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20주년을 축하하며 청한 인터뷰, 진중한 대화만 오고갈 것 같았다. 한 시간 남짓 이어진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이루마의 이야기. 이런, 이루마가 이렇게 유쾌한 음악가일 줄이야. 그의 표현으로는 ‘투덜이’ 남편이자 ‘플렉스하는’ 아빠다.
피아노 건반을 처음 두드리던 다섯 살 꼬마는 불혹의 유명 음악가가 되었다. 데뷔 첫해에 발표한 ‘Maybe’, ‘River Flows in You’의 곡명은 몰라도 선율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이루마가 데뷔 20주년을 맞아, 자신을 대표하는 곡들 중 8곡을 추린 앨범 를 냈다. 모두 익숙하면서도 낯선 멜로디. 이루마가 지나온 20년을 더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벌써 데뷔 20주년이다. 데뷔 땐 20년이 되게 길게 느껴졌는데 돌이켜보니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무리 기억력 좋은 사람이라 해도 그동안 있었던 일은 부분적으로 기억하지 않나. 20년이 됐다 해서 크게 변한 건 없는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지 않나. 터닝 포인트가 됐던 2016년 뉴욕 카네기홀 공연 때다. 그 무대에 설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내가 쓴 음악으로 그곳에서 연주를 하다니. 카네기홀 공연을 한 뒤로 모든 일이 잘되는 것 같다. 전에는 항상 한계를 느끼면서 일했었다. 내 음악이 해외 사람들에게 어떻게 느껴질지 의문투성이였다. ‘나는 이런 곳에서만 공연할 수 있어. 이런 부류만 내 음악을 들어줄 거야.’ 스스로 가두는 버릇 때문에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었는데, 그 공연 이후로 글로벌하게 활동해야겠단 목표가 생겼다. 
 
20주년 앨범 소개를 안 들어볼 수가 없다. . 말 그대로 기억을 다시 쓴다는 의미다. 나는 음악을 쓸 때마다 ‘기록을 한다’고 얘기한다. 이번 앨범은 일기 같은 나의 음악들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새롭게 써본 작업이다. over played, over listened한 곡들을 꼭 넣고 싶었다. 너무 많이 플레이돼서 사람들이 식상해할 수 있겠단 생각을 늘 해왔기 때문이다. 식상하지 않게 다시 써보고 싶단 욕심.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런 의도라면 기자에겐 통했다. 이미 아는 곡인데도 듣다가 눈물이 날 뻔했다. (웃음) 정말 새롭게 느끼길 바랐다. ‘이게 그 곡이었어?’라고 느낄 수 있게.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느낌으로 편곡했다. 
 
 
200곡 넘게 발표한 걸로 안다. 창작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정확히 세어보진 못했다. 저작권협회 등록 기준으로 하면 한 곡을 새롭게 연주한 곡도 있어서 200곡이 안 될 수도 있다. 어릴 땐 ‘사랑’이 원동력이었다. 그 외에는 내가 본 영화나 즐겨 읽은 소설이다. 장면, 이야기를 상상하면서 곡을 쓸 때가 많다. 좋아하는 사진작가의 작품들을 보면서 작업한 경우도 많다. 특히 여행하기 어려운 요즘은 그림이나 사진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편이다. 
 
어떤 분들은 자면서도 악상이 떠오른다고 한다. 꿈에서 연주를 하거나 멜로디를 흥얼거렸어도 깨고 나서 기억난 적은 없다. 다 개꿈으로 끝났다.(웃음) ‘Kiss The Rain’은 비를 맞으며 걷다가 만들게 된 곡이다. 이런 걸 대단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내 직업에선 일상이다. 어떨 땐 무언가 내게 다가와 알려주는 느낌이 든다. 아무 생각 없이 피아노 건반 몇 개를 누르다가도 느낌이 딱 오는. 
 
