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 절망을 안다면 당신이 겨울의 의미를 알 것이다…” 김혜수가 커다란 두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읊조린 시는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루이스 글릭의 ‘눈풀꽃’이다. 그는 요즘 시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고 한다. 시를 꼭 닮은 영화, <내가 죽던 날> 개봉을 앞둔 김혜수를 만났다.
“요즘 시집을 많이 읽어요. 지난달에 좋아하는 분께 좋은 시집을 선물 받았는데, 많은 위로를 받았어요. ‘그래, 그동안 내가 왜 시를 잊고 있었지? 바보’ 하면서 이것저것 시집을 찾아서 읽고 있어요. 시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써준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다독가로 알려진 김혜수는 최근 시의 매력에 새삼스럽게 푹 빠졌다.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한, 따뜻한 손길이 어깨를 토닥이는 듯한 그 느낌이 좋아서 사람들에게 시집을 선물하고 읽어준다. 그러면서 시를 읽고 받은 느낌들이 개봉을 앞둔 본인의 영화 <내가 죽던 날>과 닿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시를 꼭 닮은 영화. <내가 죽던 날>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김혜수는 큰 위로와 위안을 느꼈다고 한다. 김혜수는 그것을 ‘운명’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묵직한 위로가 있었어요. 이걸 제대로 해내서 잘 전달하면, 관객이 몇 명이 됐던 이런 마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우리 영화 속에서 누군가가 손을 내밀듯이, 잘 모르고 기대하지 않고 봤던 영화 한 편이 그런 기분, 그런 위로를 줄 수 있으면 된 것 아닌가. 소박하긴 하지만 비장한 마음 같은 게 있었어요.”
 
<내가 죽던 날>은 유서 한 장만 남긴 채 절벽 끝으로 사라진 소녀와 삶의 벼랑 끝에서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그리고 그들에게 손을 내민 무언의 목격자까지 살아남기 위한 그들 저마다의 선택을 그린 작품이다. 김혜수는 절벽 끝에서 사라진 소녀 ‘세진’의 흔적을 추적하며 삶의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형사 ‘현수’ 역을 맡았다. 절망에 빠졌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물로, 누군가의 손길이 절실하게 그리운 이들에게 온기를 주는 섬세한 감정을 잘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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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처럼 다가온 시나리오
‘커다란 위로를 느낀 현수의 이야기’
 
“어떤 이야기인지 모르고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어요. 읽어가면서 저 역시도 현수를 따라가는 거예요. 현수의 시선, 상황, 감정을 따라가다 보니 세진을 들여다보게 되고, 순천댁을 만나게 되고. 만나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연대감을 느끼고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현실을 좀 더 직시하게 되었어요. 그런 글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어요. 참 이상하게.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소설책을 보는 느낌이었고, 참 좋았어요. 온전히 마음이 갔어요.”
 
<내가 죽던 날> 시나리오가 김혜수의 손에 들어올 즈음, 실제 그는 감정적으로 몹시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살아온 모든 것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주인공 현수의 상태가 절절하게 와 닿았다. 일각에서는 어머니의 ‘빚투’ 사건으로 힘든 시기와 맞물린다는 추측도 있지만, 김혜수는 “그것은 추정일 뿐 내 입으로는 꺼내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일축했다.
 
작품 속 현수는 본인이 죽는 꿈을 꿀 정도로 절망에 빠진 인물이다. “내가 죽은 꿈을 꾼다. 좀 치워주지”라는 대사는 김혜수의 경험에서 나온 대사다. 사전작업 과정에서 내밀한 이야기를 나눈 제작진의 제안으로 나온 장면이다.
 
“꿈을 꾸면 꿈에서 내가 죽어 있는데, 죽고 나서 오래 방치된 것 같아요. ‘가엾다, 슬프다, 무섭다’가 아니라 ‘좀 치워주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스로 알죠. ‘내가 심리적으로 죽었구나’라고요. 영화 속 현수와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개인적인 경험을 캐릭터를 통해 반영하는 건 굉장히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현수의 극적인 상황과 묘하게 잘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내가 죽던 날>은 삶에 절망한 현수가 타인을 통해 치유를 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품을 통해 김혜수도 치유를 받았고, 또 한 뼘 성장했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어떤 고통에서도 성장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쁜 일을 통해서, 순간적인 상황을 통해서, 다시 만나지 못할 누군가를 통해서 사람은 성장하는 것 같아요. 영화, 예술 작품, 글, 드라마를 통해서도 그렇죠. 내가 겪은 사건이나 가슴 시린, 고통스러운 순간을 통해서도 성장해요. 물론 그 순간에는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지나고 나면 성장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인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랬어요.”
 

이정은, 김선영 등과 함께한 행복한 현장

잘 살아내고 성장하는 사람이 ‘좋은 배우’
 
배우로서 가장 큰 희열 중 하나는 연기를 잘하는 동료를 만나는 것이다. 김혜수는 이번 작품을 통해 이정은, 김선영 배우 등 ‘좋은 배우’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을 느꼈다고 말했다.
“순천댁을 이정은 배우가 하시게 됐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쿵쾅거렸어요. 순천댁이야말로 우리 영화의 살아 있는 메시지, 말 없는 희망, 용기를 주기 위한 구원의 역할을 하는 중요한 역인데 정은 씨가 하게 되었다고 해서 너무 좋았어요. 순천댁을 연기하는 이정은이라는 배우를 저도 너무 보고 싶었어요. 설레었어요.”
 
