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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 밀란 쿤데라, 안톤 필그람, 알폰소 무하 등 체코 모라비아 브르노

  • 기자명 이신화 작가
  • 입력 2024.03.29 17:47
  • 수정 2024.03.29 17:55
  • 댓글 0
  • 사진(제공) : 이신화 작가
체코의 제2도시인 브르노는 매년 국제 무역 박람회가 열리는 공업도시다. 800년간 전쟁 없이 유지된 올드타운에 고스란히 유적이 남았다. 거기에 안톤 필그람, 멘델, 밀란 쿤데라, 레오슈 야나체크 등 세기를 빛낸 예술가들의 고향이다. 무엇보다 저렴한 물가는 매일 돈을 써야 하는 강박감에 시달리는 해외여행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브루노 가옥들

모라비아의 산업, 문화 중심지

브르노(Brno)는 체코 모라비아(Moravia) 지역이다.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중앙부에 있는 모라바 강 유역에 서슬라브 족이 건립한 대 모라비아 왕국(833~906)이 그 기원이다. 동쪽은 슬로바키아, 북쪽은 폴란드의 슐레지엔, 남쪽은 오스트리아, 서쪽은 보헤미아와 접한다. 브르노에는 켈트족이 처음 정착했다. 브르노(Brno)라는 지명도 켈트 어인 '언덕의 도시'라는 뜻의 브린(Brynn)에서 유래했다. 철도의 분기점으로 프라하에 버금가는 산업, 문화의 중심지다. 특히 병기 제작, 섬유 공업 등이 발달했다. 1928년에 무역 전시관을 만들면서 매년 국제 무역 박람회가 열린다. 거기에 브르노는 세기를 빛낸 인물들의 고장이기도 하다. 16세기의 대 건축가인 안톤 필그람, 완두콩을 실험해 멘델의 법칙을 발견한 멘델과 영화 <프라하의 봄>으로 잘 알려진 작가 밀란 쿤데라, 체코의 3대 음악 거장 중 한 명인 레오슈 야나체크, 국내에서 두 번이나 전시회를 연 아르누보 스타일의 대가, 알폰소 무하가 이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브루노 집 정원
브루노 서쪽 전경
브루노 서쪽 전경
모바비아 산 레드 와인
모바비아 산 레드 와인

숙소의 직원들에게 얻은 관광객을 위한 여행 지도는 돋보일 정도로 실용적이다. 애써 찾지 않아도 도심을 걷다 보면 지도에 표기된 ‘중요한 장소’가 나타난다. 특히 물가가 프라하의 절반 정도로 저렴해 음식을 먹거나 쇼핑을 해도 마음이 가볍다. 또 1766년, 최초로 섬유공장이 세워진 도시여서 옷값이 싸다. 구경하고 쇼핑하고 맛있는 것을 사 먹어도 부담이 없는 도시. 저녁이면 카페에 앉아 질 좋은 모라비아 산 와인을 마신다. 커피 한 잔 값으로 얼콰히 취하니 그것 또한 행복하다.

브르노 랜드 마크, 성 피터 앤 폴 성당의 11시 종소리

페트로브 대성당
페트로브 대성당 내부
페트로브 대성당 공원

브르노 기차역을 빠져나오면 왼쪽 언덕 위에 페트로브 대성당이 눈에 확 띈다. 브르노의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성당은 멀리서도, 가까이에서도 연륜의 깊이가 느껴진다. 1092년,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에 14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했다. 20세기 때 네오고딕 양식을 덧대었다. 성당은 웅장하고 화려하다. 이 성당에서는 매일 오전 11시에 종이 울린다. 중세 30년 종교 전쟁(1618∼1648) 때 스웨덴 군은 석 달 동안 브르노를 포위하고 있었다. 부하들이 녹초가 될 정도로 지쳐 있을 때, 스웨덴 장군은 성당의 정오 종이 칠 때까지 브르노를 점령하지 못하면 공격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한다. 빗발치는 스웨덴의 맹공을 감당할 수 없었던 브르노의 사령관은 머리를 써서 성당의 종을 11시에 치라고 명령한다. 결국 스웨덴군은 그 종소리에 공격을 멈추고 돌아갔다. 그날의 승리를 기념하면서 현재도 오전 11시에 종을 울리고 있다. 성당 안쪽의 계단을 따라 오르면 도시의 서쪽이 조망된다. 체코의 붉은 지붕 아래 고풍스러운 가옥들은 물론 기차역, 티타늄 공장, 현대적인 건물 등이 뒤섞인 모습을 보여준다. 멘델이 머물던 토마스 수도원도 그쪽이다. 우측 끝 언덕 위에는 슈필베르크 성이 있다.

