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구호팀장님’ 한비야가 책(<함께 걸어갈 사람이 생겼습니다>, 푸른숲) 한 권을 들고 돌아왔다. 3년 전 결혼한 ‘나’와 ‘그’에 대한 이야기다. 60대에 결혼한 늦깎이 중년부부의 신혼일기라 해도 좋고, 다름을 깨닫고 서로의 삶을 인정하는 특수기술을 묘사한 체험기이자 탐구서라 해도 좋다. 여전히 에너저틱(energetic)한 그와의 속사포 인터뷰.
 
한때 수학했고 지금은 가르치는 곳, 이화여대 캠퍼스에서 그를 만났다. 만산홍엽이 바삭바삭 말라 바람에 날리고 있건만, 그곳의 가을은 그 끝을 잡고 질기게 불타고 있었다. 차가운 날에도 울긋불긋 뜨거운 단풍은 그의 열정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인사를 나누면서부터 시작된 거침없는 언변과 활달한 표정은 여느 인터비와 확연히 다르다. 어제도, 1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만났음직한 분위기로 말 건네오는 이. 오지여행가, 긴급구호 전문가, 인도적 지원학 박사 한비야다.
 
날씨와 단풍, 자연 이야기로 시작하다가 산 이야기로 잠깐 빠졌다. 여행 중에 걷는 것을 좋아하고 특히 산을 좋아한다는 그가 늦깎이 트레커인 내게 충고(?)를 건넸다. 늦게 시작한 게 다행이란다. 일찍부터 다닌 사람은 무릎이 이미 나갔을 거라고, 나이 들어 시작하면 오래오래 할 수 있다고. 회사에 돌아와 그를 잘 아는 선배에게 귀동냥했는데, 그의 무릎에 물이 찬 적이 있다 했다. 자신의 경험을 두고 한 말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내내 그럴 것 같은 것들도 살다보면 브레이크 걸릴 때가 있다. 그도 이제 나이가 들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 아무리 행복하고 나름 곱게 늙는다 해도 적극 반길 일은 아니다. 그에게도 매한가지일 터. 하지만 그래도 그는 듣던 바 그대로, 여전히 한비야다. 특유의 에너지와 모험심, 바빠야 사는 것같이 느끼는 특유의 마인드와 행동력이 여전히 살아 있다. 다만, 그는 달라지려 하고 있다. 이제 너무 바쁘게 살지 않기로 했단다. ‘달라질 준비를 위해 바쁜’ 아이러니가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에겐 큰 변화다.
 
중요한 건, 이 모든 변화와 노력이 결혼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고 외치던 오지여행가, 열일하는 긴급구호 전문가로 익히 알려진 그가, 이제 새로운 행군을 시작한 듯 보인다. 좀 더 여유 있게, 더 사려 깊게, 보다 품위 있게, 뛰지 않고 느릿하게, 남은 인생을 걸어보려 한다. 그 인생 설계 이야기를 끊김 없이 꽉 차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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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긴급구호팀장’이라고 불렀다. 이제 호칭을 어떻게 해야 어울릴까. 현장 사람이라 팀장이란 호칭이 어울리고 익숙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단 1년 만이라도 박사라는 호칭을 원 없이 듣고 싶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했고 너무 고생을 많이 했다. 포기할 생각까진 없었지만 큰 고비가 몇 번 있었다.
 
책을 읽어보니 신혼일기 겸 여생 설계서 같다. 결혼은 뜻밖이었다. 제목처럼 함께 걸어갈 사람이 생겨서 좋은가? 나처럼 독립적인 여자, 바람 같은 여자, 목표 돌진형 여자가 결혼했다는 게 신기하게 보일 것이다. 왜 결혼했는지, 그런 여자가 60대에 결혼해 어떻게 살 것인지, 궁금해 할 분들이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썼다. 나도 결혼 자체가 낯설다. 그때그때의 그런 기분을 그대로 써봤다. 남편도 그의 입장에서 글을 썼다.
 
행복지수를 물었다. 지금 얼마나 행복한가. 행복지수? 제일 높은 게 얼마인가? 기준이 100이라면 99다.
 
1은 왜, 어디로 빠졌나. 못 만나니까. 지금 그리우니까. 남편은 네덜란드에 있다. 내가 12월에 갈 건데, 매일 카운트다운을 하고 있다. 책이 나왔을 때 같이 축복하고 같이 사진 찍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옆에 없어서 그게 아쉬워서 1% 빠진다.
 
