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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사랑하고 노력하고 버티고 생각하는, 형사 박미옥

  • 기자명 이상문 기자
  • 입력 2023.06.04 08:00
  • 댓글 0
  • 사진(제공) : 안규림
30년 형사 인생을 마치고 제주의 삶을 택한 건, 필연에 가까웠다. 사건 현장에서 만난 수많은 이들에게 전할 위로의 말들은 멈추어야 비로소 가능했는지 모른다. ‘잡는’ 형사로 이름값 했지만 이해하고 사랑하는 ‘착한’ 형사가 되고 싶었던 베테랑 여경의 이야기.

투박하고 촌스럽기로 이만하기도 힘들다. 새로 들어온 책 <형사 박미옥>(이야기장수) 표지 얘기다. 달랑 얹어놓은 ‘형사 박미옥’이라는 제목은 썰렁하다. 만화책에서나 볼 만한 서체는 싱거운 웃음을 자아낸다. 벽보 게시판에 대충 붙여놓은 듯 처리한 빛바랜 사진도 시선을 끈다. 앞표지도 뒤표지도 죄다 권총 든 여인이 주인공. 제 할 일에 바빠 독자와 눈 맞추지도 않는다. 어딜 보나 엉뚱하고 불친절하다.  

그럼에도 책 속을 들여다보게 되는 이유는? 그가 박미옥이기 때문이다. 박미옥은 한국 경찰 역사상 최초의 강력계 여형사다. 만삭 의사 부인 살해 사건, 한강변 여중생 살인, 신창원 탈옥 사건, 유영철 연쇄 살인 등 세간의 주목을 받은 강력사건 해결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약수사 형사와 프로파일러, 협상 팀으로도 활동했다. ‘잡는’ 형사뿐 아니라 ‘대화’하고 ‘연구’하는 형사로도 유명했다. 덕분에 방송과 강연에 초청된 일도 많았다. 말 그대로 베테랑 형사다. 

경찰 생활 33년 3개월. 그중에서 형사로만 30년을 일한 그는 지금 민간인이 되어 제주에 산다. 순환보직 제도로 제주에 근무하다가 정년을 7년 앞둔 2021년 명예퇴직을 결행했다. 내로라하는 ‘올레꾼’이어서 이전부터 제주도 출입이 잦았다. 마을 주민이 권하는 땅을 덜컥 사두었고, 퇴직 후 ‘살 집’을 짓기 시작했고, 이젠 안채와 마당과 공용 서재 겸 책방까지 갖춘 어엿한 집주인이 되었다. 함께 집을 지어 마주 보고 사는 후배가 있어 외롭지 않지만, 그는 대문을 활짝 열어 더 많은 이들을 만나려 한다. 사건 현장이 아닌 일상에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공감하기 위해서다. 쉼터이자 사랑방, 상담소가 될 수도 있는 그 공간. 172㎝의 큰 키에다 작지 않은 몸피인 그가 활짝 팔 벌리면 품이 꽤 넉넉하지 않겠나. 넓고 깊을 것이다. 아마도 그보다 당신이 더 위로받을 공산이 크다. 

당신이 가기 전 그를 먼저 만났다. 30년 베테랑 형사를 맞으려니 기대와 설렘도 있지만 걱정스럽기도 했다. 평생 질문하던 자를 대답하게 만드는 일이어서다. 하지만 웬걸. 폭포수 같은 대답이 쏟아진다. 흔치 않은 흡족한 대화였다니 다행이다.    

경찰 생활을 했으니 글감이 많았겠다. 형사 생활 30년 동안 제일 잘못한 게 가족이더라. 전화하면 바쁘다고 끊어버리기 일쑤고 무턱대고 이해해주길 바랐다. 그래서 카카오스토리를 했었다. 가족들 보라고 일기식으로 썼다. 인스타그램 같은 SNS로 옮겨오고 나서 책을 써보라는 주변 권유가 있었다. 하지만 보직 옮길 때마다 USB 하나 안 남기고 자료를 없애는 게 철칙이라 사건 기록이 남은 게 없었다. 사건과 연관된 타인 이야기를 쓰는 것 자체도 적합지 않다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책을 냈나? 출판사 편집자를 만나면서 생각이 다듬어졌다. 썼던 것들을 다시 보니 내 사유 중심의 나만의 기록이었다. 중의적이고 애매했다.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친절한 글이 필요했다. 그런 노력을 통해 내가 어떻게 변해왔고 변해가는지를 느끼게 됐다. 의식의 흐름을 발견한 셈이다.

