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아홉 살 많은 사촌형은 가족의 자랑이자 전 국민의 슈퍼스타였다. 그리고 동경의 대상이자 롤 모델이었다. 가황 나훈아의 사촌동생, 트로트 가수 나진기를 만났다.
“최 씨(나훈아의 본명은 최홍기다) 집안에 가수 하나면 되지, 둘씩이나 나와서 뭐할라고 하노. 니가 나보다 노래 잘하나. 노래 한 번 해봐라.”
 
당신처럼 가수가 되고 싶다는 사촌동생의 고백에 나훈아가 처음 한 말이다. 그리고 곧바로 오디션이 시작됐다. 동석했던 작곡가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평소 좋아하던 형님의 노래 ‘고향역’을 불렀다.
 
“에라이 이놈아. 그건 노래가 아니다. 정말 하고 싶으면 제대로 배워라. 내가 실력을 인정하고, 가수가 되겠다 싶을 때 정식으로 시켜주마.”
 
군대에 다녀와 평범하게 건축 회사에 다니던 20대, 나진기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나훈아의 여의도 사무실을 찾아 한 시간씩 노래 레슨을 받았다. 노래가 좋았고 가수가 되고 싶었다. 퇴근 후 밤에는 나이트클럽의 무대에서 노래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LP판 하나 만들 곡을 줄 테니 집으로 빨리 오라”는 형님의 호출을 받는다.
“집에 갔더니 형님이 만드신 곡이라며, 기타를 치시며 노래를 들려줬어요. ‘이미 와~버린 이별인데 슬퍼~도 울지 말아요~’”

그 노래 ‘무시로’ 아닙니까? 맞습니다. 첫 앨범의 타이틀곡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곡이 더 있었어요. 다른 작곡가가 만들어서 형님께 간 곡인데 제게 왔죠. ‘본 듯한 얼굴’이라는 제목의 노래였는데, 그게 태진아 씨가 부른 ‘옥경이’였어요. 그렇게 두 곡을 넣어서 앨범을 내기로 하고 열심히 연습했어요.
 
그런데 왜 나진기가 아닌 나훈아와 태진아의 곡이 됐나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녹음실에서 ‘무시로’와 ‘본 듯한 얼굴’을 불렀어요. 형님이 노래를 듣고 하시는 말씀이 “니가 목소리가 나랑 너무 비슷해서, 내가 생각할 때는 노래를 안 했으면 좋겠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형님처럼 노래를 하면 대한민국 최고 가수가 되는 줄 알고 열심히 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가수 하지 말고 직장에 다니자’라는 걸로 이야기가 마무리됐어요.
 
그러다가 나훈아 씨가 데뷔 앨범을 만들어주셨죠. 제가 야간무대 나가면서 노래를 계속 불렀거든요. 수입에 도움이 되니까요. 형님이 1집부터 3집까지 내주셨습니다. 3~4년 정도, 형님 밑에서 일했어요. 대외적으로 매니저 일을 한 건 아니고 뒷바라지를 담당하는 수족이 된 거죠. 예전에는 지방에서 공연을 하면 악보를 보내줘서 밴드가 플레이를 해야 하는데요. 밤새 악보를 복사해서 공연 하루 전에 업소에 가서 세팅하는 일을 제가 담당했어요. 공연 당일 리허설 때는 제가 형님 의상 입고 노래를 했어요. 형님이랑 똑같이 부르면서 조명, 음향 맞췄어요. 형님 덕분에 큰 무대에 오른 적도 많았죠. 같이 노래한 적도 있고요.
 
본인 앨범에 든든한 형님에, 가수로서 호시절이었네요. 제1집 앨범 제목이 ‘나를 믿지 마’였어요. 그때 노태우 대통령이 ‘믿어주세요’ 하던 시절인데 믿지 말라고 하니, 안 되죠. 2집의 제목은 ‘무’예요. 세월은 너대로 가라 나는 나대로 갈란다, 라는 내용인데, 제 인생도 노래 가사처럼 되어버린 거예요.(웃음) 형님 밑에서 일하다 보니 제 일이 안 되는 거예요. ‘나도 가수인데’ 싶은 마음에 화도 났어요.