결혼은 왜, 어쩌다 하게 된 건가. 내가 언제쯤 결혼할 거라는 생각조차 없었다. 비혼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내 할 일에 만족하고 바빠 따로 상상을 못했다. 내 삶에 만족했으니까. 나는 즐겁게, 자유롭게, 이왕이면 남 도와주면서 사는 게 목표였다. 그런 걸로 충분히 행복하니까 결혼이란 것에 기웃거리지 않았을 뿐이다. 연인처럼 지내기 시작한 건 결혼하기 10년 전부터였다. 아프가니스탄 긴급구호 현장에서 만난 우리 팀 상사였다. 일할 땐 너무 엄격한 사람이었지만 속이 깊었다. 그런 점에 알게 모르게 끌렸다.
 
둘 다 늦은 결혼이다. 남들 구호만 하던 이들이 서로를 구호해준 셈 같다. 맞는 표현이다. 정말 서로를 구호해준 셈이다. 안톤(남편을 부르는 호칭. 네덜란드인으로 본명은 안토니우스 반 주트펀이다)도 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어찌 됐을까 싶다. 아마도 쉽게 은퇴를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은퇴를 해도 함께 재밌게 살 사람이 생기니까 결심한 것 같다. 내가 그를 구제한 거다. 옛날엔 그가 보스였는데 이젠 내가 보스가 된 것 같다.(웃음) 물리적으로 아이는 낳기 어렵지만, 우리의 결혼은 사회적 아이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물리적 유전자는 없지만 사회적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는 커플 아니겠나.
 
사랑과 결혼의 함의는 꼭 일치하는 건 아니다. 안톤을 사랑하는가. 당연하다. 예전엔 내 행복이 제일 중요했다. 내가 행복해야 주위 사람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게 아니라 내가 행복하면 주변 사람이 행복할 거라 믿고 살았다. 그런데 안톤을 알고부터 이 사람의 행복을 내 행복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됐다. 이 사람과 같이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궁리하고 노력하게 됐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정말 이 사람을 마음 깊이 사랑하는구나를 느꼈다. 연애감정, 열정으로 시작한 게 아니라 동지애로 시작한 게 젊은이들의 사랑과 색깔이 다르다. 우리 관계의 기본 감정은 우정이었다. 하나의 독립적 인간과 또 다른 독립적인 인간이 만나 결합했다. 그것이 핵심이다. 주례사에 자주 나오는 말처럼 반쪽과 반쪽이 만난 게 아니라 각각 독립적인 완전체가 만났다. 60대가 돼서야 결합했으니 전통적 결혼 관습과 의식과는 좀 다르다. 남편이 버팀목이나 그늘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각각 독립적이다. 그 사람은 배, 나는 사과라고 생각한다. 사과인 나는 배 맛이 어떤지 모른다. 독립적인 개체니까. 이제 섞이니까 배 맛과 육질을 알게 된 것이다. 누가 누구를 흡수하는 게 아니라 과일 칵테일이다. 서로의 고유함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한다. 그걸 유지하는 핵심 비결은 각자의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건 아니다. 우리 같은 상황과 지향점이어야 적절할 거다. 결혼생활이 행복해지는 것은 그 사람 덕이 아니라 그 사람을 만나 나를 더 알게 돼서 행복해지는 것이다. 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 진정한 행복 아니겠나.
 
결혼 첫해와 3년이 지난 지금, 달라진 점은? 결혼 3년 차가 되니 점점 더 확실하게 알게 됐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할 때 가장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며, 앞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안톤 이전에 바쁘지 않은 나를 생각해본 적 없다. 일만 하는 일벌, 일벌레였다. 이 사람을 만나고 나서부터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게 됐다. 너무 재미있을 것 같고 기대가 된다. 나이 드신 어른들이 말하길 65세부터 75세가 인생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더라. 그 하이라이트가 뭔지 기대가 된다. 안톤도 그 말뜻을 알고 기대하는 눈치다. 노후를 생각할 때 가장 많이 염두에 두는 게 경제다. 우리는 수입에 맞춰 살 준비가 되어 있다. 생활의 규모를 줄일 준비가 안 돼 있는 사람들은 고민이 깊다. 아이 교육 등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들어 버겁다. 자녀도 없는 우리는 규모를 줄일 수 있고 방법을 안다. 그래서 행복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사니 3년 차도, 4년 차도 신혼 같은 기분이다.
 
