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모처럼의 장편을 내곤 또 다른 단편들을 열심히 쓰고 있다. <빛의 과거>가 꺼낼 듯 말듯 오래 묵힌 얘기였다면 이제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의 미래와 우리의 앞날을 조금씩 엿보며 천착해본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 많다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털끝 하나까지 소설가, 은희경을 만났다.

장소제공 일산 커피통
 
짐작하시겠지만 ‘소설을 위로해줘’라는 말은 그의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를 본뜬 것. 순문학 소설이 줄고 독자가 외면하니 소설의 처지가 알량할 거라는 지레짐작을 해본 것이다. 그러니 소설을 위로하고 소설을 더 가까이 하자는 캠페인성(?) 카피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조잡한 말장난이라 보신다 해도 유구무언이요 부끄러울 뿐이다. 그래도 군색한 변명은 있다. 이것은, 인문서나 과학서를 탐하고 소설은 가물에 콩 나듯 손에 잡았던 나 같은 위인의 ‘사과’이자 ‘참회’다. 인터뷰 직전 그의 장편 두어 편을 읽고 난 느낌, ‘독후감’은 한가지나 다름없는 엇비슷한 뜻의 문장들이었다. 나는 그동안 왜 소설 읽기를 주저하였는가, 나는 왜 픽션을 픽션으로밖에 보지 않았는가, 나는 왜 소설은 세상의 근원과 실제 모두에 가깝지 않다고 여겼는가, 나는 왜 은희경의 소설을 모르면서 은희경을 조금이나마 안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니, 이 인터뷰는 내 나름의 사과이고 참회다. 소설에 대한, 그때나 지금이나 소설가인 은희경에 대한. 그리고, 그를 제대로 알고 싶어 마련한 데이트 자리다. 열성 독자는 아니지만 막연히 흠모해온 대중에게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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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는가?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지난해에 장편 <빛의 과거>를 낸 뒤 요즘엔 단편을 좀 쓴다. 아침형 인간이어서 7시 전엔 일어나 오전 중 글을 쓴다. 집중해야 하는 모든 일은 오전에 하는 편이고 점심 먹고는 다른 일을 한다. 집에서는 저녁에 일이 안 된다. 몇 년 전부터 책상에 붙어 있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 나이 들어 집중력이 떨어지나 보다.(웃음)
 
작가의 일이란 ‘읽는’ 것과 ‘쓰는’ 것, 두 가지라고 알면 되나? ‘읽는 것’은 다시 두 가지로 갈릴 것 같은데, 좋아하는 걸 읽은 것과 자료 취재를 위해 공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취재라는 게 선 긋듯 딱 나눠지진 않는다. 취재를 따로 한다기보다 평소에 많이 보고 느끼고 성실하게 살피는 편이다. 일상의 경험을 통한 내 생각과 느낌을 자료화하는 경우가 많다. 독서는 빼놓을 수 없다. 읽다 보면 떠오르는 것들이 많다. 새 작품을 쓰기 시작할 때는 굉장히 책을 많이 읽는다.
 
소설가는 늘 근무 중이라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근무 중엔 어떤 책을 보나? 소설을 제일 많이 읽는다. 지속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는 환경문제다. 요가 책도 보고 인문학 도서도 본다. 무엇이든 내게 자극을 주고 생각을 바꿔줄 수 있는 책이라면 모두.
 
작품 준비로 책을 읽다 보면 기획독서가 되지 않나? 자유롭지 못한 강박이 예상된다.  딱히 그렇지는 않다.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자유롭게 읽는 편이다. 작가의 전문성은 어떤 글을 쓰고 싶다는 ‘태도’를 규정하는 데서 나타난다. 꼭 무슨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건 아니다. 
 