은퇴 후 삶이 흥미롭다. 화가의 매니저 노릇도 한다 들었다. 얼떨결에 어시스트하다가 그렇게 됐다. 계약한 지 3년째다. 처음에는 작품 운송 정도 맡았는데 지금은 액자 리폼까지 한다. 그림과 어울리는 무게감을 생각해내고 색깔과 디자인을 고른다. 그림도 배우냐고들 묻는데 작가가 반대한다.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그리는 게 더 좋다고 한다. 툭툭 한마디씩 던지며 멈춰야 할 때, 뭔가 부족한 때를 알려준다. 해외 전시를 포함해 열 번 이상 전시를 도왔다.

책에도 본인 그림을 실었던데…. 그림은 놀이터이자 쉼터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그림부터 그려볼까 하고 스타트하면 어느새 점심때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출판사랑 계약을 하고선 쉼터에서 노는 게 부담이다. 사실 나무 조각을 5년 정도 배웠다. 밑그림으로 드로잉도 많이 했지만 붓을 잡는 느낌은 또 색다르다. 글을 쓰다가 머리 복잡해질 때 붓을 잡으면 이만한 휴식이 없다. 사건 현장에서와는 다른 감정의 언어들이 등장한다. 수사 결과 보고서를 쓰던 언어와는 퍽 다르다. 타자를 향한 언어에만 익숙했다가 내 솔직한 감정을 풀어헤치게 된다.

본디 감성적인 인간형인 것 같다. 치열한 형사 생활을 하며 어떻게 참았을까. 어떤 분들은 지금 내 모습을 보고 은퇴 후에 급변했다고들 한다. 아니다. 경찰로 살면서도 늘 그런 감성이었다. 사건 속에서도 표현하고 사람에게도 표현했다. 경찰서도 A급, B급으로 나뉘는 급지가 있다. 사회적 흐름이 6, 7년씩 빠르다는 일급지 강남경찰서에서도 무난히 견뎌냈다. 오히려 내겐 나만의 유니크한 감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 험한 현장을 감당해냈는지 모른다. 덕분에 특유의 수사 기법과 접근 방식을 여러 번 만들어냈다. 나만의 감성과 시선으로 10여 년 잘 견디어냈고 나머지 시간은 내 식대로 한 판 잘 놀았다. 어느 날 아직 유망한 조직을 돌연 떠난 것도 감성적 인간이기에 결단하고 계획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경찰 조직에 미련은 없었나? 열심히 했지만 30년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엔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당황했고 무조건 쫓아만 다녔다. 개념이 좀 잡히고 나서는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버텼다. 해결되는 사건이 하나둘 쌓일 때마다 그게 나를 키웠고, 그러고 나면 더 큰 사건이 맡겨져 계속 나를 키웠다. 그러다 30년이 됐고 정말로 성장했다. 하지만 성장만 해서는 현실을 다 감당할 수 없었다. 사건의 원인인 사회병리적 현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사건 한 건 한 건만 보고 따라가기엔 사회병리의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심리학과 법의학, 판례를 공부한 이유다. 끝까지 복무해서 서장도 해볼 만했다. 하지만 형사 생활 내내 늘 묻고 연구하다 보니 내게 진짜 필요한 일이 뭔지 발견하게 됐다. 사람들을 사건 현장이 아닌 현장 이전에 만나는 일이다. 떠난 것에 대한 미련은 없다. 하고 싶고 해야 할 과제가 있을 뿐이다.