책에 둘의 여생 설계 이야기를 많이 담았다. 유언장도 공개했다. 만으로 65세엔 월드비전 일 등 내가 책임져야 하는 사회활동은 접을 생각이다. 2024년까지가 될 것이다. 현장 가는 일도 그만두게 될 것이다. 강사와 연구자로서 연구 등 일부는 좀 더 하겠지만, 현장에 안 다니면 글도 쓰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도, 65세 이후 바쁘지 않은 삶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 것도 결혼과 안톤 덕분이다. 서로 구호해줬다는 말이 생각할수록 맞는 말 같다. 처음 얘기하는 건데… 여태껏 만난 사람은 연애감정이 생겨도 앞으로 내가 하는 일에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감정이 사라졌다. 내 일을 진심으로 응원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다시 보였다. 예를 들어 박사과정을 밟는 것도 그 나이에 그런 걸 왜 하냐고 이해를 못 해준다면 매력이 뚝 떨어졌을 것이다. 내가 가치 있게 생각하고 만족하는 일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내게 필요 없었다. 연애한다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이말 저말로 서로 발목을 잡는 건 싫었다. 함께 살면서 같이 성숙해지지 않는 결혼을 뭐하러 하겠나. 안톤은 그런 걸 다 이해한 사람이다. 그 때문에 내 앞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이성적인 판단도 있겠지만 그의 감성적인 매력에 푹 빠진 듯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보다 속 깊은 사람을 좋아한다. 일곱 살 차이지만 아버지처럼, 큰오빠처럼 속이 깊다. 신앙심으로든 감성으로든 사고방식이든 나보다 깊다. 무엇보다 따뜻하다. 일할 땐 정말 가차 없는 사람이었다. 중무장한 철갑상어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속은 소프트크림이다. 난 아무리 힘들어도 힘들다,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내가 열심히 일하면 지나가다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사람이다. 보스로서 신뢰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속이 깊은 건 일하면서 알았지만, 속이 따뜻한 사람인 건 나중에 알게 됐다.
 
의지할 사람이 생긴 듯하다. 눈물을 보인 적도 있나. 보시다시피 늘 에너저틱하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산 적이 없다. 그런데 그에게 기대어 눈물 흘린 적이 있다. 여러 번 있지만 특히 박사 논문 쓸 때 많이 힘들어 기댔다. 체력과 에너지, 시간… 모든 게 어렵고 힘들었다. 본 대로 느낀 대로 쓰는 에세이가 아니고 논문이라 너무 힘들었다.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좌절도 많이 했고 울고 싶을 때가 많았다. 너무 힘들어 진짜 운 적이 있다. 내가 눈물 보이는 순간은 이 여자가 참고 또 참고 또 참았을 거라는 것을 그가 안다. 앉아서 글만 쓰다가 치질이 생길 정도로 고통스러웠는데,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가 알더라. 그러니 독립적 인간으로 산다고는 하지만 의지하는 마음이 안 생긴다면 거짓말이다.
 
독립적으로 산다지만, 원하든 원치 않든 서로에게 스며들어 영향을 주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당연히 있다. 난 시간이 제일 중요한 자산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촌음이 아까워 아껴 썼다. 이 사람은 뭐든 미리 준비하는 사람이다. 첫 비행기 타겠다고 공항에 전날 밤 가서 자는 사람이다. 반대로 나는 늘 닥쳐서 하는 사람이다. 어느 날, 내가 밑지는 장사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았으니까. 그처럼 미리 준비하고 여유 있게 사는 법을 저절로 배워야 했다. 또 있다. 내가 말이 빠르고 끼어들기를 잘한다. 안톤이 그걸 지적한다. 내 말 습관에 대해 사람들이 싫어했겠지만 직접 면전에서 말해주진 않았다. 그런데 안톤은 ‘넌 남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다’며 ‘그러면 실례이고 너한테 손해다’라고 지적했다.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아마도 불쾌해하고 반발심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니 받아들이게 되더라. 이후론 대화할 때마다 내가 또 그러면 즉시 얘기해달라고 말한다. 그와 함께 고치는 연습 중이다. 그를 통해 나도 고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는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는 걸 더 확실히 알게 됐다. 멋있게, 품위 있게 늙고 싶다. 목소리 크고 말 빠른 건 못 고쳐도 그런 건 고칠 수 있으면 좋겠다. 사실, 말은 못했지만 나도 진짜 원했던 거였다. 미리미리 하기와 아무것도 안 하기도 연습 중이다.
 
