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롭스코예에서 약 3~4km 떨어진 곳에 트리고르스코예 영지가 있다. 25살의 젊은 푸쉬킨이 지루하기 짝 없는 미하일롭스코예 영지에서 유모 아리나와만 시간을 보냈을까? 절대 그럴 수 없고, 그렇지 않았다. 푸쉬킨은 매일, 말을 타거나 걸어서 트리고르스코예의 오시포프와 울프의 집을 찾았다. 그곳은 푸쉬킨의 ‘놀이터’였다. 특히 “예브게닌 오네긴”은 트리고르스코예의 사람들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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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관광객

 

미하일롭스코예 야외 풍경의 매력

미하일롭스코예 박물관 단지를 둘러 보고 밖으로 나온다. 사실 여행자의 시선은 내내 영지 밖의 풍경에 꽂혀 있었다. 야트막한 구릉지에는 초지가 일렁인다. 저 멀리에는 풍차처럼 보이는 밀 방앗간이 눈에 잡히고 화구를 펼치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보인다. 박물관 뒷문에서 봤던 소롯 강줄기가 아슴프리 보이는 듯 상상한다. 휘어진 사잇 길을 따라 관광객들은 산책한다. 인공적인 박물관보다 훨씬 더 자연미가 있는 영지 밖 풍경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푸쉬킨이 무수히 걸었을 그 길을 따라 가보고 싶지만 프스코프로 되돌아가야 하는 여행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안나 케른’과의 로맨스가 있던 트리고르스코예로 가는 오솔길이 눈에 밟히지만 차마 그 쪽으로도 갈 수가 없다. 그냥 푸쉬킨의 망명지를 찾은 것으로 위안 삼으면서 여행 안내소의 타냐가 그려준 약도를 따라 직선으로 이어지는 삼나무 숲길을 따라 걷는다. 수령이 오래되고 빽빽한 삼나무 숲길 산책로는 최고다. 가는 길 중간중간에 간간히 벤치가 놓여 있고 십자가 무덤도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 삼나무 숲길을 푸시킨은 말을 타기도 하고 상념에 빠져 걸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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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롭스코예 야외 풍경

 

 

일명 ‘푸쉬킨 마을’, 부그로보

숲길의 끝은 길지 않다. 이내, 찻길도 있고 주차장도 있고 영문판 마을 안내도가 있는 부그로보(Bugrovo, 1.7km)라는 마을을 만난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많이 서 있고 앞 쪽으로는 오래된 러시아 나무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다. 물레방앗간, 주택, 별채, 헛간, 정원 등이 한 마을을 이룬다. 부그로보 마을은 미하일롭스코예 영지와 스베아토고르스키와 사빈카 고리 중간에 있는 시골마을이다. 주변의 미하일롭스코예나 트리고르스코예 마을처럼 귀족들의 영지가 아니라 농노, 노동자들의 마을이다. 1800년대 러시아 촌락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마을. 푸쉬킨 시대에는 호수 기슭의 작은 제분소 마을로 불렸다. 

 

가옥의 구조는 트리 로우(three-row, trehryadki) 형태다. 집은 세 개의 건물로 나뉘어져 있다. 검은 색과 흰색 집으로 나누고 그 옆에는 각종 도구를 보관하는 헛간과 외양간이 있었다. 지붕은 짚으로 덮었고 화재 안전을 위해 흙을 얹었다. 당시 프스코프 지방 농민들의 집 구조 형태다. 푸쉬킨은 이 마을을 방문해 농민들과 소통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 마을은 부그로보라는 지명과 함께 “푸쉬킨 마을”로 불린다. 문학 민족학 박물관이 있는데 가이드 투어로 방문할 수 있다. 지역 공예품 전시관에서는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필자는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여유롭게 여정을 즐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그냥 마을 입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물레방아간을 봤을 뿐이다. 연못의 물이 흘러내리는 지점에 만들어진 물레방아간. 첫 기록은 1761년. 이 물레방아는 기장, 호밀, 메밀 및 기타 곡물을 밀가루로 만드는 방앗간이었다. 이 마을을 기점으로 반대편쪽으로 가면 작가 세르게이 도블라토프(1941~1990) 박물관(Sergey Dovlatov Museum)으로 갈 수 있다. 세르게이 도블라토프는 러시아 기자이자 아르메니아와 유대인 출신의 작가로 20세기 후반에 가장 유명한 국제적인 러시아 작가였다. 그는 푸시킨 보호 구역에서 여름 투어 가이드로 일했다. 그는 푸쉬킨 힐즈(Pushkin Hills)라는 자서전를 출간(1983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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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포바의 집