해결만이 능사가 아니다, 원인부터 더듬고 다듬어보겠다, 그런 얘기로 들린다. 깊은 생각 할 것도 없이 바로 피부에 와 닿는 얘기가 있다. 인질 협상을 해보니까 당장 사건 하나 해결했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더라. 아차 하는 순간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것 아닌가. 범죄로 죽은 사람 보는 일과는 전혀 다르다. 산 사람이 내 눈앞에서 죽을 수 있으니까. 조심할 수밖에 없다. 실수가 없어야 하니 최대한 조심하고 겸손해야 했다. 특유의 소심함과 섬세함이 협상과 사건 해결의 디테일을 살렸을 거라 생각한다. 공감력이 있어야 가능한 얘기다.

쉰둘에 퇴직했다. 일찍 퇴직한 이유는 정확히 뭔가? 정년을 지나도 늙어 죽을 때까지 일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었다. 그런 내가 일찍 퇴직을 하니 뭘 하고 싶은 건가 궁금해 했다. 제주에 집 짓고 자리 잡으니 게스트하우스나 책방을 열 것으로 짐작한 모양이다. 그 정도 속셈이었다면 그렇게 좋아하던 형사 일을 빨리 그만두지 않았을 거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감정’을 말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어쩌다가 감정 덩어리를 못 이겨 이성을 다 잡아먹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감정이 터진 이들을 수많은 사건 현장에서 목격하며 안타까웠다. 이제 아직 터지지 않은 사람들을 미리 만나려는 것이다.

현직일 때 남다른 수사 기법으로 소문났다 들었다. 피의자를 심문할 때 멈추고 바라보는 습성을 키웠다. 충분히 기다리며 다 들어야 놓칠 뻔한 것들이 보인다. 내 경험치의 판단을 우선하기 쉬운데 형사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동료와 후배들에게 늘 하던 말이 있다. 범인이라는 믿음이 가더라도 아닐 거라는 방향에서 수사하라고 했다. 반대로 범인 아닐 거라 생각되면 범인이 맞다는 믿음을 가지고 들여다보라고 했다. 반대로 생각하는 훈련을 한 거다. 이걸 실행하려면 단 한순간에 툭 치고 지나가는 어떤 것이라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말은 쉬운데 거의 수행 정진에 가까운 일이다(웃음).

여행을 좋아한다고 했다. 좀 이른 퇴직도 여행자처럼 살겠다는 의도인가? 20대 때부터 여행을 좋아했다. 오지 여행도 많이 다녔고 제주에 자주 드나든 것도 그래서다. 인생 후반부터 마지막까지는 여행자처럼 살자는 생각이 있었다. 2년간 집을 지으면서 그냥 집만 짓고 그냥 사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재를 하나 만들고 빈 방을 하나 만들어 나를 만날 사람들이 다녀갈 수 있도록 하자 마음먹었다. 내가 가지 않아도 그들이 와서 만나는 것도 여행이다.

드나드는 사람들이 쉼을 방해하지 않을까? ‘쉰다’와 ‘일한다’가 구분되지 않는다. 일하는 게 쉼이고 쉬는 게 일이기도 하다. 걱정할 필요 없는 게 잘 자르는 편이다. 열 가지 일 중에 한 가지를 하고 있으면 나머지 아홉은 까맣게 잊어버리는 스타일이다. 책방을 만들고 나서는 끊임없이 손님들이 온다. 대화를 나눌 분과는 대화하지만 잡초를 뽑아야 할 때는 그냥 내버려두고 잡초를 뽑는다. 어떤 날은 하루에 스물여덟 명이 온 적도 있다. 각자 멍 때리거나 자기 얘기하다 가기도 하고 삼삼오오 알아서 얘기하다가 떠난다. 아들을 꼭 데려오고 싶다던 엄마가 아들 데리고 재방문을 하고, 딸 결혼 문제를 상의하고 가더니 예비부부를 일부러 보낸 경우도 있었다. 낯선 사람들이었는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돼버렸다. 경찰일 때와 달리 사람을 보는 시선이 확장된 것 같다. 그러면서 마음 근육도 더 탄탄해진다.