반대로 그가 영향 받은 것도 있지 않을까? 유언장 쓰자고 할 때 처음엔 난색이었다. 난 유언장 10년 전에 써놓고 업데이트했었다. 일하는 현장이 위험했고 죽음을 눈앞에서 많이 지켜봐서 유언장 생각을 한 적 많았다. 영성수련원에 갔을 때도 유언장 쓰기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왕 하는 거 제대로 써보자고 만든 적이 있다. 그걸 바탕으로 매년 업데이트해왔다. 안톤은 처음엔 놀라며 얼버무리고 피하는 인상이었다. 죽음을 생각하기 싫었던 것 같다. 언젠가 오겠지만 미리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거다. 내 일기장 얘기도 하면서 자꾸 설득했더니 이제 그도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됐다. 죽음이 금기어가 아니라 가까운 이웃이고, 사납거나 파괴하는 단어가 아니라 언젠가 만날 단어라는 것 일깨워줬다. 겨울이 오는 걸 막을 순 없지만 외투와 담요를 준비하는 건 자연스럽지 않느냐고 얘기했다. 안톤도 유언장을 쓰기 시작했다. 내년까지는 공증 받은 유언장을 그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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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만난 동반자에 대한 감동과 감사의 고백이 내내 이어지는 동안, 두 사람의 사랑은 무슨 색깔일까 생각해봤다. 미리 생각해둔 듯이 속사포처럼 대답이 이어졌다. 자신은 빨간색, 안톤은 파란색이 딱이라고 한다. 자신의 사주팔자엔 불이 다섯 개일 정도로 워낙 불같은 성격이라고, 반대로 안톤의 기본 성격은 물이라고 했다. 물이 불을 끌 수도, 불이 물을 마르게 할 수도 있지만, 젊었을 때 만난 게 아니라서 좋은 쪽으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
 
이들 부부가 정해놓은 부부생활수칙(?)은 꽤 특이하다. 대표적인 것이 336 시스템. 3개월은 네덜란드의 남편 고향에서, 3개월은 아내가 있는 서울에서, 한 해의 절반인 6개월은 따로 떨어져 각자 사는 방식이다. ‘녹색 소파 대화’라는 것도 있다. 집에 있는 녹색 소파에 앉아 정해진 시간에 허심탄회한 대화를 한다. 서로를 위해 권고하고 충고하기를 피하지 않는다. 오전 10시 전엔 부정적인 말, 딱딱한 표정 안 짓기라는 규칙도 있다. 아무리 급하고 답답해도 아침 시간엔 항상 웃는 낯으로 상대를 대해야 한다.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을 망치지 말자는 뜻. 부부생활을 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지혜를 얻었는지 물으니, 나이 들어 결혼한 덕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이 들어 결혼한 딸, ‘바람의 딸’ 한비야는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숭의여고를 졸업하고 그해 대학입시에 실패하고는 클래식 다방 DJ, 번역 등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었다. 6년 후 특별장학생으로 홍익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고, 미국 유타대학교 언론대학원에서 국제홍보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글로벌 홍보회사 버슨 마스텔라 한국 지사에서 근무하는 동안, 고속 승진을 하며 인정받았지만 돌연 사표를 던지고 세계 여행에 나섰다. 열다섯에 작고한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데, 약속이 세계일주였다고 한다. 7년간 세계의 오지 마을을 다녔다. 그 경험을 책으로 펴낸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과 해남 땅끝 마을에서 강원도 통일전망대까지 우리 땅을 걸어 다니며 쓴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등이 큰 반향을 일으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2002년 3월이었다. 오지여행가에서 국제난민운동가로 변신한 때였다. 분쟁지역 아프가니스탄에 발을 디뎠다.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던 아프가니스탄에서 지뢰를 밟아 왼쪽 다리와 오른팔을 잃은 여자아이가 건넨 ‘귀한’ 빵을 베어 문 뒤 난민촌 아이들의 친구로 거듭났다고 전해진다. 그 순간이 그가 오지여행가에서 난민구호운동가로 변신한 결정적 계기라고 알려져 있다.
 
