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출판사 강맑실 대표가 첫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남이 쓴 책만 만들던 이가 스스로 쓰고 그린 책을 냈으니 ‘인생샷’마냥 ‘인생사건’ 같은 일이다. <막내의 뜰>(사계절)은 유년 시절을 그리워하는 모든 어른에게 건네는 소박한 위로다.
1960년대에 일곱 개의 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잠시 자신의 현재 모습을 내려놓고, 부모님과 언니 오빠들에게 사랑받던 막내로 돌아갔다. 2년 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이번 책에 실린 모든 그림을 직접 그리기도 했다. 어린 시절 살았던 집과 뜰, 마을 풍경, 가족을 그림으로 그리고 문장으로 담아낸 출판인 강맑실의 첫 책 <막내의 뜰>(사계절)이다. 
 
마냥 어린 줄만 알았는데 살다 보니 어느덧 60대 중반. 그렇다고 막내를 벗어난 건 아니다. 그래도 그 옛날과는 다르다. 함께 나이 들어가는 처지니 예전보다는 맞먹기가 쉽고 발언권도 세졌다. 일곱 남매 모임의 총무 자리도 붙박이로 꿰찼다. 때론 데면데면하게 때로는 시끌벅적하게 살아오던 어느 날, 어머니를 떠나보내고는 부쩍 쓸쓸해지고 그 헛헛함을 채우려는지 회억할 것들이 많아졌다. 배운 그림 솜씨로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지낸 유년기의 집들을 그려보았다. 나를 위로하고자 시작한 일이었는데 유년을 기억하는 모든 이에게 소박한 위로가 되기 시작했다. 일부러 그러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막내의 시간’은 누구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출판인 강맑실은 출판계의 거물군에 속한다. ‘누가 머리 위에다 한 짓이 뭔지 알고 싶어 하는 작은 두더지로부터’라는 제목의 길고 어려운 독일 그림책을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라는 제목을 달아 세상에 내놓았던 사람이다. <반갑다, 논리야>, <논리야, 놀자>, <고맙다, 논리야> 시리즈도 그의 아이디어다. ‘한국생활사박물관’, ‘아틀라스’ 시리즈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한 대형 프로젝트로 출판계에 반향을 일으킨 기획자이기도 하다. 1980년대까지는 사회과학서의 산실처럼 여겨진 출판사였지만 1990년대부터 ‘1318문고’, ‘1318교양문고’ 시리즈 등으로 청소년 출판 시장을 선도했고, 그림책, 아동문학, 아동교양 등 어린이 도서 출판으로 방향을 확대해 대성공을 거둔 출판사 대표다. 
 
강 대표는 학교 선생님인 아버지와 어머니, 여섯 명의 언니 오빠들 사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태어나고 자란 일곱 채의 집 구조와 추억을 되살리는 데는 언니 오빠들의 도움이 컸다.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일곱 채 집의 평면도를 직접 그렸다. 막내의 기억 속에 있는 마당, 골목, 함께 놀던 동물들, 자연의 풍경도 그림이 되었다. 장년이 되어 다시 그려본 ‘막내의 뜰’이 세상의 모든 막내들과 가족과 고향과 집을 소환한다. 나도 막내였음에 말길을 쉽게 터보려 애썼건만, 그도 쉬웠을지는 모를 일이다. 많이 웃으셨으니 그러려니 할뿐.

재미있게 봤습니다. 맘먹기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시작된 거죠? 애초에 책으로 내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머릿속에 집이 많아서 그 집을 맴돌면서 함께 살았던 언니 오빠들, 엄마, 아버지가 늘 마음에 담겨 있었죠. 그러다가 2014년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때 그 집들 생각이 더 절실해진 거예요. 엄마, 아버지와 함께했던 열 개의 집을 어떻게 털어버릴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다가 글로 정리하고 싶어진 거죠. 이듬해에 미대 출신인 언니한테 태어난 집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을 생각나는 대로 스케치 해달라고 했어요. 난 막내라 다 기억하질 못하니까. 
 
