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수 송창식을 만나는 일은 호기심을 동반한다. 그렇다고 마음이 가볍거나 쉽지 않다. 나이든 원로(?)여서, 범상한 인물이 아니어서 용기가 따라야 했음을 고백해야겠다. 섣부르게 자잘한 질문을 던지느니 담대한 척 큰 담론으로 상대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가객이자 기인으로 불리는 사나이, 송창식은 무엇으로 사는가. 어제는 왜 그렇게 살았고 오늘은 또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장소협조 라이브 카페 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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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멀다 하고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던 교정을 떠나 1986년 군복무를 시작했다. 열정과 냉정 사이를 오가며 혼돈만 거듭하는 음울했던 시절, 마음을 달래준 노래가 있었다. 군가도 아닌 운동가요도 아닌 그 곡은 바로 ‘담배가게 아가씨’였다. 마침 군 훈련소 때부터 담배를 배운 터였고, 멜로디도 노랫말도 신기하고 재미있어 노래를 입에 붙이고 살았다. ‘우리 동네 담배가게에는 아가씨가 예쁘다네/짧은 머리 곱게 빗은 것이 정말 예쁘다네/온 동네 청년들이 너도 나도 기웃 기웃 기웃…’. 우리 동네 담배가게에도 예쁜 아가씨가 와 있을 것만 같은 상상에 담배가 꿀맛이었다. 담배 배우길 참 잘했다 생각했고 PX(군부대 내 매점)엔 왜 시커먼 애들만 있는지 원망스러웠을 정도였다. 내겐 ‘하얀 손수건’, ‘피리 부는 사나이’, ‘맨 처음 고백’도 이미 익숙했지만 그 시절엔 그만한 노래가 없었다. 불량배에게 포위된 아가씨를 구하려 ‘아자 아자 아자자자자자~’ 돌격하는 후렴은 얼마나 비장하고 통쾌했던가. 
 
워낙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그 가수를 만나는 길은 오직 미사리로 통하고 있었다. 퇴촌에 집이 있지만 밤낮이 뒤집힌 생활을 하는 그가 비로소 움직이는 장소는 그곳 라이브 카페이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은 늘 그렇듯 늦은 오후나 밤이다.

 
수십 년째 올빼미 생활이다. 언제부터인가? 노래를 시작하면서부터 거의 그래 왔던 것 같다. 옛날엔 통금시간이 있지 않았나. 방해받지 않고 혼자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밤이어야 했다. 가사를 그 시간에 만들었다. 새벽 4, 5시까지 작업하고 연습하고 잔 뒤 오후 서너 시에나 일어난다. 평생 그렇게 살다 보니 가끔 어쩔 수 없이 밝을 때 바깥으로 나와 햇빛을 접하면 아주 이상하다. 오전이나 낮에 사람 만나는 일이 거의 없다. 
 
사람들과 교류도 부족하고 세상물정에도 어두울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부족함을 느끼긴 하는데 사는 데 별문제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이가 되고 보니 좀 아쉬운 점은 있었던 것 같다. ‘내 삶이 뭔가 약간 부족했나?’ 하고 갸우뚱할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친한 친구들이 하나도 없겠다. 좀 있긴 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됐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전부 음악 하는 친구들이니까 폭이 좁긴 하다. 일반인 친구를 만나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꼭 음악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어도 그랬을 것 같다. 음악뿐 아니라 인생 자체가 뭐라도 파고들고 공부하는 인생이라 거기에 열중하느라 대인관계에 큰 관심이 없었다. 가끔은 내가 너무 혼자 달렸나 생각할 때도 있긴 하지만, 팔자가 그런 걸 어쩌겠나. 
 
생활이 단출하면 스트레스도 없나? 때로는 풀어야 할 것들이 있을 텐데. 스트레스가 있긴 한데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있다 해도 하루 두 시간씩 운동하면 다 풀린다. 
 
특이한 운동을 한다고 들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나면 맴맴맴 돈다. 그 자리에서도 돌기도 하고 방 안을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돌기도 한다. 매일 하는 유일한 운동이다. 
 
