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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3월이면 만 103세 철학자, 김형석의 인생 이야기

  • 기자명 이상문 기자
  • 입력 2023.01.01 08:00
  • 수정 2023.01.07 12:40
  • 댓글 0
  • 사진(제공) : 안규림
김 교수는 국내 1세대 철학자이자 샘이 마르지 않는 수필가다. 명년이면 꽉 찬 103세 노인이 되지만 그는 여전히 꼿꼿하다. 끊이지 않는 말과 글의 시간은 올해도 어김없이 세 권의 책과 수십 건의 강연을 세상에 내놓았다. 2022년 세밑에 노 철학자의 인생 이야기를 다시 새겨들었다.

철학자 김형석에 대한 소개는 살아온 긴 시간이나 넓은 궤적만큼 두터워 다 열거하기 힘들다. 평안남도 시골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10대 때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들었고, 윤동주 시인과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일본 조치(上智)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30여 년간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 철학의 기초를 다졌다. 그간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무엇보다 지칠 줄 모르는 강의와 강연으로 학교는 물론 대중과도 가까운 거리를 유지해왔다. 일제 치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만으로도 웬만한 이의 인생 이야기와는 중량감이 다르다. 그 모든 것이 특별한 이유는 100년을 훌쩍 넘기고도 그가 아직 왕성하다는 점이다. 

한 조찬 강연에서 그는 요즘 사람들은 30, 60, 90세까지 인생을 세 단계로 살게 되었다고 말했다. 만 100세 때 청와대에서 지팡이를 보내준 일화를 소개하며, 인생에서 제일 좋고 행복한 나이는 60세부터 75세까지였다고도 했다. 그 기간엔 성장했을 뿐 늙지도 않았다고 설파했다.  

1920년생인 인물을 2022년에 인터뷰해 지면에 담는 일은 특별하고 신기하다. 100년의 시간 여행에 동승한 느낌이 평범할 리 없지 않은가. 배후에 102년의 삶을 걸머진 이와의 대화는 언어부터 다르지 않을까. 내 인생의 시간은 고작 그의 반토막인데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마땅한가. 4년 전 98세였던 그를 만났을 때의 경이감과는 또 다른 묘한 현기증이 스쳐 지난다. 

이태 전엔 <백세일기>(김영사), 2022년 초 <김형석의 인생문답>(미류책방), 지난 11월엔 <100세 철학자의 행복론>(열림원)을 연이어 내놓은 그를 겨울 북한산 자락에서 만났다. 

여전히 왕성하다. 4년 전과 똑같은 건가? 95세쯤 넘고 나서는 생각하는 거나 글 쓰는 거엔 이상이 없는데, 정신과 신체의 밸런스가 좀 어긋나기 시작한 것 같다. 젊을 땐 신체가 앞서가고 정신력이 따라오더니 중년엔 같이 오고, 이제는 정신이 신체를 끌고 가는 형국이다. 예를 들어 말하면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는데 일어나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몸은 더 자려고 하는 것 같은 거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에 비하면 요즘은 정신이 신체를 업고 다니는 것 같다. 더 지나면 정신력이 감당을 못하는 시기가 올 것이다. 

그런데도 매달 강연 스케줄이 빼곡하다. 매끄럽게 감당이 되는가? 그런대로 잘하고 있다. 다만, 과거와 달리 고유명사 같은 게 생각 안 날 때가 빈번해서 집에서 메모를 해가지고 간다. 원고는 따로 없다. 심리학자들 얘기로는, 처음엔 고유명사, 그다음엔 명사, 형용사, 부사 순으로 잊는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안 잊는 건 동사겠지. 죽을 때도 아프다, 죽겠다 하면서 죽으니까(웃음). 

집필도 매일 하시는가? 시간을 많이 쪼개서 쓰긴 하지만 어쨌든 매일 쓴다. 40분쯤 쓰고 쉬고 또 쓴다. 

여태까지 수필 써내신 거나 저서들이 굉장히 많다. 근래 특히 더 말하고 싶은 주제, 집중하는 주제가 있나? 전엔 그런 게 있었는데, 구십 넘으면서는 내가 쓰고 싶은 것보다 사회가 요청하는 걸 더 많이 쓰게 됐다. 보통 사람들은 나이 들면서 생각의 폭이 줄어들게 되는데 내 경우엔 지평이 더 넓어져온 것 같다. 전엔 나와 가족, 학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사회에 대한 걱정이 많아졌다.

