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점도 찍었고 바닥도 쳐봤다. ‘인생사 새옹지마’라지만 너무나 굴곡졌던 삶의 여정. 정희자 전 서울힐튼호텔 회장의 농밀한 시간을 들여다봤다. 삶 자체가 장르를 넘나드는 사람이다.
1 1989년 김일성 주석과 함께한 공식 기념사진. 2 휴가지에서 찍은 부부. 3 정 회장이 1998년 방한한 트럼프 그룹 회장을 힐튼호텔 펜트하우스에 초청했다.
#서울힐튼호텔 터프 마담 정희자 
 
 
김 회장은 정 회장에게 자주 독서를 권했다. 아주 가끔 책을 선물했는데 그중 하나가 ‘전쟁 후 폐허 속에서 성공을 거둔 일본 여성 사업가’에 관한 내용이었다. 언젠가 아내가 회사 경영에 참여할 거라 내다본 것 같다. 1982년 그날을.
 
“나더러 호텔을 맡으래요. 그 전부터도 대우가 인수한 회사 중에 작은 데를 경영해보라고 했는데 내가 못한다 했어요. 호텔은 하고 싶더라고요. 일하는 건 너무 좋고 설레는데 ‘회장’이라니까 깜짝 놀랐죠. 나는 상무면 족하다 했는데 남편이 아무 소리 말고 회장을 하래요. 늘 그렇게 일방통행식이었어.”
 
김 회장의 출근 시각은 새벽 여섯 시 전이었다. 정 회장은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도왔다. 호텔 경영을 시작하고도 한결같았다. 아무리 바빠도 남편이 집에 있을 땐 화장을 하거나 옷 갈아입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내조와 경영, 무엇 하나 서툰 모습을 보이기 싫은 뚝심이었다. 
 
서울힐튼호텔 개관 때만 해도 국내 호텔이 몇 되지 않았다.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조차 호텔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정 회장은 외국 유수 호텔에 투숙한 경험과 집안 살림으로 익힌 노하우를 직원들에 전수했다. 직접 꽃 시장에 가서 꽃을 사온다거나 식기를 손수 디자인하는 등 호텔에 드는 비용을 아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마침내 개관한 지 3년, 손익분기점을 넘었고 5년 뒤엔 호텔 건립에 쓰인 차관과 이자를 모두 갚았다. 호텔은 개관하고 10년은 돼야 투자비용을 회수할 수 있단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성과였다. 
 
정 회장은 서울힐튼호텔을 필두로 15년 동안 한국, 중국, 베트남 등에 일곱 개 호텔을 열었다. 늘 현장에 있는 경영인이었다. 음식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주기 위해 주방에 들어가기도, 그릇을 정리하기도, 작업복을 입고 호텔 로비를 빗질하기도 했다. 외국 회사와의 협상은 정 회장의 몫이었다. 얼마나 치열하게, 현명하게 조정을 이끌었는지 ‘터프 마담(Tough Madam)’이란 별명까지 붙었다. 
 
“대표는 나 혼자 잘났다 하면 안 돼요. 배려하면서 해야지. 나 혼자 뛰고 너희는 쫓아오라고만 하면 안 돼요. 함께 뛰어야 해.”
 
그의 업적에 ‘문화예술 후원’ 30년 역사도 빼놓을 수 없다. 2012년 수상한 몽블랑 예술후원자상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몽블랑 상’은 문화예술 발전에 공헌한 사람, 단체를 기리기 위해 1992년 제정된 세계적인 문화예술인상이다. 그는 상금으로 받은 1만5,000유로(2,000만 원)를 부산국제영화제에 전액 기부했다. 
 
정 회장의 미술 소양은 애정과 경험에서 쌓였다. 해외에 나갈 때면 미술관을 찾았다. 1991년 경주에 세운 선재미술관이 그러한 애정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지금이야 너무 당연한 광경이지만, 호텔을 미술품으로 장식한 것도 정 회장이 처음이다. 이제 와서 ‘선구자적 안목’이라 평하는 것이지, 당시 비판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호텔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오는 곳이잖아요. 그러니까 더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보다가 저건 누구 것인지 알게 될 수도 있고. 근데 작가들은 자기네 작품 가치를 떨어지게 한대요. 생각해봐요. 어디 한곳에서만 전시를 하면 특정 소수만 볼 수 있어요. 호텔에 그림을 걸면 (관람)표를 안 끊어도 볼 수 있잖아. 지금 봐요. 고급 호텔에 미술품 있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됐지.”
 
