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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뉴스데스크 권재홍입니다

MBC 뉴스데스크 권재홍입니다

  • 기자명 취재 두경아 기자 사진 김태환
  • 입력 2014.03.13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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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가 되면 를 만드는 기자와 앵커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시작한다. 5시가 되면 방송국 분장실에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고, 6시에는 저녁을 먹는다. 7시가 되면 그날 보도할 기사들이 모두 앵커 책상에 올라온다. 앵커는 기사를 하나하나 검토하며 신중하게 멘트를 작성한다. 9시가 되기 몇 분 전, 모든 준비가 끝난 앵커가 뉴스데스크 앞에 앉는다. 하나, 둘, 셋, 큐! 카메라에 빨간 불이 켜진다.


오후 7시 MBC 방송국 보도국 안. 뉴스 특보나 예고편이 방송될 때 배경으로 등장했던 곳으로, 생각보다 훨씬 넓고 꽤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다. 누군가는 기사를 쓰고, 누군가는 녹음실로 뛰어가고 있으며, 누군가는 복도에서 소리 내어 원고를 읽고 있다. 보도국 안쪽에는 권재홍 앵커가 두 시간 후면 보도될 기사를 검토하며 원고를 쓰고 있다. 앵커 멘트다.

“요리로 비유하면 사건은 요리, 기자들은 요리사, 앵커는 그 요리가 어떤 요리인지 설명해주는 사람이에요. 메뉴만 봐서는 어떤 음식인지 잘 모르잖아요. 그럴 때 ‘이건 이런 요리입니다. 이걸 이렇게 드셔보세요’라고 소개하는 역할이죠. 그렇기 때문에 앵커는 뉴스의 흐름을 읽고 맥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생방송 직전의 긴장감이 감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하루 중 가장 긴장감이 팽팽할 때다.

“<나는 가수다> 광팬인데, 거기 나오는 가수들도 무대에 서면 다 긴장하고 떨어요. 저도 이 일을 30년 동안 해왔지만 매번 떨려요. 카메라에 불이 켜지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죠. 더군다나 오락프로가 아닌 뉴스잖아요. 앵커 멘트를 쓸 때부터 긴장이 시작됩니다. 최대한 잘 전달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더 그렇죠.”

권재홍 앵커는 1981년 MBC 방송기자로 입사해 사회부, 경제부 기자를 거쳐 2001년에 앵커가 됐다. 이후 위싱턴 특파원으로 근무하고 돌아와 <경제 매거진 M>, <100분 토론> 등을 진행하다가 지난해부터 다시 뉴스데스크 앵커 자리에 앉았다.

  생물학도, 방송기자가 되다  
권재홍 앵커는 지난 9월 2일 KBS홀에서 열린 제38회 한국방송대상 시상식에서 앵커상을 수상했다. 그는 “뉴스데스크를 만드는 모든 선후배 동료들과 이 영광을 함께하고 싶다”며 “항상 가깝게 다가서는, 균형 잡힌 앵커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평소 이미지다운 성실한 소감이었다.

큰 상을 받았다. 소감이 어떤가. 상 받으면 누구나 좋지 않나. 잘해서 줬다기보다 오래 했다고 준 것 같다. 정말 오랜만에 받은 상이다. 기자시절에는 상도 많이 받았는데…. 오랜만이라 더 기뻤던 것 같다.

어떤 상을 받을 때 가장 기뻤나. 1984년부터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지금은 다큐멘터리 제작을 PD들이 많이 하지만, 그때는 기자들이 만들었다. 자연 다큐멘터리였는데, 제대로 된 자연 다큐멘터리로는 우리나라 최초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연 다큐멘터리라고 해봤자 <동물의 왕국>이 다였다. <한국 야생화의 사계>, <한국의 나비>, <꿀벌의 세계>, <한국의 새>…. 1년 동안 취재해서 1년에 한 편씩 총 다섯 편을 만들었다. 1년 중 3분의 2는 산에서 살았는데, 그렇게 5년을 보냈다. 덕분에 한국방송대상, 기자상 등 받을 수 있는 상은 다 휩쓸었다.

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공이 반영된 건가?학부과정에서 자연과학을 해봤자 얼마나 알겠나.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암울한 시기라 매일 휴강하고 데모하느라 공부도 제대로 못 했다. 그래도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나 기본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 다른 사람들보다는 친숙하게 접근했던 것 같다.