어지럽지 않은가? 처음엔 단 1분만 돌아도 어지러웠다. 자꾸 하다 보면 된다. 그 전엔 선 자리에서 힘 빼고 기마 자세를 유지하는 운동을 했다. 태권도 기본자세나 입선 자세 같은 건데 그게 최고의 운동이다. 그런데 어느 날 좌선을 하는 자칭 ‘도사’라는 후배가 몸이 휘청거릴 테니 힘쓰지 말고 그냥 놔두라고 했다. 그러면 몸이 돈다고(웃음). 그 뒤부터 계속 돈다. 1만 일을 목표로 아직까지 돈다. 2024년이면 1만 일을 채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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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취미나 잡기는 없나? 예전엔 바둑을 두었다. 3단까지 땄는데 중간에 그만두었다. 머리도 몸이라고 생각한다. 머리가 좋다고 모든 걸 잘하는 게 아니다. 몸이 꾸준한 연습을 하지 않으면 그 이상의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음악 하기에도 바쁜 놈이 바둑을 꾸준히 연습할 수 없으니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사리에 있는 라이브 카페 ‘쏭아’는 오래전부터 그와 기타리스트 함춘호가 무대에 서는 곳이다. 코로나19 유행으로 금요일, 토요일 공연만 하고 있었지만, 팬데믹이 더 심해진 근래엔 무대가 지속될 수 있을지 위태로운 상황. 평일이었던 인터뷰 날 저녁엔 손님이 아예 한 테이블도 없었다. 하지만 공연이 있든 없든 그는 카페에 매일 나온다. 혼자 지내는 집에선 구상과 연습을 할 뿐 식사와 미팅은 주로 카페에서 이뤄진다고. 집과 스튜디오, 카페를 오고가는 삼각 루트가 공고해진 지 오래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여전히 중심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는 꽤 온전하진 못한 듯했다. 코로나19 때문에 가라앉은 분위기도 문제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더 깊은 곳에 있음을 이내 알아챘다. 노래가 걱정이다. 담담한 말투에 녹아든 냉정한 성찰과 회의가 쓸쓸한 뒷맛을 남겼다.    

무엇이 문제인가. 성대가 문제다. 점점 소리가 짧아지고 힘을 못 쓴다. 원래 판소리하는 사람들은 거기다 덕지덕지 결절을 많이 붙여서 다시 성대를 만들어 쇳소리를 낸다. 내 경우엔 그러면 야들야들하게 소릴 못 내니까 수술을 했던 건데, 이제 다시 수술하려 하니 나이가 많아 한계가 있는 거다. 성대수술을 하면 이전 목소리와 달라진다. 일반인이 듣기에 같은 것 같아도 사실 같은 소리가 아니다. 1976년에 첫 수술을 했을 때도 사람들은 그대로라고 했었다. 호흡도 달라지고 발성도 다르다. 본인은 알고 있다. 짧아진 호흡을 가지고 안간힘을 써서 노래를 부르다 보면 짜증이 난다. 내 마음대로 되질 않고 지 마음대로 끊기고 음정도 다르니 불만족스럽다. 지금도 매일 내게 맞는 음색을 찾으려 연습하는데 썩 잘 되진 않는다. 영영 안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연습조차 안 하면 내 음색이 아예 없어질 테니까 매일 연습한다. 몸이 많이 늙어서 힘들다.
 
팬들은 그만해도 다름없이 만족하고 좋아하지 않겠나. 간혹 예능프로그램에 나올 때 꽤 화제가 됐다. 복고 트렌드로 추억을 소환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졌다. 방송 출연을 거의 안 하다가 작년에 <악인전>에 나간 게 계기가 됐다. 그 작가가 자꾸 나한테 예능적인 요소가 있다고 나오라고 해서 끌려 나갔다. 난 예능적 요소가 전혀 없는데 이상하게 그런 말로 불러냈다. 그러다가 그 작가가 그만두고서는 흐지부지됐다. 질긴 권유로 어쩌다 하게 됐지만, 다시 말해도 난 예능적 자질은 전혀 없다.
 