20201214122947_ippudbiu.jpg

# 죽었다 깨어나도 못 따라갈 형님
신비주의자, 완벽주의자 그리고 테스형
 
 
‘형님’ 곁을 박차고 나온 그는 일본 오사카로 갔다. 1990년 초 나훈아와 함께한 공연이 알려져 오사카의 한 업소에서 러브콜이 왔다. 내심 일본에서 엔카를 부르는 가수로 자리잡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현실이 녹록지 않았다. 6개월 만에 접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토스트 가게를 운영했고,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는 스스로 ‘생계형 가수’라고 표현했다. 현재 그는 미사리의 라이브 카페 ‘열애’에서 무대에 선다. ‘콩 심은 데 팥도 나게’, ‘한 남자로’, ‘최고의 여자’ 등 신곡이 담긴 CD를 꺼내 들려줬다.

음색이 나훈아 씨와 비슷합니다. 아, 그런가요? (무릎을 치며) 제가 그걸 벗어나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는데 아직 멀었나 봅니다. 저는 형님처럼 노래를 하면 최고의 가수가 되는 줄만 알았는데, 그건 이미테이션이었어요. 나진기의 색깔을 내기 위해서 노래해야 되는데 말이죠.
 
형님과 교류는 하고 지내시나요. 제가 정말 잘 되어서 형님 앞에 나타나면 보기 좋은데, 그것도 아닌데 나타나면 부담을 가지실 거 아니에요. 미안한 마음에 연락은 드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형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조심스럽지만, 과거에 있었던 일은 사실이니까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지난 추석 나훈아 공연이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습니다. 보셨습니까. 형님은 항상 “내가 어느 순간 안 나오면 그냥 그런 줄 알아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형님이 활동을 안 하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나오시니까 반갑죠. ‘테스형’을 듣고 ‘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감탄했어요. 형님이 평소 아버지 산소에 자주 가시는데요. ‘테스형’이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만든 곡이란 걸 저는 알죠.
 


20201214123007_qdwahmms.jpg

신비주의 가수 나훈아는 실제 어떤 사람입니까.
머리가 굉장히 좋으세요. 잠시도 가만히 계시지 않고, 항상 작곡을 하고 가사를 쓰세요. 잠자리가 불편해서 지방 공연이 끝나면 곧장 서울로 오시는데요. 차 안에서는 잠을 안 자고 기타를 치고 곡을 만드세요. 평소에는 책도 많이 읽으시고 DVD로 해외 공연 실황도 많이 보십니다. 그런 걸 보시고 무대 연출할 때 영감을 얻으면서 남들이 생각하지도 않은 걸 만들어내시는 것 같아요.
 
알려진 대로 완벽주의자입니까. 콘서트를 앞두면 전체 스태프를 데리고 제주도로 가요. 호텔을 통으로 빌려서 2박 3일 동안 회의를 해요. 먹고 이야기하고 놀고 회의를 거쳐 콘셉트를 짜니 스케일이 다를 수밖에요.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철저하게 점검하시는데, 디너쇼를 하면 스테이크를 직접 드실 정도로 섬세하십니다. 공연 끝나면 저보고 얼른 밖에 나가보라고 하세요.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나 듣고 오라고요.
 
재미있는 일화도 많으시겠어요. 큰집에 형님 두 분이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는데요. 큰형님은 공부하고 형님(나훈아)은 유학 자금으로 노래를 배우러 다니셨어요. 그러다 오아시스 레코드사에 들어가서 오늘날 나훈아가 됐죠. 그때 형님 얼굴에 여드름도 나고 조금 촌스러웠거든요. 작곡가 한 분이 “니가 (그 얼굴로) 무슨 가수를 하냐. 니가 가수가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하셨대요. 그분은 아마 장을 여러 번 지지셨을 거예요.(웃음)
 
본인에게 나훈아는 어떤 존재입니까. 가수 나진기의 목표도 궁금합니다. 인생의 형님이자 선생님. 형님의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약이에요.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형님이 될 수 없지만, 형님에게 배운 것을 잘 키우고 싶습니다. 그동안 제가 취입한 곡이 30곡인데, 절반 이상은 형님 곡이에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은 ‘비오리’예요. 형님이 불렀으면 대히트가 되었을 노래인데, 아쉽지만 그게 운명이겠죠. 가수로서 저는 제 스타일을 계속 찾아가고 싶습니다.

관련기사

ⓒ woman.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
  • 페이스북
  •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