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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솔직 입담 윤여정

  • 기자명 임언영 기자
  • 입력 2024.03.02 08:00
  • 수정 2024.03.08 09:14
  • 댓글 0
  • 사진(제공) : CJ ENM
“잘 지내셨냐”는 인사와 “살아 있었다”라는 대답으로 핑퐁 같은 인터뷰가 시작됐다. 까칠한 것 같으면서 다정하고 가벼운 것 같으면서 묵직한, 세상 어디에도 없는 매력적인 화법을 가진 배우. 윤여정을 만났다.

“<파친코> 찍고 좀 쉬었다. 이 나이에 외국 왔다 갔다 하는 건 너무 힘든 일이다. 체력이 너무 딸리고 힘들더라. 작정하고 쉬려고 했다. 내가 나이에 비해서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오는 편이지만 상(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을 탄 후에는 평소보다 더 많이 들어왔다. 역할도 주인공에다 젊은 사람들과 함께 나와서 비중이 컸다. 그런 작품들을 받아보면서 내가 인생을 많이 산 사람으로서 씁쓸했다. 나는 쭉 여기에 있었고 활동했던 사람인데 상을 탔다고 해서 등급을 높여주는 건가 싶더라. 나는 나대로 살리라 했다.”  
영화 <도그데이즈>는 윤여정의 ‘나는 나대로 살리라’ 정신이 발휘되어 출연하게 된 작품이다. 한국 최초의 오스카 수상자가 된 이후 달라진 대접이 낯설기도 불편하기도 할 즈음이었다.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촬영 당시 배우와 조감독으로 인연을 맺었던 김덕민 감독이 입봉작을 만든다는 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출연을 결심했다. 윤여정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시 두 사람에게는 전우애가 있었다. 
“나중에 감독으로 입봉하면 무조건 출연해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19년이나 입봉을 못해서 가슴이 아팠다. 감독 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가 싶어서 출연하게 됐다. 우리 나이에 역할 좋고 감독 좋고 시나리오까지 좋은 건 잘 없다. 사람을 보든 시나리오를 보든 돈을 보든 그때그때 기준에 따라 출연을 결정한다. 이번 영화는 김덕민 감독을 보고 출연을 결정했다.”
<도그데이즈>는 성공한 건축가와 MZ 라이더, 싱글 남녀와 초보 부모 등 다양한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반려동물을 만나면서 달라지는 이야기를 그림 작품이다. 윤여정은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지만 반려견에게는 누구보다 다정한 세계적 건축가 민서 역을 맡았다. 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집에서는 혼자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외로운 노인이기도 하다. 라이더 역의 탕준상과의 에피소드로 젊은 세대와의 소통, 멋진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의리로 받아들인 역할에 대한 느낌은 어땠나. 상투적인 역할이다. 점수로 매기면 30점.
 
성공한 건축가와 싱크로율이 높다. 본인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느꼈나?
안 재봐서 모른다, 싱크로율은. 윤제균 감독(제작자)이 수완이 좋은 사람이다. 시나리오가 너무 많이 들어와서 안 보려고 했는데 이건 봐야 한다더라. 윤여정으로 이름을 지어서 다른 사람을 캐스팅할 수 없다면서. 그때 대본에 이름이 윤여정이었다. 나를 생각했다니까 나를 대입해서 썼겠지 뭐. 

MZ세대 라이더가 된 탕준상 배우와 호흡이 좋아 보였다. 나는 요즘 젊은 애들을 모른다. 탕준상 보고 기절했는데, 걔 아버지가 내 아들이랑 동갑이더라. 깜짝 놀랐다. 아들 딸뻘과는 많이 (연기)해봤지만 손자뻘은 처음이었다.  

연기는 어떻게 봤나. 현장에서 연기적인 조언도 들려줬나? 내가 연기학원 선생이 아니라서 그건 모르겠다. 걔가 할 만하니까 뽑았겠지. “얘는 어떻게 이렇게 예뻐”라며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이 못 된다. 늙어서 시들한 나이다. 