하긴 당시엔 그런 건 절대 안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괜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웃음).노래만 가지고 평생 간다고 했는데 성대를 다치고 나니 연예인으로서 명맥을 잇기가 불편하고 불리한 것 같더라. 지금은 예능적 요소가 없으면 매체에서 다루질 않는다. 예전보다 자극적인 시각적, 청각적 요소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나처럼 그냥 음악만 하고 노래만 하는 건 쓸모가 없어진 것 같다. 가수로서의 재능 말고도 다른 재능이 있어야 써먹을 수 있다. 이야기라도 잘해야 하고…. 그런데 난 이른바 ‘구라’라는 걸 영 못한다. 소질이 아예 없다.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그것도 연예성, 대중성이 있는 이야기여야 먹히지 나처럼 정통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아카데믹하게 하면 지루하고 재미없다. 그러니 예능 프로그램에는 안 맞겠지(웃음). 
 
요즘은 예능이 곧 트로트다. 그 열풍은 어떻게 생각하나? 트로트는 사실 우리들 모두의 뿌리다. 트로트적 요소는 누구에게나 다 있고 향수도 강하다. 술 한 잔 딱 하면 나오지 않나. 신문화가 들어오면서 그동안 뒤로 밀려 있었을 뿐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이제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전면으로 나왔으니 다시는 자리를 안 뺏길 것 같다. TV 앞으로 나온 트로트 팬들도 웬만해선 다시 물러서지 않을 것 같더라. 사실 지금 트로트는 예전과 다른 것이다. 요즘 친구들이 부르는 건 트로트 그 자체는 아닌 듯하다. 실제로 그들이 트로트를 부르는 건 아니다. 예전 트로트를 따라 하는 것이고 트로트풍으로 노래를 잘하는 것일 뿐이다. 트로트는 이미자 씨 같은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정석이다. 그걸 처음 변형시킨 건 나훈아였다고 본다. 이후로 변형된 트로트가 생겨났다. 지금은 트로트 그룹과 케이팝 그룹으로 세대가 나누어진 것 같다. 그 중간 음악은 어정쩡해 보인다.
 
 
때마다 복고풍이란 게 있었다. 음악의 유행은 같은 것이 계속 돌고 도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것으로 진화하는 것인가? 트로트가 다시 살아났지만 옛날 트로트는 아니다. 통키타 음악도 다시 살아난다 해도 예전과는 질이 다른 것이 될 것이다. 겉만 비슷할 뿐이고, 예전 것 중 어떤 요소만 떼어내 가미한 것 아닐까? 그러면서 새롭게 진화하는 것이다. 연습하는 패턴도 예전과는 다르다. 
 
뭐가 다른가? 연습하는 패턴부터 다르다. 지금 시대는 노래를 잘하기 위한 연습이란 주로 표현력을 연습하는 것을 말한다. 예전엔 노래 자체를 연습했지, 표현력이나 퍼포먼스를 우선으로 여기지 않았다. 지금은 보다 자극적인 고도의 표현력이 있어야 가치가 있어 보이는 시대다. 테크니컬이 중시되는 시대다. 
 
송창식의 노래는 특별한 표현력이 없이 담백해도 큰 감동을 주었다.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 내 노래에는 기교가 전혀 없었다. 테크니컬한 표현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당시로서는 그게 대중을 사로잡는 표현력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정도로는 눈에 띄지 않고 인정받기 힘들다. 그런 식으로 노래하면 승부를 걸기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지. 그래서 빨리 어필할 수 있는 표현에 집중하는 거지. 본질보다 퍼포먼스가 중요한 시대다. 음악의 유행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인 줄 알았다고? 그건 아니다. 같은 것 같아도 다 다른 것. 당대의 대중이 당대의 현실에 맞고 구미에 맞는 것을 취하는 것이라고 본다.
 
단지 가수라기보다 음악 공부의 달인으로 소문나 있다. 아직도 계속하나? 공부 많이 한다. 내 음악의 선과 원칙을 논리적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된다고 확신한 중심선과 로드맵을 그렸다. 그런데 만들긴 만들고서 몸을 거기에다 다 맞추질 못했다. 음악을 대중화하는 일은 여럿이 같이해야 하는 건데 나는 너무 혼자 갔다. 내 음악만 너무 따로 노는 듯한 느낌이다. 
 