마침 엊그제 일본 작가가 쓴 <작가의 마감>이란 책을 봤다. 원고를 쓸 때 특별한 루틴이 있나? 마감 중 징크스는? 새 작품을 쓸 때 얇은 새 노트를 꺼낸다. 가제와 등장인물, 그들의 나이와 성별, 관계도, 시대의 특징, 사건과 에피소드, 줄거리와 디테일을 적어놓는 게 습관이다. 그렇게 미리 적어놓지만 절대 그렇게 되진 않는다. 그런데 그게 없으면 시작이 안 된다. 오래 글을 써오지만 이 딜레마가 해결이 안 된다. ‘정해진 대로 쓴다’와 ‘정해진 대로 쓰기 싫다’가 머릿속에서 막 싸운다.(웃음) 이야기하다 보면 딴 얘길 하는 경우가 많다. 그즈음 보는 영화, 책, 만나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변형돼 소설 속에 들어간다. 그 당시에 책이나 영화를 안 보면 그 소설이 안 나오냐 물을 수 있는데 그건 아니다. 무엇을 봤든 개입이 됐을 것이다.
 
요즘 쓰고 있는 건 무엇인가? 조금만 공개해보자. 가장 최근 쓴 단편은 아들이 팔순 노모랑 뉴욕을 여행하는 이야기다. 할머니, 어머니, 노인을 규정해버리는 어떤 것, 패턴화된 선입견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책 속 노모가 수전 손택의 책을 여행에 가져간다. 할머니가 “이 여자가 나랑 나이가 같네?”라고 얘기한다. 1933년생이다. ‘할머니’라고 규정됐다고 인생이 규격화된 것은 아니라는 걸 이야기로 쓰고 싶었다. 개인의 환경, 사회, 분위기, 교류의 범주에 따라 사람은 다른 인생을 산다. 할머니도 그냥 할머니가 아닌 수전 손택 같은 대작가의 삶을 살 수도 있었다. 동년배인 오노 요꼬처럼 살 수도 있었다. 수전 손택과 할머니 삶의 접점은 무엇인가 찾기 위해 책을 많이 봤다. 1933년생이 살았을 법한 인생을 수집하기 위해 역사적 배경을 파헤쳤다. 한꺼번에 규정할 수 없는 개인의 삶을 또 이야기한다.

작가 은희경은 지난해에 아주 오랜만에 장편을 발표했다. 2012년 <태연한 인생> 이후 7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이었다. 제목은 <빛의 과거>(문학과지성사). 갓 성년이 된 여성들이 기숙사라는 낯선 공간에서 마주치는 ‘다름’과 ‘섞임’의 세계를 풀어냈다. 전주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여대생 기숙사 생활을 했던 자신의 이야기가 모티브였다. 8명의 여성이 제각각의 성격으로 입체적으로 부각되고 1970년대의 문화와 시대상도 디테일하게 묘사된다. 사람들은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가 ‘은희경’이라는 필터를 거쳐 ‘오늘, 나’의 이야기로 섬세하게 전개됐다고 말한다. 그에겐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며 오래 묵혔던 ‘숙원작’이었다. 