사회적 이슈, 정치 이슈에 대한 발언은 부담스럽지 않나? 고양된 철학적 발언만 하셔도 될 텐데….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어릴 적 환경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자라다 보니 민족의식이 깊이 배어 있다. 학교에선 선생님들이 나라 걱정을 하시고 교회에서도 인류와 사회에 대한 책임과 사명을 가르쳤으니 자연히 스며들지 않았겠나. 내가 나라 걱정하고 정치를 염려한다고 해서 뭐 큰 영향이 있는 건 아닐 텐데도 걱정하게 된다. 

원로 철학자 김형석은 강연은 물론 신문 등에 줄곧 칼럼을 기고해왔다. 철학적 사상을 풀어낸 칼럼도 있지만 정치에 관한 쓴소리도 있는데, 근래엔 그 수가 부쩍 늘어난 듯하다. 인터뷰를 통해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에 대한 평가와 소감을 주저 없이 피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굳이 요청을 해오니 펜을 들고 입을 여는 것이지만 마지못해 하는 건 아니다. 어느 때부턴가 할 말은 다 하고 싶어졌다. 

“왜 그런 변화가 오나 곰곰 생각하다 보니 열네 살 때 아버지가 하신 얘기가 기억났어요. ‘너 이제부터 긴 세월을 살아나갈 텐데, 너만 생각하고 가정 걱정만 하면 너가 딱 그만큼 자라고, 사회에서 뜻 있는 일을 하면 또 그만큼 되고, 민족과 국가를 항상 걱정하게 되면 너 자신도 모르게 그만큼 크게 성장하게 된다’고 하셨어요. 그 얘길 다 잊어버렸다가 연세대학교에서 교수생활 할 때 다시 상기했어요. 항상 학교로부터 무엇을 얻어낼까에 관심이 많은 교수는 정년퇴직하면 버림받아요. 하지만 대학과 학문과 학생들을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노력한 교수는 퇴직하더라도 학교와 일을 계속 하게 되더라고요. 생각의 크기가 그다음을 결정한다는 걸 말씀하신 거죠. 난 이제 자식들도 나이 들었고 혼자 말년을 보내고 있잖아요. 그러니 더더욱 나 자신이나 가족에 매일 일이 없고, 그러니 민족과 나라 걱정하는 일에 관심이 쓰이는 거겠죠.”

언제나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은 건강 이야기일 것 같다. 백 년이 넘도록 건강하니까 그 모든 관심도 행동도 가능한 것 아니겠나. 원래 건강 체질이라고 얘기들 하지만 사실 중학생 나이 때 내 건강은 절망적이었다. 항상 기도드리는 마음으로 살았다. 살고 싶으니까 살아야겠으니까 나한테 건강을 주시면, 그래서 내가 어른 될 때까지 살게 해주시면, 내가 나를 위해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기도했다. 그때 신앙이란 걸 제대로 알았다. 그때 그 하나님과 함께한 인생이 지금까지 연장되고 있고 이제 몇 달만 지나면 만 103세가 된다.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동안까지는 그 약속대로 살려고 한다.

탐구와 몰입 그리고 집필과 강연에 평생을 바쳤다. 김형석에게 ‘놀이’는 없나? 탐닉하는 취미 한 가지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예술에 관심이 많다. 음악과 미술 그리고 소설도 많이 좋아했다. 다만, 그쪽으로 마음이 가다가는 되돌아오고 가다가는 또 되돌아오는 게 문제였다. 이미 주어진 일이 많아 다른 데 투자할 시간이 없었다. 나름대로 즐기긴 했지만 늘 아쉬웠다.

특히 구미를 당기는 예술은 어떤 분야였나? 나는 일제치하에 중등과 대학교를 다니고 서양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동양적인 것, 한국적인 것에 약했고 결핍이 있었다. 그래서 관심 두게 된 게 그림이었다. 일본서 대학 다닐 때 동경의 한 미술관 지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위층에 올라가면 늘 일본 국전이 열리고 있었다. 서양회화전도 있었다. 그때 그림을 실컷 봤는데 뭔가 양에 안 차는 듯했다. 돌아와 중학교 교사 하던 시절에 전시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박수근 등 한국적인 작품들에 눈뜨게 됐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이후 예술적 경험을 통해 느낀 건, 가장 인간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것이었다. 보편적인 인간관이 있어야 세계적인 것 아니겠나 싶었다. 한국 작품의 우수성은 거기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도자기를 알게 됐고 아주 빠르게 그 세계에 빨려들어 30년 가까이 우리 도자기를 찾아다니고 수집했다. 

