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만개했다. 노래를 시작한 열일곱 소년은 쉰을 넘겨서야 때를 맞았다. 인고의 시간 끝 피워낸 꽃이 유난히 야물어 보인다. 올해 예순하나, 가수 진성은 인생에 우연은 없다고 했다.
지상파든 케이블이든 TV 채널만 돌렸다 하면 트로트 방송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스타가 된 젊은 가수는 말할 것도 없고, 기성 가수들이 유명 프로그램을 채운다. 그중에서도 진성은 토크, 요리 등 트로트 방송 외의 예능에도 꾸준히 출연하고 있어 인기 수준을 가늠케 한다. 인터뷰 섭외 전화를 걸었을 때도 마찬가지. 쉬는 날이 딱 하루 있다고 했다.

“그날 하루 빈다고 좋아했는데(웃음) 쉬지 못하겠네요.”

대세 연예인을 만나 무척 반갑습니다. 아휴, 대세라고 할 게 뭐 있습니까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영광입니다.

원래 오늘이 유일한 휴일이었잖아요. 얼마나 바쁘게 지내고 계신 거예요? 방송을 하다 보니까 시간을 굉장히 타이트하게 보내고 있어요. 행사는 노래만 하고 오면 되는데 방송은 길게는 열두 시간도 이어지니까요.

체력 소모가 보통이 아니겠어요. 사실 체력적으론 제가 정상이 아니거든요. 얼마 전에 몸이 심하게 아팠는데 그때 체력이 정상궤도에 오르질 못했어요. 녹화가 7시간 이상 이어지면 겁부터 나요. 방송도 하나의 작품이니까 스태프, 시청자들에게 만족감을 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까 봐 걱정이 돼요.

정확한 건강 상태를 물어도 될까요? 혈액암 치료를 끝낸 지는 3년 6개월 됐어요. 암만 온 것이 아니라 심장판막증이 같이 왔었어요. 심장판막증만 해도 위중한 병이거든요. 처음 항암치료 받을 때만 해도 항암제를 투여하지 못했어요. 심장에 무리가 와서 쇼크사 할 우려가 있다고 해서요. 한 달간 심장부터 다스린 뒤에 항암 치료를 했죠.

심장판막증이면 노래 부르는 것도 버거웠을 텐데. 엄청 힘들었죠. 그 진단 받고 한두 달 더 노래하겠다고 버텼으면 이미 죽었을 거예요. 노래 부르고 나면 가슴이 당긴 적도 많았거든요. 길거리에 그냥 주저앉아서 가슴 진정시키고 다음 스케줄 장소로 이동했던 적도 많아요.


# ‘안동역에서’ 역주행, 열 배 오른 출연료

2016년 림프종 혈액암 판정을 받았다. 2012년 발매한 ‘안동역에서’가 뒤늦게 입소문을 타면서 ‘가수 진성’이 막 시선을 모으던 때였다. 활동을 중단했다간 오랜 무명 시절로 돌아갈 것 같았다. 입원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서둘러 <아침마당>으로 복귀했다.

‘안동역에서’는 요즘말로 역주행 곡이에요. 발매하고서 3~4년 정도 묵혀 있었죠. 미는 곡이 아니었어요. 안동 애향 가요 모음집이라고, 그중 하나였어요. 근데 노래가 좋으니까 ‘이 노래 어디서 들어야 하느냐’면서 유튜브에 계속 올라오는 거예요.

그 노래가 뜰 거라 예상하셨어요? 들었을 때 참 좋다는 느낌은 있었죠. 가사가 마음을 움직이더라고요. 소설적인 부분이랄까. 근데 제가 방치를 해버리니까 다른 가수들이 욕심을 내기 시작했어요. 작사가가 최후통첩을 했어요. 이거 안 부르면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웃음) 그래서 편곡을 한 거예요.

1994년 데뷔임을 감안하면 ‘안동역에서’까지 정말 오래 걸렸어요. 그건 방송 데뷔고 열일곱 살 때부터 야간업소에 나가서 노래했어요. 노래에 청춘을 바쳤기 때문에 무명이 길어져도 미련을 떨치질 못했어요. 좀만 더 올라가면 될 것 같았거든요. 유년시절부터 슬프게, 외롭게 살다 보니 ‘나는 노래로 인생의 지침서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늘 불타올랐어요. 경제생활이 안 돼서 다른 일도 하긴 했어요. 장사도 해보고 시다바리(보조자)도 하고.

