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꽃 한 송이가 져서 곁에 있던 꽃들도 시들어버렸다. 메마른 자리. 수없이 많은 눈물이 그곳을 적셨다. 마침내 꽃이 자랐다. 배우 이광기가 흘린 눈물은 꽃이 되었다.
 
일곱 살 아들이 아빠를 떠났다. 아빠는 그리움에 사무쳐 울부짖다 좋은 곳에 먼저 갔을 거라 애써 담담하다가 잊고 지내는 것 같아 미안해하다가 다시 운다. 그렇게 보낸 12년, 아빠 이광기가 가슴에 묻은 석규 이야기 <내가 흘린 눈물은 꽃이 되었다>를 펴냈다. 
 
출간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러 가면서 다짐했다. ‘울지 말아야 한다.’ 책을 읽다 감정이 복받쳐 세 번 덮었었다. 그 앞에서 또 눈물짓는다면, 그를 더욱 슬픔에 몰아넣을 것 같았다. 한 시간 인터뷰를 나눠보니 괜한 다짐이었다. 
 
“우리 애가 좋아하던 눈이 내리면 더 그리워요. 또래 아이들 만나도 그립고. 우리 애도 살아 있다면 이 나이가 됐겠구나…. 애들이 크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잖아요. 사춘기 땐 얼마나 원수 같아요.(웃음) 석규는 밉기도 전에 가장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갔어요. 어떨 땐 감사해요. 아름다웠던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줘서.”
 
이광기는 아들의 흔적을 부여잡고 더는 눈물을 쏟지 않는다.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행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책을 쓰려면 그때를 생각해내야 하잖아요. 많이 힘들었을 것 같더라고요. 여전히 아이 사진도 펼쳐보고 녹음된 음성도 듣고 하는걸요.(웃음) 주변에선 그래요. 이 책 쓴 걸 마지막으로 제가 새롭게 시작하려는 것 같대요. 맞아요. 이 얘기를 풀어내지 않으면 내 다음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세상엔 다르게 보는 사람들도 꼭 있어요. 
 
“어떤 아버지는 차분하게 슬픔을 삭이는데 이광기는 너무 나대는 것 같아 씁쓸하다”는 수군거림이 있었다고 썼던데, 그런 의미인가요? 그런 부분들이 좀 불편했어요. 제가 어떻게 용기를 냈느냐 하면요, 손미나가 힘을 줬어요. 남미 문화를 잘 아는 미나가 “오빠, 남미에서는 죽으면 축제를 열어. 힘든 세상 마치고 더 좋은 세상으로 간 걸 축하하는 거래.” 아, 생각의 전환이란 거구나. 감출 필요가 없겠구나. 저는 어차피 오픈 된 사람이라 감추는 것도 이상한 거예요. 준서(석규가 떠나고 태어난 아들)를 데리고 형한테 자주 가요. 우리 준서도 형의 존재를 너무 잘 알아서 어떤 날은 “형 보고 싶다”고 해요. 속으로 안 삭이니까 화병도 안 나요. 눈물은 흘려야 해요. 코로나로 가족을 잃은 분들은 장례식도 못 치른대요. 얼마나 더 힘들겠어요. 그분들에게 제 책이 조금이라도 도움 됐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가족들 반응은 어때요? 우리 와이프는 저 없을 때 읽더라고요. 왜 그런 내용까지 썼냐고.(웃음) 그러면서도 어차피 세상이 다 아는 거 누군가 우리 얘길 듣고 기운 내면 좋겠대요. 
 
그러게요. 세상이 다 아니까 ‘이광기’ 하면 ‘아들을 잃은 아빠’부터 떠올릴 수도 있어요. 괜스레 더 안타깝게 여기는 시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고 얘기해요. 나중에 천국 가서 만나면 “아빠 멋지게, 열심히 살다 왔다”고 얘기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웃음) 
 
어떤 상처든 완벽한 회복은 없는 것 같아요. 조심스럽지만, 광기 씨 상처의 깊이가 지금은 어느 정도인가요? 상처라고 말하고 싶진 않아요. 그리움이죠. 상처는 치유됐어요. 한때는 우리 석규 또래를 만나기가 두려웠어요. 아이 떠나고 3~4년까지는 유치원 친구 아빠들이 전화를 해왔는데 내가 피했어요. 
 
 

202103_286_2.jpg


#남겨진 가족
 
석규가 떠난 그 당시 큰딸 연지는 열한 살이었다. 연지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석규가 미국에 공부하러 갔다고 생각하자”며 부모를 위로했다. 동생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하는 줄 알았다. 천방지축인 딸이 원망스러워 괜히 혼낸 날도 있다. 연지가 이를 악문 채 홀로 울고 있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내가 흘린 눈물은 꽃이 되었다>를 읽는데 연지 이야기가 너무 마음 아팠어요. 잘 자라야 하는 시기를 소홀히 한 것 같아서 늘 미안해요. 연지는 지금도 우리 앞에선 울지 않으려고 해요. 그게 더 안쓰럽고 미안해요. 옛날에 제가 뭐라고 한 적이 있어요. “너는 동생이 떠났는데 슬프지도 않니. 너무 무덤덤하다”고. 애써 꾹 참고 뒤에서 울었던 건데…. (내내 담담하게 말하던 이광기 씨는 큰딸에 대해 말하다 처음 울었다.)
 
 
얼마나 컸는지 궁금해요. 몇 년 전 <내 딸의 남자들>에 출연한 건 봤었어요. 연지가 어릴 때 <스타주니어쇼 붕어빵>을 해서인지 SNS에 뭘 올리면 실검까지 올라요. <내 딸의 남자들> 쪽에서 제안을 해서 나가게 된 거예요. 연지 본인도 출연하고 싶어 했고요. 
 