읽기도 전에 여대생 기숙사 얘기라는 입소문이 퍼졌다고 들었다. 영화 소재로 많이 이용돼 오해도 있었을 것 같다. 여대생 기숙사 이야기를 쓰려고 한 건 아주 오래됐다. 주변에서도 많이 알고 있어서, 다들 “그럼 이번엔 호러냐? 스릴러냐?”고 묻더라.(웃음)  <빛의 과거>는 청춘소설이자 성장소설, 세태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70년대 여성을 짓누른 규율과 억압구조, 폭력성에 대해 쓰려 했다. 그렇다고 고발에만 충실한 건 아니다. 그 안에서 각자의 기억으로 살아온 개인의 이야기에 충실했다. 일단 쓰기 시작하면 길이 발견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쓰기 전 사고의 과정이 너무 길면 안 된다고 생각해 매번 그렇게 시작했다. 그런데 그 작품은 번번이 그렇게 안 됐다. 여러 번 포기했다. 그래도 그 이야기는 꼭 쓰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자기 얘기여서 더 그런 거였을까? 꼭 그런 건 아니었다. 모든 소설이 어차피 자기 경험에서 출발하고 연결되는 것이니 별다를 것도 없었다. 내가 등장인물이 돼버리면 객관화시킬 수 있으니 걱정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도대체 이걸 왜 쓰는 건지 회의가 들었던 것이다. 확신이 안 섰다. 어디서부터 뭘 써야 할지 몰랐다. 울고 싶었다. 물건을 잘 안 버리는 편인데, 그 당시의 일기장이 있었다. 읽어보지도 않고 자료가 충분하다 생각하고, 나중에 읽어보면 다 생각이 날 거라 믿었다. 그런데 막상 열어보니 전혀 생각과 달랐다. 열아홉 살 어린애가 너무 유치하고 치졸했다. 내가 소설에 쓰려고 했던 아이가 아니었다. 순수하고 선량한 약자가 아니라 유치하고 치졸하고 이기적인 여자였다. 어쩌면 그래서 이 소설이 시작됐는지 모른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나와 실제의 내가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느끼고 그걸 표현해냈다. 두 사람이 같은 시대를 다른 기억으로 바라보는 이야기다. 타인이라는 존재들이 ‘다름’ 속에서 ‘섞임’과 마찰을 일으키는 것이 사람의 삶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나’가 섞이는 삶, 그것이 소설이 됐다.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나’는 <새의 선물>부터 해왔던 말이다. ‘진희’의 냉소와 회피를 통해 표현하려 했던, 말하자면 우리 모두의 자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식의 표현이 줄곧 은희경을 비관과 냉소의 작가로 불리게 만든 건 아닐까? 자꾸만 날 그런 프레임에 넣는 경향이 있는데, 난 비관주의자도 아니고 시니컬한 사람도 아니다. 그냥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는 사람일 뿐이다. 차가운 소설도 아니다. 오히려 내 소설은 따뜻하다. 혹시 잘못될까 봐 의심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사랑 함부로 믿으면 안 되는데…’ 같은 걱정, 그런 거다. 질문 받으니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오른다. ‘오해받고 있어’와 ‘그게 당연하지’다. 독자들의 권리니까 자유다. 그러나 나는 소설가들은 기본적으로 휴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인간에 대해 쓰니 인간에 대한 애정이 강한 건 당연하리라 믿는다. 그러니 비관주의자가 될 수 없다.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 게 문학이라고 본다. 
 
초기작은 냉소와 위악, 이후엔 연민과 위로로 넘어왔다는 해석도 있다. 내 소설 속 등장인물은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로써 냉소와 위악을 취한다. 그런 등장인물에게 연민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냉소와 위악이라는 가면을 손에 들려주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인간의 약점과 모순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소설을 써왔다. 치우치지 않고, 건조하고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차갑게 보였다면 너무 따뜻한 쪽에 서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나는 계속해서 따뜻한 소설을 써왔다. 변화가 있다고 해석한 이유는, 표현 방식에서 날카로움이 점점 생략된다거나, 좀 친절해져서 속마음을 설명해준다거나 그런 차이가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더 독하게 쓰려고 했다면 지금은 굳이 그런 걸 다 드러내면서 쓸 필요 있나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해피 엔딩이 삶을 기만하는 은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피했는데 지금은 꼭 그렇진 않다. 
 
여대생 기숙사니 동창들 이야기다. 자연인 은희경은 동문회, 동창회 같은 걸 좋아하나? 거의 안 나간다. 소설에도 동창회에 안 나가는 이유를 썼다. 그 시절에 만들어진 권력관계로 돌아가는 거라 꼭 가고 싶지 않은 거다. ‘너 그땐 새침하고 여성적이었는데’ 등등 당시의 역할이 자동으로 주어지는 게 싫고 불편하다. 넌 어땠다고 한 번에 낙인찍은 집단에 나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 아니겠나.  
 
 
페킹 오더(pecking order)라는 것, 여학생 사이에도 있었을까? 여학생 시절에도 그런 거 있었다. 공부를 잘하거나 부자이거나 선생님에게 이쁨 받는 걸로 권력적 서열이 존재했다. 남자들처럼 주먹 센 걸로 서열이 생기진 않았지만. 소설에서도 페킹 오더 같은 수직적 서열 관계가 나온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고유성을 부각하려 애썼다. 당시엔 페킹 오더보다 1970년대의 억압구조 그 자체가 권력이었다. 그 와중에 각자의 독립적 삶을 살아가는데 누가 옳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누구의 기억만 맞는다고도 할 수 없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인생을 편집하는 것. 어느 한쪽이 옳은 것은 아니다. 그걸 말하고 싶었다. 
 