대중으로부터는 사랑받지 않았나. 그건 나와 대중이 배짱이 맞았을 뿐이다. 내가 대중을 오래 끌고 온 게 아니라 대중이 날 그냥 좋게 봐준 것뿐이다. 내가 세운 음악의 주지선대로 일로매진하질 못했다. 열심히 했지만 게으른 점이 있었을 수도 있고, 스스로 너무 독단적인 듯해서 주저한 점도 있고…. 어쨌든 음악 하는 사람들의 힘을 받아서 함께 갔으면 성공했을지 모르는데 혼자 하려니 힘들었던 것 같다. 세계에도 알릴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자 했는데, 결국 케이팝이 먼저 성공을 거두었다. 내 음악은 아직 몸으로 완성하지 못해 성공 못한 것이다.
 
막연하고 어렵다. 송창식의 음악은 어떤 것인가. 말하자면… 우리는 음악을 서양의 체계 내에서 공부했다. 그런데 그 체계 밖에서도 여러 음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느 날 그 체계 말고 새로운 이론 체계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난 단지 노래만 하는 가수가 아니다. 이론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이론은 만들었는데, 몸으로 다 만들어내질 못했다. 
 
새로운 체계란 무엇을 말하나. 악보를 파괴하고 필링(feeling)으로 부르는 이장희식 팝송을 말하는 건가? 그거는 필(feel)만으로도 노래가 된다는 걸 발견한 거고, 이거는 아주 근본적인 것이다. 서양음악은 피타고라스라는 천재가 만든 12음계를 쓴다. 수학적 계산으로 음계를 나눈 건데, 너무 기막힌 체계여서 다들 매료됐고 계속 발전돼왔다. 나도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있었지만 알고 보니 전부가 아니란 걸 알았다. 사실은 그게 자연음계가 아닌 인위적인 음계였던 거다. 우리는 12음계로 노래하지만 몸은 12음계로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 몸은 육자배기 음계가 녹아 있어서 12음계를 노래하지만 완전히 녹아들어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우리는 우리 식으로 노래해야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 식의 음계는 국악이 기본이 돼야 한다. 나도 내가 제일 노래 잘하는 사람인 줄 알던 시기가 있었다. 알고 보니 내 몸은 12음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맞는 음계를 연구했다.
 
그런 걸 다 언제 깨달았나? 1973년 군대에 있을 무렵이었다. 옛날 주한미군방송(AFKN)에서 아마추어들이 블루스 부르는 걸 봤던 날이었다. 나도 블루스를 좀 한다 자부했는데 나랑 비교해보니 내가 훨씬 더 못한 것 같아 너무 놀랐다. 2주일 동안 눈이 퉁퉁 부어 다녔다. 분해서 울고 다녔다. 어릴 때부터 음악 교육은 받지 못했어도 내 나름대로 자존감이 엄청났었는데, 그때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다. 몇 달 뒤엔 전주대사습놀이 경연대회를 보는데, 장원을 한 두 여자가 하나는 가야금, 하나는 대금 병창을 하더라. 두 사람 연주를 보다가도 놀랐다. 난 걔들만도 못했다. 처음으로 음악 전체에 대한 회의가 생겼다. 음악 이론으로는 누구한테 뒤지지 않게 정말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었지만, 다 없는 걸로 치고 다시 공부하자 생각했다.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거다. 그때부터 내 음악을 찾겠다고 연구에 골몰했다. 그런데 이미 가수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아니었나. 내가 틀렸으니 같이 음악 한 후배들은 오죽했겠나. 그런데 걔들은 ‘우리가 왜 틀렸냐?’, ‘그런 게 어딨냐’며 호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둘씩 떠나게 됐다. 한꺼번에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스며들게 하는 쪽으로 작전을 바꿨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만들 때 새로 만든 음악 요소를 한 소절씩 집어넣어 봤다. 1974년에 낸 <한번쯤>에도 실험적으로 가미했다. 