 

 

프라스코브야의 트리고르스코예 영지

부그로보 마을을 떠나기 전에 트리고르스코예(Trigorskoye) 마을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부그로보에서 트리고르스코예 마을까지 가는 도로는 지도상에는 없지만 분명히 최단 거리다. 트리고르스코예 이야기는 푸쉬킨 작품 속에서 168번이나 언급되는 마을이다. 필자는 비록 부그로보만 보고 곧추 푸쉬킨스키예-고리로 나왔기에 트리고르스코예 마을을 찾지 못했지만 푸쉬킨스키예-고리 여행에서 절대 간과할 수 없는 곳이다.

 

푸쉬킨은 미하일롭스코예 영지에 올 때마다 트리고르스코예 마을을 찾았다. 트리고르스코예 마을에는 오시포프와 울프의 집(Osipovy wulf House)이 있었다.

트리고르스코예 영지는 푸쉬킨 당시 프라스코브야 알렉산드로브나(Praskovya Alexandrovna, 1781~1859)의 소유지였다. 이 영지는 1762년, 프라스코브야 할아버지 막심(Maxim Dmitrievich Vyndomsky) 사령관이 예카테리나 2세에게 하사받았다. 1780년, 프라스코브야의 아버지 알렉산더가 물려 받으면서 별채 등 건물들을 새로 지었다. 알렉산더가 죽자 딸 프라스코브야의 소유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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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포바의 집안 그림

 

 

프라스코브야는 일찍 어머니를 잃고,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할 정도로 똑똑한 여성이었다.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니콜라이 울프(Nikolai Ivanovich Wulf). 그와 14년(1799~1813)을 살면서 안나(Anna, 1799~1857), 알렉세이(Alexey, 1805~1881), 미하일(Mikhail, 1808년생), 에우프라시아(Eupraxia, 1809년), 발레리안(Valerian, 1812년), 총 다섯 자녀를 두었다. 1813년에 거의 동시에 남편과 아버지가 죽었다. 첫 남편이 죽고 4년 후인 1817년 후반, 이반 오시포바(Ivan Safonovich Osipova, 1773~1824)와 재혼한다. 오시포바에게는 이미 알렉산드라(Alexandra, 1808~1864)라는 딸이 있었다. 오시포바 사이에서는 마리아(Maria, 1820)와 캐서린(Catherine, 1823)을 낳았다. 그러나 7년 후인 1824년(43세) 남편이 죽었다. 프라스코브야의 자녀는 모두 합해 8명이다.

 

그녀는 트베리 주(Staritsky 지역의 Koinnhovo, Rogue 및 Niva의 마을 Malinniki 마을)에 살다가 본 집을 새로 건축하는 동안 트리고르스코예 영지로 이사한다. 처음에는 오래된 저택에서 살다가 아이들이 성장하자 이전 리넨 공장 건물을 개조해 옮겨 살았다. 프라스코브야는 죽을 때까지 46년 동안 이 영지를 관리했다. 당시 영지에는 700명의 농노가 있었다.

 

푸쉬킨과 프라스코브야의 집

1817년 여름, 푸쉬킨은 트리고르스코예 영지를 첫 방문한다. 그 이후부터는 미하일롭스코예 영지에 올 때마다 이 집을 찾는다. 망명 생활 때는 점심 식사 후에는 거의 매일 오시포프 집을 찾았다. 긴 유배생활과 망명생활까지 겹친 25세의 젊은 푸쉬킨의 삶은 암울했고 외로웠다. 영지에서 거의 홀로 보내며 무료해지면 지하실에서 권총을 들고 표적 연습을 하거나, 호수에 나가 본인의 시를 큰 소리로 읽었다. 조용한 호숫가의 오리들이 푸드득 놀라 도망칠 정도로 큰 소리로 말이다. 젊은 푸쉬킨의 유일한 재미는 이웃 마을 트리고르스코예 영지를 찾는 일이었다. 말 타고 한 시간 정도만 가면 한껏 차려 입은 젊은 여성들과 마을 청년, 손님으로 찾아온 유명작가들이 모여 매일 파티를 열었다. 남자 손님들이 밤새 머물 수 있는 목욕탕도 있었다.