책방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히는 후배와 둘이 쓰는 공용 서재다. 방문자에게 책을 파는 곳은 아니고 그저 둘러보고 앉아 쉬고 책을 보는 공간이다. 소장 도서와 새로 사서 들인 책들로 서재를 채웠다. 철학과 인문학, 정신분석학, 심리학, 여행 등 애독 장르와 그 밖의 서적으로 3000여 권의 서재를 꾸몄다. 

“그런데 의외로 책을 안 읽어요. 공간이 참 좋다는 말만 하다가 자기 얘기들을 하죠. 자신의 집, 가족, 친구 그리고 어릴 적 꿈 이야기가 오갑니다. 두 번째 방문할 땐 어느 칸에서 커피를 마실지, 어느 쪽을 바라보고 멍 때릴지, 자고 가도 되냐고 물을지를 생각하죠(웃음). 난 내 루틴대로 지낼 뿐 그들 때문에 피곤하진 않아요. 필요할 때 얘길 들어주고 심리 컨설팅을 하는 게 전부니까요.”

프로 상담가가 될 생각도 있나? 상담사 자격증을 갖고 있지만 그럴 생각은 없다. 더 전문적인 프로들이 많으니 그분들이 하시면 될 일이다. 내가 이 공간에서 그렇듯이 저마다 스스로 자신을 발견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길 바랄 뿐이다. 필요한 책이 있으면 가져다 보면 된다고 책방 키도 꽂아둔다. 어쩌다 질문 하나 툭 던져오면 말 상대가 돼주는 걸로 족하다. 사실 요즘 더 유목민처럼 살아볼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집과 서재는 열어놓고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하고 좀 돌아다니고 싶다는 욕심…. 그래야 에너지가 더 충만해질 것 같은 느낌이랄까(웃음).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과 인연이 깊다. 영향 받은 것 아닐까? 그분을 알기 전부터 이미 올레꾼이었다. 올레 코스를 도는 동안 제주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우연히 함께 걸을 기회가 생겼는데 전직 기자여서인지 질문이 참 많았다. 사회부 출신이라 사건에 대한 질문이 끝이 없었다. 역으로 기자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더니 ‘전생 같다’고 하더라. 그때 나도 30여 년의 형사 생활이 ‘전생 같다’고 맞장구를 친 기억이 있다(웃음). 절친이 되었으니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부분이 왜 없겠나. 가장 맞닿는 점은 계산적이지 않고 저돌적이라는 점이다. 내가 글을 쓰게 되기까지 결정적인 한 방을 던져주신 분이기도 하다. 글을 쓰면서 내게 내상이 많다는 것, 하나하나 꺼내다 보니 꺼내지더라는 걸 알게 해줬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순경 시험을 봤다. 착하게 살려고 경찰에 지원했다는데…. 아버지는 어촌 수산회사에 다니는 어항 설계자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7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서 성장기엔 언니들의 도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아주 어릴 때 할머니가 숨 거두시는 모습을 직접 봤다. 나이 차 많은 형제들이 같이 놀아줄 시간이 없자 사촌오빠가 유일한 벗이었다. 그런데 그 오빠마저 일찍 병으로 죽었다. 죽음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초등학생 때부터 염세적인 아이가 돼버렸다. 중학교 입학 때 열두 살 많은 둘째 오빠가 대구백화점에 데리고 가 입학 선물을 고르라고 했다. 중학교 갓 입학하는 아이가 서점으로 직행해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골랐으니 오죽했겠나. 니체의 철학책을 읽으며 더 염세적이 되는 듯했다. 그러다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신나게 살아보자고 다시 마음먹었다. 노트에 대중가요 가사를 적어 일부러 크게 불러보기도 하면서 성격을 바꿔보려 노력했다. 그 무렵 어린이날 설문조사에 꿈을 적는 문제가 나왔다. 자연스럽게 경찰관이라고 적었던 것 같다. 사람들을 도와주고 정의를 실천하며 착하게 사는 직업이니까. 길 잃은 아이 집도 찾아주니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가(웃음).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어 알게 된 세상의 현실은 차가웠다. 대구는 어촌 출신 소녀가 감당하기엔 빈부의 격차, 문화적 이질감이 심한 대도시였다. 지역 명문여고여서 후원이 빵빵한 집안의 엘리트 학생이 수두룩했던 것. 영부인도 나왔다는 여고에서 상위권을 지키고 대학에 진학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을 터, 일찌감치 밖으로 눈을 돌렸다는 여고생 박미옥. 

