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신화 작가의 유럽 인문 여행] 나폴리에 미항은 없고 마르게리타 여왕 피자는 있다

  • 기자명 이신화 작가
  • 입력 2024.03.16 10:00
  • 댓글 0
  • 사진(제공) : 이신화 작가
나폴리의 첫 느낌은 묘한 불안이다. 로마의 테르미니역 만큼이나 규모가 큰 중앙역에 어슬렁대는 부랑아 때문에 핸드백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좁은 골목에 높게 올라간 거무튀튀한 건물들 사이로 속력을 멈추지 않은 오토바이가 달려와도 초긴장이다. 이러다 보니 나폴리의 산타루치아 항구에 따라붙는 ‘미항’이라는 수식어가 맞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까지 생긴다. 그러나 산텔모 성에 올라 아름다운 나폴리 전경을 보고 마르게리타 ‘여왕 피자’를 먹으면 충분히 위안된다. 나폴리 피자 제조법은 최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2017년 12월 7일)됐다.
보메로 언덕에서 바라본 나폴리
보메로 언덕에서 바라본 나폴리

보메로 언덕의 산텔모 요새에서 나폴리 전경 조망하기

보메로 언덕에서 바라본 나폴리 시가지
보메로 언덕에서 바라본 나폴리 시가지

나폴리에서는 가장 먼저 보메로 언덕에 올라 나폴리 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생각이다. 18세기의 화가였던 루이지 반비텔리(1700~1773) 이름을 딴 지하철역에서 내려 다시 푸니쿨라를 타러 모르그헨(Morghen) 역으로 간다. 푸니쿨라는 산텔모 성 언덕까지 쉽게 올려 준다. 탄탄해 보이는 성벽의 진한 회색빛에서는 깊은 연륜이 배어 있다. 성으로 오르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에 5유로의 입장 티켓을 산다. 과거 군용감옥소로 이용됐다는 흰색 건물이 길게 늘어선 다르미 광장을 지나쳐 산텔모(Sant'Elmo) 성의 가장 높은 전망대로 향한다.

보메로 언덕
보메로 언덕
산텔모 성과 베수비오 산
산텔모 성과 베수비오 산

앞이 막힘없이 트여 나폴리 시가지는 물론 산타루치 항구, 베수비오 산(1,281m)까지 눈에 잡힌다. 나폴리는 해안을 앞에 두고 배후에 베수비오 산이 버티고 있어 한 눈에도 천혜적인 입지다. 찾는 이 많지 않아 한갓진 보메로 언덕에 앉아 나폴리의 명소들을 가늠하면서 성채에서 한참이나 머문다. 성채 전망대에서 한 걸음씩 발길을 옮기면서 찾아갈 관광지도 가늠한다. 성벽 가까이에는 아르누보 스타일의 중산층 주택, 아파트들이 눈길을 끈다. 20세기 초부터 급격하게 늘어난 가옥들이다.

나폴리만
나폴리만

양배추 언덕 위의 산텔모 성채와 산 마르티노 수도원

산텔모 성채와 나폴리
산텔모 성채와 나폴리

보메로(Vomero) 라는 지명은 고대 농업과 연관된 보메레(vomere, ploughshare, 쟁기, 쟁기질)에서 기원했다. 당시 브로콜리 재배를 많이 했는지 ‘브로콜리의 언덕’이라고 불렸다. 산텔모 성이 들어선 첫 기록은 1275년. 10세기의 산테라스모(Sant'Erasmo) 교회에서 이름이 유래됐다. 이 성채에서는 당시 나폴리 왕인 앙주 왕조(1266~1442)의 카를로 1세(1226~1285)의 친지들이 살았다. 14세기, 로베르토 왕(1275~1343, 재위 1309~1343) 시절에 대대적인 확장공사가 이뤄진다. 로베르토는 경제 번창은 물론 나폴리를 중세의 우아하고 화려한 도시로 만들어 냈기에 ‘이탈리아의 평화주의자’라고 불린다.

수도원

당시 산 마르티노 수도원을 건설하던, 시에나 출신의 건축가 티노 다 카마이노(1280~1337)가 1343년, 성채를 완공했다. 1456년, 지진으로 크게 부서져 폐허로 남아 있다가 1537년~1547년에 총독 돈 페드로 알바레즈 드 톨레도와 발렌시아 출신의 군사공학자 페드로 루이스 에스크리바가 설계를 맡아 과감하게 육각형 형태의 성채와 테라스를 만들었다. 당시에는 거센 비판을 받았지만 1599~1601년에 개축할 때도 본래 형태를 유지했다.