 
프라스코브야의 집 안에는 방이 여러 개 있었다. 특히 그 방에는 도서관이라고 불리는, 책 많은 서재가 있었다. 프라스코브야는 이 도서관에서 철학, 정치,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 문학에 관한 책을 읽었다. 그녀는 똑똑한 여성, 세련된 안주인 및 고고한 아내였다. 아이들에게도 교육을 철저하게 시켰다. 많은 러시아 시인과 작가들이 그녀와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안톤 델비그, 바랴틴스키 왕자, 코슬로프, 투르게네프, 위아제엠스키 왕자 등과 친했다. 푸쉬킨은 프라스코브야 서재에서 책들을 가장 많이 읽은 정규 독자였다. “보리스 고두노프”의 자료를 찾았다. 푸쉬킨은 인생이 끝날 때까지 그녀와 친구였다. 프라스코브야는 죽을 무렵에 친척 및 친구와의 모든 서신을 불태웠지만 푸쉬킨 것만은 보관했다.

 

당시 옛 집은 오시포프와 울프의 박물관이 되었고 푸쉬킨의 편지 24개와 그에게 보낸 편지 16개가 보존되어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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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과 안나 케른

 

 

푸쉬킨과 안나 케른 이야기

세기의 바람둥이 푸쉬킨이 미하일롭스코예에서 로맨스가 없을 리 없다.

프라스코브야의 딸들 모두가 시인을 사랑했고 그와의 우정을 소중히 여겼다.

1817년, 첫 방문 때, 푸쉬킨은 프라스코브야의 장녀인 동갑내기 안나 니콜라에브나 울프(Anna Wulf, 1799-1857)와 잠깐 사귄다. 18살의 안나 니콜라브나 울프는 그해 7월~8월까지 푸쉬킨을 만났다. 그녀의 생일날 “나는 당신의 황금빛 봄의 목격자였습니다‘라는 시를 썼다(이 편지는 출판되었다). 하지만 푸쉬킨은 망명시절에 그녀에게 고통을 주었다. 그녀는 예쁘지 않았다.

 

미하일롭스코예에서 가장 유명한 로맨스는 안나 케른(Anna Kern, 1800~1879)이다. 푸쉬킨이 남긴 연서 “케른에게(to Kern, 1825년)는 아직까지도 러시아어의 최고의 사랑 시로 유명하다. 안나 케른은 망명 첫 해에 사랑에 빠진 여인이다. 푸쉬킨의 여성편력을 아는 이라면 푸쉬킨과 케른의 로맨스는 그냥 그 당시에 충실하게(?) 사랑했던 한 여인이었다. 실제로 푸쉬킨은 망명지를 벗어나면서 올레닌과도 결혼하려 했었고 결국 곤차라바를 만나 결혼도 했다. 그런데 푸쉬킨과 케른과의 이야기가 빈번하게 회자되고 있을까? 푸쉬킨이 죽고 나서도 안나는 삶을 길게 살았는데 그녀는 ‘회고록’을 썼다. 회고록에는 푸쉬킨 이야기가 등장했고 가난에 쪼들려 투르게네프가 푸쉬킨 박물관을 만들고자 했을 때, 편지를 5루블에 팔기도 했다. 그녀가 살아 있는 한, 푸쉬킨은 회자되었다. 무엇보다 케른의 인생 이야기가 매우 드라마틱하다(이미 필자가 쓴 토르조크 편에서 케른의 묘지에 대한 이야기를 말한 적 있다). 트리고르스코예 영지 주변의 참나무 숲 사이에는 ‘케른 벤치’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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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케른

 

안나 케른의 삶

안나 케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케른의 집안은 귀족집안이었다. 할아버지(Mark Fedorovich Poltoratsky)는 러시아 오페라 가수이자 주 의원이었고 외할아버지는 오룔의 주지사(Ivan Petrovich Wulf)였다. 아버지(Peter Markovich Poltoratsky)는 케른의 어머니(Ekaterina Ivanovna Wulf)와 결혼한다. 그렇게 따지면 케른의 어머니는 프라스코브야의 첫 남편(Nikolai Ivanovich Wulf)의 올케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오룔의 영지에서 살다가 3살 때 트베리 지방(프라스코브야의 트베리 영지)으로 이사했다. 케른은 프라스코브야의 장녀인 사촌 안나 울프와 함께 12살까지 자랐다.

