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박물관 밖의 오른쪽에는 간호사의 오두막이 있다. 특별날 것 없는, 러시아의 영지에 딸린 하인의 방에 “간호사의 오두막”이라고 명명된 데는 이유가 있다. 푸쉬킨은 작품 속에 유모 아리나를 늘 ‘간호사’로 지칭했다. 푸쉬킨과 유모 아리나는 단지 귀족 주인과 하인의 관계가 아니었다. 푸쉬킨이 태어날 때부터 함께 했던 유모와의 관계는 평생 특별했다. 특히 미하일롭스코예 영지에서는 더욱 각별했다.

푸쉬킨 박물관 내의 하인의 방

박물관 본채 오른쪽에는 작은 하인의 방(푸쉬킨은 작품 속에 유모 아리나를 늘 ‘간호사’로 지칭했기에 간호사의 집(Nurse's House)이라고 명명)이 있다. 여느 잘사는 러시아 귀족들의 영지에는 항상 따라 붙어 있는 별채다. 이 하인의 방은 입장권이 있어야 관람이 가능하다. 티켓을 보여 달라는 스태프가 있다. 필자는 모든 전시관을 다 볼 수 있는 티켓을 구입했기에 기꺼이 하인의 방을 관람한다.


18세기~20세기 초의 모습을 재현한 이 오두막은 1947년에 재건했다가 파손되어 1999년에 재건축한 건축물이다. 널빤지로 지붕을 씌운 오두막은 1개의 방으로 되어 있다. 좁은 실내는 당시의 하인의 방이나 가난한 여느 민초들의 집처럼 초루한 느낌이다. 주인들의 밥을 준비했을 주방용품들. 러시아 가정에서 으레 볼 수 있는, 향신료나 차로 이용했던, 말린 허브 꽃이 벽에 걸려 있다. 그 외에는 빵이나 음식물을 조리했음직한 네덜란드 스타일의 페치카, 사모바르(Samovar, 러시아에서 물을 끓이는데 사용하는 주전자), 반죽을 위한 목재그릇, 다양한 냄비, 구리 빵틀 등 낡은 생활용품들이 있다. 거기에 옷가지를 수선하거나 만들었음직한 러시아식 물레도 있다.


하인의 방 내부.JPG
하인의 방 내부

 

그중에서 가장 반짝이는 곳은 식탁이다. 작은 사각 프레임이 있는 창문에서 얕은 햇살이 비추는 곳에 마련된 식탁테이블. 아마도 주인들이나 손님들이 오면 이곳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페치카 옆에는 옷가지가 걸려 있고 실로 뜬 아주 낡은 실내화도 보인다. 오른쪽에는 목욕탕이 있는데 푸쉬킨은 소설 속 주인공인 오네긴처럼 얼음 목욕을 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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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나의 나무 상자

 

 

이 전시관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있는데 일명 ‘아리나의 나무 상자(저금통으로 쓰인 나무 상자)’다. 1826년 여름, 이 집을 방문한 시인 니콜라이 야지코프(Nikolay Mikhailovich Yazykov, 1803~1846)에게 선물한 것이란다. 이 집은 나중에 푸쉬킨의 요리사인 네오니라(Neonila Onufrievna)의 가족(남편과 딸 아들)들이 함께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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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의 유모 아리나

 


유모 아리나는 누구?

특별날 것 없는 이 하인방을 따로 표를 구입해서 봐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이 하인방은 푸쉬킨의 유모 아리나 로디오노브나 야콥레바(Arina Rodionovna Yakovleva, 1758~1828)의 흔적이 남은 곳이다. 한국인에게 푸쉬킨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만 유모 아리나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드물다. 행여 푸쉬킨의 영지를 찾는다면 유모 아리나에 대해서 알고 떠나야 한다.


아리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근처의 가친스키(Gatchinsky) 주의 작은 시골마을인 람포보(Lampovo)의 가난한 농노 집안의 7남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어린 아이들만 남기고 죽었을 때 그녀는 고작 10살이었다. 그녀는 군부대의 중위인 페도르 백작(Fedor Apraskine, 1733-1789) 집의 하녀가 된다. 그러다 1759년, 아브람 한니발(푸쉬킨의 외조부)이 페도르 백작에게서 하인을 포함한 영토를 구입하게 되면서 아리나는 한니발 가의 하녀가 된다. 