그 길로 30년 넘게 이어진 컬렉션이 600여 점. 고가의 작품도 있긴 했지만 대개는 서민적인 백자가 주류였다고 한다. 6남매를 건사해야 하는 데다 지병으로 오래 누워 있던 아내 때문에 살림은 꽤 오래 쪼들렸다. 이때 모아둔 도자기 일부가 생계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는 후문. 예전에 재직하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도 보내주고 지인에게 선물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던 수백 점은 지금 강원도 양구에 마련된 기념관(양구인문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소장돼 있다. 양구인문학박물관은 한국 철학의 거장 김형석·안병욱과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양구 출신 이해인 수녀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고 지역문화예술의 인프라를 구축하자는 취지로 2012년 건립된 곳이다.

 회화에서 도자기로 관심이 옮겨간 경로가 궁금하다. 오래 남아 있는 유명한 그림들은 대개 왕실에 고용됐던 궁정 화가들의 것이 많다. 그것들보다 더 한국적인 그림들을 찾다보니 인문화 또는 문인화로 시선이 갔고 그러다가 더 서민적인 풍속화로 이어져 민화를 만나게 됐고, 거기서 더 한국적인 걸 찾다보니 도자기가 됐다. 도자기는 우리 땅 속에서 나왔다는 점이 더 끌리게 만든 것 같다. 

그림에 대한 지식과 안목이 꽤 높다고 들었다. 해외여행 다닐 때마다 일행이 동행하지 않아도 혼자서라도 미술관을 빼놓지 않고 다녔다. 샤갈을 특히 좋아했다. 아직도 머릿속에 스페인 가서 봤던 그림, 런던, 스코틀랜드, 파리, 이탈리아에서 본 그림들이 떠오른다.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을 보면 누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린 작품인지 대충 아는 정도다. 이중섭의 ‘소’ 그림을 보다가 작가가 언제, 어디서, 어떤 생각으로 그린 건지 얘기했더니 다들 놀라더라(웃음).   

음악도 못지않게 좋아하신다 들었다. 일본 유학 시절 집에 돌아오는 길에 눈이 와 잠깐 쉴 곳을 찾다가 다방에 들어갔다. 르네상스 다방이라는 간판이었는데, 들어가 보니 어두컴컴한 곳에서 클래식 음악이 잔잔히 흘렀다. 그 맛을 알고부터 클래식에 푹 빠지게 됐다. 안병욱 선생 등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럴 때마다 일행이 다른 델 가도 혼자서 꼭 오페라 한 편씩 보고 왔다. 

탐미주의자 같다. 직접 창의적인 예술 활동을 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 철학하는 사람은 합리주의자이기 쉽지만 본질적으로 탐미주의자에 가까울 수도 있다. 나도 그 경우지만, 사람이 뭐 다 가지고 누릴 수야 있겠나. 그래도 나름대로 간접 경험하면서 풍부하게 잘 자랐고 살았다. 

다작인데 수필 위주다. 소설이나 시 문학에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나? 살다 보면 가장 소중한 것은 나라는 인간인데, 그 안에 수필이 들어오든 문학이 들어오든 철학이나 예술이 스며들든, 삶의 체험 안에서 허락되는 것만 받아들이는 것 아니겠나. 받아들일 수 있는 것까지만 받아들여야지 너무 욕심을 내서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안 되는 것 같다. 내가 철학을 했지만 철학이라는 학문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철학을 가지고 내 삶을 어떤 내용으로 채우느냐가 중요하다. 예술이나 문학도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니까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이런 생각은 아마도 내 인생이 종교적 삶이어서 그럴 것이다.  

많은 책을 썼다. 그래도 아직 써보지 못한 글이 있다면? 60, 70대까지는 그런 게 있긴 했는데 지금은 특별히 그런 건 없다. 이후엔 사회가 요구하는 글을 쓴다. 어떻게 보면 학자로서 순수성이 없어지는 느낌도 들긴 하는데, 그렇다고 사회에 무관심하고 자기 글만 쓴다는 것도 한계가 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아무래도 빌려다 쓴 학문이다 보니 ‘그다음’이라고 할 만한 남는 게 없다. 아직 못 쓴 글은 없는 것 같고 써야 할 글은 더 있을지 모른다.