1970년대 이후에도 여성에 대한 억압구조는 다 해소되지 않았다. 어느 작품에선가 “수긍도 재능”이라는 표현을 쓴 게 기억나는데, 개인적 삶은 어땠나? 수긍하는 삶이었나? 딜레마가 너무 심했지만 서른 중반까지는 나도 어쩔 수 없이 시스템에 순응하며 살았다. 시스템을 바꿀 수 없어서, 그대로 있으면 폭발할 것 같아서 소설을 쓰기로 한 거다. 가족 간이라도 사고방식을 바꿀 순 없다. 관계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순 없으니 시스템을 다 고치기보다 내 탈출구를 찾는 걸로 타협했다. 그 전에는 내가 피해자였다면 소설을 쓰고부터는 내가 가해자라는 생각도 한다. 사회 전체 시스템에서는 여전히 피해자인데 구체적인 삶에서는 나도 가해자더라.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를 쓸 때의 일이다. 주인공은 그 자신, 등장하는 아이들은 그의 아이들이 모티브였다. 일일연재 중인 원고를 쓸 때마다 아들, 딸에게 보여주고 감수를 받았다. 청소년들의 말투와 습관, 정서를 귀동냥하기 위해서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개량된 나’였는데, 실제의 나, 즉 아이들 엄마 은희경은 그것보다 매우 보수적이었다. 보수적인 부모로 행할까봐 경계를 했지만 내심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다. 어느새 ‘엄마인 나’도 가해자가 된 것이었다. 가부장제만 두고 보면 남편과의 싸움과 타협이 늘 반복돼왔다. 그렇게 저렇게 서로 타박하다가 부추기기도 해가며 소설을 써왔다. 애주가 남편은 아내의 속을 적절히 긁어 평생 아내 소설의 소재가 돼주었음을 짐짓 공치사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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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으로서 억압구조에 대한 인식은 언제 가장 심했나? 난 어릴 때부터 젊은 부모님 장녀로서 지원을 많이 받은 편이다. 책도 많이 읽히고 나의 교육을 위해 투자를 많이 하고 기대도 높으셨다. 초등 5학년 때 2인 시화전을 열 정도였다. 읍 단위 시골이었지만 두각을 나타낸 편이다. 그게 나한테는 자연스럽지 않은 성장의 시작이었다. 부모 앞에 가서 어떻게 해야 칭찬받는지를 일찍 알았다. <새의 선물> ‘진희’처럼 연기하는 삶을 나도 산 것이다. 대학교는 부모에게서 떠나 맘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부풀었다. 그러나 지방 출신이라는 차별도 지방 간의 차별도 있었다. 위축에서 못 벗어났다. 순응하고 다수가 사는 안전한 둥우리에서 지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런 채로 30대 중반까지 간 거고 소설을 통해서야 터진 것 같다. 내 소설은 동의하지 않는 시스템에 순응해 살아온 것에 대한 반성이다. 나는 스스로 뭔가 선택하는 것에 배짱이 없었다. 평판에 예민했다. 소설을 쓴다는 건 그렇게 산 나의 인생의 반성문이다.
 
특유의 섬세한 언어를 보면 그것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상상해보게 된다. 내 소설에 쓰인 단어가 지나치게 많다거나 평이한 문장을 쓰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은 적 있다. 예전에는 내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조금 고민이 된다. 쉽게 읽히지 않는 빡빡한 문장과 사건 전개에 직접 관계가 없는 꼼꼼한 디테일을 버겁게 느끼는 독자들이 많아진 것 같다.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이나, 정확하지 않은 문장으로 쓰면 소설이 아니라 허술한 설명서가 돼어버린다는 레이먼드 카버의 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트렌드에 민감한 편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적응보다는 관찰하는 쪽을 택하게 된다. 최근 단편소설 몇 편을 쓰면서도 내 스타일이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상황이나 감정에 대해 정확하고 정밀한 표현을 찾지 못하면 마치 옷의 단추를 안 채워 자꾸 앞섶이 벌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쓰려면 먼저 쓰는 사람이 상황이나 감정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마치 눈앞에서 보고 있듯이. 단어나 문장의 선택은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내 경우는 섬세한 책을 읽는 것, 그리고 한 가지 문제를 여러 방식으로 오랫동안 생각하는 습관에서 오는 것 같다. 
 