“형편상 언니 오빠들 지원으로 학교를 다녔으니 빨리 독립하고 싶었지요. 일단 독립부터 하고 학벌은 나중에 필요하면 채우자고 생각했어요. 1학년 때 한국취업정보센터라는 곳을 찾아갔다가 경찰공모시험 공고를 봤어요. 담임선생님한테 그랬죠. 1년을 다녀보고 대학 진학 여부를 결정할 건데, 지금은 경찰 쪽을 생각하고 있다고 솔직히 말했어요. 엄마는 간호대에 가라고 성화였는데, 결국 3학년 학력고사 날 시험장에 안 가고 불국사에서 멍 때리다가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을 속인 거죠. 일단 혼나고 나서 엄마한테 당당히 말했어요. 경찰관 시험 도전해보고 떨어지면 그때 엄마 말 듣겠다고요.”

너무 어린 나이에 경찰이 됐다. 좌충우돌이었겠다. 정말 너무 어렸다. 다들 어리게만 보니 그저 성실하게, 착하게 맡은 일 수행하는 것만 생각했다. 그런데 1, 2년 지나니 이런저런 요구가 많아졌고 형사라는 직업이 감당하기 힘들다는 걸 알게 됐다. 운전도 잘하고 신체 조건도 좋아 자주 불려 다녔지만 정서적으론 불안하기만 했다. 도둑놈, 사기꾼, 살인범이랑 평생 지지고 볶을 생각을 하니 암담했던 모양이다. 생각다 못해 스님 되려고 절을 찾아갔으니 오죽했겠나. 그런데 곧 마음을 다잡았다. 실체를 모르고 관념만 가지고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자, 우선 제대로 해보자고 다짐했다. 돌아와 현장에 다시 가보니 담당 형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중요해 보였다. 그때부터 탄력이 붙은 것 같다.

나이 어린 데다 여자라는 이유로 감당해야 했던 멸시와 차별이 많았다. 어린 아가씨가 뭘 알겠냐고 대놓고 무시하는 시민들, 여경이 할 일은 따로 있다 여기고 따돌리는 경찰 내부자들이 허다했다. 서운하고 억울했지만 그래도 ‘담당 형사님’을 찾는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새벽 두 시든 세 시든 무차별로 걸려오는 비상전화가 피곤하고 두려웠지만, 그때마다 더 힘을 내려 노력했다. ‘형사님’이라는 한마디의 무게감이 그렇게 크더라는 것.

착하게 사는 길이 참 어렵다. 착하다는 말 자체가 중의적이고 무게감이 있어 보인다. 착하다는 말처럼 많은 걸 품고 있는 말이 어디 있겠나. 착한 걸 지키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성장과 끊임없는 확장과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무력하게 머물러만 있는 착함은 착함이 아닌 것 같다. 나의 착함도 뒤집어 보고 객관화시킬 줄도 알아야 한다. 착한 것의 기준도 타인들은 다를 수 있다. 내 기준이 균형적인지 늘 살펴야 한다. 입문할 때 말한 ‘착하다’라는 단어를 지키는 데 30년이 걸렸다(웃음).