코브리노 마을의 아리나의 집.JPG
코브리노에 있는 아리나의 집

 

 

1781년(23세), 아리나는 농부 피오도르(Fyodor Matveyev, 1756~1801)와 결혼해 고향 근처의 코브리노(Kobrino)에 남편과 정착한다. 1792년(34세), 푸쉬킨의 외할머니인 마리아 알렉세이예나 한니발(Maria Alekseyevna Ganibal)이 남동생 미하일(Mikhail)의 아들인 알렉세이(Aleksei)를 돌보는 유모로 보낸다. 1795년(37세) 마리아 외할머니는 아리나에게 감사의 표시로 독립권을 주었지만 아리나는 푸쉬킨 가를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1797년(39세), 아리나는 푸쉬킨의 어머니(Nadezhda Osipovna Pushkina) 아이들의 보모가 된다. 아리나가 푸쉬킨 가에 다시 온 이유는 첫 아이 ‘올가’에게 젖을 멕이려는 것이었다. 당시 귀족들은 사교에만 열을 올리고 있어서 아이 돌보는 일은 뒷전이었고 거의 유모들이 맡았다. 푸쉬킨의 엄마도 마찬가지. 올가 탄생 1년 반 후에 푸쉬킨이 태어났을 때 아리나는 41세였다. 푸쉬킨 탄생 당시 아리나에게는 예고르(Yegor, 17세) 나데즈다(11세), 마리아(Marya, 10세), 스테판(Stefan)이 있었다. 막내아들 스테판이 올가와 동시에 태어났기에 젖을 멕일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알렉산더 푸쉬킨이 태어났을 때는 아리나의 젖은 말라 버린 상태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미망인이 되었기에 더 이상 자녀를 가질 수 없었다.


그녀는 푸쉬킨 가족과 함께 살면서 종종 자녀들을 만나러 코브리노를 방문했을 뿐이다. 그 당시 그런 삶은 일찍부터 하인의 삶을 산 아리나의 운명이었다.

 

영지에서의 푸쉬킨과 아리나.JPG
영지에서 지내는 푸쉬킨과 아리나의 모습

 

 

푸쉬킨과 유모의 미하일롭스코예 영지 생활

미하일롭스코예 영지는 할머니가 사망하자 푸쉬킨의 어머니의 소유가 된다. 푸쉬킨 가족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살면서 이곳을 여름 별장으로 이용했다. 1818년(아리나 60세, 푸쉬킨 19세), 푸쉬킨 가에서는 아리나를 영지로 보내 재산의 모든 책임을 맡긴다. 그녀의 정직성 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아리나는 다른 하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신뢰를 받았다.


푸쉬킨이 영지에서 망명생활(1824~1826, 25세~27세) 중 일 때도 아리나(66세~67세)와 함께 살았다. 미하일롭스코예에서 갇혀 살아야 했던 푸쉬킨의 당시 상황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편지가 남아 있다.


“나는 친구가 없다. 나는 혼자 마신다”. 그리고 몇 줄 후에 또 반복한다. “나는 혼자 마신다…” 푸쉬킨이 영지에서 머문 지 1년 후에 그의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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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이 스케치한 아리나

 

 

외롭고 고독하며, 갈등이 많았던 그 시점. 푸쉬킨과 아리나는 더 특별한 관계를 형성한다.

푸쉬킨은 유모를 스케치하고 시를 썼다. 푸쉬킨 작품의 첫 구절을 듣는 이도 늘 아리나였다.

푸쉬킨의 친구 표트르 뱌젬스키(Pyotr Vyazemsky)에게 보낸 편지(1825년 1월)에는 “그녀는 나의 유일한 친구입니다. … 난 스토브 벤치에 엎드려 오래된 동화와 노래를 듣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의 글을 간호사에게만 읽어 주었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푸쉬킨은 한 번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그의 편지에는 대문자로 “간호사”라고 썼다. 푸쉬킨의 대표작인 예브게닌 오네긴에서 타티아나의 하녀도 아리나에게 영감을 얻었다. 보리스 고두노프의 루살카(Rusalka) 공주의 하녀인 크세니아(Ksenia)도 마찬가지다. 푸쉬킨의 소설 두브로스키(Dubrovsky, 1841년작)에서도 간호사로 부른다.

