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에게 흑백영화는 어떤 의미일까. 화려한 컬러가 사라져 다른 데 눈을 둘 곳이 없으니, 관객의 두 눈이 오직 배우의 연기에만 집중하게 된다. 연기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야말로 부담스러운 도전. 그러나 그 덕에 훨씬 밀도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는 작업이다.
영화 <자산어보>는 설경구에게 ‘처음’이라는 타이틀을 쥐어준 작품이다. 첫 사극 그리고 흑백영화다. <박하사탕>을 시작으로 <공공의 적>, <오아시스>, <광복절 특사>, <실미도>, <역도산>,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살인자의 기억법>, <퍼팩트 맨> 등 28년간 굵직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배우지만 이번 작품이 새롭고 특별함을 갖게 된 배경이다. 
 
<자산어보>는 이준익 감독의 작품이다. 흑산도로 유배된 후, 책보다 바다가 궁금해진 학자 정약전과 섬을 벗어나 출세하고 싶은 청년 어부가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벗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설경구가 유배된 학자인 정약전을, 변요한이 청년 어부 창대를 맡아 호흡을 맞췄다. 코로나19로 극장가가 한산해졌지만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면서 한국 영화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가운데 설경구와 화상으로 인터뷰를 나눴다. 

감동적인 영화다. 어떻게 보셨나.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약전 캐릭터에 몰입해서 눈물을 흘렸다. 사람 사는 이야기인데, 어쩔 수 없는 시대상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영화를 봤을 때는, 내가 나오는 장면에서도 눈물이 났다. 갓을 탁 벗을 때. 약전의 바람이 느껴졌고 마음이 움직였다. 
 
약전의 마지막 내레이션과 파랑새 등장이 압권이었다. 목소리가 주는 힘이 있달까. 창대에게 보내는 유언 같은 말이다. 부탁이라기보다 친구로서 벗으로서 조언해주는 말들이다. 마지막 대사는 현장에서도 녹음실에서도 녹음했다. 
 
흑백영화에 대한 소감은? 찍을 때는 흑백이라는 느낌을 안 받았다. 흑백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는데, 결과물을 보니 이것이 그 시대의 질감과 색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흑백과 컬러를 구분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의 색감은 그게 맞는 것 같다. <자산어보>는 흑백이 주는 맛이 더 있는 것 같다. 만약 사극을 한 번 더 한다면 그 시대에 맞는 컬러감을 살리고 싶다는 호기심이 생겼다. 요즘의 총천연색이 아니라 각 시대에 맞는 색이 있을 것 같다. 
 
그간 사극 제안이 많았을 텐데, <자산어보>로 첫 사극 도전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결정적인 이유는 이준익 감독이다. 사극은 ‘언젠간 하겠지’라고 생각한 것이 지금까지 오게 됐다. 감독님에게 사극 대본을 달라고 한 것은 아니고, 대본 준비하고 있는 것 있으면 달라고 했는데 그게 마침 사극이었다. 
 
작품 소개를 한다면. <자산어보>라는 제목부터 막연히 어려울 것 같은데, 쉽다. 그리고 즐겁다. 사람들 사는 이야기다. 고되고 힘들지만 정도 있고 따뜻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기존에 했던 사극과는 배경이나 색감이 많이 다른 작품이다. 물론 흑백이라서 색감이 없겠지만,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다. 기존 사극에서 봤던 양식들과 다른, 차별성이 있어서 좋았다. 사실 영화에는 큰 사건도 없고 사회를 흔들 만한 사건이나 사실도 없다. 섬에 들어와서 일어나는 소소한 재미들을 보여주는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좋았다. 광해군, 연산군 등으로 한정되는 사극의 소재를 넘어선 즐거운 영화인 것 같다. 


# ‘사람 사는 이야기’ 닮은 즐거웠던 섬 촬영 현장 
 
 
설경구는 <자산어보>가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결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소한 재미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섬이라는 공간에서 촬영했던 현장의 기억 역시 사람들과의 소소한 추억으로 채워졌다고 한다. 
 