보메로 언덕에 있는 군인 교도소

이 성채는 1604년~1952년까지는 시에서 가장 높은 교도소였다. 이어 1976~1981년까지 복원해 관광객들에게 공개했다. 지난 30년 동안 고대 및 현대 미술의 수많은 전시회뿐만 아니라 영화 및 연극 뮤지컬 등이 펼쳐졌다. 또 2010년에 개관한 노베첸토박물관에서는 지역 예술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90명 작가 170여 작품을 볼 수 있다. 회화, 조각, 설비 등이 수준급이다.

성채 미술관의 작품
성채 미술관의 작품
성채 미술관의 조각품
성채 미술관의 조각품

성채 바로 밑에는 1368년에 지어진 카르투시오(Carthusians) 회의 체르토사 산 마르티노 수도원이 있다.

움베르토 1세 갤러리와 산 카를로 가극장

움베르토 갤러리

보메로 언덕에서 내려와 다시 푸니쿨라를 타고 아우구스테오 역에서 내린다. 나폴리의 역사적인 중심거리로 성당, 왕궁, 성채 등은 물론이고 대형 쇼핑가, 극장 등이 두서없이 흩어져 있다. 행여 길을 잘 못 들으면 좁고 칙칙하고 음산한 골목들을 헤매야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주변은 오래전부터 소문난 매춘 지역이었다. 그곳을 없애고 1890년, 대형 쇼핑가인 움베르토 1세 갈레리아를 건축했다. 움베르토 1세(1844~1900)는 다른 도시(특히 밀라노)와 같은 거대한 갤러리를 갖기를 원했다. 1887년, 공학자 에마누엘레 로코의 설계로 건축가 안토니오 쿠리와 에르네스토 디마우로가 맡아 시공했다. 넓은 지붕으로 덮인 순수 벨레포크(19세기 말에서 1차 세계대전 시작까지의 시기) 양식의 건물은 웅장하면서도 화려하다. 거대한 건물 내부에는 넓은 통로를 중심으로 부티크, 카페, 레스토랑, 영화관 등이 있다. 대리석 바닥 중앙에 12궁이 있고 사방에 출구가 있다. 갈레리아 길 건너편에는 산 카를로 가극장이다. 이 가극장은 이탈리아 3대 오페라 극장(로마, 밀라노)으로 손꼽힌다. 이 극장에서 얼마나 많은 나폴리 가곡이 열창 됐겠는가? 나폴리 가곡하면 떠오르는 ‘산타루치아’, ‘오 쏠레미오’, ‘푸니쿨라’ 등. 특히 나폴리 수호신이자 해안의 지명인 산타 루치아는 나폴리타노들의 애환이 서린 민중 음악이었다. 산타루치아 항구에서 배 타고 미국으로 이민 간 나폴리타노들은 고향을 그리면서 산타루치아를 흥얼댔을 것이다.

플레비쉬토 광장

플레비쉬토 광장

이곳 심장부는 플레비쉬토 광장이다. 유럽에서 가장 큰 역사 중심지로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 나폴레옹 지배 시절인 1809년, 나폴리 군주였던 조아킴 뮈라(1767~ 1815)는 레알레 왕궁 앞을 시민광장으로 만들기로 선언한다. 뮈라는 나폴레옹의 공신이었으며 여동생 카롤린(1782~1839)의 남편이었다. 뮈라는 저택, 교회, 수도원 등을 철거한 후 광장을 조성한다. 1815년, 뮈라가 처형된 후에는 스페인계 부르봉 왕가의 전제군주 페르난도 1세가 완성시킨다. 광장 중앙에는 넓은 돔 지붕을 가진 산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성당이 있다. 1816년에 완공된 이 성당은 로마의 판테온을 모델로 했다.

플레비쉬토 광장의 산 프란체스코 디 파올라 성당
플레비쉬토 광장의 사자상
플레비쉬토 광장의 사자상

성당 건물 앞에 열주와 사자상이 특징이다. 광장 반대편에는 1700년 대의 레알레 궁전이 있고 8개의 하얀 석상들이 세워져 있다. 광장 맞은편의 살레르노 궁(1775년)은 1825년까지 여러 번 재구성됐다. 이 건물 맞은편의 네오클라식 풍의 총독궁(1815년경)에는 감브리누스(Gambrinus) 카페가 있다. 베네치아의 플로란스, 로마의 타짜도르와 함께 이탈리아의 3대 카페로 불린다. 한때는 이 광장에서는 마상 시합 등이 벌어졌고 공식적인 결혼식이 열렸다. 광장에서 바닷가 쪽으로 가면 누오보 성이 있다. 산타루치아 항구 근처에 있는 델로보 성과 구분하기 위해 '새로운 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성은 시립 미술관이 됐다.