 

영지 이후, 아리나의 말년

1826년, 푸쉬킨은 영지의 망명 생활이 풀린다. 그 다음해(1827년 9월 14일)에 푸쉬킨은 아리나를 마지막으로 만난다. 10개월 후인 1828년 7월 31일, 아리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푸쉬킨의 누나 올가의 집에서 잠시 병을 앓고 나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아리나의 장례식에는 푸시킨이나 누나 올가도 참석하지 않았다. 올가의 남편 니콜라이 파브리쉬체프(Nikolay Pavlishchev)가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스몰렌스크 묘지에 묻혔다. 현재 그녀의 무덤은 사라졌고 플라그(plaque, 기념명판)만 있다.


아리나 사후, 1830년, 푸쉬킨은 모스크바에서 만난 곤차로바와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 직전, 푸쉬킨은 아리나 가족을 방문한다. 아리나 딸 마리아는 시인이 걷는 동안 스크램블 에그를 준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리나에 관한 전기를 쓴 한 작가(AI Ulyansky)의 말에 따르면 “아리나는 자신을 군주의 노예라고 생각했다. 아리나는 “나 자신이 농부인데 자유가 필요한 게 무엇입니까?”라고 말했단다. 아리나는 당시 러시아 농노제에서 ‘평생 충실한 하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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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스코프에 있는 푸쉬킨과 아리나의 동상

 

푸쉬킨과 아리나의 특별한 관계

앞서 소개한데로 푸쉬킨과 유모 아리나의 관계는 매우 특별했다.

 

푸쉬킨은 어린 시절, 늘 혼자였다. 사교에만 열을 올리는 엄마 대신 외할머니와 유모랑 같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푸쉬킨은 어릴 적부터 유모 아리나에게 러시아 민속, 동화, 민요 등에 대해 많은 것을 들었다. 아리나는 동화와 속담과 민속어 등을 알려줬다. 이런 성장 배경은 푸시킨이 시인으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아리나에게 들은 이야기들은 푸쉬킨의 작품 속에 자연스레 배어들었다. 동화 7곡, 노래 10곡, 민속 표현 몇 가지를 썼다.


푸쉬킨에게 있어 유모는 단순한 하인이 아니었다. 부모에게는 단 한편의 서한도 보내지 않았음에도 아리나에게는 편지와 시를 썼다.

푸쉬킨과 아리나는 평생 특별한 관계였지만 특히 이 영지에서는 각별하고 특별했다.


푸쉬킨의 “유모”라는 시를 보면 영지에서의 상황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힘든 하루 동안/노쇠한 나의 비둘기/혼자서 깊은 소나무 숲에서/오랫동안, 당신은 나를 기다립니다/당신은 빛의 창 아래에 있습니다/마치 시계의 잘못인 것처럼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뜨개질 바늘/주름진 손이 매 순간 이어집니다/당신은 봅니다/길고 검은 길의 잊혀진 문에서/슬픔, 직감, 걱정/항상 마음을 조아립니다/그래서 당신을 상상합니다/(1826년 미완성. 1855년에 출간)


1825년, 푸쉬킨와 로맨스를 만든 안나 케른(Anna Kern)이 쓴 푸쉬킨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그는 간호사와 누나(올가) 외에는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라며 25년 넘게 이에 대해서 썼다.


현재 영지 박물관에서 푸쉬킨이 그린 아리나의 스케치가 있다. 또한 프스코프에는 푸쉬킨과 아리나가 함께 하는 동상이 있다. 거기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근처의 코브리노 마을에 있는 그녀의 옛집은 현재 박물관이 되었다.(계속)


Data

 

푸쉬킨 고리 박물관

웹사이트http://pushkinland.ru/

전화:8 (81146) 2-23-21 , 2-26-09

코브리노 아리나의 집 박물관

전화 (81371)58-510/

웹사이트 

www.russianmuseums.info/M270/W983 lenoblmus.ru/museum/muz_agentstvo/

 

개장연도 1974년/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 농부 주택의 내부가 재건축됨. 러시아식 난로, 침대, 린넨 커튼 뒤에 매달린 요람, 토기가 있는 테이블, 나무 및 자작 나무 껍질판 그리고 접시, 넓은 벤치, 상자 및 기타 농민 가구. 모서리에는 이콘과 이콘 램프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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