애로도 많고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네요. 제일 문제가 나를 드러내고 싶지는 않다는 거였어요. 그러면서도 기록적이긴 해야겠고… 기술적으로 잘 써야 하는데 내공은 부족하고… 그래서 ‘나는 못 쓰려나 보다’ 하고 밀쳐놨었어요. 스케치만 가지고 있다가 2019년 3월에 온라인 모임인 ‘잘 그리면 반칙’ 방에서 활동하면서 자신감이 생겼죠. 지난해 5월에 드디어 도면에다 색을 입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5월이라 엄마 생각도 많이 나고 해서요. 그렇게 평면도에 색을 입히고 나무도 그리고 하다가 그때 그 집들이 더 그리워졌죠. 7형제 단톡방에다 내가 태어나 살던 첫 번째 집을 올리고 언니, 오빠들한데 물었죠. 언니 오빠 방은 어디였는지, 아빠 서재는 어느 방이었는지. 다들 신이 나서 즉각적으로 반응이 올라오더라고요. 특히 큰언니는 나는 몰랐던 돼지, 거위 얘기도 해주었어요. 염소나 닭은 그렸지만 돼지나 거위는 난 몰랐었죠. 첫 번째 집은 거의 기억이 안 나서 나보다 6형제의 공동 작품인 셈이에요.(웃음) 나를 드러내지 않는 방법으로 3인칭을 택했어요. 에피소드 중심으로 막내가 주인공이 되어 기록을 해가죠. 그러니 덜 부끄러워지더라고요. 나는 뒤로 꼭 숨고 동화 형식으로 썼으니까요. 한 달 동안 8개의 집을 그렸고 6월 한 달 동안 28꼭지를 썼어요. 미친 듯이 쓴 거죠. 때마침 네이버 회사 블로그에 올리는 글이 필요하다기에 북클럽 회원 코너에 글을 올렸습니다. 어쨌거나 난 책을 낼 생각이 없었고 너무 사적인 걸 드러내기 싫어했어요. 그래서 그림톡 방에서도 ‘왜그림’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커져버렸네요.(웃음)
 
‘왜그림’이 뭡니까?왜 그리냐고 따지는 건가요? 제가 10년 이상 마라톤을 했는데 그때 닉네임이 왜가리였어요. 왜가리가 홀로 먼 곳을 쳐다보는 모습이 연상되잖아요. 왠지 철학적이어서 굉장히 좋아했던 이름이라 그림방에서도 갖다 썼어요. 왜 그림을 그리냐고 끝없이 묻는다는 뜻도 재미있을 것 같고요.
 
자기 책을 내는 게 어찌 그리 부끄러우셨을까요? 제가 출판사 대표가 아니고 자연인이었다면 부담이 덜했겠지요. 일을 벌여놓고 나서  언니 오빠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언니 오빠들을 엄청 새롭게 만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서로를 객관화시켜서 보니까 나 스스로도 다시 돌아보게 됐고, 그 과정이 행복했죠. 하지만 이게 너무 사적인 거라 조심스러웠어요. 보통 출판사 사장은 인문서를 내거나 내공 있는 에세이를 내는데 너무 사적인 제 얘기를 냈을 때 회사가 감당해야 될 좋지 않은 부분이 걱정스러웠어요. 그런데 직원들이 밀어붙이는 데다 40여 년간 그림책, 아이들 책을 낸 사계절 대표로서 동화 한 편 쓴다 생각하면 의미도 있겠다고 생각이 바뀌었죠. 그래도 처음엔 너무 부끄러워 책을 권하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좀 뻔뻔해졌어요. 막 주고 권하고 있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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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도에 ‘유년기를 기억하는 모든 이에게 건네는 소박한 위로’라고 했습니다. 의도대로 성공하고 있나요? 네, 좋게 봐주셔서 잘 돼가고 있는 것 같아요. 가장 듣기 좋았던 말은 ‘이 책을 읽고 잠을 못 잤다’는 말이었어요. 너무 놀랐죠. 그렇게나 재미있나 하고 속으로 신기해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고 이 책을 통해 자신들의 유년이 떠올라 밤새 생각하느라 밤을 꼴딱 새웠다는 거였어요. 책을 통해 저마다 유년의 뿌리를 찾아간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죠. 그런 반응이 제일 좋아요. 부모나 형제와의 관계에서 아픔이 있는 분들도 많겠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어린 시절 사랑 받았던 기억이 현실을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될 거예요. 어릴 때 가족의 맹목적인 사랑을 받았으니 지금의 가족과 내 주변, 회사 동료, 소수자들에게 나눠줄 힘이 생기는 것 아닐까요? 유년의 기억이 그런 샘물 같은 역할 아닐까 해요. 유년의 뜰이 그래서 좋은 것 같아요.
 