노래로 한을 풀고 싶단 건가요? 세 살 때부터 부모님이 안 계셨어요. 집을 나가셨죠. 어릴 적부터 남의 집을 전전하면서 눈칫밥 먹으며 컸어요. 그래선지 이미자 선생님의 ‘여자의 일생’, ‘동백아가씨’를 듣는데 가사가 너무 슬퍼요. 내 신세 같아서요. 그렇다고 가수는 노래를 ‘한’으로만 부르면 안 돼요. 한풀이밖에 안 되죠. 인간사 한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이후로 부모님을 다시 뵌 적은 있나요? 열세 살 때 만나서 1년 정도 살다가 또 헤어졌어요.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없어요. 부모도 형제도 같이 살면서 살을 맞대고 싸우기도 해야 감정이 싹트지, 나중에 만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워낙 인기가 많아서 ‘몸값’이 얼마나 뛰었을지 궁금했어요. 많이 뛰었죠.(웃음) 30대 중반까지는 돈 안 주면서 오라는 데도 많았어요. ‘내가 바보야’, ‘태클을 걸지 마’ 나오면서 100만~150만 원 정도 받기 시작하다가 지금은 1,500만 원. ‘안동역에서’로 열 배가 뛰었어요. 게다가 요새 제가 출연하면 시청률이 확 올라버리니까(웃음) 많이 불러주시죠.

트로트 인기는 얼마나 갈까요? 10년 봐요. 저는 앞으로 딱 6년, 예순일곱까지 (활동)할 거고요. 뭐 그 안에 건강이 안 좋아지면 더 일찍 끝내야죠. 이후로 3년은 노래 봉사활동하면서 지내려고요. 작은 재단이라도 만들어서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애들한테 보태주고 싶어요. 나름대로 머릿속에 그리고 있긴 한데 잘 이뤄질진 모르겠어요.

비슷한 이유로 후배 가수들을 많이 챙기시나 봐요.후배들이 방송에서 고마움을 자주 언급해요. 마음으로나마 가깝게 해주고 싶은 게 그 친구들도 다 힘든 위치에 있었잖아요. 애들한테 항상 “스타가 되는 것도 힘들지만, 되고서 관리하는 건 더 어렵다”고 말해줘요. 인성이 중요하거든요. 스스로 자제할 줄도 알고 남한테 싫은 소리 안 듣게 행동해야 하고. 세상을 바르게 보는 시각을 갖췄을 때 스타로서 롱런하는 것이지, 내가 스타랍시고 안주하면 꼴불견이에요.

말씀하신 관점으로 볼 때 트롯맨 중 가장 스타성을 갖춘 후배는요? 애들 하나하나 깊은 내막은 모르기 때문에 단정할 순 없지만 <미스터트롯>에 출연한 애들은 다 성품이 좋아요. 그래서 안심이에요.

애정이 가는 후배는 있을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영웅이한테 마음이 가요. 어머니랑 얼마나 힘들게 살았겠어요. 어머님이 작은 미용실 운영하면서 어렵게 키우셨는데 아들이 잘 돼서 다행이에요. 애가 성품도 착해요. 인터넷 시대니까 특히 더 조심해야 한다고 말해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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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지막이 만난 아내

쉰을 목전에 두고 아내를 만났다. 곪은 외로움을 전가하고 싶지 않아 선택한 ‘만혼’이다. 진성은 아내에 대해 답하다 울컥하기도 했다. 그에게 아내는 과묵히 곁을 내준 사람. 그 또한 그런 남편이길 바랐다.

<신상출시 편스토랑>에서 봤어요. 집에서 늘 진수성찬을 준비하시던데. 될 수 있으면 채소 위주로 차려서 먹으려고 해요. 하루 식단을 짜서 같은 반찬으로 세 끼를 먹는 거예요. 밭에서 직접 채소를 기르니까 가능해요. 지금은 사과가 좀 열려 있고 대추 있고 호박, 상추, 부추, 백민들레 정도 있어요.

요리 실력도 수준급이에요. 어려서부터 혼자 살다 보니까 안 굶으려고 요리를 했어요. 라면 하나만 끓여 먹고 살면 발전이 없겠지만 호박 하나를 사더라도 이렇게 만들어보고 저렇게 만들어보고. 그러다 보니 칼질도 장난 아니에요.(웃음)

건강 식단 관리는 얼마나 해온 거죠? 암 투병 때문에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술을 많이 먹었어요. 그래서 몸이 더 안 좋았을 수도 있어요. 20대에 야간업소 전전하면서 새벽 한 시에 일 끝나면 마음이 공허한 거예요. 집에 가봐야 반겨줄 사람도 없잖아요. 밖에서 뱅뱅 돌다가 친구한테 전화해서 시장에서 만나자고 해요. 삼삼오오 모이면 동 틀 때까지 마시고 그대로 집에 가서 쓰러져 자고. 그나마 다행인 게 저는 부지런해서 술을 먹더라도 아침 6~7시면 꼭 일어났어요. 언젠가 내게도 기회가 올 테니 규칙적인 생활습관은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프로의 기질’이라고 이해하면 되나요? 그렇지.(웃음) 야간업소에서 노래하면서도 낮에는 건축 사무소를 다녔어요. 노가다. 아침에 별 보고 나가서 별 보고 들어오면서, 그렇게 열심히 살았어요. 인생에 우연은 없어요.