생물학 전공은 사실 좀 의외다. 고등학교 때는 생물학자가 꿈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생물반 서클활동도 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개구리도 해부하고, 실험도 여러 가지 했던 기억이 난다. 전국대회에 나가서 상도 탔는데, 당시 서클활동을 했던 친구들은 모두 생물학과에 진학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당연히 생물학자가 될 줄 알았다.

그렇다면 방송기자의 꿈은 언제부터 꾼 것인가. 대학에 입학하면 누구나 서클 서너 개 정도는 들지 않나? 생명연구회랑 인문 분야 서클에 가입하려다 우연히 방송부가 있다는 걸 알고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반 선배가 목소리가 좋으니 아나운서를 해보라고 권했다. 당시 교내 방송국에는 PD와 아나운서밖에 없었다. 테스트를 거쳐 아나운서가 됐다. 막상 해보니 방송이 정말 재밌더라. 음악방송도 하고 드라마도 만들고…. 서클 회장도 하면서 대학교 방송서클 콘테스트도 나갔다. 그때 MBC에서 열린 콘테스트에 참가해 상도 탔다(당시 서클활동을 함께한 친구들 몇 명이 지금 MBC에 있다). 방송일을 하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졸업하자마자 방송국 시험을 봐서 기자가 됐다. 다행인지 몰라도 입사하던 1981년에 컬러TV 시대가 시작됐다. 그전까지 방송은 라디오가 메인이었는데, 컬러TV가 보급되면서 TV로 넘어갔다. 나는 컬러시대 방송기자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서클활동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렇다. 나는 어느 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면 깊게 빠지는 경향이 있다. 지금 내 적성에 맞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일에 대한 미련은 없다.

당시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나. 반대하셨다. “공부해서 교수가 되지 왜 방송국에 들어가느냐”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우리 과 정원이 다섯 명밖에 안 됐기 때문에 공부하면 다 교수가 되던 시절이었다. 교수님들도 “미쳤냐. 대학원 나오면 교수되는데, 왜 ‘딴따라’ 하려고 하느냐”고 반대하셨다. 그때는 방송기자도 딴따라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갈등은 없었다. 2학년 때부터 전공공부를 안 하고(웃음), 방송만 해왔거든. 이미 마음은 방송 쪽으로 가 있던 상태라 후회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교수도 잘 어울린다. 사주를 보니, 정말 교수 사주가 나오더라. 그런 데(점집)는 잘 안 가는데, 유명한 점집이 있다고 해서 가봤더니, 교수 하라고 하더라. “나이 50 넘어서 뭘.” 하고 웃어넘겼다. 하긴 교수나 앵커나 다 말하는 일이니까 크게 운명을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뉴스 중 돌발상황… 건강 더 신경 쓰게 돼  
지난 7월 26일 권재홍 앵커가 를 진행하는 도중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이 발생했다. 그로 인해 그와 함께 뉴스를 진행하는 배현진 아나운서가 “뉴스데스크 진행 중에 권재홍 앵커가 갑자기 몸이 불편해져 후반부 뉴스를 혼자 진행하게 되었다. 양해 부탁드린다”고 시청자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한 바 있다.

얼마 전 뉴스 진행 도중 갑작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현재 건강은 괜찮은가. 방송 중에 쓰러졌다고 보도됐는데, 쓰러지진 않았고 후배들의 부축을 받아 내 발로 걸어서 병원에 다녀왔다. 피곤이 쌓이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사람마다 다른 증상으로 나타난다. 배가 아프다거나, 머리가 아프다거나. 나 같은 경우는 스트레스 쌓이면 2~3년 주기로 어깨가 뭉치고 두통이 온다. 이걸 풀어줘야 하는데 안 풀어주면 그런 일이 생긴다. 의사는 순환계에 순간적으로 이상이 생겨 몸에 힘이 빠진 거라고 하더라. 뉴스를 진행하는데 갑자기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사물이 흔들려 보이더라. 물을 먹으면서 조금만 더 해야지 하고 있는데, 배현진 앵커가 “국장님 얼굴이 왜 그러세요?” 하더라. 거울을 보니까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러다가는 앵커 멘트를 하다가 카메라 앞에서 쓰러질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건 정말 큰 사고가 아닌가. 그런 사태를 막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나머지 뉴스를 배현진 앵커에게 맡기고 병원에 다녀온 것이다.