그 새 음악의 ‘요소’란 12음계와 다른 체계에서 만들어낸 것을 말한다. 문제의 <피리 부는 사나이>의 한 소절은 무엇일까. 특유의 눈웃음과 함께 공개한 대목은 ‘언제나 웃는 멋쟁이’였다. 일반인은 못 느낄 정도였지만 12음계를 무너뜨린 부분이었다. 남 몰래 시도한 실험 그리고 언제나 웃는 멋쟁이. 성공의 기쁨을 혼자 만끽하고자 가사를 그리 박아놓은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기질 자체가 쉽게 타협하지 않고 ‘보통’으로는 만족하지 않는 것 같다. 베스트나 절대만 지향하는 건가? 절대를 추구하는 완벽주의자나 결벽주의자는 아니다. 절대를 추구했다기보다 그냥 누구보다 못하다는 걸 쉽게 용납 못하는 성격인 건 맞다. 내가 제일 잘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나보다 나은 놈이 눈에 띄는 건 용서할 수 없는 기질이 있다. 후배들에게도 그 기질을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그걸 닮고 싶어 하는 후배가 없었다. 이만하면 됐다는 식이 많았다. 그래서 거꾸로 내가 결벽주의자처럼 비춰진 점도 있다. 
 
노랫말이 모두 좋다. 영감을 어떻게 얻나? 노랫말이 큰 성공 요인이었던 건 나도 느낀다. 그런 건 그냥 재능이나 솜씨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작사가가 그렇듯이 영감의 원천이라면 그냥 자기 삶이겠지. 좋은 노랫말을 만들려면 말이 곧 노래라는 걸 스스로 느껴야 한다고 본다. 말 자체가 음악이고 노래라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 나도 그게 조금 있었던 사람일 뿐이다. 그게 다행히 대중과 배짱이 맞았을 뿐이고.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소문났다. 글쓰기 재능도 있었나? 재능이 좀 있었지만 백일장에서 상 탄 적은 없다. 백일장은 주로 시를 쓰니까. 선생님이 ‘창식이 너는 시는 쓰지 말라’고 했었다. 산문은 소질이 좀 있었다. 말 자체가 노래인 것은 일찍 알았다. 외국 노래에다 한국말을 입힐 때 문법적으로 안 맞아도 노래하기 좋은 말로 바꾸는 감이 있었다. 이런 경우에 대개는 창피하고 자존심 상하니까 문법적인 걸 지키려 하지만 난 그걸 과감히 탈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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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대개 사랑을 이야기한다. 송창식의 노래도 체험에서 나온 건가? 내 가사 내용 중 실제 체험은 10분의 1도 안 된다. 사랑 노래를 썼다 해서 그 사랑을 다 해본 건 아니다. 그냥 명상하다가도 쓰고 다른 일 하다가도 쓴다. 해석은 듣는 분들의 자유 영역이다. 실제로 난 명상하다가도 쓰고 그냥 허겁지겁 급하게도 쓴다. 예를 들어 옛날에 ‘당신은 누구시길래’라는 곡은 친구 상벽이(이상벽 기자)가 내가 뮤지컬 <춘향전> 곡을 쓴다고 보도를 맘대로 해버려서 부랴부랴 썼던 것이다. 실제 체험과는 무관하게 다른 상황을 연애하는 상황으로 대입해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참새의 하루’는 내용보다 5절짜리 곡을 쓴다는 목적만 생각하고 쓴 글이다(웃음). 
 
체험하지 않고 앉아서 써도 줄줄 나오나 보다.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나. 물 그러면 석유 그래도 되는 거고, 다 그런 거 아닌가. 구체적인 체험 없어도 척하면 아는 거고. 예전에 이런 얘길 어떤 가수한테 했더니 깜짝 놀라더라. 내 곡 가사들을 보고 굉장히 낭만적인 사람으로 알았다면서 ‘앞으론 괜히 그런 얘기 하고 다니지 마세요’라고 했다(웃음).
 
가수 말고 ‘인간 송창식’은 어떤 사람인가. 가수로나 인간으로나 낭만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어떤 사람이냐 묻는다면 대답하기 막연하다. 그냥 공부하는 사람이다. 낭만적이기보다는 아카데믹한 인간 부류에 속한다. 
 