방송에 뜻이 있나 봐요? 하고 싶어 했었는데 그걸 찍고 나선 하기 싫대요. 본인이 생각했던 촬영 환경이랑 달랐던 거죠. 정말 하고 싶으면 개인 방송을 하겠다더니 지금 유튜브를 해요. 패션, 뷰티 쪽으로. 걔가 영상 두 개로 구독자 1만2,000명을 모았어요. 그것도 한두 달 만에. 제 건 3,000명도 안 되는데.(웃음) 얘가 촬영도 편집도 아주 감각 있게 하더라고요. 
 
광기 씨의 오늘이 있는 데는 가족, 특히 아내분의 역할이 큰 것 같아요. 맞아요. 제일 힘이 됐죠. 아내랑 항상 매일매일 같이 다녔어요. 요즘에도 거의 매일 붙어 있어요. 인간이다 보니 너무 붙어 있어서 성질도 내고 그래요.(웃음) 
 
코로나 때문에 이혼율이 높아졌대요. 맞아요.(웃음) 


#아트디렉터 이광기 
 
인터뷰 이틀 전, 이광기는 홈쇼핑 채널에서 화가 강익중의 작품 604점을 판매해 40분간 2억4,000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파주에 복합문화공간인 스튜디오 ‘끼’를 차렸다. 더 많은 사람이 미술을 향유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했다. 젊은 작가들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작품을 경매할 수 있는 ‘랜선유랑단’도 기획하고 있다. 

엊그제 홈쇼핑 건도 그렇고, 요즘 정확히 어떤 일을 하고 계신 거예요? 원래 하고 싶었던 게 ‘라이브 커머스’거든요. 주로 식품, 주방용품들도 하시던데 저는 미술 저변을 확대하고 싶어요. 왜 미술은 특별한 사람들의 취미가 돼야 하나, 왜 자꾸 미술의 벽은 높다고 여겨질까. 제가 가족들이랑 다니면서 작은 소품, 신진 작가들 그림을 알음알음 컬렉션을 하면서 많이 연구했어요. 내가 공익적으로 젊은 작가들을 대중에 알리고, 많은 분들이 미술 장르에 진입할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해야겠다. 그러다 보니 아트디렉터가 돼 있더라고요.
 
‘아트디렉터’요? 쉽게 ‘비빔밥’으로 설명할게요. 비빔밥은 재료를 어떻게 비비냐에 따라 맛이 다르잖아요. 저는 그 비빔밥을 맛있게 비벼주는 역할인 거예요. 문화를 맛있는 비빔밥처럼 비벼서 대중이 보다 편하게 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한다고 할까요. 2000년도부터 미술 컬렉션을 했고, 2010년 아이티 봉사활동을 다녀오면서 자선미술 전시도 했어요. 자선 경매 수익금으로 월드비전을 통해 아이티에 기부하고 학교도 만들고, 10년째 꾸준히 하고 있어요. 
 
벌이를 떠나서 ‘꾸준히 돕는다’는 게 멋지네요. 기부는 부담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지속성이 떨어지니까요. 꼭 금전을 나누지 않아도 돼요.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나누는 것, 그게 상대방한테 엄청 힘이 돼요. 제가 그랬거든요. 똑같이 자식을 잃은 부모가 제 손을 잡아주는데 그게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돼요. 한번은 아이티 심장병 어린이들이 한국에 와서 수술 받는 걸 도와준 적이 있어요. 병동 왼편에는 아이티 애들이 있고 오른편엔 우리나라 심장병 환우들이 있었는데, 외국 애들은 케어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한국 연예인들이 순번을 정해서 돌봤거든요? 제 차례 때 우리나라 애들 쪽에 가서 한 명씩 안아주면서 “꼭 회복하고 건강하게 나가”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어느 날 석규 납골당에 갔더니 메모지가 붙어 있어요. “안녕하세요? 이광기 씨, 그때 안아주셨던 아이가 석규 옆에 와 있어요.” 딸을 안아주던 모습이 너무 고마워서 우리 석규 있는 곳에 오고 싶으셨대요. 우리 석규 주변에는 다 애들만 있어요.
 
오늘 울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망했어요. (웃음) 또 하루는 대학로 공연을 보러 갔는데 어떤 애가 막 뛰어와선 울어요. 그 아이 큰언니라고, 너무 고마웠다고. 내가 또 안아주면서 “힘내”라고 말했죠. 저는 이런 게 나누는 것이라 생각해요. 
 
 
‘내가 흘린 눈물은 꽃이 됐다’고 했어요. 어떤 꽃인가요? 우리 석규가 산에 가면 노란 들꽃을 챙겨서 엄마한테 줬어요. “엄마 사랑해” 하면서. 그때 그 노란 들국화, 노란 민들레라고 생각하는데 딱 규정짓고 싶진 않아요. 제가 책 제목을 왜 그렇게 정했냐 하면요, 우리 가족이 다 꽃이었는데 한 송이가 죽으니까 다 죽었어요. 주님께 기도하면서 물었어요. “우리 가정이 다시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석규가 없는 그 자리에.”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는데 정말 놀랍게도 꽃이 폈어요. ‘준서’라는 꽃도 피고 ‘회복’이란 꽃도 피고. 상징적인 의미의 꽃이에요. 

인터뷰하는 동안 이광기는 울었고 웃었다. 마냥 슬픈 것 같지도 그렇다고 아주 괜찮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움의 무게를 견디는 방법을 알아가는 것 같다. 눈물로 피운 꽃, 그 꽃이 활짝 만개하는 날 이광기를 다시 만나고 싶어진다. 

관련기사

ⓒ woman.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
  • 페이스북
  •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