촬영 현장은 어땠나. 태풍으로 고생했다던데. 촬영 기간에 태풍이 자주 왔다. 한옥펜션에 머물렀는데, 태어나서 그런 바람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집이 흔들리고, 황토 방바닥이 다 떨어져서 아수라장이 됐었다. 핸드폰은 물론 모든 전기가 정전이 됐는데, 섬이라서 복구도 빨리 되지 않았다. 태풍이 지나간 후에 바람이 엄청나더라. 배우들이 삼삼오오 나와서 주민들과 함께 걱정하고, 그러는 와중에 이정은 씨가 라면 끓여줘서 먹고 그랬다. 촬영부가 묵었던 숙소에 주인분이 문을 잠가서, 태풍이 지난 후에도 갇혀서 못 나왔던 적도 있다. 그것도 다 추억이다. 그때 봤던 파도와 하늘의 수많은 별들은 우리 모두에게 준 선물이었다. 
 
역사 속 실존 인물의 연기는 캐릭터 해석 접근 방식이 다른가? 약전이라는 인물은 그 시대 양반과는 다른 인물인 것 같다. 현장에서 스태프, 배우들과 놀면서 찍었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했다. 약전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많지 않지만, 사상이나 생각이 그 시대에는 위험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머릿속으로 몇 줄로 상상하며 해석했다. 사람의 관계가 수직이 아니라 수평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흑산도 사람들과 잘 섞이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찍었다. 
 
진보적인 성향으로 해석할 수 있는 캐릭터다. 지금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시대에는 위험한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을 것이다. “양반도 상놈도 임금도 필요 없는 세상”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면서 한편 그 말을 뱉을 수 있다는 게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부드러움 속에 강골 같은 느낌도 있는 것이 약전의 매력이지 않나 생각했다. 
 
창대를 연기한 변요한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 작품 전에 친분이 있지는 않았다. <감시자들>에 같이 출연을 했었지만 호흡을 맞춰보지는 않았다. 이번 작품에 내가 추천했다. 나도 모르게 변요한 씨 생각이 났다. 왠지 낯가림도 심하고 그런데, 생각이 났다. 창대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글을 많이 쓰고 싶었지만 못 쓰는 처지가 있다.  
 
가거댁과의 로맨스가 또 하나의 볼거리다. 로맨스 대상으로는 최고의 상대를 만났다. 어떤 대화를 나누면서 찍은 건 아니고, 장난 식으로 감독님이 큰 블로킹은 그어주셨다. 상대 배우가 편하니까, 거기서 오는 장점이 있다. 안 친하거나 쑥스러우면 힘들 텐데, 물론 이정은 씨가 쑥스러워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약전의 모습 같기도 했다.  
 
연기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어떻게 보일까’ 하는 걱정이 제일 큰 어려움이었던 것 같다. 감독님이 그리는 약전의 모습과 다른 모습이 나오면 어떻게 할까 하는 어려움이 걱정이었다. 이준익 감독님이라 ‘하겠습니다’ 했는데 ‘상투 쓰고 갓 써도 양반 같지도 않고, 뭘 입혀도 상놈 같네?’ 이러면 낭패 아닌가.(웃음) 한편 연기는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감 때문에 했던 거고, 그 어려움은 익숙하니까 재미가 있더라. 현대적 감각에 맞춘 퓨전 사극이 아니라, 그 시대 색감에 맞는 사극을 하면서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양한 해산물 요리를 먹는다. 가장 맛있게 먹은 것은? 이정은 씨가 직접 회를 쳐서 상에 올리는 장면이 있다. 즉석에서 회를 쳐서 올려준 건데, 바로 회 쳐서 먹는 홍어는 입에서 녹는다. 내가 여태 먹었던 홍어는 산지에서 날짜가 지난 홍어였다. <자산어보> 덕분에 진짜 홍어를 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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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년 차 배우의 혹독한 자기 관리 
 
설경구는 지난 2017년 개봉한 <불한당> 이후 스타일리시한 중년 아이돌이라는 수식을 얻었다. 꽤 탄탄한 팬덤도 있다. 28년이라는 시간 동안, 설경구는 매일 스스로를 혹독하게 다스리면서 배우로서의 체력까지 탄탄하게 키우고 있다. 