영화에 대한 투자도 거침없었다. 1990년대 초 영화심의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과 연이 닿았다. 김동호 전 위원장은 과거 한 언론 인터뷰에서 부산국제영화제 창업 공신으로 정희자 회장을 꼽았다. 
 
“김동호 위원장은 선각자에요. 하루는 우리나라에 국제영화제를 만들고 싶은데 좀 도와주실 수 없느냐고 참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더라고. 어느 정도로 조심하셨느냐 하면 몇 년을 알고 지내는 동안 우리 남편하고 경기고 동창이란 걸 몰랐어요.(웃음) 내가 그때 3억 원을 보탰고 여기저기서 뜻이 같은 사람들이 모이고, 부산시도 지원하면서 1996년에 부산국제영화제를 열 수 있었던 거예요. 김 위원장이랑은 지금도 교류를 하면서 지내요.”
 

#방북, 고독했던 김일성 주석 
 
 
정 회장을 인터뷰하니 옛 인물들이 자주 소환됐다. 그가 들려주는 일화에 언급된 인물 대다수가 고인이다. 가령 ‘골프 친구들’이었다는 고 정광모 한국소비자연맹 명예회장과 고 이인희 한솔 고문, 절친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의 부친인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 그리고 어린이대공원에 골프장을 지으려 했더니 어린이를 위한 시설을 지어야 한다며 반대했다던 고 육영수 여사. 여든넷 정 회장의 세월이 읽혔다. 그중에서도 고 김일성 주석과 얽힌 이야기는 생경할 정도다. 김우중 회장이 북한을 수시로 방문한 건 알아도, 정 회장까지 동행한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김 회장은 1988년 처음 방북한 뒤론 세 번째부터 정 회장을 동행시켰다. 1989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열 번 정도다. 김 회장은 <김우중과의 대화>에서 “김 주석이 가족을 데리고 오라고 그래요. 그래서 아내와 함께 갔지요. 그런데 김 주석이 우리 아내와 금세 친해져요. 아내가 직선적으로 얘기하는 스타일인데 그걸 더 좋아한 것 같아요. 김 주석 주위에 그렇게 솔직하게 거침없이 얘기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라고 회고했다. 
 
정 회장이 김일성 주석을 처음 만난 건 1989년 평양축전에 남한 대학생 대표로 임수경이 참가한 사건 직후였다. 북한이 우리나라 대학생을 평양축전에 초대한 데 대해 우리 정부가 허가하지 않았으나, 임수경과 문익환 목사가 평양행을 강행한 일이다. 남북관계가 무척 껄끄러운 시기였다. 
 
북한 시내 곳곳에 임수경 사진이 붙었더란다. 정 회장은 무심결에 말해버렸다. “이 사람은 정식으로 온 게 아닌데 이렇게 여기저기 얼굴을 붙여놓고 선전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누군가 정 회장의 옆구리를 툭 쳤다고 했다. “아내가 직선적으로 얘기하는 스타일”이라던 김 회장의 얘기가 이해됐다. 
 
또 한번은 저녁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관리자가 정장을 갖춰 입으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김 주석이 정 회장 부부와 직접 전화 통화를 하겠다고 한 것이다. 앞서 김 주석은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정 회장에게 죽을 보냈는데, 그 죽이 입에 맞는지 염려하고 있었다. 
 
정 회장은 김 주석과 만나면서 인간적인 연민을 느꼈다고 한다. 이념과 정치적 의미, 국제관계와는 별개였다. 
 
“왜 이렇게 큰 집에서 혼자 사느냐고 물었더니 김 주석이 ‘나도 여기 살고 싶지 않는데 우리 아들이 여기 있어야 한대요’ 했어. 많이 고독해 보였어요. 북한에 갈 때면 나를 먼저 끌어안더라고요. 나도 겉치레 인사로 안았는데 사람들이 깜짝 놀라요. 어떻게 감히 그분 몸에 손을 대느냐고.(웃음) 근데 그 양반은 웃으면서 너무 좋아해요. 나도 처음에는 어려웠죠. 그래도 인간적으로 대하니 상대도 마음을 내려놓아요. 김 주석이 인간적인 감정에 굶주렸던 것 같아요.”
 