건강관리에 신경 써야 할 것 같다. 어떻게 관리하는가. 조심하고 있다. 운동도 하고 스트레스도 안 받으려고 하는데, 하는 일이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조심해서 사는 수밖에. 뉴스가 끝나면 밤 10시니까 술자리도 스태프들과 한잔하는 것 이외에는 안 했다. 젊었을 때는 많이 마셨지만, 지금은 많이 안 마신다. 그나마 내가 쓰러진 뒤로는 술 먹자는 사람도 없더라.(웃음)

지난 30년을 돌아봤을 때, 전성기 언제였나. 젊었을 때가 아닐까. 산에 다니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나, 뉴욕 특파원으로 일한 것도 경력에 도움이 되었으니 인상에 많이 남고. 하지만 뭐니 뮈니 해도 앵커를 시작했을 때인 것 같다. 남들보다 빨리 앵커가 된 편이다. 1998년에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로 시작했다. <피자의 아침>이라는 세 시간짜리 아침방송 앵커도 했다. 뉴스와 교양을 합치고 PD와 기자가 같이 만드는 프로그램으로 방송에서는 MBC에서 처음 시도한 형태의 프로그램이었다(그래서 프로그램명도 피디랑 기자를 합쳐 ‘피자’다). 두 시간의 뉴스가 끝나면 중간에 옷을 갈아입고 토크쇼가 이어졌다. 프로그램이 오래 가진 못했지만, 새로운 시도였고 재미있었다. 그러고 나서 곧장 메인 앵커를 맡았으니까 그때를 중심으로 4~5년간이 방송기자로서의 전성기이자 내 인생의 황금기였던 것 같다.

아나운서와 앵커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앵커, 특파원, 기자… 어떤 이름이 편한가. 지금도 식당에 가면 나를 아나운서라고 부른다. 방송기자가 생긴 지 몇십 년 됐지만 아나운서가 맨 처음 나왔기 때문에 뉴스에 나오면 다 아나운서다. 개인적으로는 앵커라고 불리는 게 익숙하다.

<경제 매거진 M> 등 경제 전문 기자로도 활약했다. 재테크에 대해 밝을 것 같다. 지금도 경제부 기자로 알려져 있고, 경제 관련 프로그램을 많이 했지만, 주식은 안 한다. 그동안 깨달은 것은 아마추어가 주식하면 망한다는 거다. 주식시장은 전문가들의 시장이다. 수백억 굴리는 사람도 있는데, 몇 백만 원으로 덤벼봤자 전부 전문가들에게 들어간다. 이런저런 정보를 듣고 사봤자 다 망한다. 가끔 내게 재테크에 대해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걸 알면 기자들은 다 부자겠지. 그저 그런 세상의 생리를 좀 안다는 정도다. 경제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역할만 거다. 나는 펀드에 투자하고 있다.

  권재홍 앵커의 로맨틱한 사생활   
권재홍 앵커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기자는 “뉴스에서 보는 모습과 다르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웃는 얼굴은 처음이었다. 뉴스데스크에 앉은 그의 얼굴은 무표정이거나 언제나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니까. 그는 “뉴스가 워낙 딱딱해서 그렇지,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편한 사람이고, 잘 노는 편이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왠지 엄한 아버지일 것 같다. 전혀 아니다. 오히려 방임하는 스타일이다. 아들 하나 있는데, 살갑게 대하는 편이다. 나를 어려워하지는 않는다.

아들은 어떤 일을 하나. 지금 미국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다. 올해 장가보냈다.

지금 나이에 며느리를 봤다니, 너무 이른 것 아닌가. 내가 장가를 빨리 갔다. 대학 졸업하고 스물다섯 살에 결혼했다. 눈이 나빠 군대에 못 가서 남들보다 빠르다. 친구들의 아이들은 이제 막 대학 졸업하고 그러고 있다.

하나 있는 아들을 장가보낸 심정이 어떤가. 더구나 지금 미국에 가 있는데. 서운하고 섭섭하더라. 다 키워서 보내니까. 요즘 아이들은 딸 아들 할 것 없이 (시집/장가) 가면 끝이지. 아들 가진 부모도 딸 가진 부모만큼이나 상실감이 있다. 멀리 있으니 보고 싶긴 한데, 그래도 잘하고 있으니 안심이다.

왜 한 명만 낳았나, 좀 더 낳지. 그러게. 지금 나이 되어 보니까 네 명 정도는 낳았어야 했다. 그때는 바쁠 때라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결혼하자마자 사건기자, 사회부 기자했고, 다큐멘터리 찍으러 다녔으니 집에 못 들어오는 날이 더 많았다. 아들이 한참 자랄 때는 얼굴도 제대로 못 봤다.

그래도 아들 결혼시켰으니, 할 일은 다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이제 할 일은 다 했다. 부모님 두 분, 장인 장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결혼했고…. 이젠 할 게 없다. 이제 방송만 잘하면 되는 건가?