젊었을 때 처음 접한 철학적 고민은 어떤 것이었나? 다른 친구들은 모두 칸트다, 헤겔이다, 플라톤이다 하면서 철학자 한 명씩을 고르고 들어가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나는 철학적 사유는 역사에서 위치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칸트라는 인물만 놓고 연구하면 그 우물 속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할 것 같아 늘 경계하고 역사를 먼저 들여다보았다. 옛날에 이름을 대면 알 만한 헤겔 연구 교수가 강의를 마친 뒤 나한테 귓속말로 농담을 한 적이 있다. “나도 모르는 거 강의하려니까 그럴듯하기는 한데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100% 농담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철학엔 논리적 사유가 중요하지만 그 전에 역사적 사유가 포함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역사적 맥락에서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는? 칸트와 헤겔은 빼놓을 수 없고 키에르케고르도 손에 꼽는 철학자다. 

요즘 젊은이들의 문해력과 논리력 문제가 대두됐다. 원래 어렵게 여겼던 철학이나 인문학이 더 멀게 느껴질 가능성이 있다. 해법은 뭘까? 당연한 말이지만 독서가 필요하다. 자신을 스스로 키울 줄 아는 사람은 모두 다 독서를 한 사람들이다. 지금 우리 인류가 이만큼의 문화 수준에서 살도록 이끌어준 나라는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그리고 일본인데, 이 다섯 나라가 어떤 나라였냐면 국민 대다수가 100년 이상 독서를 해온 나라다. 스페인에 가보면 세르반테스 동상 정도나 눈에 띄지만 영국이나 독일에 가보면 문학사나 사상사에 길이 남을 인물의 동상이 수없이 많다. 그 배경이 독서다. 독서는 한 나라의 인문학의 증거다. 인문학은 대학이 발전시키는 게 아니다. 책 읽는 가정, 독서하는  사회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책을 안 읽으니 걱정이다. 때려가며 읽힐 순 없지 않은가. 부모가 책을 읽고, 지도자들이 독서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이 본보기를 보이면 된다. 책을 읽힐 방법도 자꾸 연구해야 한다. 미국 고등학교에선 선생님이 한 학기 동안 학생과 함께 읽을 도서를 지정하고 대학에서도 강의 시작 전 필독 도서를 내거는 식으로 한다. 안병욱 선생이나 김태길 선생이 독자 팬들이 많았던 이유는 그들이 책을 쓰기 전 책을 엄청 많이 읽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두 분은 젊었을 때 문학을 했었다. 

자유와 평등, 법치와 인권, 다수와 소수의 권리 등 가치가 충돌돼 벌어지는 일들이 많다. 결국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또 나온다. 예컨대 문재인 정부 같은 좌파정부는 정치권력을 가지고 평등 사회를 만드는 게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질서와 인권이 무시되기 때문에 자칫 북한 같은 사회가 될 수 있다. 또는 중국이나 러시아같이 될 수도 있으니 그건 역사의 후퇴가 된다. 정의란 더 많은 사람이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게 의무이자 책임인 어떤 것이다. 자유와 평등은 어느 한쪽만 두드러지면 충돌을 일으킨다. 그래서 균형이 중요한데 그러려면 휴머니즘이 필요하다. 휴머니즘의 나무에만 평등과 자유가 함께 열매를 맺는다. 핵전쟁이 나면 인류가 멸망할 테니까 그러면 안 된다는 건 모두 다 안다. 그런데 결국 인간애만이 인류와 역사를 구출한다는 건 모두 다 믿지 않는다. 이상한 일 아닌가. 

나부터 살고 보자는 이기심 때문 아닌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보다 어쨌든 살고 봐야 된다는 이기심. 윤리의식의 빈곤이다. 공자님이나 석가님이나 예수님 모두가 얘기한 인간애, 휴머니즘을 잊고 사는 것 같다. 매 순간 현실이 작동하고 그 현실에만 끌려 다니니까.

