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워낙 클래식을 좋아하니 행복해요. 내 남편의 연주를 사랑해요.”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공연장. 관객석의 맨 마지막 줄에 앉아 무대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윤정희의 얼굴을 기억한다. 배우 윤정희가 10년째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의 영화 같은 삶이 재조명되고 있다.
윤정희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진 건 남편인 백건우와 딸 진희 씨의 입을 통해서였다. 다음 달 백건우의 공연을 앞두고 이루어진 한 일간지 인터뷰 자리, 실과 바늘처럼 늘 동행하던 아내 윤정희의 자리를 딸이 대신했다. 인터뷰뿐 아니라 연습, 녹음, 공연에 늘 함께했던 윤정희는 현재 파리 근교에서 요양 중이다.

인터뷰에서 백건우는 윤정희가 10년 전부터 알츠하이머 증상이 시작되었고, 최근 증상이 심각해져 딸의 옆집으로 옮겨서 간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결혼 후부터 단둘이서만 살고 모든 것을 해결해왔다”는 그는 “(아내를) 제일 잘 아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 했지만, 무엇보다 본인이 너무 힘들어했다”면서 담담하게 윤정희의 상황을 알렸다.

평생 해왔듯 함께 공연장을 가다가도 “우리가 왜 가고 있느냐”고 묻는가 하면, 공연장에 도착하면 금세 잊어버리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하고 다시 물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지만, 딸을 보고 자신의 막냇동생과 분간을 못 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지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엄마’라고 부르는 딸에게 ‘나를 왜 엄마라 부르냐’고 되물을 정도까지 증세가 심각해져, 지난 5월부터 본격적인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 윤정희는 아침에 일어나면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창문 밖의 작은 호수를 보면서 지내고 있다. 백건우는 아내에게 갈 때마다 발코니에 꽃이나 화분을 하나씩 올려놓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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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시>의 한 장면. 윤정희는 알츠하이머를 앓으면서 중학생 외손자와 함께 살아가며 시를 쓰는 미자를 연기했다.
2 이창동 감독과 윤정희가 <시> 기자회견에서 밝게 웃고 있다.
3 2013년 6월, 통영 사량도에서 열린 백건우 섬마을 콘서트 공연 현장.
4 인터뷰 촬영을 위해 포즈를 잡은 두 사람. 윤정희는 표정이 굳은 남편을 위해 재미있는 표정을 지으면서 분위기를 이끌었다.
5 리허설을 하는 동안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윤정희의 모습.

한국 영화사 전성기 연 여배우
알츠하이머 할머니 역 맡았던 마지막 작품 <시>

“이보다 더 영화 같을 수 없다.”

윤정희의 투병 소식이 세간에 알려지고 가장 많이 회자된 말이다. 아마도 윤정희의 마지막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 영화 <시>의 영향이 크다. 백건우는 인터뷰에서 “마지막 작품이 하필 <시>라는 것이 이상하다”는 말을 남겼다.

2010년 개봉 당시 호평 받은 <시>는 윤정희에게 LA 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 대종상 여우주연상 등 배우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안겨준 작품이다. 그리고 지금 ‘알츠하이머를 연기한 알츠하이머에 걸린 여배우’라는 영화 같은 이야기를 더하게 했다. <시>에서 윤정희는 알츠하이머를 앓으면서 중학생 외손자와 함께 살아가며 시를 쓰는 노인 ‘미자’를 연기했다. 미자는 그의 본명이기도 하다.

영화 <시> 제작에 참여했던 스태프들은 현장에서 그의 알츠하이머 증세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편과 딸의 인터뷰에 의하면 그때 이미 병세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백건우는 “(<시> 촬영 당시) 긴 대사는 써놓고 읽으며 (촬영)하고 그랬다”고 고백했다.

문희, 남정임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로 60년대를 풍미했던 윤정희는 한국 영화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1967년 강대진 감독의 <청춘극장>으로 데뷔한 그는 늘 주인공이었고,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데뷔한 해에만 16편의 영화에 출연한 그는 이후 30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하면서 명실상부 최고의 여배우 자리를 지켰다. 지고지순함과 강인함, 순종적 이미지와 치명적 매력 등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로 인정받았다.

<시>에 출연하기 전까지 15년이라는 긴 공백이 있었지만 그는 항상 배우라는 이름으로 살았고, 또 살고 있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지난 2016년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는 <스크린, 윤정희라는 색채로 물들다>라는 기념전이 열렸다. 당시 윤정희는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영화를 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며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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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동행했던 남편의 연주 여행
관객석 맨 마지막 줄에서 듣는 연주 사랑해

영화 <시>를 촬영할 때, 윤정희가 이창동 감독에게 내건 조건은 하나였다. ‘남편의 연주 여행에 동행하게 해달라’는 것. 알려진 대로 백건우 선생의 연주에는 늘 아내 윤정희가 함께했다. 그는 그것을 가장 큰 기쁨이자 행복으로 여겼고, 두 사람은 최고의 파트너였다.