어떤 남편인가. 무난한 남편이다. 직접 물어봐야 할 것 같지만, 아내에게 잘하는 편이다. 여행도 많이 다니고 데이트도 자주 하고. 워싱턴에서 특파원을 할 때 그곳에 기자들이 스무 명 정도 있었는데 그중에서 내가 가장 로맨틱하다고 했다. 확인해봐도 좋다.(웃음)

아내와 데이트할 때 주로 어디를 자주 다니나. 음악을 좋아한다. 클래식, 재즈 모두 좋아한다. 특파원 시절에 공연을 많이 봤다. 돈 많이 깨졌지. 요즘도 뮤지컬이나 연극을 자주 본다. 그래서 대학로에 자주 나간다. 예술의전당 공연은 비싸고, 대학로 공연은 저렴하다. 코미디를 좋아하는데, 최근에 본 공연은 연극 <배꼽>, <웃음의 대학>, <키사라기 미키짱>이다. 정말 재미있더라.

대학로라면, 주로 젊은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 아닌가. 나 때문에 내 주변 사람들이 대학로로 온다. “대학로 가서 연극이나 봅시다” 하면 처음에는 어색해 하다가도 일단 가보면 되게 좋아한다. 2만 원짜리 연극보고, 인근에서 저녁 먹고…. 대학로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 오히려 젊을 때는 대학로에 안 갔다. 방송만 했다. 공연도 나이 들면서 보게 된 거다.

대학로의 어떤 점이 좋은가. 사람들과 시간 보내기도 좋지만, 극장에 가면 ‘사람들이 참 열심히 사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무대 위에서 참 열심히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인생을 너무 쉽게 사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돈을 떠나서 자기 일을 탐닉하며 산다는 건 참 멋진 일 같다.

대학로에 나가면 사람들이 알아볼 것 같다. 불편하지는 않나. 처음에는 불편했는데,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좀 불편해도 어쩌겠나, 즐길 수밖에.

  정치에는 소질 없고, 새로운 포맷의 토크쇼 만들고 싶어  
이날의 메인 뉴스는 대규모 정전 사고였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엘리베이터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한다면 훨씬 생생하지 않을까? 촛불 켜고 목욕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왜 밖으로 나오지 않고 굳이 촛불까지 켜고 목욕을 했을까? 이런 것도 궁금하지 않나?” 라는 질문을 던졌다. 좀 더 생생한 뉴스를 위해 고민하는 기자의 마음이다. 그는 언젠가 시장 상인부터 유명인까지 다양한 계층이 등장하는 토크쇼를 만들고 싶다.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이나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 지금까지 과분하게 많은 것을 이뤘다. 모든 프로그램을 다 했으니까. 기회가 닿으면 프로그램 포맷을 개발하고 싶다. 지금 토크 프로그램은 죄다 연예인이지 않나. 너무 한정되어 있다. 일반 사람들도 여러 가지 애환도 있고, 다양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예인이 아니면 시청률이 안 오른다고 생각한다. 그건 방송을 만드는 사람들의 직무유기가 아닐까. 유명 MC만 있으면 시청률이 기본 10% 이상 나온다. 그래도 이 세상에 어디 강호동, 유재석만 있나. <나는 가수다>를 보면 우리가 모르던 사람 중에 노래 잘하는 사람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것만 보더라도 새로운 포맷을 자꾸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모델이나 멘토가 있나. 미국 NBC 방송에 피터 제닉스라는 앵커가 있다. 나와 키도 비슷하고 스타일도 비슷하다. 그분의 뉴스방식이 좋다. 국내에서는 이득렬 선배다. 그분은 한국 방송 앵커의 효시다. 지금 봐도 참 잘하신다. 그분에게 뉴스를 자연스럽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써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간혹 뉴스 앵커들이 클로징 멘트로 곤혹을 겪기도 한다. 나는 클로징은 거의 안 하는 편이다. 민감한 부분이다. 내 의견이 MBC의 의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안에 관한 클로징 멘트는 한다. 어제 했던, “대규모의 정전 사고가 일어났는데, 아무도 사과하는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이념에 관련된 멘트를 하는 것은 반대하는 편이다.

정치의 꿈은 없나.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부분이다. 요즘 유행하는 대로 말하자면, ‘철수 나오면 영희도 나와야 하나?’ 그 분야의 선수가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잘하는 분야는 방송이다. 얼굴이 알려진 사람들이 정치하는 건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콘텐츠가 있나’, ‘자신이 있나’ 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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