2001년부터 2009년 6월까지 한비야는 국제 NGO 월드비전에서 긴급구호팀장으로 일하면서 전 세계 구호현장에서 전문 구호 활동가로 활약했다. 네티즌이 만나고 싶은 사람 1위, 여성특위가 뽑은 신지식인, 한국 여대생이 존경하는 인물 1위, 평화를 만드는 100인 등에 선정되었고, 2004년 ‘YWCA 젊은 지도자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론을 갖춘 구호 전문가로 거듭나기 위해 2009년 8월 미국 터프츠대학교 국제관계 및 국제법 전문대학원 ‘플레처스쿨’에 진학해 인도적 지원 석사과정을 공부했다. 광고료와 인세로 지구촌의 어려움에 대처하고 참여할 수 있는 시민의식 배양을 위해 ‘세계시민학교 지도 밖 행군단’을 구성했다.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에서 인도적 지원학 박사과정에 도전해 신고 끝에 학위를 얻었고, 지금은 대학원생과 학부생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강의와 강연을 이어가고 있다. ‘새 신랑’ 안톤과는 2002년 아프가니스탄 북부 헤라트의 한 긴급구호 현장에서 처음 알게 됐다. 멘토, 친구, 연인 관계를 거쳐 만난 지 15년 만에 부부가 되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쓰는 책마다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한비야의 중국견문록>,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6인 6색,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 <그건, 사랑이었네> 등이 있고, 이제 막 출간된 남편 안톤과 함께 쓴 <함께 걸어갈 사람이 생겼습니다>는 그의 열 번째 책이다.

은퇴 이후의 삶은 슬로라이프인가? 기질상 그게 맞을까? 그렇게 되지 않겠나. 혼자가 아니라 둘이 되니 모든 일에 시간이 더 들어간다. 어디를 나가도, 밥을 먹어도, 시간이 두 배로 든다. 어린아이 데리고 나가려면 시간 걸리는 것처럼 그렇더라.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슬로라이프에 익숙해지려면 마음 수련이 필요할 듯하다. 그런데 나도 이젠 예전과 똑같진 않다. 체력의 한계도 왔고 앞으로 더 올 것이고, 순발력이나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도 달라지는 걸 느낀다. 회복 타이밍도 더디다. 그래서 현장 일도 65세 이상이면 안 되겠구나 생각하게 된 것이다.
 
336 시스템이 계속되진 않을 거라고 들었다. 2030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세 달씩 한국과 네덜란드에서 같이 살고 6개월 떨어져 사는 식은 10년만이다. 2030년부터는 한국에서 부부가 함께 정착한다는 계획이다. 65세까지 일하면 현장 경력 25년이다.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젠 안 바쁜 한비야가 될 것이다. 이리저리 빙빙 돌아가는 경유 노선 항공기 말고, 제일 싼 숙소나 제일 싼 음식 말고, 제대로 된 것으로 바꾸고 천천히 여유 있게 살고 싶다. 이번 12월에 네덜란드 갈 때 대한항공을 탄다. 그 전엔 그렇게 직항 노선으로 다녀본 일이 드물다. 65세 은퇴 후 2030년 되기까지는 유럽에 주로 있을 예정이다. 평생 오지로만 다녀서 의외로 유럽을 잘 모른다. 네덜란드가 서유럽의 허브다. 그곳 남편의 고향 마을에 주로 있을 것이다. 방문자가 아닌 그곳 마을 사람의 일원으로 살고 싶다. 마을에 섞이고 마을을 위해 자원봉사도 하고 취미생활도 열심히 할 예정이다. 한국 사람이 드물다. 자랑스런 나라, 대한민국 출신에 박사학위까지 한 구호활동가.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되는 한국인 아내이니 잘 대접받고 잘 섞일 거라 믿는다. 희귀하고 귀여운 존재가 되지 않을까? 우리 부부 별명이 플래닝닷컴(planning.com)이다. 우리는 다 계획이 있다(웃음).
 
남은 인생에서 꼭 하고 싶은 버킷 리스트가 있나? 전 세계 순례길을 다녀보고 싶다. 걸을 수 있는 한, 리스트에 따라 차례차례로 천천히. 둘 다 가톨릭 신자라서 영성생활의 한 방편이 될 것이다. 남편은 수도자 같은 사람이다. 나이 들수록 영성생활의 비중이 커질 것이라 버킷 리스트 중 최우선이다. 원래 ‘책 열 권 내기’도 버킷 리스트였는데, 이번 책으로 목표를 달성했으니 여한이 없다. 나이가 적든 많든 인생에서 중요한 건, 혼자 있는 힘, 혼자 생각하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그날의 생각을 끄적거릴 수 있는 시간, 다른 사람의 생각이 섞이기 전에 내 생각을 하는 것, 섞이지 않는 나를 발견하는 것, 그런 걸 중시한다. 그래서 책 쓰기는 좋은 버릇이다. 늘 반 발짝 앞서가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동안의 내 삶이 진짜 그랬다. 반 발짝 앞선 이야기를 글로 쓰는 재미나 의미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앞으로의 삶에도 남보다 반 발짝 앞서는 경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걸로 만족하고 그만 쓰고 싶다.
 