플레비쉬토 광장 주변의 골목
플레비쉬토 광장 주변의 골목

산타루치아 아 마레 대성당과 이탈리아 배우 토토

산타루치아 아 마레 대성당

플레비쉬토 광장을 벗어나 나폴리 해안을 향해 걷다 보면 산타루치아라는 거리 이름이 나오면서 자그마한 산타루치아 교구 교회를 만난다. 결코 눈에 띄지 않은, 작은 성당 안에는 미사를 보는 신도들이 있다. 여느 곳보다 초루해 보이는 성당에는 의외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 성당은 9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274~337)의 조카가 만들었다는 전설이 흐르지만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 성당의 기원은 인근 메가리데(Megaride, 현재 델로보성) 섬의 바실리안 수도사였다. 이후 수도원에 소속된 수녀원의 산타 파트리지아 수녀가 맡았다. 1588년, 에우세비아 미다도아 수녀원장 때 대대적으로 복원한다. 그러다 이탈리아(1861) 통일 후에는 치아타모네 바닷가 산책로의 확대 등으로 완전한 변형을 가져온다. 1845년, 도로 정비 등으로 해수면이 높아져 원래의 성역을 매몰시키고 그 위에 새로운 성소를 세워야 했다. 또 1943년 전쟁으로 교회가 파괴돼 복원했다. 그때 중세기의 유물들은 대부분 파괴됐다. 현재 성당 내부의 높은 제단에는 세인트 루시아를 묘사한 18세기 동상이 있다. 건축가 니콜라 후모1647~1725)의 작품이다. 또 교구 사무실에는 지오아치노 토마(1836~1891)가 그린 루이기 빌라니 주교의 초상화가 있다. 특히 이 교회에서는 나폴리 해군에서 복무한 프란체스코 카라치올로(1752~1799) 제독의 장례가 치러졌다. 1881년, 그의 묘비가 발견됐다. 그는 프랑스 해군 편에 서 있다가 영국 제독 넬슨에게 처형당해 시신이 바다에 던져졌다. 그의 장례식은 시체가 묻힌 교회에서 이뤄졌다. 또 이탈리아의 유명한 배우(감독, 시인 등)인 토토(1898~1967, 안토니오 드 커티스)가 1957년 방문해 몇 개월 동안 치료를 받고 눈이 좋아져 카메라 앞에서 설 수 있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달걀 성, 델로보 성

델로보 성

성당에서 델로보 성으로 가는 파르테노페(Parthenope) 해안 길은 나폴리 내에서도 최고의 데이트 코스로 꼽힌다. 이 해안가에 불쑥 튀어 나온 마리나로의 메가리데 바위 섬 위에 델로보(dell'Ovo) 성. 성까지는 다리로 연결돼 있다. 델로보 성의 기원은 12세기 노르만족이 나폴리의 해안을 방어하는 요새로 세웠다. 그 후 몇 세기 동안 앙주 왕가의 거주지로 이용됐다. 로베르토 왕은 이곳을 대대적으로 재건축했다. 그 후 감옥이었으며 군사 시설로 이용되기도 했다.

군모 모형
군모 모형

델로보 성은 ‘달걀성’이라는 뜻. 로마의 최대 시인이자 마법사인 베르길리우스(BC 70년~BC 19년)는 ‘이 섬에 숨겨진 마법의 알이 깨지는 날이면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읊었다. ‘로마의 시성’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그는 BC 52년, 로마를 떠나 나폴리의 에피쿠로스학파에 들어가 약 3~4년간 생활을 했다. 이때 나폴리의 루쿨루스(BC 118~BC 57?) 장군의 별장에 살고 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BC 63~14)를 알게 돼, 일생 동안 황제의 도움을 받았다. 또 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461?~527년?)도 이 별장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로물루스는 13살~14세 때까지 10개월간 황제로 재위했지만 정식 황제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아버지 오레스테스가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살해(476년 8월)되면서 그의 왕권은 유명무실해졌다. 오토아케르는 로물루스를 폐위하고는 이 소년 황제가 불쌍해 보였는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연금을 줬다. 로마를 세운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가 같은 장소에 머물렀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베르길리우스 시인의 예언처럼 마지막 로마 황제 로물루스 때 알은 깨진 것은 아닐까?

스파카나폴리 피자 거리

스파카나폴리 피자 거리

장소를 바꿔 단테 광장으로 나선다. 단테 광장 주변 또한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다. 이곳도 건축물은 회색빛으로 칙칙하고 좁은 골목에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단테 광장에는 서점이 즐비하다. 환락가 거리 속에 서점이 많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단테 광장 근처의 스파카나폴리(Spaccanapoli)는 피자 골목이다. 나폴리는 피자 원조 동네. 골목에는 길게 피자집이 이어지는데 유독 한 곳에만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린다.