유년이 부러울 정도로 유복하셨습니다. 막내의 특권도 눈에 많이 띄고요. 저는 어려서 모르고 지냈지만 가정이 온전히 넉넉하고 유복했던 건 아니에요. 엄마의 삶은 매일이 굉장히 드라마틱했죠. 그 많은 걸 다 얘기할 순 없지만, 우리 일곱 남매 집안도 구성원 하나하나 파란만장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어요.(웃음)
 
막내는 어쨌든 특권이 있지 않나요? 책으로 낼 ‘뜰’도 있고. 막내를 사회적으로 개념화할 순 없고 막내마다 다를 순 있지만, 일단 맹목적인 사랑을 받으며 크고 많은 부분이 용서가 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게 특권인 반면, 글을 쓰면서 나를 들여다보니 어딘가 모르게 외로움이 강했더라고요. 바로 위에 4년 터울의 오빠가 있는데 이미 커서 또래랑 노는 시기에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노는 방법도 다르고 여자 동생이니까 챙겨주지도 않았어요. 오빠는 4년 동안 막내로 귀여움을 받다가 내가 태어나니까 귀여움을 독차지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도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웃음) 다른 윗형제들은 나이 차가 더 많았고 엄마도 늘 바빴기 때문에 내 눈높이에서 놀아주는 일은 많지 않았죠. 마음으로 이뻐하긴 했겠지만 ‘그래, 고민을 털어놔 봐라’ 할 만한 관계는 아니었다고 할까. 아마도 큰언니가 없었다면 굉장히 외로운 아이였을 거예요.
 
큰언니 얘기가 많긴 많더군요. 큰언니가 나보다 열여덟 살 많은데 엄마 역할, 친구 역할까지 다 해준 것 같아서요. 어찌 보면 큰언니도 막내인 저한테 의지하는 구석이 있었는지 몰라요. 내 생각만 그런가?(웃음) 어쨌거나 큰언니는 고민이 있으면 내게 말을 걸어요. 나도 속상하면 큰언니한테 전화하고요. 바로 윗언니인 별메 언니는 동생 놀려먹기에 바빴죠.(웃음) 
 
형제들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별메 언니, 밝내 오빠, 맑실이…. 아버지가 1930년대 연희전문대 문과를 다니셨어요. 최현배 선생님 제자고 윤동주 시인이 2년 후배였다니 우리말을 굉장히 사랑하신 분이었죠. 1950년대 이후 태어난 자식들은 순한글로 지어주셨어요. 별메는 ‘별이 교교히 쏟아지는 들판’을 뜻하고, 밝내는 ‘이 세상을 밝히는 빛의 냇물’이라는 뜻이에요. 맑실은 ‘맑은 골짜기’라는 뜻이고요. 
 
각자 파란만장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맑실이’는 어떻게 파란만장했나요? 엄마 돌아가셨을 때 너무 힘들었다고 했잖아요. 제가 엄마 속을 너무 썩혀드려서 그래요. 어릴 때 누구보다 말 잘 듣던 막내가 반란을 꾀했으니까. 반대하는 결혼을 했어요. 7남매 중에서도 막내에 대한 기대를 제일 크게 하셨는데 그랬네요. 아버지가 전라도 지역에선 꽤 알려진 교육자여서 맞선도 많이 들어왔는데 다 마다하다가 연애결혼을 한다고 하니 놀라실 밖에요. 유학 보낸다고 여권도 막 만들고 했어요. 도망 다녔죠. 결혼도 도망치듯 부모님 뜻에 어긋나게 했고요. 엄마는 오랫동안 제 결혼을 인정하지 않으셨어요. 초기에는 충격 때문에 단기 기억상실증까지 있었죠. 싸우고 대들진 못했지만 마음이 늘 아팠어요. 그러니 막상 돌아가시니 회한과 그리움이 더 특별할 수밖에 없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다른 의미로 특별하지요? 막내와 아빠의 무등산 등반이 인상 깊었습니다. 매주 다녔어요. 언니 오빠들은 주말만 되면 핑계 대고 도망 다니기에 바빴지만.(웃음) 나도 꼭 좋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으니까…. 가기 싫은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정말 좋은 추억이죠. 가끔 꾀부리고 “아버지, 월요일에 시험인데요?” 하면 “시험 못 봐두 된다”면서 끌고 가셨어요. 혼자 가셔도 되는데 왜 그렇게 데리고 다니셨는지….
 
얼마나 끌려 다니신 거예요? 세 살 때부터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요. 무등산 중봉은 나무가 없고 높은 언덕인데 한번은 넘어져 구른 적이 있어요. 아버지 말씀이 “저놈은 산에서 구르면서도 웃더라”며 끝까지 산에 데리고 다녀야겠다고 하셨죠.
 
물통에 술 받아 갖고 다녔다면서요? 아버지 덕분에 커서 술고래가 된 것 같다고 하셨던데…. 온갖 술을 다 담아 갔죠. 술항아리가 늘 여러 개였는데, 아버지 서재방 뒷마루 장에 놓여 있어서 제가 아무 거나 담아 가고 그랬어요. 초등학교 때 산에 오르다가 그 싸한 맛이 생각나서 아버지한테 한 모금 하고 가자고 하면 정상 가서 마셔야 된다고 절대 안 주신 기억이 나요. 추울 때 수통 뚜껑에 조금씩 따라 마셨던 것 같아요.
 