가해자에 대한 낮은 양형이 문제될 때가 많다. 부실한 공권력 문제와 겹쳐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보호가 부실하다는 의견이 적지 않은데 의견은 어떤가? 우선, 현상을 단편적으로 보는 게 문제인 것 같다. 하나의 문제를 그것 하나만 집중해서 볼 때 균형이 사라질 수 있다. 골고루 진단하고 토론해보질 못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기는 것 같다. 양형 문제는 가족문화가 강한 우리나라의 감정적 경향, 집단적 성향과 연관 있어 보인다. 보다 합리적인 사고를 도출할 적극적인 토론의 장이 필요하다. 어느 한쪽만 문제가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예를 들어 성희롱이나 성폭력 사건의 경우, ‘성인지적 관점’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성인지적 관점을 중시하라는 것은 무조건 피해자 위주로 판결하라는 말은 아니다. 내 경험적 판단을 멈추고 상대의 가치관이 뭔지 살피라는 의미다. 그런데 가해자의 인권은 열심히 논하면서 피해자의 인권에 대해선 집중적 논의가 부족할 때가 있다. 법 이전에 인권이 중요하다는 관점은 가해자에게나 피해자에게나 동등하게 배분돼야 한다. 그렇다고 각자 입장에서만 따로 얘기하는 게 균형은 아니다. 제대로 된 균형 있는 토론이 안 되는 원인을 생각해보면 정말 중요한 게 빠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사회적 데이터가 안 보인다. 사회적 데이터 안에서 키워드가 나와야 하는데, 조사와 토론이 부족하니 키워드가 없다. 사회 시스템이 많이 발전됐고 세련돼왔다고 하지만, 인간에게 진짜 더 중요한 걸 배려하지 못하는 시스템이라면 우리 사회는 세련되지 않은 것이다. 사실은 양형이 다소 문제 있다 해도 너무 약한 건 아니다. 개별 사안에 따른 개인의 생각일 수 있다. 

토론을 확장해 새로운 균형을 찾아내는 과제는 양형하는 법률가만의 몫이 아니다. 사회적 병리라 일컬어지는 모든 문제들은 각 전문가들과 시민에게 같은 숙제를 안겨주고 있다. 하지만 ‘형사 박미옥’ 말마따나 우리는 각자 떠들기만 한다. 연구로부터 성취와 발전을 이뤘다 말하지만 각자도생식이다. 섞고 녹여 새로 빚는 훈련이 안 돼 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는 사회학자대로, 여성학자는 여성학자 입장에서 연구의 결실을 학문적으로 발표하는 데 급급하다. 여성학계 인사가 사법연수원 강연에서 할 소리는 늘 뻔하지 않은가. 이 대목에서 박미옥은 “지금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 아픈지를 함께 얘기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그가 사회병리학과 사람의 감정을 놓지 않으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확장된 시선으로 토론하고 키워드를 만드는 일은 중요하다. 공감한다. 그런데 그걸 누가 하나? 정치권인가? 정치권은 아니다. 학계의 힘만으로도 안 될 것 같다. 각 분야에 분명히 마스터가 있을 것이다. 전문가란 무엇인가 생각해보는데, 완벽한 전문가라는 건 없고 매뉴얼을 가진 사람 정도로 해석하는 게 옳을 것 같다. TV에 전문가들이 나와 결론짓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이게 맞는 거라고 말한다.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내 경우 취조나 인질 협상 등에 관한 형사 시절 매뉴얼이 샘플로 남아 있다고 한다. 어차피 완전한 전문가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변수와 또 다른 해결책이 계속 나타날 테니까. 난 거대한 데이터에 포함될 수 있는 샘플일 뿐이다. 그때그때 좋은 질문을 던져놓고 가는 사람, 그런 이가 전문가요 마스터라고 본다. 그런 사람들이 함께 얘기하면 좋겠다.

매니저로 돕고 있는 작가의 개인전 타이틀이 <우리가 버린 것은 천사였다>였다. 박미옥이 형사로 사느라 버린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본성 아닐까? 나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나는 뭘 좋아하던 아이였나 같은. 부모로부터 심하게 강요받은 건 없는 방임형 아이였다. 다행히도 방임형 아이가 자율형 아이로 성장했다. 일찍부터 독립심이 있었을 뿐 크게 외롭지도 않았다. 그리고 솔직했다. 그런데 진짜 남의 편만 있는 세상 속에서 체면을 지키려니 날 포장해야 되는 면도 있었다. 조직에서 나를 지키느라 안 따를 수 없는 지시에 따르면서 생겨버린 가치관들이 있다. 억지로 가치라고 생각한 가치관들이 일상복처럼 나한테 입혀져 있다. 그러는 사이에 되돌아봤더니 ‘난 어디 갔지?’가 돼버렸다. ‘내가 진짜 지키고 싶었던 건 뭐지?’, ‘난 내 삶에 무엇을 해주고 싶었던 거지?’라고 되묻게 된다. 그래서 SNS에 “우리가, 내가 버린 건 뭐지?”라고 써봤다(웃음).