‘청춘’과 ‘꼰대’로 불리는 두 세대가 서로를 알아가고 성장하는 대사들이 많았다. 연기하면서 공감했는지? 나는 너무 좋다는 표현을 못하는 배우다. 무뚝뚝하고 무심하다. ‘어쩜 이렇게 맞는 말을 했을까’가 아니라 ‘내가 할 만한 말을 했네’라고 생각했다. ‘잘 썼네’까지는 아니었다. 그 여자가 세계적인 건축가인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할머니는 뭐 그리 잘 살았냐”는 대사가 있는데, 맞는 말 아닌가. 그 아이를 통해 소통하는 것도 배웠고,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아이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인물이 성장했다. 

애드리브도 있었나? 대사 수정하는 배우들, 애드리브 많이 넣는 배우들 개인적으로 싫어한다. 내가 예전에 교육받은 게 있다. 예전에는 소설가들이 TV 작품을 썼다. 애드리브를 한다는 게 있을 수 없다. 한 선생님이 “나는 토씨 하나를 가지고 밤을 새고 연구하는데 그렇게 고치면 그렇죠”라고 하셨는데 그 말을 기억한다. 작가들이 대사를 쓸 때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고치고 또 고치고 했겠나. 나는 구식 배우라서 그런지 그런 걸 잘 안 한다. 

극중 민서는 좋은 어른이다. 좋은 어른은 뭐라고 생각하나. 내가 좋은 어른이 아니라서 모르겠다. 자신을 알면 얼마나 좋겠나. 나는 나를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무의식의 나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의 ‘롤모델이다’, ‘존경합니다’라는 말을 하나도 안 믿는다. 세상을 많이 살아서 안다. 그냥 말할 뿐이다. 안 속는다. 

실제로 많은 후배들이 윤여정을 롤모델로 삼고 있고 그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롤모델이 있을 필요가 있나? 저마다 자기 인생을 산다고 생각한다. 롤모델이라는 말이 언제부턴가 나와서 유행어처럼 쓰는데, 나도 없었고 후배들도 없기를 바란다. 예전에 김혜자 언니가 우리의 우상이었으니까, 그때는 다 그 언니처럼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때도 그랬다. “대한민국에 김혜자는 한 명만 필요하다. 다른 걸 해야 한다. 윤여정은 윤여정이 되어야지.”  

반려견을 키우시나? 안 키운다. 한 번 키웠는데 도망갔다. 찾느라 2년을 헤맨 안 좋은 추억이 있다. 강아지를 키우는 것은 아이 하나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려면 내 인생을 포기해야 하는데 나는 너무 늙고 힘들어서 내 마음 하나도 건사하기 힘들다. 

실제 윤여정의 반려나 위로의 대상이 궁금하다. 좋은 친구들 만나서 와인 마시면서 수다 떨 때 즐겁다. 어느 유명한 사람이 그러더라. 늙을수록 외로워야 한다고. 누가 옆에 있으면 기대를 하기 때문에 실망감이 크다. 내가 혼자 독립된 사람으로 사는 것이 맞고 외로운 걸 연습해야 한다. 그런데 새로운 문명이 나오면 쓸 줄을 몰라서 일러줄 사람이 있어야 할 것 같긴 하다. 그런 건 불편한 일이지만 나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외로울 자신은 있다. 

 

 

# “연기는 나의 일상… 
그걸 하다가 죽으면 행복하지 않을까“

“내가 이야기하는 건 반세기 전 이야기다. 내가 어렸을 때는 적령기가 되면 시집을 갔어야 했다. 연기는 잠깐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반추해보면 다른 사람들은 연극을 하다 오거나 연영과 출신이거나 그랬는데, 나는 독특해서 탤런트 시험에 뽑힌 것 같았다. 연기할 때 내가 정식으로 뭔가를 거치지 않은 배우라는 열등의식이 있었을 거다. ‘빨리 시집가서 잘 살아야지’ 했는데 뜻대로 안 되어서, 다시 오게 됐을 때부터는 굉장히 감사했다. 생각을 해봤더니, 내가 대기업에서 잘나가는 임원이었다고 해도 10년 동안 공백을 가진 다음에 나를 다시 기용할 일은 없지 않나.”
‘한국 최초의 오스카 수상 배우’라는 타이틀이 생겼지만 그의 배우로서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윤여정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전하듯 본인의 지난 시간을 축약해서 들려주면서, 본인은 실용적인 사람이라 아티스트가 못 된다고 말했다. 
“나에게 다시 배역을 주고 일을 시켜주는 것을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했다. 아무 불만 없이. 못하는 걸 알았기 때문에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했다. 이제는 일흔이 넘었다. 살만큼 많이 살았다. 내다볼 게 없는 나이다. 돌아볼 것밖에 없다. 이제는 그냥 일이 좋아서 한다. 시나리오가 좋아서 하든 감독이 좋아서 하든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아프고 아프면 일상을 못 산다. 물론 이런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짜증이 안 나는 건 아니다. 현장에서 애들이 이상하게 굴면 짜증낸다”(웃음).