 

이후 가족들은 폴타바(Poltava, 현재 우크라이나) 지방으로 이사한다. 안나의 아버지가 폴타바의 법원 합창단장이었다. 케른의 엄마는 착했지만 몸이 약했고 남편 이외에 아이들은 뒷전이었다. 외로운 어린 케른은 독서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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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케른의 남편

 

 

그녀의 첫 결혼은 17세. 52살이나 되는 군인 장교(Yermolai Fiodorowicz Kern, 현재 시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나이차 많은 부부가 대중적이었던 듯하다)였다. 케른은 남편과의 사이에서 두 딸(Ekaterina(1818년)와 Anna(1821년)을 낳는다. 케른의 남편은 수비대로 거주지를 수시로 옮겨 다녀야 했다. 엘리자베트그라드(Elizavetgrad), 프스코프, 도르팟(Dorpat), 리가 등.

 

케른은 1819년 초,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이모 올레니나(EM Olenina)의 집에서 처음으로 푸쉬킨을 봤다. 푸쉬킨은 그녀를 기억하지만 케른은 관심이 전혀 없었다. 당시 케른에게는 사랑에 빠진 어떤 남자(지방 토지 소유자인 A. G. Rodzianko)와 바람을 피우고 있는 중이었다. 케른이 리가에서 트리고르스코예 영지로 여행 온 것은 1825년 6월. 때마침 망명 첫 해인 푸쉬킨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안나 케른의 회고록에 “푸시킨은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때로는 시끄럽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소심하고, 때로는 상냥하고, 때로는 지리멸렬해 1분 안에 어떤 기분이 될지 추측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 달 동안 이들은 거의 매일 만났다.

 

분명코 푸쉬킨은 케른에게 사랑의 열병에 빠진 듯하다.

 

"매일 밤 나는 정원을 거닐며 마음 속으로 반복합니다. 그녀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녀가 우연히 발견한 돌덩이가 내 책상 위에 놓여 있고, 시든 가지의 헬리오트로프 옆에 있습니다. 나는 많은 시를 씁니다. 그리고 이것은 확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모든 증상이 있습니다 ... "

 

푸쉬킨은 그녀가 떠난 지 며칠 후 케른의 여동생에게 편지를 썼다.

 

1825년 7월, 프라스코브야는 케른을 리가의 남편에게 억지로 데려갔다. 떨어져 있던 7월~ 9월까지 둘은 많은 서신을 주고 받는다.

 

푸쉬킨과의 재회는 그해 10월. 그때 케른은 남편과 함께였다.케른은 남편과 리가로 돌아간 후 남편과는 영원히 관계를 끊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간다. 안나는 푸쉬킨의 친구인 안톤 델비그(Anton Delvig)와 친구가 되어 아내 소피아와 함께 아파트에서 살았다. 사촌들이나 푸쉬킨은 물론 많은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만났다. 그들은 계속 만나고 종종 매우 긴 대화를 나눴다. 1년 반 동안 케른과 서신을 계속했지만 푸쉬킨은 나중에 그녀를 " 바빌론의 창녀 "라고 불렀다. 그렇게 둘의 관계는 끝났다.

 

푸쉬킨에게 있어 케른은 그냥 그 당시에 충실하게(?) 사랑했던 한 여인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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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른의 벤치

 

 

푸쉬킨 사후의 케른의 삶

케른은 푸쉬킨과 헤어진 후 바로 나이 26세(1826년)일 때, 16세의 사촌 샤샤(Sasha, Alexander Vasilyevich, Markov-Vinogradsky)를 만나 두 번째 결혼했다. 하지만 그녀는 법적으로는 여전히 유부녀였다. 샤샤와의 사이에서 3년 후, 사생아인 아들 알렉산더(Alexander)가 태어났다. 그녀의 본남편은 1841년 초에 사망했다. 장군의 미망인인 안나는 상당한 연금을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1842년 7월 25일, 그녀는 그녀의 애인과 결혼했다. 동거 16년 후이다. 이제 안나의 성은 케른에서 마르코바(Markova-Vinogradskaya)가 되었다. 그들은 아주 가난하게 살아야했다. 처음에는 남편의 고향에서 수년 동안 살았다. 

 

1855년, 남편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일하게 된다. 남편은 열심히 살았지만 박봉이어서 안나는 번역으로 돈을 벌어야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계는 깨지지 않았다. 남편은 1865년, 은퇴했지만 역시 작은 연금으로는 도시에서 생활할 수 없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떠났다. 그들이 어디에서 살든 배우자는 빈곤이 따라다녔다. 안나는 오시포바의 집 박물관을 만들 때 푸쉬킨의 편지를 5루블에 팔았다. 10살 연하였지만 남편이 먼저 죽었다(1879년). 4개월 후인 그해 안나도 79세로 죽었다.

 

푸시킨의 연서는 번역되어 나왔다.