찾았나? 찾고 있는 중이다. 

더 감성적으로 살고 사람의 감정을 더 연구하며 더 예술적으로 사는 것 같다. 예술이 주는 위안이 커 보인다. 스스로 지칭하는 새로운 표현이 ‘자유인 박미옥’이다. 서명숙 이사장을 만난 후로 15년 동안 앞날의 파장을 전혀 모른 채 저돌적으로 저지르며 살았다. 형사 하는 동안 본 많은 사람들도 나와 같은 감정 덩어리들이었다. 누군가는 표현하고 누군가는 누르고 누군가는 어설프게 왜곡하고 누군가는 억지를 부리는 꼴을 모두 지켜봤다. 어느 순간부터 현재의 나보다 더 순수한 원래의 나로 살아보자는 생각을 했다. 살인범 잡고 강도 쫓는 이야기로만 내 인생을 다 채울 순 없었으니까. 그래서 또 다른 도구로, 나로 살자 했는데, 예술을 하는 순간이 아무 계산 없는 나를 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예술가들의 치열한 삶을 욕되게 할까 조심스럽지만, 내게 예술은 힐링의 시간이다.

연금생활자다. 불편 없이 넉넉한가? 퇴직하고 가장 많이 받은 식상한 질문이 그 질문이었다. 연금은 얼마냐와 돈은 얼마나 모아두었냐는. 그런 거 없다. 집 지으면서 빚져서 연금에 의존하고 있다. 고정수입은 매니저 활동, 강연 등으로 부수입이 간헐적으로 있다. 크게 바라지 않고 부족하면 조금씩 작게 채우면 된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아직은 다리 힘이 많이 남아 있고 여행도 가고 싶고 좀 더 좋은 와인을 마시고 싶다. 필요하면 경제활동을 늘리면 되지 않겠나.  

사랑과 결혼에 대한 기록은 빠져 있다. 어쩔 셈인가. 형사로 살면 나 중심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 공연 티켓을 끊어놨어도 사건이 우선인 사람이니 데이트하기가 힘들다. 서른두 살 때쯤 엄마가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일에 미친 딸이라 조금 늦게 보내게 될 거라는 어림짐작은 한 것 같은데 어느새 서른을 훌쩍 넘기니 걱정되셨던 모양이다. 아무리 언니, 오빠들이 챙겨준다 해도 부모 살아 있을 때만 못하다고 으름장을 놓으셨다. 나도 그에 질세라 당당하게 말했다. “엄마, 아버지 돌아가시면 오빠한테서 호적 뺄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자 엄마가 “세상에 부모 말고는 니 편 없다. 그래서 니 편 하나는 만들어주고 가고 싶은 거다”라고 하시더라. 그때 생각했다. 그럼 내 편이 필요할 때가 오면 누구든 내 편이 될 수 있는 사람과 살면 되겠다 싶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우영우’ 변호사도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할 때 말하지 않았나. “나는 나로서 충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이 외로울 수 있다”고. 나도 약간 그 과인 것 같다(웃음).

은퇴했으니 다르지 않을까? 비슷하다. 아직도 난 자신한테 집중하고 살기에 바쁘다.

외롭진 않나? 어차피 사람은 같이 있어도 외롭지 않나? 인간은 외로울 필요도 있는 것 같다. 글을 써보니까 알겠더라. 티벳 불교에서는 감정엔 옳고 그름이 없고 좋고 나쁨도 없다고 말한다. 단지 내가 그 감정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는 문제만 있다고 한다. 같은 고독도 외로워 죽겠다는 사람의 고독과 나는 왜 외로운가를 사유하는 사람의 고독은 다르다.