많은 곡을 듣기도 만들기도 하니 본인도 모르게 복제할 것 같다. 그럴 땐 그 음악을 접어버린다. 계속 다시 쓴다. 이제는 음악을 접할 수 있는 매체가 너무 많아서 내 귀를 리셋하고 싶을 정도다. 드라마를 보다가 음악이 나오면 ‘어? 이건 어디서 쓰인 음악이네’부터 캐치하게 되니 좀 피곤하다. 
 
최근에 음악을 편하게 감상한 적이 있나? 클래식이나 팝, 아예 옛날 음악을 듣는다. 가요는 비슷한 걸 찾게 돼서 잘 안 듣게 된다. 
 
가요 얘기가 나오니 생각났다. 가수 에일리의 ‘Higher’를 작곡했더라. 아주 오래전에 만든 테이의 ‘아프게 희망하기’라는 곡도 있다. 가요 작업에 대한 생각은 계속했었다. 가요스러운 음악을 써보고 싶다 해서 나온 게 백지영의 ‘싫다’다. 규현의 ‘Eternal Sunshine’, 샤이니의 ‘너와 나의 거리’도 있다. 혼자 하기엔 버거운 느낌이 들어서 2Face라는 작곡가 친구랑 같이 작업한다. 
 
편견일 순 있지만 클래식과 대중가요는 전혀 다른 분야로 다가온다. 장르적으로 봤을 땐 다르다고 할 수 있어도 사실 음악은 다 똑같다. 비트가 들어간다거나 박자가 바뀐다거나 그런 것 빼고는 같다. 작업 진행 과정 자체가 다르기도 하지만 그 점이 재밌다. 협업으로 내 새로운 음악이 탄생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게 좋다. 가요는 틈나면 계속 쓰고 싶다. 
 
곡을 주고 싶은 가수가 있나? 많은데 뭐 연락이 돼야지.(웃음) 잘나가는 가수와는 다 작업하고 싶지 않겠나. 이하이 씨 너무 좋다. 얼마 전에 유튜브 영상을 같이 찍었는데 곡 작업도 해보고 싶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실력 있고 좋은 목소리를 가진 가수라면 언제든 오케이다. J6라는 무명가수가 있다. 우리끼린 ‘제육’이라고 부른다.(웃음) 그 친구가 워낙 노래를 잘해서 재작년에 같이 낸 곡이 있다. 
 
요즘 대세는 트로트다. 트로트 작곡은 어떤가. 아, 그러면 작곡가 이름을 바꿔야 할 것 같다. ‘이루마’ 하면 색안경 끼고 듣지 않겠나. ‘마루’, ‘대청마루’가 어떨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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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주행
 
속사정까지 다 알 순 없으나 부침 없이 20년을 지난 음악가다. 꾸준히 사랑받아온 이루마의 음악들. 그 저변에는 심도 깊은 성찰이 있었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만든 결실 중 하나가 ‘빌보드 역주행’이다. 2011년 발매한 데뷔 10주년 기념 앨범 는 지난해 빌보드 클래식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다.

이루마 음악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꼽는다면. 요새는 ‘나’다. ‘나는 어떤 음악가일까’부터 시작해 나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된다. 항상 상대방을 보면서 음악을 써왔지, 내 중심적인 게 없었던 것 같다. 나 자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쓴 음악을 듣는 사람, 그 사람도 자신을 소중히 여기게 되지 않을까. 
 
