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기진의 서촌 스케치 11] 파리의 나그네

  • 기자명 이기진
  • 입력 2024.03.01 08:00
  • 댓글 0

파리에 와 있다. 방학이 되어 파리에 간다고 하니 주위에서 “또 가요?!” 이런 말을 많이 한다. ‘앗 또인가?’ 뜨끔하지만 내 상황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이미 내 손아귀에서 떠난 아이들, 나보다 몇 백배 더 바쁜 딸아이들. 외톨이가 된 나에게는 서울의 서촌이나 파리의 다락방이 별 차이가 없다. 차원을 달리한 평행우주의 다른 공간처럼 서울과 파리의 두 공간이 존재할 뿐이다. 파리에 오면 더 좋고 서촌에 있으면 더 편하고 이런 느낌도 없다. 다른 멋진 두 개의 우주가 있을 뿐이다. 두 세계가 분명 존재하지만 동시에 둘을 다 가질 수 없는 세계들이 있을 뿐이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일주일간 밤을 새웠다. 올해 2월로 종료가 되는 연구비를 신청하기 위해 계획서를 써야 했다. 서울에서 잔뜩 들고 온 서류를 들춰가며 책상에 앉아 있어야 했다. 보온병에 커피를 내려놓고 마시면서 서류를 작성했다. 올해는 경쟁이 더 치열해진 연구비. 연구비를 받지 못하면 앞으로 손가락을 빨고 있어야 한다. 현실이다. 누워 있다가 이런 생각이 들면 정신이 바짝 들어 컴퓨터 앞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연구비 신청을 마무리하자 파리 패션위크에 온 채린이의 문자가 날아왔다. “아빠 파리야?” 이 문자를 받은 시간 나는 공동연구를 위해 아르메니아공화국의 대학으로 가려고 샤를 드골 공항 터미널에 앉아 있었다. 채린이 역시 파리에서 행사를 마치고 어렵게 시간을 만들어 문자를 했는데 나는 떠나야 했다. 두 개를 동시에 가질 수 없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나그네’ 같은 마음이 된다.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나그네의 마음.

파리 다락방을 얻어 우리 식구가 함께 살았던 적이 있다. 서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파리에서 ‘포닥(post doctor)’을 하기 위해 서울 집 전세를 빼서 파리의 다락방을 얻었다. 채린이가 한 살 때다. 유모차를 타고 우유병을 물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파리 오스테를리츠역 근처의 6층 다락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당시 전세를 빼 파리로 떠난다고 하자 주위의 어른들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명분은 공부를 한다고 가는 것 같지만 분명 ‘이놈’은 딴생각이 있다고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당시 나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다락방 6층까지 채린이를 위해 에비앙 물 6병들이 두 박스를 두 손으로 들고도 손쉽게 오르던 힘 있던 시절이었다. 세 명이 동시에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 다락방. 집사람과 채린이가 침대 겸 쓰는 소파에서 잠이 들면 난 마룻바닥에서 잠을 잤다. 작은 일인용 식탁이 창가에 있어 집사람과 함께 밥을 먹었고 다들 잠이 들면 그 책상에서 밤늦도록 공부했다.
당시 매일 해먹었던 음식은 파스타였다. 마늘, 버터, 후추의 단정한 알리오올리오 파스타가 물리면 양파가 가득 들어간 토마토소스와 간 소고기로 만든 라구 파스타로 영양 보충을 했다. 와인 한 잔에 잔뜩 뿌린 올리브기름과 슈퍼에서 산 팔마산 토핑 치즈를 잔뜩 얹어 먹고 마지막에 바게트로 접시에 남은 소스를 깨끗하게 닦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집사람과 채린이가 새근새근 잠이 들면 작은 책상에 앉아 어두운 밤하늘 별빛을 바라보면서 하나도 정해진 것 없는 끝없는 불안한 미래 앞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이런 걱정을 했던 시절. 하지만 그 시절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달빛처럼 지나갔을까?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달빛 같은 추억을 남기고. 서울에서 갑자기 문자가 날아온다. “아빠 뭐해!?” 막 파스타를 삶으려는 순간이었다. 문자를 보고 국수 삶은 사진을 찍어 보냈다. 브르타뉴 사르딘 깡통을 선물 받은 게 있어 사르딘 파스타를 해먹으려던 참이었다. 사르딘 파스타는 매력이 있다. 여름 토스카나에서 사온 올리브기름을 잔뜩 뿌려 먹으면 혼자 먹어도 미소가 지어지는 맛이다. 
다 먹고 나니 문자가 온다. 
“아빠 파스타 사진 좀!?” 
이런…, 다 먹었는데…ㅠㅠ

 

이기진은…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물리학자이자 동화책 작가, 로봇 디자이너, 영화배우, 갤러리 사장. 걸그룹 2NE1 멤버 CL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여성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Editor's Pick
최신기사
포토뉴스
추천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