가옥에 그려진 그림
가옥에 그려진 그림

슈필베르크 성은 시립 미술관

슈필베르크 성
슈필베르크 성역

성당 옆,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후소바 차도를 따라 걷는다. 슈필베르크(spilberk) 성역까지 일직선 길이다. 성 입구에 거의 다다르면 미술공예 박물관, 모라비안 미술관, 법원, 벙커 등이 있다. 슈필베르크 성과 요새는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있다. 13세기 중반에 건립된 성채는 몇 세기에 걸쳐 수차례 소유주와 용도가 바뀌면서 개축을 거듭했다. 원래는 고딕식 성이었으나 17세기 중반에는 바로크식으로 개축했다. 18세기에는 포대가 자리를 잡고 군사용 요새로 이용하다가 18세기 말 황제의 명령으로 포대 위층을 감옥으로 개조했다. 체코는 물론이고 프랑스, 이탈리아, 폴란드 등 유럽 각국의 정치범들의 수용소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에 의해 갇힌 사람들이 컴컴한 지하 돌 감옥에서 산 채로 썩어 갔다. 성벽은 지독하게 깊고 벽돌담(40m)은 두텁다. 습했을 감옥을 이제는 관광객들이 무심하게 구경할 뿐이다. 성 내부는 시립미술관으로 이용된다.

약 800년 이상, 파괴되지 않은 올드 타운

스파보디 자유광장

성역을 빠져나와 19세기에 건립된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 교회 앞으로 간다. 건물색이 유난히 붉어서 ‘붉은 교회’라고 불린다. 50m 높이의 뾰족한 첨탑을 가진 네오고딕 양식의 이 교회는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1592~1670) 주교 이름을 붙였다. 모라비아 태생인 요한 아모스는 교육학자, 인문주의자, 철학자로 근대 교육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교육 학설은 루소, 페스탈로치 등, 후대의 교육학에 큰 영향을 줬다. 이어 14세기경에 건축된, 바로크 양식의 성 토마스 성당을 지나 본격적으로 올드 타운으로 들어선다. 중세풍의 건물들이 즐비한 곳에, 사람들로 북적댄다. 브르노는 약 800년 이상, 파괴되지 않은 덕분에 옛 건축물들이 고스란히 남았다. 광장은 매우 넓고 복잡하고 골목마다 사람들이 넘친다. 13세기부터 이어져 온 양배추 시장이 유명하다. 다양한 채소와 과일을 파는 곳으로 파르나 분수의 조형물이 볼만하다.

16세기에 건축 대가 안톤 필그람의 작품과 해골 납골당

세인트 제임스 교회
세인트 제임스 교회의 해골관
납골당 내부
인골들

구 시청사는 브르노 출신인 세기의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안톤 필그람(1460~1515)의 작품이다. 그는 자신이 만든 작품마다 ‘자기 색깔’을 넣었다. 본인의 얼굴을 조각해 놓는 등, 영화감독인 히치 하이코크처럼 후대에게 숨은 그림을 찾으라는 듯, ‘미션’을 남긴 예술가로 유명하다. 브르노 시청사 현관 앞 천사들 머리 위의 뾰족탑 하나를 꼬부라트린 건축법은 후대에서도 오랫동안 회자된다. 공사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자 일부러 휘게 한 것. 그가 15세기 만든 세인트 제임스 교회 내부에도 그만의 색깔을 읽을 수 있다. 타워의 낮은 창 앞에는 맨송맨송 엉덩이를 내놓은 남자 조각 하나가 매달려 있다. 그의 해학적인 성격을 엿보게 한다. 이 교회의 92m 높이의 첨탑은 브르노 구시가 건물 중에선 가장 높다. 특히 이 교회 지하엔 5만여 구의 인골로 장식해 놓은 납골당이 있다. 국가보호 문화 유적지로 지정된 납골당은 성당 입구와는 다른 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또 넓은 자유 광장에 서 있는 둥근 조각품 같은 시계탑도 독특하다.