 
의외의 대답이다. 딸이 있는 아빠라서 더 의외다. 물론 딸을 위해 쓴 곡도 있고 늘 가족을 생각하지만 결국은 내가 행복해야 주변도 행복하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생기는 여유, 그게 누군가를 배려할 수 있는 여유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루마가 가장 많이 담긴 곡은? 모든 곡에 다 담겨 있긴 한데 음… 모르겠다. 아직 못 쓴 것 같다. ‘I’라는 곡은 있다. 그 곡을 쓰고 있는데 어머니가 “무슨 곡이니?”라고 물으셔서 “이거 ‘내 곡’이야”라고 하다가 붙여진 이름이다.(웃음)
 
현재는 ‘데뷔 20주년’이 가장 큰 화두지만, 지난해 빌보드 역주행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무려 스무 번 넘게 1위를 했다. 굉장히 기뻤다. 빌보드는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듣는 음악인지 보여주는 차트다. 그러다 보니 클래식 앨범 차트는 늘 외국인이 차지했는데, 그렇게 많은 분들이 내 음악을 듣고 계신다니 자신감을 얻었다. 지금(4월 8일 기준)도 64주 넘게 차트 안에 머물고 있다. 이번 주는 2위다.(웃음)
 
코로나만 아니었어도 해외 공연이 엄청났을 텐데. 랜선 공연을 꾸준히 했다. 실제로 관객을 만나지 못해 아쉽고 그립긴 하지만 시대에 맞게 잘 적응하는 것 같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생활하려 한다. 
 
<이웃집 찰스>에서 봤는데 한 러시아 여성이 이루마의 음악을 듣고 한국에 관심이 생겨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루마 음악의 힘이 대단하다. 아, 최근에(현지시간 4월 2일) 러시아 국제음악상 브라보에서 ‘올해 앨범상’을 받았다. 러시아는 갈 때마다 반응이 좋았다. 러시아 감성에 동양적인 부분이 많아서인 것 같다. 매번 공연이 매진됐고 관객들이 다 울었다. 너무 우는 바람에 입장을 못해서 인터미션이 길어진 적도 있다. 
 
내가 만든 곡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관객이라니. 희열이 느껴지겠다. 기쁘다. 그래서 더 연기를 하게 된다. 무대에 서면 나 또한 연기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음악에 심취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걸 그대로 드러낼 순 없다. 푹 빠져서 연주하는 것처럼 연기를 해야 한다. 이건 시작하는 뮤지션들한테도 늘 강조하는 부분이다. 
 
준수한 외모도 이루마 음악의 인기에 한몫하는 것 같다. (듣자마자 손사래를 쳤다) 20대 초반에 데뷔했을 당시엔 연륜 있는 피아니스트들이 연주 음악을 했다. 상대적으로 젊다는 게 관심을 받게 된 계기였던 것 같다. 특이한 이름 영향도 있었다. 유키 구라모토, 이사오 사사키가 국내에서 엄청 인기가 많았을 때라 많은 분들이 이루마도 일본 사람인 줄 아셨다. 알고 보니 한국 사람? 그런 점들이 이슈가 됐다. 시대를 잘 타긴 했지만 조금 더 빨리 데뷔했다면… 생각한 적도 있다. 지금은 음원이 소비되는 시대이지 않나. 내가 앨범 판매량 몇십만 장은 우스웠던 그 시대에 데뷔했더라면.(웃음) 그리고 서태지를 너무 좋아하는데 그때 활동했다면 서태지를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 살아 있는 음악가
 
코로나 확산 우려를 고려해 화상으로 진행된 인터뷰였다. 그럼에도 장난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따금 어깨를 들썩이며 부리는 말재간이 인상적이었다. 이루마는 무거움과 가벼움의 경계를 기막히게 넘나든다. 어떤 음악가이냐는 질문에는 “살아 있는 음악가”라고 답했다. 유쾌한 답변의 속뜻을 듣고 피식 웃어버린 순간이 미안(?)했다. 

내내 느꼈다. 참 유머러스하다. 진지한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친한 개그맨 친구들도 있고 아버지의 유머러스한 부분을 닮은 것 같다. 음악 쓸 때는 짜증내는 순간도 많다.(웃음) 실은 별명이 ‘투덜이 스머프’다. 아내가 너무 잘 알고 있다. 
 
