서 한다. 내 생각을 무슨 법규나 공사비나 이런 제약들 없이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으니까 되게 스트레스 풀리는 일이다. 건축 일을 하면서 힘들었던 점을 풀어내고 자기 표현할 수 있는 매체가 생겼으니 너무 감사한 일이다. 원래 10, 20대 때는 생각이 없지 않은가.(웃음)

요즘 머릿속에 가장 많은 생각은 뭔가? 당연히 지금 설계 중인 건축물. 어찌하다 보니 글을 쓰게 된 거고 하다 보니까 tv에 나가게 된 거지, 사실은 내가 가장 성공하고 싶은 분야는 건축설계 아니겠나. 언어의 장벽 없이 누가 보더라도 진짜 훌륭하다는 얘기를 듣는 작품을 만들자는 게 생각의 중심이다.

그럼에도 다양한 활동을 한다. 두 마리도 아니고 대여섯 마리 토끼를 잡다 보면 부실해지지 않을까? 번아웃도 염려된다. 그런 말 듣긴 하는데 실상은 그 반대다. 내가 기본으로 하는 일이 설계하는 거, 글 쓰는 거, 가르치는 거, 방송에 나가는 거, 이렇게 네 가지 정도다. 그런데 네 가지가 다 서로 도움을 준다. 각각 따로 노는 일이 아니고 서로 시너지 효과를 준다. 결국은 한 가지 일이나 마찬가지다. 번아웃이 오면 방송을 좋아하니까 거기 가서 풀면 된다. 정말 지쳤을 때는 잔다. 나처럼 누워 있기 좋아하는 사람도 드물 거다. 아, 말해놓고 보니 정말 누워 있는 시간이 많다.(웃음) 

누울 때마다 잔다고? 설계는 언제 하나? 깨어 있는 시간 중에 2~3시간은 누워 있다는 얘기다.(웃음) 누워서 설계 구상도 하지만, 대개는 아침에 이동하는 중에 생각을 많이 한다. 아침에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도 설계 아이디어를 정리한다.

운동은 전혀 안 하나? 최소한으로 한다. 제자리 자전거 타는 거랑 일주일에 한 번 필라테스 하는 게 다다.

그를 만나기로 해놓고 빠트렸던 몇몇 저서와 강연, 기사들을 찾아보았다. 그간 해온 이야기가 대개 그렇지만, 근래의 유현준 키워드는 ‘양극화를 막는 공간혁명’ 그리고 그를 통해 만들어질 ‘지속 가능한 사회’로 더 집약된다. 공산주의 사회가 아닌 한, ‘공간’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양면의 괴물이다. 자유와 소통, 나눔을 상징하지만 불평등과 경계, 소외를 뜻하기도 한다. 그가 염려하는 양극화는 거기에서 비롯된다. ‘엘리시움’ 같은 극단적 상상은 일견 누군가는 바라는 꿈일 것 같지만 아마도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 뻔하다. 

지나고 보니 꽤 무거운 이야기도 많았는데 편하게, 유쾌하게 나눈 듯했다. 마치 ‘알쓸신잡’ 촬영 같은 인터뷰가 되었는데, 물론 ‘셜록현준’의 잘 정리된 생각과 매끄러운 달변 덕이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던 중 입에서 불쑥 뭔가가 튀어나왔다. 중얼거리고 보니 얼마 전 본 영화 제목.

‘집도 잘 짓고,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하고… 유현준은 복도 많지.’ 

찬실이도 당황할 이 난데 없는 라임은 대체 무슨 일인가. ‘셜록’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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