술로 채울 만큼 외로우면 빨리 짝을 찾으시지. 아이, 그때 아가씨 한둘 만나는 건 일도 아니었죠. 근데 내가 불우하게 자라서 가정이 행복하다는 걸 모르잖아요. 삼류 인생으로 살면서 여자 하나 데려다 남의 집 셋방살이부터 시키기 싫었어요. 30대 중반쯤 주변에 속된 말로 ‘제비족’ 하면서 사모님 하나 잡아서 팔자 고치는 놈들도 많았어요. 그 돈으로 노름하고 경마하고. 여전히 그 기질을 못 버려서 늙어서도 콜라텍 다니는 사람도 많아요. 나는 그런 게 싫었어요.

‘사모님’을 어떻게 잡아요? 1990년대 초반에 업소에서 노래하면 아줌마들이 그걸 보고 인터폰으로 불러요. 나는 잘 안 갔어요. 근데 술을 팔아야 하니 웨이터들이 우리를 이용해 먹어요. 인사 한 번만 드리면 양주 15만 원짜리 하나 들어가니까 좀 도와달라고. 같은 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먹고 살겠다는데 모른 척할 수도 없잖아요. 들어가면 아줌마들이 만 원짜리 다섯 장을 팁으로 줘요. 절대 안 받지. 그 팁을 받으면 마음이 무너져버리거든요. 

꼿꼿하셨네요. 5만 원을 건네면 바로 웨이터 불러서 집에 갈 때 애들 밀감이나 사다주라고 줘버렸어요. 솔직히 아줌마들이 나를 만 원짜리 몇 장으로 본다는 게 너무 자존심 상하기도 했어요. 수표를 몇 장 줘도 받을까 말까인데. 내가 거지도 아니고 자존심을 지키는 게 낫지. 그 돈을 받으면 내가 삼류로 전락 해버릴까 봐 두려웠어요.

그렇게 마흔을 넘겨서 아내 분을 만나셨군요. 마흔아홉에 결혼하고 식은 안 치렀어요. 우리 마누라는 그렇게 식을 올리고 싶다 했는데 안 했어요. “이 나이에 사람들을 결혼식장에 초대하는 게 창피하다, 호적상 부부면 됐지 뭐가 더 있겠느냐”면서 식은 하지 말자 했어요.

아내 분이 남편 항암에 좋은 약초를 캐러 갔다가 다친 일화가 유명해요. 그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파요. 내가 퇴원하고 1년 정도 됐을 때에요. 야생 백도라지가 항암에 좋다고 하니까 동네 심마니 비슷한 사람들을 따라갔대요. 그날 몸이 다치려고 했는지 그 사람의 눈에 백도라지가 보인 거예요. 4미터 정도 되는 암석 위였는데 거길 오르다가 발을 잘못 디뎌서 두 바퀴 굴렀어요. 여기저기 꿰매고 얼굴에 난 타박상을 보는데 마음이 미어졌어요. ‘내가 왜 아파가지고 이 사람한테 고통을 줄까.’ 많이 울었어요. 병원에서 암이라고 처음 알려줬을 때 실은 당장 산으로 숨어 들어가버릴까 생각도 많이 했어요. 내 처지에 여자하고 무슨 결혼생활인가, 가진 거 다 주고 산으로 가버리자 했어요. 한편으론 내가 떠나버리면 아내 마음에 엄청난 아픔을 주는 거라는 생각도 들고. 조금씩 좋아지니까 함께 버텼죠.

‘재력가 아내’라고 들었어요. 나보다 (돈이) 많았었지. 제가 노래로 큰돈은 못 벌었어요. 노래가 딱 떴는데 세월호가 터지면서 8개월 동안 행사를 전혀 못 했어요. 그 뒤로 1년간 몇 억을 벌었는데 덜컥 아파버려서 8개월간 또 못 하고. 이후에 1년 6개월 정도 활동하니 코로나가 와버렸어요. 근데 나는 돈이 너무 많아도 관리를 못하는 사람이에요. 지금 더 욕심낼 것도 없어요.

욕심 좀 내면 ‘안동역에서’와 견줄 만한 곡이 나올까요? 글쎄. ‘안동역에서’가 ‘돌아와요 부산항에’ 이후로 최고 히트곡이라고 했어요. 노래방에서 6년간 일등을 했으니까.(웃음) 아, 지금은 ‘보릿고개’가 일등이래요. 

흔한 질문이지만, 어떤 가수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마흔 전까진 대한민국에서 정말 잘나가는 ‘가수왕’이 되고 싶었어요. 가요계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가수가 되어보자고. 마흔을 넘어서 보니 나는 그 정도 그릇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 가수가 되려면 이론적으로 박식해야 해요. 그래야 깊이를 알지. 무엇보다 살아온 인생 자체가 너무 굴곡졌어요. 굴곡이 심한 땅은 꽃을 심어도 안 피는 곳이 많아요. 밭 전체에 꽃이 펴야지 슈퍼스타가 되는데 내 그릇은 안 돼요. 조용필, 나훈아, 남진 선배처럼 슈퍼스타는 못 돼요. 그래도 어떤 분들은 나더러 ‘트로트의 BTS’라고 해요. 부끄러우면서도 좋아요. BTS랑 비교한다는 자체가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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