어느 정도로 투덜대기에. 많이 고치긴 했는데 하나하나 다 투덜댄다.(웃음) 굉장히 부드러운 성격이었는데 음악 활동을 하면서 소송 건을 겪다 보니 성격이 좀 변한 것 같다. 
 
유머러스한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음악성도 아버지를 닮은 건가. 하모니카를 잘 다루시고 피아노도 칠 줄 아신다. 음악도 좋아하시지만 그림 그리기를 정말 좋아하신다. 미대 진학을 꿈꾸셨는데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때문에 미대를 못 가셨다. 지금도 가끔 그림을 그리신다. 얼마 전엔 나한테 선물하시겠다며 그림을 그리고 계시더라. 어머니는 만들기를 정말 잘하신다. 누나들은 본인 옷을 스스로 만들어 입을 정도다. 예술적인 기질은 물려받은 것 같다. 
 
딸도 아버지 이루마의 음악 소질을 물려받았나? 내 딸을 자랑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웃음) 나보다 낫다. 훨씬 낫다. 근데 음악을 하고 싶어 하진 않는다. 취미로 드럼을 배운다. 피아노는 배운 적도 없는데 음을 듣고 알아서 친다. 전에는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에 신청곡도 보냈더라. 아는 작가가 “따님 이름 아니냐”고 말해줘서 알았다.
음악가의 교육법이 궁금하다. 교육법이라고 할 게 없다. 우리 부모님이 하셨듯이 딸이 하고 싶은 걸 많이 서포트해준다. 딸이 그림 그리는 걸 되게 좋아한다. 얼마 전에도 둘이 잠깐 문구점에 들렀다. “자! 플렉스”라고 외치면서 필요한 걸 고르라고 했다. 애는 스트레스 풀고, 나는 문구점에서 플렉스하니 좋고.(웃음) 
 
곡을 발표할 때마다 처제인 손태영 씨가 SNS에 적극 홍보를 하더라. 태영이는 진정한 홍보대사다. 너무 고맙다. 우리 부부랑 태영이네 부부가 또래라서 엄청 친하다. 
 
음악가, 배우, 미스코리아. 넷이 모이면 좀 특별한 얘기를 할 것 같은데 어떤가? 다 똑같다. 우리 노후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나중엔 어디서 살아야 하나. 대부분은 애들 교육 얘기다.(웃음)
 
손태영 씨 자녀들한테 피아노를 가르치진 않나? 별로 배우고 싶어 하질 않더라.(웃음) 아들 룩희는 기타를 잘 친다. 아니나 다를까 연기자 아들이어선지 폼이 예술이다. 
 
‘뜻을 이루마’라는 뜻의 순수 한글이름인 걸로 안다. 무엇을 이룰 것인가. 사람은 이름을 따라가는 것 같다. 이름 때문인지 계속 다짐을 하게 된다. ‘이뤘다’가 아니라 ‘이루마’. 아직 이루진 못했다. 이미 인생의 절반, 또는 더 많이 산 것 같은데 말이다. 생각이 많아진다.(웃음) 
 
 
앨범 발매 외에 올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 팬데믹이 정말 힘들지만 또 다른 기회로 생각하려 한다.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툴이 있다면 그게 음악이다. 좋은 음악을 쓰는 게 늘 목표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오래오래 남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 
 
자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이라고 하니 묻는다. 이루마는 어떤 음악가인가? 살아 있는 음악가다. 피아노 학원에 가면 방마다 이름이 있다고 한다. 베토벤방, 모차르트방 등등. 어떤 학원에는 이루마방이 있는데 꼬마들이 이루마가 죽은 사람인 줄 알더란다.(웃음) “이루마가 살아 있어요?”라면서 놀란다고. 나는 살아 있는 음악가이자 작곡가이고 싶다. 죽은 다음에 빛을 보는 작곡가가 되고 싶진 않다는 뜻이다. 살아 있을 때 사랑받는 음악가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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