브르노 국립 극장과 야냐 체크

야냐 체크 국립극장의 포스터

말리노프스키 광장 옆으로 야냐 체크 국립극장이 있다. 극장은 세 군데로 나뉘어 있다. 레두타 극장에서는 발레 공연을, 마헨 극장에서는 드라마, 연극 공연이 펼쳐진다. 야나체크 오페라 관에서는 오페라 공연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야나체크(1854~1928)는 스메타나, 드보르작과 함께 체코의 3대 작곡가다. 브르노 태생의 야나체크는 작곡가, 음악이론가, 민속음악학자, 출판인, 음악교사다. 그는 모라비아 지방의 동양풍의 민족음악을 소재로 독특한 음악을 작곡한 인물로 민요를 분석해 현대적으로 발전시켰다. 오페라 <예누파>는 ‘모라비아의 국가 오페라’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민속적 색채가 짙다. 야나체크는 <예누파>로 모라비아의 음악을 세계에 알렸다.

에디슨의 전기 조명 설비를 도입한 마헨 극장과 투겐타트 별장

마헨 극장

야냐 체크 국립극장 옆에는 마헨 극장(1882)이다. 네오 바로크, 네오 르네상스, 네오클래식 스타일로 지어진 오래된 건축물. 1880년 브르노의 레투타(Reduta)의 도시 극장에 불이 났다. 당시 시장은 빠른 시일 안에 새로운 극장을 만들어야 했다. 비엔나의 유명한 건축사무소(Fellner and Helme)가 설계를 맡았고 에디슨의 전기 조명 설비를 세계 최초로 도입했다. 전기 시공은 에디슨의 조수 프랜시스 젤이 맡았고 에디슨은 25년 뒤에야 이곳을 방문했다. 1882년 11월, 마헨 극장이 개관하던 날, 베토벤은 에그몬트 서곡(1810년)을 연주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국가의 소유(1918년)로 바뀌면서 마헨 극장(1965년)이 됐다. 야냐체크 극장이 생기기 전까지 주축이었다. 또 러시아 작곡가인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1891~1953)의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이 초연된 곳. 현재 체코 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마헨 극장 뒤에는 세기적인 건축가 미에스반데어로에(1886~1969)의 대표적인 작품인 투겐타트 별장(1962년 국가 기념물로 지정)이 있다. 이 별장의 재건은 시민 모금에 의해 이뤄진 것이다.

멘델 수도원과 박물관

학창 시절 완두콩의 변형을 실험해 '멘델의 법칙(1868년)'을 발견한 유전학의 아버지로 배운 멘델(1822~1884)은 수도사였다. 멘델이 수도사로서 거주했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은 멘델 박물관이 됐고 마사릭(Masryk) 대학교 내에 있다. 멘델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 시절 브르노의 동쪽 끝인, 폴란드와 경계에 있는 슐레지엔(폴란드어로는 실롱스크)의 첩첩 산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멘델은 본래 자연과학자가 되고 싶어 했지만 17세 때 아버지가 일을 하던 중 크게 다치며 가세가 기울어 공부하기가 어려웠다. 여동생이 학비를 대 준 덕에 전문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멘델은 진학 이후에도 학비 문제로 계속해서 고생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수도원이었다. 사제가 된 후에도 열심히 공부하면서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알게 됐다. 멘델은 수도원에서 진화론을 증명할 실험을 하기로 하고 수도원 뜰에 완두콩을 심고 실험을 시작했다. 이후 1856~1863년 사이에 무려 8년 동안 완두콩을 심고 관리하며 실험을 한다. 멘델은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식물 잡종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학계에 발표했지만 무시당했다. 멘델의 본업이 종교인인 데다 학력도 대학 중퇴에 그쳤기 때문. 멘델은 과학자라기보다는 평범한 수도자에 가까웠다. 매우 뚱뚱해 모두 그를 인심 후덕한 신부로 대했다. 교회 입장에서도 그의 완두콩 연구는 그냥 수도자의 원예 취미 정도로만 여겨졌다. 이후 멘델은 수도원의 대수도원장(1867년)에 오르면서는 연구시간도 줄어들게 됐다. 대수도원장으로써 오스트리아 정부의 수도원 세금 징수 법안에 대해 철회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평소 몸이 약했던 그는 만성 신장염으로 사망했다. 멘델이 사망한 후 논문, 연구 자료는 대부분 불태워졌다. 멘델이 죽은 지 16년이 지난, 1900년에 기적이 일어난다. 네덜란드의 식물학자 드 브리스(1848~1935)가 멘델과 비슷한 주제로 연구하던 도중 도서관에 남아 있던 멘델의 논문을 '우연히' 집어 든 것이다. 드 브리스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35년 전 멘델이 실험한 논문을 첨부했고, 이를 통해 멘델의 논문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된다. 과학계에서는 1900년을 멘델 법칙 재발견의 해로 지정했다. 이후 1910년, 멘델의 동상이 세워졌고, 동상이 세워진 광장에는 멘델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는 등, 멘델은 죽고 나서야 유전 법칙을 밝혀낸 과학자로 인정받게 된다.