환생복수극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드라마가 인기다. 인생 2회차를 산다면 언제쯤에 다시 태어나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그런 건 없고, 죽고 나서 한 70년, 100년쯤 후에 다시 와 그동안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잘 살게 됐나, 얼마나 행복하게 사는가 슬쩍 보고만 가고 싶다. 다시 사는 건 아니고 살짝 보고 가는 거. 

곧 갈 거라도 훔쳐보지만 말고 한 말씀 하고 가야 되지 않겠나. 아니다. 그냥 잘 사는지 확인만 하고 갈 거다(웃음).

다시 태어난다면 더 잘생긴 외모를 원하나? 별 싱거운 질문을…(웃음). 그 얘기 들으니 김태길 선생이 했던 얘기가 생각난다. TV 출연하고 온 날 내가 TV에 나갈 땐 얼마를 받느냐고 묻길래 36만 원이라고 했더니 왜 그렇게 적으냐고 하더라. 뭔 소린가 했더니 자기는 그 두 배라고 방송국이 잘생긴 사람한테는 비밀리에 플러스알파 출연료를 주는 것 같다는 거다. 자기만 미남수당 받아 미안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외모 가지고 그런 장난을 치고 놀긴 했다(웃음).

그걸 인정하셨나? 김형석, 안병욱, 김태길 삼총사의 외모 순위를 솔직하게 매긴다면? 사실, 김태길 교수가 나보다는 아래지. 그런데도 방송국 미남수당은 비밀이라 배우 신성일 말고는 누가 포함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허풍을 떨었다(웃음). 꼭 말하라면, 안병욱 교수가 나보다는 좀 더 잘생겼고, 내가 아까운 2등이다. 다시 태어난다면? 다른 건 모르겠고 좀 개성 있게 태어났으면 좋겠다. 중학생 때도 인기가 별로 없었다. 개성이 없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북이 고향인 실향민이다. 나이 들수록 향수에 시달리진 않나? 마음을 심하게 괴롭히는 일은 없지만 어쩔 수 없는 향수병이 있다. 마음뿐 아니라 몸의 생리적 변화도 느꼈다. 예전엔 김치 같은 건 안 먹었는데 지금은 없으면 밥을 못 먹는다. 어릴 때 북에서 먹었던 김치 맛이 당긴다. 한창 활동하던 때는 안 나오던 평안도 사투리가 늙으면서 저절로 튀어나오는 것도 향수병 아닐까? 땅에서 뛰는 동물이나 새들이 때가 되면 제 집으로 돌아가는 귀소본능, 그런 게 생기는 것 같다. 하지만 고향을 다시 찾는 건 단념한 지 오래다. 고향은 과거에 있는 게 아니고 미래에 있다고 믿었다. 만들어가는 것이 고향이다. 나와 안병욱 선생을 위해 기념관을 지어준 양구도 내겐 고향 같은 곳이다. 

하루 중 하늘을 몇 번이나 올려다보나? 반가운 질문이다. 자주, 많이 본다. 어딜 가더라도 하늘이 잘 보이는 창가에 앉는다. 아마 어릴 때 하늘로 덮인 작은 시골에 살아서 그런 것 같다. 지금 집에 이사 온 것도 2층 내 방의 전경 때문이었다. 하늘이 시원하게 보여 가슴이 트인다. 

하늘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나? 그냥 구름 보는 거 좋아하니까 구름을 살피고, 심호흡하고… 요즘 말로 그냥 멍때린다(웃음).

혼자 지낸 시간이 길다. 외로움을 어떻게 해결하나? 여자친구 있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던데…. 97세 때인가, KBS에 갔더니 아나운서가 농담으로 여자친구 생각나지 않느냐고 하길래 “지금은 너무 바빠서 안 되고 2년 후에 내가 신문에 광고를 내겠다”고 받아친 적이 있다. 2, 3년을 기다려도 신문광고가 안 나온다고 지금도 놀린다(웃음). 살면서 가만히 보면, 남녀 간의 연정이란 것은 가정을 가지고 살게 되면 애정이 되고 칠십 넘고 팔십 넘으면 인간애로 변화되는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은 20년 넘게 아내가 병상에 있었는데(23년을 누워 있던 부인은 김 교수가 84세 되던 해에 86세의 나이에 별세했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냐 하면, 연정이나 애정도 없진 않았겠지만 인간으로서 인간을 돕는 애정으로서 곁에 있었던 것 같다. 인간애였을 것이다. 아내 잃고 혼자 된 지 20년 가까이 된 셈이다. 고적해서 어떻게 사냐고 자꾸들 묻는데, 솔직히 힘들다. 그 첫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고, 이후로도 많이 힘들었다. 집이 없어졌다는 느낌이었다. 안사람이 있어야 집인 건데 없으니 내겐 집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안병욱, 김태길 두 친구가 있어서 참 좋았고 오래도록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재혼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나? 그러게. 그때부터 신문광고를 낼 걸 그랬나? 아내가 떠날 때 여든넷이었다. 구십을 6년 앞두고 재혼을 생각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였다. 그땐 이렇게 오래 살 줄 몰랐다(웃음).  