윤여정은 타고난 배우인가 성실한 배우인가. 남들이 평가해야 하는 부분이지. 나는 타고난 배우라는 생각은 안 해봤다. 주위를 보면 타고난 사람들이 많더라. 여러 작업을 해보면 안다. 나는 타고난 것이 없다는 깨달음을 일찍이 얻었다.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연기의 동력도 성실함인가? 아카데미는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지름길은 없는 것 같다. 내가 연습하고 많은 대사를 외우는 것은 타고난 게 없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버릇이었다. 미모와 같은 타고난 건 다 없어질 수 있다. 유지하는 건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열심히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명언인 것 같다. 클래식 라이브를 하는 사람들도 보면 피나는 노력을 한다. 조성진도 하루 서너 시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연습한다. 그걸 당할 수는 없다. 재주는 잠깐 빛날 수 있지만 유지하는 건 열심히 안 하면 안 된다. 

쉴 때는 뭐하나. 가만히 미라같이 있다. 슬픈 건 예전에는 쉴 때 책을 봤는데 언젠가 깜짝 놀랐다. 어려운 책이 아닌데 전 페이지를 읽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는데 전 페이지 내용이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책을 읽어도 별로 남는 게 없다. 자괴감이 들었다. 기억력이 떨어져서 뇌에 문제가 생겼나 했다. 그래서 되는 대로 살기로 했다. 나를 위해서 읽는 책이니까 그냥 또 읽는다.  

건강관리법도 궁금하다. 배우는 육체노동자다. 현장에서 늙었다고 대우해줄 수 없잖나. 젊은 사람이랑 똑같은 역할로 하니까 너무 힘들다. 에너지가 고갈되는 걸 느낀다. 65세부터 운동을 한다. 일주일에 두세 번 트레이너가 집으로 온다. 시작할 때는 너무 늦지 않았나 했는데, 지금은 열심히 해서 우등생이다. 내가 보기와는 달리 굉장히 성실한 편이다. 그래서 남 성실하지 않은 꼴을 못 본다. 

차기작은 뭔가. 반쯤 예스를 한 게 있다. 시나리오를 보고 하겠다고 한 거다. 독립영화라서 돈은 없다(웃음). 시나리오를 하도 보니까 반 무당이 되어 있지 않겠나.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인데 있을 법한 이야기고 무겁고 우울하지 않고 밝고 건강하게 풀었더라. 내가 노년에 할 수 있는 영화겠구나 싶어서 선택했다. 

아직도 하고 싶은 역할이 있나? 노희경 작가가 윤여정은 여전히 멜로를 할 배우라고 말했는데. 너무 이상한 애다. 그 이야기 좀 하지 말라고 했다. 하고 싶은 역할 같은 건 별로 없다. 나에게 역할이 왔을 때 어떻게 다르게 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편이다. 내가 가만히 앉아서 송혜교랑 같은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 너무 숭하지 않나?

오스카 수상으로 배우로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은 셈이다. 또 다른 목표가 있나? 아유, 상 안 받았으면 어쩔 뻔했나. 배우로서 목표는 없다.

윤여정에게 연기는 뭔가. 오래 하니까 내 일상이 된 것 같다. 일상을 못 살면 죽는 거 아닌가. 책에서 읽었는데, 제일 행복한 기분은 자기 일을 하다가 죽는 거라고 하더라. 죽음을 많이 본 의사가 쓴 책이었다. 나에게는 연기가 일상이 됐으니 그걸 하다가 죽는 게 행복하지 않을까. 무대에서 죽겠다는 식의 극적인 말은 못하겠다. 자기 일상을 살다가 죽는 게 행복한 죽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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