기자가 취재차 부부를 만날 때도 두 사람은 늘 함께였다. 몇 차례 만남 중 가장 인상적인 시간은 6년 전 통영 사량도에서 열린 백건우의 섬마을 콘서트 현장이다. 1박 2일 일정을 함께 보내면서 두 사람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백건우 섬마을 콘서트’는 클래식 문화를 쉽게 접하기 어려운 섬마을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연주를 들려주는 일종의 나눔 콘서트다. 기자가 동행 취재한 자리는 2011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된 2013년 콘서트였다. 첫해에는 연평도, 위도, 욕지도에서, 두 번째 해에는 울릉도와 사량도에서 콘서트가 열렸다.

이날 윤정희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은 세련된 매너다. “오늘은 내가 주인공이 아닌데 빠지면 안 돼요? 내 남편 연주하는 날이니 남편과 이야기 많이 나누세요”라며 남편을 배려하는 모습에서 우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조용한 목소리로 스케줄을 체크하고 악기 조율을 예민하게 확인하는 모습을 보면서, 백건우라는 거장이 연주를 이어가는 힘은 바로 윤정희의 안정적인 내조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을 앞두고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예술가도, 아내의 옆에서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항상 함께인 둘은 인터뷰도 함께했다. 질문 하나에 답도 하나. 둘 중 한 명이 먼저 대답하면 그게 끝이었다. 모든 시간을 함께 보내는 두 사람은 경험과 생각도 같아서 누가 답을 내놓아도 상관없었다. 윤정희의 이야기가 백건우의 이야기고, 백건우의 감정이 윤정희의 감정이었다. 휴대폰도 하나를 가지고 나눠 쓰는 두 사람이다.

야외에 꾸려진 무대. 리허설을 지켜보던 윤정희는 양산과 디지털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남편이 리허설하는 모습을, 처음 방문한 아름다운 섬의 풍경을 조용히 카메라에 담았다. 무대 위에서 연주 중인 백건우의 모습을 카메라로 찍다가 기자를 보며 “내 남편은 자기 꾸미는 데는 관심이 하나도 없어요. 옷도 늘 입는 것만 입어요” 하면서 활짝 웃던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본인은 ‘내 남편’이라는 호칭이 당연하고 익숙한데 한국에서는 내 남편이라는 말을 안 쓰는 게 이상하다면서 혼잣말을 하던 모습은 천진난만한 소녀와 다르지 않았다.

콘서트가 시작되고, 진지하게 연주를 감상하던 모습도 잊을 수 없다. 백건우의 공연장에서 윤정희는 항상 관객석의 맨 마지막 줄에 앉아 공연을 지켜본다. 나란히 앉은 기자에게, 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VIP석보다 관객석의 가장 마지막 줄이 연주에 집중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라면서, 단 한 번의 흐트러짐 없이 남편의 무대를 마음을 담아 감상했다.

“내가 워낙 클래식을 좋아하니까 행복하죠. 내 남편의 연주를 사랑하고요. 이렇게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삶의 가장 좋은 낙이에요.”

연주를 끝내고 내려온 백건우를 맞는 모습도 요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내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진심으로 그 시간을 즐기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난 후 식사 자리에서는 공연을 비롯한 풍요로운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현지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연주 여행의 또 다른 기쁨”이라던 말을 증명하듯, 두 사람은 소박한 밥상을 기쁘게 맞으며 행복한 시간을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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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촬영은 몇 시야?”
투병 중에도 놓지 않은 배우라는 이름

“이렇게 근사한 연주를 해주는 남편과 함께 사시니 행복하시겠어요.”

백건우의 콘서트가 끝나면 윤정희가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다. 그만큼 공연이 좋았다는 관객들의 인사말이기도 한데, 그 말을 들은 윤정희는 미소로 대답한다. 자부심과 자존감이 묻어나는 기분 좋은 미소다. 알려진 대로 윤정희는 배우로서 프라이드가 강한 사람이다. 그리고 타고난 주연이었다. 1994년 영화 <만무방>, 16년 만인 2010년 <시>로 받은 두 번의 대종상 여우주연상 그리고 숱한 수상 경력이 그것을 증명한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2016년 한 인터뷰에서 그는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영화를 할 것”이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영화가 젊은 것만 있나요? 요즘은 100살까지 살 수 있으니까, 나이에 맞는 좋은 시나리오만 있으면 그때까지 할 거예요. 다만 배역에 대한 욕심은 있어요. 저는 주인공인 게 중요해요.”(웃음)

이렇게 배우로서의 자존심이 강했던 배우가 알츠하이머라는 본인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가 공개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딸 백진희 씨는 인터뷰에서 어머니의 병을 공개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엄마는 요즘도 ‘오늘 촬영은 몇 시야?’라고 물을 정도로 배우로 오래 살았던 사람이다. 이 병을 알리면서 엄마가 그 사랑을 다시 확인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엄마에게 사랑의 편지를 많이 써줬으면 좋겠다. 지금 엄마에게 그게 정말 필요하다.”

다시 윤정희와 함께했던 섬마을 콘서트 날이 떠올랐다. 연주가 좋았다는 말에 기자에게 다가와 한 말이다.

“나는 안 근사한가 뭐? 나도 배우인데? 아임 액트리스!”

노래하듯 속삭이듯 말하던 그 모습은, 기자가 만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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