틈새에 인터뷰에 동석한 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김 교수의 강연 일정을 조율하고 원고 입력을 돕는 이종옥 씨. 사단법인 아가페 복지 이사장으로 그 역시 80대 가까운 노년이다. 강연 요청인 듯한데 초청인은 경북 경산시 모 단체. 만 103세를 맞는 노 철학자가 노구를 이끌고 가기엔 너무 멀다 싶었지만, 두 사람은 다반사처럼 받아들인다. 내년 6월쯤으로 스케줄을 잡는 걸 보니, 앞서 보여준 일정 빼곡한 캘린더가 공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너무 강행군 아닌가? 부산도 가고 제주도도 가니 특별한 스케줄도 아니다. 비행기도 타고 KTX도 탄다. 여행 가는 기분으로 다니면 아직 다닐 만하다. 어떤 강연이 제일 좋으냐는 질문을 간혹 받는다. 다 좋지만 신청자가 많이 몰려 열기가 느껴지는 곳이면 더 좋다. 예쁜 교회에 갈 때도 좋다. 기대를 많이 하고 잘 들어주는 분들 앞에선 70~80분을 내내 강연해도 견딜 만하다. 

현장에선 어떤 질문이 가장 많은가? 건강관리 등 내 생활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도 많고, 자기네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상담하는 경우도 많다. 어떤 이들은 내가 질문을 하도 많이 받으니까 상담사 자격증을 줘야 한다고들 한다. 30대 초반부터 강연을 했으니 그럴 만도 한 것 같다. 

저서가 60권 이상 되는 것 같다. 지금까지 강연은 몇 번이나 했을까? 너무 많아 총 횟수는 셀 수가 없다. 1년 평균 70~80번 하는 것 같다.

평생 읽은 책을 세어보라면? 아주 일찍부터 독서를 했으니까 그건 더 헤아릴 수가 없다. 중학교 때 뭣도 모르고 읽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처음에 소설인지도 모르고 읽었다. 그냥 전쟁이 있던 시대니까 전쟁과 평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무작정 읽은 책이었다. 시골에 살았으니까 교과서 외엔 책이 다양하게 많지 않았다. 해방되기 전까지는 일본말을 더 많이 썼기 때문에 어릴 때 읽은 책의 흔적은 일본어나 영어로 남은 게 더 많다. 내가 글을 쓰는 데 힘들었던 것도 바로 그 점이다. 국어로 글 쓴 경험이 아주 두텁지 못해 문장력이 뒤진 편이다. 겉으로 티는 안 냈지만 내심 열등감도 있었고 걱정도 많았다.

절친이던 두 분이 먼저 떠나셨다. 말벗이 없겠다. 강연하러 가서 말하는 것 말고는 말할 상대가 전혀 없다. 제일 힘든 게 그거다. 원하면 후배 교수들도 만날 수 있지만 매번 상대가 될 순 없으니 외롭다. 늙어갈수록 점점 인간관계가 끊어지는 게 문제라더니 정말 그렇다. 고독하다. 일을 핑계 삼아 견딘다. 

몇 가지 우려를 갖고 시작한 인터뷰는 4년 전과 다름없이 무난했다. 한쪽 귀가 어두워져 이제 막 보청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익숙지 않아 웬만해선 착용을 꺼린다고 한다. 무엇보다 썩 편하지 않은 좌석에서 두 시간 가까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체력이 놀라웠다. 바로 이어진 사진 촬영 때도 포즈를 잡는 모습이 매끄러웠다. 노 철학자의 인생문답, 행복담론은 2023년 새해에도, 그다음, 또 그다음 해에도 계속 이어질 기세다. 그런데 우린, 그가 있는 동안 과연 인생의 참의미를 깨닫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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