‘프라하의 봄’을 쓴 밀란 쿤데라의 고향

영화 프라하의 봄으로 잘 알려진 밀란 쿤데라(1929년 4월 1일~) 작가도 브르노 태생이다. 그는 체코의 주요한 음악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루드빅 쿤데라(1891~1971)의 아들로 태어났다. 루드빅 쿤데라는 작곡가 레오슈 야나체크의 문하생이었으며 브르노 뮤지컬 아카데미의 수장(1948~1961)이었다. 쿤데라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나중에는 그 역시 음악학을 공부했다. 이러한 음악적 배경은 그의 소설 작품의 근간이 된다. 심지어 그는 첫 소설 《농담》(1967)에 음표를 그려 넣기도 했다. 1948년, 그는 브르노에서 중등교육 과정을 마치고 프라하 카렐 대학교의 예술학부에서 문학과 미학을 수학한다, 두 학기 만에 프라하의 공연예술 아카데미의 영화학부로 옮겼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영화 기획과 희곡 창작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영화 아카데미 AMU에서 조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50년, 그는 잠시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학업을 중단당했다. 1952년, 졸업 후에 영화 아카데미에서 세계 문학을 가르치는 강사가 됐다. 1950년, 그와 그의 절친인 얀 트레풀카(1929~2012)는 '반공산당 활동'이라는 죄목으로 공산당에서 추방당했다. 밀란 쿤데라는 1975년부터 프랑스에 살고 있으며, 1981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땄다. 1984년, 그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발표하면서 그의 대표작이 됐다. 1988년, 미국의 영화감독 필립 카프만이 영화화해 전 세계적으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쉽지만 브르노에서 그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프라하에서 브르노까지는 열차로 약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여행 포인트 브르노가 위치한 모라비아 지방은 체코 와인의 기원이다. 로마 프로부스 황제의 통치기(276~282)에 슬로바키아 남부와 모라비아에 로마 군단이 주둔하면서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후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슬로바키아 거주민들의 와인 재배 기술도 점차 발전했다. 모라비아에서 와인 재배에 관한 최초 기록은 1101년. 13세기 후반부터 포도밭 조성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고취돼 당시 모라비아 와인 농가들은 대부분 와인 저장고를 두고 있었다. 남모라비아는 와인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인식될 만큼 와인 생산에서 독보적이었다. 오랜 시간 햇빛을 머금는 모라비아의 빼어난 테루아는 같은 품종이라도 완전히 다른 맛을 지닌, 다른 곳에선 다시 없을 와인을 품어낸다. 화이트 와인 중 뮬러 투르가우, 룰란스케, 리즐링 린스키등이 유명하다. 레드 와인 중엔 자수정 빛의 프랑코프카가 인기다. 그 외 룰란스케, 바브르지네츠케, 벨틴스케 젤레네 와인 등이 있다. 해마다 가을이면 와인 축제를 연다. 또 브르노에 양조장을 갖고 있는 스타노브르노(starobrno) 맥주가 있다. 1325년, 크리스티안 수녀원이 시초였다. 19세기에 그 자리에 양조장이 지어졌고 2009년 네덜란드 하이네켄이 합병했다.

홈페이지 http://ticbrno.cz/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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