이준익 감독이 한 인터뷰를 통해 “이번 작품에서 설경구의 잘생김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자신의 잘생김을 발견한 순간이 있나? 없다.(웃음) 창피하게, 감독님은 그냥 모든 걸 좋게 봐주신다. 
 
이준익 감독은 어떤 사람인가. 선후배가 아니라 동료이자 친구다. 말씀을 잘하시고, 장점은 말씀하신 걸 까먹는다는 것.(웃음) 그만큼 준비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상황에 맞는 대화를 풀어내는 재주가 어마어마하다. 7~8년 전 <소원>이란 작품을 같이했었는데, 모습이 똑같다. 호기심 많은 소년 같다. 반면 일하실 때는 정색하고 하신다. 단호할 때는 단호하고. 현장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류승용 씨가 “이준익 감독 현장은 행복한 것 같아”라고 말하고, 최원영 배우가 “<자산어보> 현장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그게 이준익 감독님의 현장인 것 같다.   
 
매일 2시간씩 줄넘기를 하는 자기 관리의 끝판왕으로 유명하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오아시스> 촬영하면서부터다. <공공의 적 1> 촬영 끝나고 <오아시스> 촬영 준비를 하는데 두 달밖에 시간이 안 남았더라. 그때 90kg까지 쪘는데, <오아시스> 대본의 ‘종두의 앙상한 갈비뼈’ 하나 때문에 살을 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없어서 억지로 살을 뺐다. 그리고 지방을 돌아다니는데, 한겨울이었다. 체력을 유지하려면 안 먹는 것 이외에 운동을 해야 하는데, 급하니까 여관 숙소에서 줄넘기를 시작했다. 나이 들면서 더 많이 하게 됐다. 촬영 전에는 목표를 잡아서 하는데, 평소에는 잡생각이 많이 날 때 줄넘기를 하면서 해소한다. 그 시간이 소중하다. 오늘도 줄넘기 하고 나왔다. 매일 한다. 
 
설경구에게 <자산어보>는 어떤 기억인가. 작품으로도 남겠지만 현장에서의 여운이 크다.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그것이 <자산어보>에 대한 나의 기억이다. 현장과 숙소, 동네 골목골목까지 기억이 또렷이 날 정도로 <자산어보>는 현장의 기억이 큰 작품이다. 
 
 
정약전은 좋은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실제 본인도 좋은 어른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나? 약전은 애기 같은 모습도 있고 천진난만한 모습도 있고 단호한 모습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참된 스승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꼰대 같은 모습을 싫어한다. 자기의 허물은 무시하고 남의 허물을 보지 않나. 과감하게 꺼내서 보여주고 같이 해보자고 하는 것이 참된 스승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약전은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 상대방에게 과감히 꺼내놓는다. “나는 바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니가 나의 스승이 되어줘”라고 말한다. 그런 모습이, 약전은 정말 큰 스승 아닐까. 반대로 창대는 약전에게 스승이다. 나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스승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젊고 어린 사람도 스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무슨 생각 하고 사나. 코로나 언제 끝나나?(웃음) 제발 이 코로나가 끝났으면 좋겠다.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걸 단절시켜 전 세계가 답답하지 않나. 영화계는 말할 것도 없다. 이번에 기자간담회 하러 코엑스에 갔다가 정말 충격 받았다. 5시부터 8시까지 있었는데, 정말 사람이 없더라. 놀란 걸 떠나서 충격이었다. 그런 모습이 단절 아닌가. 이제 백신 접종도 시작됐고, 골이 깊은 만큼 봉우리도 높다고 하니까 좋은 날이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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