스파카나폴리 피자 거리의 유명 피자집

낮에는 문을 열지 않고 오후 7시부터 개장한다. 시간보다 먼저 와서 줄서서 기다려야만 피자 맛을 즐길 수 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들어가 보지 못한 식당에 가기 위해 연이틀, 이 골목을 찾는다. 한 시간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주변 골목을 더 둘러본다. 무수한 교회를 만나고 오래된 건축물, 광장에 서 있는 동상들을 스치듯 지나친다. 그곳에 1224년, 페데리코(프리드리히) 2세가 만든 1폴리 페데리코 2세 대학교가 있다. 나폴리의 3개 대학 중에서 가장 전통을 자랑한다. 대학 건물에 카메라를 들이대니 보안원 아주머니는 들어와서 보란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아주머니는 지나가는 학생을 붙잡는다. 그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철학이 전공이라는 젊은 대학생하고 잠시 수다를 떨고 피자 골목으로 되돌아가 피제리아 지노 소르빌로 식당으로 들어선다.

나폴리 피자 골목의 마르게리타 피자

마르게리타 피자

나폴리 피자의 대명사는 마르게리타 피자. 1889년, 사보이의 여왕 마르게리타(1851~1926)가 남편 움베르토 1세와 함께 나폴리를 방문했다. 이때 당시 최고의 요리사였던 돈 라파엘 에스포지토는 여왕을 위해 특별한 피자를 준비한다. 그는 폼페이 근처에서 수확한 밀가루로 피자 반죽을 만들고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 그리고 바질을 토핑한다. 피자 반죽의 흰색에 토마토소스의 빨간색, 바질의 초록색이 어우러지게 한 것은 이탈리아 국기를 상징하기 위함이었다. 여왕은 피자 맛에 반한다. 여왕은 이후 요리사를 궁전까지 불러 피자를 만들게 한다. 당시 궁전까지 올라가는 것은 특별한 노력을 필요로 했다. 요리 도구와 재료를 전부 당나귀에 실은 뒤 궁전 부엌에 가서 여왕용 피자를 만들었다. 여왕의 이름을 딴 마르게리타 피자는 전 세계에 알려진다.

전통 피자 굽기
전통 피자 굽기

마르게리타 피자는 마리나라 피자, 엑스트라 마르게리타 피자와 함께 이탈리아 농무부가 지정한 나폴리의 3대 피자 가운데 하나. 재료와 만드는 방법이 정해져 있다. 치즈는 아펜니노 산맥 남쪽 지역에서 생산되는 모차렐라 치즈만 사용해야 한다. 보통 물소의 젖으로 만드는데 최근 들어 급격히 높아진 소비량 때문에 소의 젖을 사용하기도 한다. 크러스트 반죽은 손으로 해야 하며 두께는 2cm가 넘으면 안 된다. 또 피자의 가운데 부분은 두께가 0.3cm 이하이여야 한다. 토핑은 토마토소스와 모차렐라치즈, 바질 잎만 사용해야 한다. 구울 때는 반드시 장작 화덕에 구워야 하며, 전기 화덕은 금지된다. 참나무 장작으로 달군 돌 오븐에서 60∼90초 정도 구워야 하는 등의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피자 장인’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현재 3000명의 피자 장인이 활동 중이다. 나폴리 피자 제조법은 최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2017년 12월 7일)됐다.

Travel data

나폴리와 나폴리 만
나폴리와 나폴리 만

찾아가는 방법 한국에서 로마까지 직항 비행기를 타면 된다. 로마에서 나폴리까지는 기차를 이용하면 된다.

현지 교통 보메로 언덕에 오르려면 푸니콜라레(Funicolare)를 이용해야 한다. 푸니콜라레는 첸트랄레 선(Funicolare Centrale), 디 몬테산토 (Funicolare di Montesanto), 디 키아이아 (Funicolare di Chiaia)선 이 있다. 대부분 지하철역에서는 약간 떨어져 있다.

음식 정보 마르게리타 피자는 물론 튀김류 등 먹거리가 푸짐하다. 필자가 연 이틀째 방문한 곳은 지노 소르빌로(Gino Sorbillo)다.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알고 몰리는 유명한 피자집이다. 문 열기가 바쁘게 손님들이 몰려든다.

치즈가 들어간 튀김
치즈가 들어간 튀김

숙박 정보 라 콘트로라(www.lacontrora.com) 호스텔이 괜찮다.

홈페이지 http://www.comune.napoli.it

기타 정보 중앙역에서 사철을 타고 폼페이, 소렌토, 카프리, 아말피 등을 연계하면 된다. 휴양지는 숙박비가 비싸서 나폴리에 거점을 두고 움직이는 게 좋다.

저작권자 © 여성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Editor's Pick
최신기사
포토뉴스
추천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