오지여행가, 구호 전문가로서 베테랑의 조언을 듣고 싶다. 젊은 세대들에게 한마디 조언을 남긴다면? 얼마 전 조카가 대만 여행을 간다고 했다. 인터넷 블로그를 뒤지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가 그랬다. 다른 사람이 올린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는 건 팩트 체크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 네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정하고 너에게 맞는 정보를 찾아라, 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섞지 말고 너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면 된다고 했다. 그런 힘이 지금까지 나를 키워왔다. 내가 하고 싶은 것에만 집중하는 힘, 혼자 생각하고 혼자 실행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1만 원 한 장으로 책을 사든 맛있는 걸 사먹든 자기 판단대로 결정하되 책임을 지면 된다. 책을 정말 좋아한다면 한 끼 정도 굶어도 되지 않겠나. 우리는 대개 한정된 자원 안에서 선택을 해야 하고 자기 선택에 책임지며 산다. 세상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다른 사람 생각하지 말고 내 생각에 집중하는 것, 자기 선택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나만의 휴식, 힐링이 필요할 땐 무엇을 어떻게 하나? 뭔가 복잡하거나 힘들면 일단 혼자 산에 간다. 사람이 거의 없는 시간에 너무 힘든 곳 말고 땀이 약간 날 정도의 코스를 택한다. 그러면 생각이 훨씬 정리가 잘 된다. 산에 오르면 힘이 든다고 말하지만, 난 산에 가야 힘이 안 들고, 오히려 힘이 생긴다.
 
인터넷엔 아직 ‘한비야’를 부정하고 폄하하는 글들이 남아 있다. 그때 그리고 지금, 대중의 평판으로 인한 상처는 어떻게 극복하는가? 예전에 이런저런 논란이 일었을 때 정작 나는 몰랐다. 나중에 봤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일일이 대답해야 할지 무대응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했지만, 그때 상황은 그냥 무대응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심적으로 아팠고 위축됐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들, 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함께 기뻐하고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많은 걸 보고 힘이 생겼고, 그때 일일이 대응하지 않은 게 맞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별 생각 없이 한 건데 그것이 뜨거워 데는 사람도 있겠다는 반성을 해보곤 했다. 내가 너무 열정적이다 보니, 뜨겁다 보니, 받아들이는 분 입장에선 언어 폭력 같은 게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정말 미안하고 용서를 구한다. 나도 용서해야 할 사람들이 있는데, 우선 내 용서가 필요한 분들께는 정중히 용서를 구한다. 너무 뜨거우면 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나랑 성향이 아주 다른 사람은 날 보면 숨 막힌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목소리 크고 빠르고 성격이 불같은 데가 있으니까. 그런 나와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이 많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예전에 잘 아는 수녀님한테 고민을 얘기했더니 ‘다 유명세 아니겠냐. 그런데 세율이 좀 높다’라고 하신 적 있다. 그냥 열심히 진정으로 임하면 언젠가는 다 없어지겠지, 시간이 말해주겠지, 라고 위로를 해주셨다. 책을 쓰면 대중과의 접점이 또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비슷한 질문이 또 나올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도 전에 비해 훨씬 마음이 덜 무겁다.

 
우리가 아는 한비야는 꽤 벅찬 인생을 살아온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다. 30대에 육로로 세계일주를 떠났고, 40대에 한국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으로 세계 곳곳의 재난현장에서 일했다. 50대에 인도적 지원학 석사학위를, 60대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1년의 절반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머지 절반은 국제구호 전문가로 일하고 있다. 그에게도 인생에 한 번은 있을 법한 결혼이라는 선물도 찾아왔다. 의혹과 비난, 논란도 많았지만 그가 이겨내는 사이 우리도 견뎌낸 듯하니 대수로울 일도 아니다.
 
은퇴를 수년 남긴 지금, ‘바람의 딸’이라는 그가 꿈꾸는 바람은 또 무엇일까. 두어 시간 만나고 보니 종착점은 모르되 지향점은 알게 된 듯하다. 바쁘지 않게, 여유 있게, 품위 있게, 사려 깊게, 또 어디서 무엇이 되든 이제부턴 그렇게 살기로. 지도 위도 아니고 밖도 아닌 곳, 한비야의 새로운 행군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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