등산 친구인 막내를 제일 아끼셨겠어요. 아니에요. 나한테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딸’이라고 했는데, 다른 언니 오빠들 얘기 들으면 똑같은 사랑 고백을 다들 들었더라고요.
 
교육자인 아버지 말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요? ‘매 순간 승리하라’라는 말을 참 많이 하셨어요. 그 의미는 굉장히 많은데, 누구랑 싸워서 꼭 이기라는 말이라기보다 자기 자신과 싸울 때, 정의롭지 않은 것과 부딪칠 때, 괴로움이나 고통 같은 쓸데없는 잡념에 휩싸일 때, 그걸 이겨내고 승리한다는 말인 것 같아요. 항상 믿어주셨죠. ‘너는 해낼 수 있을 거다’, ‘사람에 대한 희망은 버리는 게 아니다’라는 말씀도 해주셨어요. 때론 그 말씀 때문에 괴롭기도 했죠. 희망을 버리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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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집은 책으로 말하셨습니다. 어른이 되고서는 집이 어떻게 변해 갔을까요?
시골집에 대한 기억이 강해서인지 단독 주택을 좋아했어요. 결혼 초기에도 단독 주택 단칸방에서 셋집살이를 시작했고, 시어머니가 서울 오시면서 역촌동에 일반 가옥 슬래브 집으로 옮기기도 했고, 충정로에선 2층집에서 살아봤어요. 여건이 안 맞아 아파트에도 10년을 살았어요. 아파트로 가는 게 너무 싫어서 서대문 안산 산자락 아래 아파트를 골라 억지로 이사했어요. 그나마 산이 있는 곳을 택한 거죠. 하늘공원이 앞에 있다는 이유로 상암동 아파트에도 잠깐 살았고요. 지금은 강화도에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살고 있어요. 전원주택처럼 혼자 뚝 떨어진 게 싫어서 동네 한가운데 버스정류장 근처에 지었죠. 삼거리에서 우리 집은 다 보여요. 
 
동네슈퍼 하면 딱이겠네요. 네, 딱 좋아요. 주민과 더불어 사는 게 중요하잖아요. 혼자 살 거면 아예 산속에 들어가 살겠지만 그게 아니면 동네와 어우러지는 게 좋아요. 
 
엄마의 유년 이야기를 본 자녀들 반응은 어떻든가요? 자신들의 유년과 비교하진 않던가요? 아이들의 유년은, 미안하죠. 엄마나 아빠나 정신없이 바쁘게 살 때였으니까. 집이라는 공간도 마음 같지 않게 아파트와 주택을 왔다 갔다 했고…. 책 쓰고 나서 애들 반응은 좋아요. 특히 딸이 부럽고 좋았다고 얘기해요. 자신의 유년과 비교해 엄마가 미안해하고 걱정할까봐 자신도 괜찮았다고 말해주더군요. 고맙죠.
 
 
자녀들한테 죄책감이 드는 건가요? 엄마를 가장 원했을 사춘기 때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게 미안하죠. 죄책감 같은 걸 깨달았을 때 큰애는 이미 대학생, 둘째는 고등학생이 돼버렸어요. 그때부터 시간을 많이 갖고 이야기 나누려고 애쓰곤 했는데, 우리 엄마 같은 흉내를 낼 수는 없었죠. 어머니는 그 많은 아이들과 어떻게 사셨을까 싶어요.
 
전문 출판인이니까 책의 위기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요? 항상 철칙처럼 생각하는 것은 책의 차별화된 기획이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작은 것 하나에서 시작해서 독자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찾아나가는 길들은 여전히 열려 있다고 생각해요. 
 
도서정가제 논란이 늘 있습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리고 누가 수장이 되느냐에 따라서 흔들리기 때문에 항상 불안해요. 하지만 출판인들과 서점이 지키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낙관적이라고 봐요. 책이라는 것은 메시지가 담긴 문화상품이잖아요. 자유경쟁 시스템에 방치했다가는 대형서점 빼고는 책방은 죄다 없어지기 쉬울 거예요. 소비자도 손실이에요.

‘잘 그리면 반칙’이라는 그림방은 이름부터 독특하다. 잘 그리게 되면 퇴출? 쫓아내지 않았다면 멤버 모두 범칙자이기 쉽다. 그도 그럴 것이, 강 대표는 그곳에서 ‘그냥 막 돌진하듯이 그리는’ 사람이다. 책을 내면서 가족사진을 일곱 번이나 그렸다고 한다. 책을 보고 나니 ‘강맑실 쓰고 그림’이라는 바이라인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가 또 수줍게 내밀지 모를 글 같은 그림, 그림 같은 글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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