 

경이로운 순간을 기억하노라/덧없는 환상처럼/순수한 아름다움의 수호신처럼/그대가 내 앞에 나타났던 순간을./절망적인 우수의 고뇌 속에서/소란한 세상의 불안에 휩싸여 있을 때/그대의 상냥한 목소리가 오랫동안 울렸고/그대의 사랑스런 자태가 꿈 속에 보았노라./세월은 갔고, 폭풍우의 반항적 격정은/옛 시절의 꿈을 와해시켰고/난 그대의 상냥한 목소리를,/그대의 하늘 같은 모습을 망각하였네./나의 나날은 고요히/오지로, 유형의 암흑 속으로/神性도, 영감도 없이,/눈물과 생과 사랑도 없이 빨려갔노라./내 영혼이 각성이 찾아들었으니/그대가 또 다시/덧없는 환상처럼/순수한 아름다움의 수호신처럼 나타났노라./그리하여 내 가슴은 황홀함에 뛰고/거기에 새로이/신성, 영감, 생, 눈물, 사랑이 소생하였노라.

 

푸쉬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의 모티브

푸쉬킨의 짧은 인생(38세)에서 가장 창작열을 올리던 시기는 영지시대였다. 푸쉬킨은 모스크바에서 태어났고 결혼 후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살았고 인생 대부분을 유배지를 떠돌며 살았다. 그중 푸쉬킨에게는 이 영지는 특별했다. 어릴 때부터 자주 찾았던 곳. 1817년(18세), 차르스코이 셀로 리체이 학교를 졸업 후, 제일 먼저 달려온 곳도 이곳이었다. 그는 1824년, 차르 니콜라스 1세는 푸쉬킨을 오데사 유배지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오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차르에게 서한을 잘 못 보내는 바람에 2년 동안(1824년~1826년, 25세~27세) 이 영지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푸쉬킨은 홀로 고립된 당시, 이 영지에서의 망명 생활은 창작력을 높혔다. 불안정할 때 더 창작욕구가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다.

 

푸쉬킨은 "시가 나를 구했고, 나는 내 영혼을 부활 시켰습니다"라는 말을 나중에 썼다.

그는 예브게니 오네긴(Eugene Onegin)과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 1831년에 출판되었지만 1866년까지 검열에 의해 공연이 승인되지 않았다)를 포함한 사랑의 시, 집시, 눌린(Nulin) 백작 등을 집필했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1825년에서 1832년 사이에 출판되었다. 최초의 완전한 판은 1833년에 출판되었으며, 현재 인정되는 버전은 1837년 출판에 근거하고 있다.

 

줄거리는 “사교계의 스타 오네긴은 숙부가 죽자 시골로 낙향하는데, 여기서 오네긴은 블라디미르 렌스키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와 친구가 된다. 렌스키는 타티아나의 언니 올가 라리나의 약혼자다. 시골을 방문한 오네긴을 본 타티아나는 첫 눈에 반해 그에게 사랑의 편지를 쓰게 되고, 다음날 아침에 그에게 사랑고백까지 하게 되지만 오네긴은 타티아나에게 자신과 결혼하면 불행해질 것이라고 말하며 거절한다. 타티아나가 오네긴에게 거절당한 다음날 저녁, 라리나 집안에서는 타티아나의 생일파티를 연다. 많은 사람들이 파티를 즐기고 오네긴 역시 타티아나와 춤을 추지만, 그는 이러한 시골 사람들의 생활에 지겨워하게 되고, 장난삼아 렌스키를 도발하기 위해 타티아나의 언니 올가를 꿰어 춤을 추지만 그 모습을 본 렌스키는 질투에 눈이 멀어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하게 되는데~~~~결투로 죽게 된다”는 내용이다.

 

푸쉬킨은 ‘말이 씨 된다’는 속담처럼 현실에서 결투로 죽었다. 차이콥스키는 오네긴 오페라를 작곡해 지금도 러시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람들은 예브게닌 오네긴의 많은 캐릭터가 말 그대로 Trigorskoye의 사람들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원의 특정 부분과 일부 나무에 이름이 붙여진다.