‘경이로운 정은 씨’라는 표현을 쓰면서 동료 배우 이정은에 대한 찬사를 이어가던 그는 ‘좋은 배우’에 대한 본인의 생각도 솔직하게 전했다.
 
“좋은 배우,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좋은 사람이냐? 같으면 좋을 것 같아요. 좋은 배우가 되려면 좋은 사람이어야 해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아요. 좋은 배우와 좋은 사람이 같지 않기도 하죠. 정은 씨는 그것이 일치하는, 흔치 않은 참 좋은 사람이고 훌륭한 배우예요.”
 
1986년 하이틴 스타로 데뷔한 김혜수는 데뷔 34년을 맞았다. 평범하게 자라다가 청소년기에 연예인이 된 바람에 그는 본인의 삶이 편협해진 부분이 생긴 것 같다고 고백했다.
 
“배우라는 게 얼마나 엄중한 이름인지 몰랐죠. 그땐 수업 안 듣고 특이한 어른들 만나는 것이 신나는 거예요.(웃음) 어른들이 이뻐해주고, 현장에서는 배우가 아니라 애니까 그냥 신났어요. 업어달라고 하고 밥 사달라고 하면서 대학교 초반까지 철없게 보냈어요. 일을 오래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내 자리를 찾겠다는 시점이 늦었던 것 같아요. 재미있는 취미생활, 특별활동 하듯이 했으니까 뭔지 모를 부담감이 있었어요.”
 
뒤늦은 사춘기처럼 20대를 보낸 김혜수는 30대에 접어들면서 배우를 계속할 것인지 고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새로운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결핍이 많다는 걸 알았어요. 어떤 면은 집중적으로 발전한 면이 있는데 어떤 면은 취약하고, 어떤 면은 또래보다 어른스러운 점이 있는데 어떤 면은 비어 있고요. 그러다가 내 인생을 그냥 충실하게 잘 살자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하는 일이 결국 인생을 이야기하는 거고 사람을 드러내는 역할인데, 내 속이 풍요로워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좀 열심히 살았어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막연하게 상상력을 동원하거나 설정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느끼고 알게 된 것을 만나는 것이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숙제가 생겼다.
 
“좋은 사람이어야 좋은 배우라는 마음이 있었는데요. 그런데 좋은 사람과 좋은 배우가 정비례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어요. 결과적으로 정은 씨, 선영 씨 만난 게 특별한 의미인데, 아직까지는 제가 믿고 싶은, 지향하고 싶은 것이 ‘엄청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가 아니라 ‘잘 살아내고 정신 차리고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러면서 인간적으로도 배우로도 같이 성장하는 사람이고 싶어요. 그런 배우가 제 눈과 마음에는 좋은 배우, 훌륭한 배우로 느껴져요.”


뒤늦게 알게 된 수다의 즐거움
“돌아보면 결국 사람인 것 같아요”
 
 
요즘 김혜수는 선배 배우들의 존재 자체가 감사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김혜자 선생님은 잠깐 눈빛만 스쳐도 느껴지는 감동이 있어요. 그분의 삶의 궤적이 느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분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많은 혼돈의 시간들을 보내면서 현재까지 곁에 계셔 준다는 것이 감사해요. 먼발치에서 뵙게 되어도 그냥 ‘아’ 탄식이 나오면서 존경 이상의 마음이 생기는 기분이에요. 존재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아요.”
 
본인이 선배, 어른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는 순간도 많다. 나이에 큰 의미를 두진 않지만, 어른으로서 무언가를 해야 할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아는 그는 본인의 리듬에 충실하면서 많은 것을 나누려고 한다.
 
차기작을 준비하면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김혜수가 느끼는 행복의 순간은 언제일까. 의외로 소소한 대답이 돌아왔다.
 
“수시로 달라요. 최근에는 친구 카디건의 단추를 달아줬는데, 생각보다 잘해서 정말 기뻤어요.(웃음) 학교 다닐 때부터 바느질을 못해서 친구가 대신 숙제를 해주곤 했었거든요. 제가 수다의 즐거움을 뒤늦게 알았어요. 음식 만들어서 친구들과 수다 떨 때 행복해요. 그게 소소하지만 얼마나 큰 재미인지 이제는 알아요. 소규모로 문화적인 시간을 보내는 그룹이 있는데, 주로 만나서 영화나 음악 이야기를 나눠요. 그 시간도 행복합니다.”
 
<내가 죽던 날>은 스스로를 지켜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김혜수가 본인을 지킬 수 있는 힘은 무엇인지 물었다.
 
“제가 누릴 수 없을 정도의 환호가 있건, 누구라도 겪고 싶지 않은 일이 있건, 돌아보면 결국 사람인 것 같아요. 그 순간에는 느끼거나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지나다 보면 그게 소중하고 의미가 생겨요. 저는 늘 그랬던 것 같아요. 나를 나답게, 돌아갈 마음의 고향 같은 역할을 해주는 사람들이 제 곁엔 늘 있었던 것 같아요. 다행스럽기도 하고 감사한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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