내가 썼지만 너무 잘 써서 기억에 남는 작품 속 문장. 많겠지만 꼽을 수 있을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좋은 문장이 있어서 잊어버리지 말아야지 하고 써놓을 때도 있긴 하지만, 나중엔 좋은지를 모르겠다. 그날의 일기나 편지가 너무 좋았지만 다음날 보면 그게 아니듯이. 몰두하다가 순간 떠오르는 문장이 가장 좋다. 그래서 평소에 많이 읽고 많이 접하고 생각하는 버릇이 중요한 것 같다. 그러니 큰일 났다. 나이 들면 뇌 활동이 활발하지 않을 텐데….(웃음) 
 
다작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기표절이 되는 경우는 없나? 작가생활 26년 동안 열세 권 냈으니 다작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냥 성실하게 썼다 정도다. 물론 쓰다가 가끔씩 ‘어? 이거 익숙한데?’ 할 때도 있다. 멈칫한다. 그래도 인물과 상황이 매번 바뀌기 때문에 중복되는 일은 없다. 일부러 기존 작품의 어떤 문장이나 단락을 새 작품 안에 넣는 경우는 있다. 재미삼아 두 번 그래 봤다. 어제랑 오늘은 결론이 항상 다르다. 작가는 늘 갱신하는 존재다. 
 
<빛의 과거>는 과거 이야기다. 집필 중 만난 옛 사람, 옛 물건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을 것 같다. 모교인 고등학교에서 강연 요청이 왔는데 갈등 끝에 억지로 갔다. 동창들이 점심 자리를 마련해놓고 환대해줬고 어떤 친구는 교지에 발표했던 내 시를 외우고 있었다. 공연히 내가 사람에게 벽을 쳤구나 느끼고 두려움을 버리자고 생각했다. 얼마 후 전주에서 도서전이 열려 친구들 주려고 책을 여러 권 가지고 갔는데, 도로 갖고 오게 됐다. 그래서 다시, 사람관계는 쉬 결론 내면 안 된다는 생각, 인간은 단순하지 않고 삶은 훨씬 더 우회적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됐다.(웃음)
 
1990년대에 문학상을 거의 휩쓸었다. 상이 주는 의미는 무엇이었나? 어떤 수상 소감에서 내가 그랬다. “작가가 된 후 복권은 절대 안 산다, 모든 행운이 내가 쓴 책에 몰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안 산다”고 했다. 그때 내 마음이었다. 내가 가장 크게 기대하는 행운은 소설이었으니까. 상을 받으면 ‘제대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경사이기도 하지만 ‘그대로만 해’라는 격려로 받아들였다. 단, 이상문학상 경우엔 너무 빨리 받은 느낌이라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과 겁이 생겼다. 인터뷰를 해준 평론가한테 “확률만 있다면 다음에 받고 싶다”고 했다. 뭔가 덜컥 주어진 것 같아 두려웠다. 

알려진 대로 은희경의 글쓰기는 서른 중반에 시작됐다. 어느 날 집을 나가 지방에 칩거하며 몰아치듯 소설을 썼다. 우린 그날을 작가의 탄생으로 안다. 은희경이라는 미래의 작가가 태동한 건,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였던 것으로. 하지만 신내림이 아니고서야 그럴 리 만무하지 않은가. 은희경은 언제부터, 왜, 밖으로 나가 글을 쓸 운명을 감지했을까. 

소설 쓰기의 시작. 진짜 어느 날 갑자기였나?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쌓이고 쌓인 거였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한 건 아니었다. 그냥 내 인생이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라는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잡지사 다니다가 오래 쉬고 조그만 기획사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 최선을 다해도 좌절이 계속 왔다. 생각했던 삶이 아니었다. 나를 표현할 만한 계기가 없었다. 
 