정 회장 부부는 1994년 6월 중순을 마지막으로 김 주석을 만나지 못했다. 부부가 북한을 다녀온 지 보름 만에 김 주석이 사망했다. 마지막 인사 때 김 주석이 신신당부하던 모습이 생생하다고 했다. 김 주석은 “또 오실 거죠? 인제 가면 못 오는 건 아니죠? 11월 3일(단군릉 복원을 알리는 개천절 행사)에는 꼭 오실 거죠?”라며 정 회장 손을 꼭 잡았다. 
 
김우중 회장이 사업을 벌이면 정 회장은 사업 파트너의 식사 대접을 도맡았다. 남편을 대신해 만난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서 사업가 시절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엘리자베스 여왕, 브루나이 국왕, 쿠바 카스트로 수상, 수많은 리더들을 만났다. 
 
“그럴 때마다 인간적으로.” 
 
남편을 더욱 빛낸 정 회장의 대인(對人) 전략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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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8년 아트선재센터 개관식. 큰아들 선재 씨의 이름을 따 붙였다. 2, 3 31년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선재 씨. 4 김우중 회장이 떠나기 전 온 가족이 남긴 사진이다.

 

#제일 사랑한 남자 선재, 꼭 닮은 이병헌  
 
정희자 회장은 김우중 회장을 보내고 “제일 사랑한 두 남자를 잃었다”고 표현했다. 다른 한 남자는 31년 전 교통사고로 떠난 장남 선재 씨다. 
 
정 회장은 “내 평생에 애인이자 사랑은 선재였다”고 했다.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따뜻한 아들이었다. 대우실업이 시작된 해에 태어난 아들, 엄마를 유난히 따랐다. 엄마가 집에 있으면 하교 후 곧장 뛰어오던 아들이었다. 밤 11시 이후에 들어온 적도 없다. 홀로 침대에 누운 엄마에게 “같이 자자”며 살갑게 굴던 아들이었다. 
 
정 회장은 선재 씨를 안산농장에 묻고 그곳에서 1년 반을 살았다. 비닐 천막에서 잠을 자고, 아침이면 밥과 국을 만들어 무덤 앞에서 먹었다. 후로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그곳을 다녔다. 여행 갈 땐 간다고, 돌아오면 왔다고 아들에게 말해주었다.
 
선재 씨가 떠나고 6개월 뒤 경주의 호텔과 미술관이 완성됐다. 미술관은 선재 씨의 이름을 딴 경주선재미술관으로 이름 붙였다. 김 회장의 반대에 맞서 정 회장이 몰래 지은 공간이었다. 개관식 날 김 회장은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도 아들이 그리운 아버지였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한창 바쁘던 때라 가슴 아플 사이도 없이 그 아이를 떠나보냈다. 아니, 아픔을 잊기 위해 일에 더 매달리려고 했다”고 기록했다. 
 
1994년, 가슴에 묻은 아들과 똑같이 생긴 배우가 TV에 나왔다. 이병헌이다. 정 회장은 식사 자리에서 “우리 선재와 너무 닮아서 우리 아들 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 발언이 와전돼 대우그룹 김 회장 부부가 배우 이병헌을 양아들로 삼았단 보도가 쏟아졌다. 김 회장은 “아들이 둘이나 살아 있는데 무슨 양아들이냐”며 몹시 화를 냈고, 두 아들도 “우리가 있는데 양아들이냐”며 섭섭해 했다. 
 
 
“병헌이가 처음 드라마에 나왔을 땐가, 아무튼 신인일 때였는데 우리 선재랑 똑같이 생긴 거야(옆에서 아들 선용 씨가 “병헌이 형 어렸을 때, 처음 나왔을 때 사진 보면 진짜 선재 형님 느낌이 있다”고 거들었다). 내가 그때 가슴이 아파가지고 죽네 사네 할 때인데 그 필링(feeling)이란 게 있잖아요. ‘어머나, 우리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나?’ 내가 병헌이한테 손 좀 보자고, 손을 만져보니까 우리 선재하고 똑같아요. 병헌이가 대우 광고 모델도 했었어요. 처음엔 CF가 뭔지를 몰라서 그랬는지 안 하겠대요. 그때 병헌이 아버지가 설득해서 한 거예요.”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몇 년 전에는 이병헌 부부 집에 초대받아 식사를 대접 받았다.
 
“이민정이 참 착해요. 모르겠어. 다른 사람들한텐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가면 아줌마들 다 내보내고 본인이 손수 음식 장만을 해요. 자식도 잘 키우지 남편 내조도 잘하지, 음식까지 잘하지. 살림도 잘하고 야무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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