"타티아나의 오솔길(Tatiana's alley)", "전나무 천막(fir-tent)“, "고독한 참나무(solitary oak)", "오네긴의 벤치(Onegin's bench)", "자작 나무 안장(birch-saddle)"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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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의 박물관

 

 

오시포프와 울프의 박물관의 “푸쉬킨 방”

오시포프와 울프의 박물관은 1918년에 불에 타 버렸다. 현재의 집은 1962년에 복구되었다. 저택 공원은 매우 넓다. 3개의 연못, 과수원, 많은 골목, 해시계, 오네긴 벤치, 한적한 참나무 숲 등이 있다. 매 시간마다 가이드 투어가 있다. 투어의 시작은 식료품 저장실에서 관람이 시작된다. 프라스코브야의 오시포프 집의 역사를 알려준다. 1899년의 예술가 V. Maksimov의 Osipov-Wulf 집 내부, 안나 케른, Yu.M.의 손자인 유명한 지리학자가 만든 집 계획의 사본. 1924년의 Shokalsky, XIX 후반-XX 세기 초의 Trigorsk House의 외부 및 내부 사진.

 

다음은 주방이다. Trigorsky의 삶, 시인에 대한 그들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도서관은 두 방을 차지한다. 첫 번째 방은 "푸쉬킨(Pushkin)"이라고 명명되었다. 시인이 읽은 책에 대해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 기념 항목, 플라톤, 버질, 몰리에르의 흉상 및 일부 러시아 작가의 초상을 볼 수 있다.

 

구리 찻잔 사모바르(a copper samovar), 꽃병 2개(그림이 있는 이탈리아 도자기), 은도금 쟁반, 조각된 테이블(참나무, 호두), 마을의 샴페인 냉장고. Golubovo. 소설 "예브게닌 오네긴"의 사본, 알렉산더 푸쉬킨의 시적 메시지, 자화상 및 그림, 안나(Anna)와 유프라시아 울프(Eupraxia Wulf)의 실루엣(미지의 예술가, 사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알렉세이 울프(AI Wulf)의 초상화(A. I. Grigoriev의 수채화, 1828, 사본);

푸쉬킨의 편지 사본 등 공원의 가장 흥미로운 장소는 원형으로 심어진 고대 오크 나무가 다이얼의 구획인 놀라운 해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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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노치 마을

 

 

고대 정착지 보로니치 마을

트리고르스코예 영지 근처에는 500m 높이의 언덕이 있다. 고대의 정착지인 보로니치(Voronich)다. 보로니치는 프스코프 지역에서 가장 번창했던, 16세기의 고대 도시의 유적지다. 프스코프 시의 방어한 도시였다. 이 도시는 스테판 바토리(Stefan Batory)에게 1581년에 파괴되고 재건되지 않았다. 크렘린 흔적이 남아 있고 14~15세기의 성벽이 남아 있다. 성 조지 교회, 트리고르스키 교회가 있다. 오스포바(Osipovy-Wulf)가족묘가 있다. 또 게이첸코(Geychenko)와 그의 가족, 사브바 얌스치코프(Savva Yamschikov, 러시아 보존전문가)의 묘가 있다. 미하일콥스키에서 3km 떨어져 있다.

 

언덕 꼭대기의 남서쪽에는 높은 가파른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먼 과거에는 모퉁이에 탑이있는 높은 나무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요새에는 옆길로 이어지는 두 개의 문이 있다. 이 길의 흔적은 오늘날까지 살아 남았다. 요새 안에는 무기, 탄약, 식량 창고가 있었다. "공성 케이지"-위험한 상황에서 인근 주민들을 위한 임시 피난처였던 가벼운 유형의 건물. 요새에는 Ilyinskaya와 Yegoryevskaya라는 두 개의 교회가 있었다. 엘리아스 교회의 흔적은 거의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은 성벽에 더 가까운 요새 중앙에 위치했다. 1913년에 소실된 예고례프스크 교회의 기초, 돌 울타리 및 15-16 세기의 여러 고대 돌 십자가가 부분적으로 보존되었다. 그들은 1984년에 복원되었다. 교회 마당 입구에는 커다란 돌무더기 더미가 있다. 현장에서 발굴 중에 발견되었다. 2007년에 성 조지 교회는 역사적 설명과 계획에 따라 오래된 기초 위에 재건되었다.(계속)

 

Data

부그로보 마을(village Bugrovo)

전화+7 811 462-14-54

오시포프와 울프의 박물관

주소 S. S. Geychenko Blvd., 1 

푸쉬킨스키예 고리

전화 +7 811 462-16-80/웹사이트 http://pushkinland.ru/

숙박정보

부그로보 마을(Gostevoy Dom V Bugrovo)과 근처에 푸쉬킨의 유모 이름을 아리나호텔(Arina R, 주소:1A, der. Bugrovo/전화:+7 811 462-11-0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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