원래 바라던 미래는 뭐였나? 잡지사 다녔다고 해서 기자가 되겠다는 꿈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열심히 살았는데 여기 내 인생이 없다는 자각이 계속 생겼을 뿐이다. 그러면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가라는 물음이 생겼다. 모든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라 그대로는 물음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일단 벗어나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포터적인 삶을 떠나 나를 표현하는 삶을 처음 생각한 순간이었다. 지방에 혼자 내려가 글을 쓰자고 했는데, 내 얘기를 다 못 털어놓는 소심한 성격이라 소설을 쓰기로 결정한 것. 난 여자로서, 딸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어떤 것에 억압돼 있는지 파헤쳐봤다. 그러니 소설은 애초에 내 목표였거나,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묻다가 저절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소설 쓰는 은희경’ 이전 은희경의 삶은 참 의외다. 이데올로기에 순응한 것이다. 예전부터 날 알던 사람에겐 지금 모습이 의외다. 만약에 남편이 경제적 안정이 꽤 있었다면 난 거기에 계속 적응해갔을까? 역설적으로 남편이 술꾼이라서 자아를 찾은 걸까? 그런 상상도 해본다.(웃음) 남편도 자기 때문에 내가 소설가 된 거라고 농담을 던진다. 등장인물 끌어다 쓰기 어려운데 끌어다 쓰기 편하게 도움을 줬다고 으스대는데, 그것도 맞는 말이다.(웃음) 
 
순문학으로서의 소설이 읽히지 않는다. 특히 장편은 쓰려는 사람조차 드문 현실이 되어간다는데 이유는 뭘까? 순문학의 정확한 규정을 어떻게 내려야 할지 모르지만, 만약 클래식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대중서적보다 읽히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문학을 읽는 데는 훈련된 미의식이나 틀을 벗어난 윤리의식이 개입하니까. 과거의 순문학보다 더 안 읽힌다는 게 질문이라면? 순문학이라는 개념도 변했고 독자도 다양해졌다. 백만 독자가 읽는 국민작가 열 사람이 나오기보다는, 백 명의 작가를 각기 십만 명씩의 독자가 읽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편소설을 쓰는 사람이 드물다는 건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생각이 나뉠 것 같다. 장편 공모 심사를 계속하는데 응모작은 줄지 않는다. 안 읽고 쓴다는 점에서 독자가 줄어드는 건 확실하지만.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뉴노멀에서 문학과 작가는 어떤 변화를 맞을 것이며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용산 때도 그랬고 세월호 때도 그랬듯, 작가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세상을 관찰하고 느끼고 재현할 것이다.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 방향 같은 게 있을 리 없고, 저마다 진지하고 성실하게 질문하고 또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머릿속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생각은 무엇인가? 미래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다음 세대 인간은 어떤 삶을 살까. 가끔은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죽을 거라는 사실에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낯선 곳을 여행하다가 낯선 아이들을 만나면 그들의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다는 데에 묘한 허무감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나의 미래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당연히 늙음과 죽음이 포함된다. 매일 핸드폰 게임이나 SNS 같은 걸로 적지 않은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서 자책한다. 지금 내게 가장 없는 게 시간인데 그 얼마 안 되는 자산마저 낭비하고 있다니. 하지만 부족하다고 해서 낭비를 안할 도리가 없다. 그게 인간이니까. 어쨌든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지금의 내 삶과 욕망을 가지치기해서 단순하게 만들고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려면 먼저 내가 뭘 원하는지 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아내야 하는데, 역시나 그동안 쓰고 싶었으나 못 썼던 글들에 대해 가장 미련이 남는다. 독자들이 언제까지 내 글을 읽어줄지 알 수 없지만, 그나마 기회가 있을 때 열심히 많이 쓰려고 한다. 하지만 그 역시 잘 안 되고 있다. 알지만 실천할 수 없는 게 또 인간이니까. 매일 새로 쓸 글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 뭘 잘 안 버리기 때문에 쓸데없는 자료는 많다.

 
미지의 미래가 가져다주는 허무감, 멈추지 않는 시간에 대한 의식, 남은 삶에 대한 자각…. 질문을 압도하는 진정성과 무게감에 감동해 짧은 탄성이 소리 없이 흘러나왔다. 작가라면 흔하고 당연한 태도라 여길지 모르나 은희경의 통찰은 유난히 확고하게 빛이 나는 듯하다. 
 
그러니 당연하지 않은가. 그가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 한, 미지의 미래에도 기지의 현실에도 소설은 늘 살아남을 터. 우리에겐 그의 소설을 즐겁게 위로할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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