가수가 아닌 다른 삶을 살았다면 가장 어울릴 직업은? 제일 어울리는 건 중? 스님이 됐을 것 같다. 
 
그냥 속세에 살면 안 되나? 그럼, 한글학자나 국어학자 정도? 언어학이나 기호학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겐 음악이 소재가 됐을 뿐 전부이거나 절대는 아니었다. 공부하고 분석하는 게 좋을 뿐이다. 
 
가난에 찌든 때가 있었다. 돈 많이 버는 직업엔 관심이 없나? 어렸을 땐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그렇다고 꼭 돈이 많아야 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필요하다는 건 알았지만 거부가 되겠다는 욕심 같은 건 없었건 거지. 노래 시작하고 나서는 돈에 쪼들리지는 않았으니까, 살만큼은 있었으니까 당연히 욕심이 없었다. 밥 굶고 노숙하던 경험이 있어서 돈 좀 부족한 것이 그리 겁나지 않았던 것도 영향을 주는가 보다.     
 
보통 사람과 사고가 다르다. 그래서 ‘기인’이라는 소릴 듣는가 보다. 보통 사람과 달리 산 건 맞다. 하지만 보통 사람에게 있는 집착이 아무것도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결벽주의자도 아니고 욕심도 있다. 돈에도 여자에도 욕심 있다. 단, 그쪽으로 탐닉하고 쓸데없이 일로매진하지 않는다는 게 다를 뿐이다.  
 
절제한다는 의미인가? 절제하다는 말이 맞다. 돈에 대해선 특히 그렇다. 돈을 버는 일에 투신하는 시간을 아까워한다. 돈을 너무 많이 벌어서 크게 쓰고 살기 시작하면 나중에 돈 없을 때 골치 아파진다는 생각을 한다. 돈은 쓸 만큼만 쓰고 살 수 있으면 된다 생각해서 그랬다. 어느 정도 벌었으면 그다음엔 더 이상 돈 버는 일에 매진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내가 돈 버는 일에 결벽증 있는지 돈 안 되는 일에만 몸을 쓴다고까지 얘기하는데,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니다(웃음). 
 
사랑도 절제하고 살았나? 그런 쪽에도 절제가 많았다. 여자한테 푹 빠지는 건 좋지 않다 생각했다. 물론 사랑은 해봤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완전히 나를 완전히 투신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교제를 하더라도 상대방이 뭔가 조금이라도 저항하거나 기피하는 기색이 있으면 욕심이 나도 파고들지 않는 편이었다. 남녀 간에 흔히 하는 밀당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집착을 하지 않는 기질이라고 보는 게 맞다.  
 
오히려 남들보다 사랑의 기술에 능숙한 것 아닌가? 그렇다고 얘기해도 상관없겠다. 어떻게 보면 ‘밀당’ 기술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웃음).
 
절제라고 하지만 어떤 면에선 두려워서 피하는 건 아닐까? 그렇지. 두려움이 당연히 있다. 겁이 많은 거지. 돈에 대해서도 여자에 대해서도 그랬다. 겉으로 겁내는 행동은 안 하지만 속으로 겁나니깐 절제하고 피하는 것 같기도 하다.
 
기억할 만한 가장 강렬했던 사랑은? 사랑했으니까 결혼하지 않았나. 당시에 난 독신주의자를 천명하고 살았다. 결혼을 안 해야 할 이유를 이론적으로 무장하고 다닐 정도였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는 순간 그걸 까맣게 잊었다. 내가 독신주의자라는 것을.
 