이제 형사가 아닌 작가다. 일과는 어떻게 채워지나. 경찰공무원 출신이니까 뭔가 잘 짜인 루틴이 있을 법하지만 거의 없다. 하고 싶은 대로 할 뿐 시간 단위로 가두지 않는다. 관리 능력도 없다. 식단관리도 운동도 잘하는 편이 아니다. 요즘엔 관절이 안 좋아 주사 맞으러 다닌다. 30대엔 스키와 스쿠버다이빙, 40대엔 오지 여행, 자유여행을 즐겼는데 이제 신호가 오는가 보다. 하지만 유료 관리 후 부활시키려 계획 중이다. 우선은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웃음).

지금도 철학책을 탐닉하나? 여전히 관심 있지만 요즘엔 문학책을 많이 본다. 얼마 전 출판사에서 헤르만 헤세 전집을 보내주셨다. 요즘엔 신달자 시인의 책을 보고 많이 웃었다. <어린 왕자>든 <데미안>이든 어릴 때 읽었던 작품을 지금의 마음과 시선으로 다시 읽고 싶어 클래식 동화 전집 50권짜리를 샀다.

형사 생활 때 ‘진짜 체력은 이골이다’라며 현장을 누볐다. 이젠 이완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완이라는 말보다는 ‘주도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경찰에 있을 때는 살인범이 내 스케줄을 잡았지만 이제는 내 스케줄은 내가 잡는다. 24시간 전화 대기할 일도 없다. 또 다른 이골을 만들고 있는 중인데, 이름을 걸고 지속적으로 할 수 있길 바란다. 예를 들어 커피 원두 볶는 일이 그렇다. 잘못 볶다가 망가져서 기계를 세 번이나 바꿨다. 온도와 습도, 바람에 노출된 곳에서 볶으니 예민하다. 상품화까지 갈 계획이라 진지하게 노력하게 된다. 화가의 매니저 일도 이골이 나도록 열심히 해볼 생각이다. 내가 추구하는 바와 같기 때문이다. 이것도 사람들한테 뭔가 울림을 줄 수 있는 거라면 보조라도 굉장히 즐거울 수 있을 것 같다. 작가 노트를 기록하다 보니 완전히 다른 글쓰기에 눈을 뜨게 돼 연습하게 된다. 새로 지어진 공간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은, 내심 좀 두렵기도 하다. 그전에 소문내지 않고 지인들을 맞이했는데 이젠 책과 언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사람을 맞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 사태를 어떻게 감당할지 지금 가장 큰 숙제다. 잘 버텨내길 바라는 수밖에. 내가 나를 끌고 갈 수 있는 이골이 계속 생겨나기를 기도하고 있다.

순서가 늦었다. 이번 책을 낸 소감은? 전직 형사가 책을 낸다고 하니까 사건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사람 이야기더라는 반응이 많다. 책을 쓴 이유가 분명해져서 고맙다. 짜임새가 부족해 아쉽다. 기억을 좇아서 내 의식대로만 기록한 느낌이라 독자 입장에선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준 것 같아 그것도 아쉽다.

2탄도 기대해도 되나? 아직 계획 없지만 한다면 한 단계 더 나간 깊이로 다른 도구를 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림을 그리면서 느끼는 감정도 있고 퇴직 후 새로운 생활과 감정, 경찰관이 아닌 상태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감정들이 소재가 될 것이다. 어쩌면 형사 이야기에 더 깊이 들어갈 수도 있고 아예 형사가 아닌 도구로 형사 얘기를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요즘 그의 집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닌 인생에서 상처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 복잡한 사람들이 찾아와 말을 건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고통을 나누는 일을, 그는 형사 인생의 연장선으로 여긴다고 했다. 그 모습을 상상하면 깊은 영감을 주었다는 책 <파리의 심리학 카페>에 나오는 일화가 떠오른다. 카페를 열고 맞은 첫 손님에게 “여기까지 오는데 힘드셨죠?” 인사 한마디 건넸을 뿐인데 내담자가 이미 울고 있었다는 것. ‘자유인 박미옥’의 따뜻한 인사에 눈물샘 터질 이는 누구일지, 그의 말을 진심으로 경청해줄 사람은 어떤 이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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