어떻게 만났나? 왜 지금은 따로 살고 있나? 서울예고 동창이었다. 졸업 후 따로 만난 적 없는데 미국 공연 갔다가 그 사람 쌍둥이 언니를 우연히 만났다. 안부를 물었더니 동생이 인사동에서 골동품 갤러리를 한다고 하더라. 나중에 하나 사러 갔다가 만났다. 처음엔 찌릿한 건 없었다. 나랑 전혀 어울릴 상대도 아니라 생각했다. 사회적 지위와 품격이 달랐다. 그 사람은 힘있는 분들을 상대하는 상류사회의 비즈니스 우먼, 나는 유명 가수이긴 하지만 하류사회 출신이었고 세련되지도 않았다. 이미지가 워낙 고급스러운 미모의 엘리트 여성이었다. 어느 날인가 내게 연말 파티에 갈 파트너를 소개해달라고 했다. 암만 생각해도 내 주변엔 그 사람에게 갖다붙일 사람이 없었다. 못 구했다고 하니 너라도 같이 가자고 해서 송년파티에 같이 가게 됐다. 그런데 새해가 밝는 첫날 0시에 남녀 키스 타임이 있었다. 다들 하니까 나한테도 키스하라고 그녀가 말했다. 당황했지만 하라니깐 해버렸다. 그날 일 이후 슬슬 연애가 시작됐다. 서른 살이었을 때다. 
 
유명 가수 송창식이 등장했으니 파티장이 난리였겠다. 천만에 말씀. 거기는 완전 상류사회 파티 자리였다. 송창식은 완전 애숭이였다. 일반인한테나 대가수였지 그런 사람들한테 송창식은 그냥 보통 사람이었다.     
 
부인 쪽에서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다. 분위기는 그렇게 흘러갔다. 그 집에 가서 저녁까지 먹고, 둘 사이의 벽이 점점 무너졌다. 상류층 여자와 하류층 남자인 우리가 결혼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분위기는 그렇게 몰려갔다. 연애 시작 한두 달 뒤에 그녀 입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왔고, 난 깜짝 놀랐다. 과연 내가 결혼생활을 할 수 있을지 겁도 났고. 그래도 서로 좋아하니까 하기로 했다.

하지만 둘의 결혼은 생각만큼 낭만적이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결혼하고 딱 일주일 만에 ‘아, 이 결혼은 잘못됐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 보통의 남편과 보통의 아내로 살기엔 특별한 구석이 많았다. 자신도 남편 될 준비가 채 안 된 사람이긴 했지만, 아내도 평범한 아내이자 주부로 살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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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꿨는데 아내가 내 나라, 그러니까 내 세계를 망치러 들어온 간첩이더라고요. 아내도 꿈을 꾸었는데 좀 이상했어요. 그 꿈속에서 내가 하잘것없는 존재였다는 거죠. 둘 다 꺼내놓고 얘기해보니 그랬어요. 국혼으로 정략결혼한 대국 공주와 소국 왕자라고나 할까… 아무튼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닌 존재, 형식적인 존재, 소품 같은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죠. 아내는 사회적 위치가 높은 상류층 여성이었고 가정에서 ‘남편의 아내’ 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었어요. 가수로서 존재 가치가 꽤 컸지만 그것조차 아내에겐 별로 눈에 들어오는 가치가 아니었지요.” 
 
살수록 더 많은 ‘다름’이 노출되자 둘은 합리적인 결정을 하기에 이른다. 서로의 생활을 존중하고 보장하기 위해 집을 따로 얻어 살기로 한 것. 서울에서 신혼생활을 하다가 퇴촌으로 집을 옮긴 뒤에 분가(?)했으니 벌써 25년 정도라고 한다. 아들도 결혼해 집을 비운 지금, 그는 완전한 솔로 라이프를 실천하고 있다.

외롭지 않은가. 난 외롭다는 말에 별 데미지가 없다. 혼자 있다는 것이 싫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사람이니까 외로움이야 늘 있긴 한 건데 그게 싫지 않다는 것이다. 결혼할 때도 여자가 꼭 필요해서 결혼한 것도 아니었다. 혼자가 좋다. 
 
 
나이 듦을 어떻게 받아들이나. 나이가 들수록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좀 이상한 말이지만 내가 명이 길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공부하다 보면 그런 느낌이 딱 온다. 사실은 얼마 안 남았다(웃음). 얼마 안 남은 인생, 맨숭맨숭하게 있다가 잘 가면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폭삭폭삭하다가 폭망하지 말고 맨숭맨숭하게.
 
과거를 돌아보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은 없나.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그때 맞았던 건 지금도 맞는 듯하다. 다만, 이거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 생각하는 건 좀 있겠지. 인생에 맞고 틀린 것이 어디 있겠나. 다 그럴 만한 이유로 있을 수 있는 일이 벌어진 것일 텐데.
 
하거나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게 있다면? 후회스러울 것도 거의 없다. ‘그때 그거 하지 말았어야 했어’라고 할 만한 일은 딱 하나, 결혼이었지만, 그렇다고 후회할 일은 아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냥 하게 된 것, 벌어진 일이다. 내 인생에서 거쳐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견뎌낼 뿐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생각은 안 했다던 말이 생각난다. 예전에 어느 인터뷰에서 그랬다. 가난의 불편함이 너무 괴롭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철이 없어서 그냥 넘기고 견뎌낸 것 같다. 스스로 천재라 믿으며 자신감이 있었을 때였으니까. 철이 없는 게 좋은 점도 있는 것 같다.
 
그럼, 철은 언제 들었나? 모르겠다. 지금도 철들었다고 말하긴 어렵지 않을까(웃음)? 사실은 철드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다. 말 그대로 의미를 따져보면 사회적으로 세련되는 것 아니겠나. 내가 과연 사회적으로 세련된 적이 있었나? 전혀 없었던 것 같고 지금도 그런 것 같다.
 
한 분야의 베테랑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느 점에서 베테랑이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하다. 내가 베테랑인가 반문해보면 잘 모르겠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도 그냥 얻은 건 아니었다. 고행과 수행이 따른다. 뭐든지 몸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 같다. 기능적으로는 뭐든지 집중하고 열심히 하면 베테랑이 되겠지. 정직하게 얘기하면 나는 베테랑이 아니다. 몸으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했다고는 말 못하니까.
 
송창식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묻는다면? 밥으로 산다(웃음).
 
그러지 마시라. 공부다. 내게 공부가 없으면 삶의 도락도 가치를 느끼는 일도 없을 것이다. 교과서로 배우는 공부가 아니라 마음과 몸으로 체득하는 게 공부다. 어릴 때부터 학교 공부엔 전혀 가치를 못 느꼈다. 현실과 맞지 않는 게 학교 공부였다. 자연과학 공부는 죄다 이미 지나간 것들을 배우고 외우는 것들이었다. 창의적으로 뭔가 새롭게 만드는 공부가 아니었다. 학교는 구분학인 수학을 산술학으로 가르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1+1과 2는 다르다. 그런데 학교는 같다고 가르친다.  

송창식은 일곱 살에 자신이 평생 음악을 할 것을 예감했다. 열두 살에 ‘난 이미 음악가’라고 생각했고 주변에선 그를 천재라고 불렀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태연하게 잘 견뎌온 밑거름은 바로 그 자신감, 자존감이었다. 
 
하지만 살면 살수록 존재감이 무너지는 경험의 연속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줄 알았는데 예고에 가보니 정규교육을 받은 짱짱한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친구 집에 갔다가 클래식 기타를 처음 접하고 그 매력에 빠져 세계적인 기타리스트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쳤고 실력을 자부했지만 ‘쎄시봉’에 들어가 보니 훨훨 나는 기타리스트가 넘쳐났다. ‘할 수 없다’ 생각하고 노래하는 사람 중에 기타 제일 잘 치는 사람이 되기로 했는데, 푸에르토리코의 맹인 가수 호세 펠리치아노의 연주를 보고 기가 눌렸다고 한다. 
 
돌아보니 모든 게 그랬다. 지는 게 싫었지만 좌절도 있었고, 최고의 자부심을 가졌지만 착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그가 평생 공부하고 성공한 가수가 된 것은 그 자존감과 몰입력 덕이니, 전혀 손해 본 인생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내내 자신에게 준엄한 듯하다.
 
“굉장히 열심히 배우고 치열하게 공부했지. 뭐든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열심히 한 게 아냐. 어느 정도 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또 됐다 싶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그랬거든. 완전히 되고 나서야 다음으로 넘어가야 하는 건데… 설렁설렁했어.”
 
송창식은 무엇으로 사는가. 답을 듣고 나니 더 어려운 물음이 생겼다. 
공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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