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은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이 배어나온다. 입꼬리를 약간 올린 미소나 치켜든 턱의 각도에서도 묻어나는 도도함. 상위 1%를 연기할 때나 거지를 연기 할 때도 다르지 않다. 설령 어린이용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브라우니’보다 더 인형 같은 강아지와 함께 산책할지라도.



허경환과 김영희.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나누기도 전에, 이들이 과연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허세’의 대명사 허경환은 “잘생겼다”는 말에 쑥스러워하는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였다. 

“‘네 가지’에서 제 자랑하는 거, 정말 낯간지러워요.”

그런가 하면 ‘두분토론’을 통해 기 센 여자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여당당’ 김영희는 소녀 같은 아가씨였다.

“저는 열 번 못해주다가 한 번 잘해주는 경상도 남자가 좋더라고요.(볼 발그레)”

생각했던 이미지와 실제 모습 사이의 아이러니. 이날 화보의 콘셉트이자 인터뷰의 분위기이기도 했다.



허경환, “말 안 돼? 웃기면 그만이지!”

두 사람은 요즘 <개그콘서트>의 코너 ‘거지의 품격’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다. 드라마 <신사의 품격>을 패러디한 이 코너에서 이들은 거지 행색과 달리 자존심과 자부심만큼은 상위 1% 안에 드는 캐릭터를 선보인다. 거지로 분장한 김영희는 자신이 들고 있는 깡통과 행인의 핸드백이 부딪치자 “방금 내 핸드백 ‘루이빈통’에 스크래치 났거든요!”라고 외치는가 하면, “내가 서 있는 곳부터 다음 블록 횡단보도 옆 의류수거함까지가 모두 우리 집”이라고 떼를 쓰기도 한다. 허경환은 허우대 멀쩡해 보이는 ‘꽃거지’로 등장해 행인에게 마구 작업을 거는 듯싶더니 “궁금하면 500원!” “궁금하지 않으면 200원!” 같은 멘트로 당당히 돈을 요구한다. 여자에게 자신의 더러운 신발을 벗어주거나 의자에 더러운 손수건을 깔아주는 등 경악케 하는 호의는 덤이다. 이들은 거지 연기로 <개그콘서트>의 대세를 노리고 있지만, 정작 이 코너가 인기를 얻을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어요. 감독님은 ‘재미있는 부분이 있긴 한데, 대중의 반응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일단 해봐라.’면서 기회를 주셨죠. 개그맨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저희끼리는 정말 솔직하게 말하거든요. 재미없으면 정말 재미없다고. 동료들이 이 코너를 보더니 ‘어디서 거지 같은 코너를 가지고 왔느냐’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어요.”

함께 코너를 이끌어가고 있는 김영희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허경환 선배는 개그를 복잡하게 안 해요. 경상도 남자답게 ‘퉁퉁’ 던지죠. ‘저렇게 해서 되겠나?’ 싶었는데, 되더라고요. 선배의 감이 맞았어요.”

허경환도 “내 개그는 앞뒤가 없는 개그”라면서, “이건 내 스타일”이라며 웃는다.

“내가 웃기면 남도 웃겠지 하는 식이죠. 첫 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툭’ 던졌을 때 ‘팍’ 웃으면 그걸로 가자! 하는 거예요. 그러다 안 웃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사람들이 앞뒤가 안 맞는다고 하면 ‘<개콘>에서 앞뒤 맞는 게 어딨어?’라고 해요.”

그러나 허경환도 코너 첫 방송에서는 부담이 됐는지, 무대에 먼저 등장하는 김영희에게 “네가 안 웃기면 나는 안 나갈 거다. 내가 안 나가더라도 당황하지 마라.” 하며 엄포를 놓았다. 김영희가 “이기적이다”라며 눈을 흘기자, 그는 능청스럽게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라며 웃는다.

‘꽃거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다. 거지로 분장해도 거지로 보이지 않아야 한다. 허경환은 “꽃거지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이 코너를 시작했다. ‘허세’ 캐릭터는 그가 좋아하는 연기 중 하나다. 얼마 전 상경한 사람들의 이야기 ‘서울메이트’라는 코너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솔직히 저는 아직 ‘내가 서울 살고 있구나.’ 하는 (생경한) 느낌이 있어요. 촌놈이 서울 올라와서 강남에 살고 있다는 게 아직도 신기해요.(그는 통영 출신이다.) 그런 느낌을 잘 살리는 연기가 바로 허세 연기인 것 같아요.”



김영희, “죽다 살았다”

‘거지의 품격’이 첫 방송을 타고 난 뒤 인터넷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가 줄지어 업데이트됐다. ‘김영희, 9개월 만에 복귀’. 이 코너는 김영희에게 특별하다. ‘두분토론’ 종영 이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9개월 동안 그녀는 더없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죽다 살았어요. 공백이 너무 길어서요. 9개월 동안 계속 코너 짜서 감독님께 검사받았는데, 다 까였거든요.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 이 길이 아닌가 보다 절망하기도 했어요. 그때 정경미 선배가 ‘잘하고 있다. 조금만 더 하라’며 안아주셨죠. 제 캐릭터가 강하다 보니 코너를 같이하자고 손을 내미는 선배는 많지 않아요. 허경환 선배는 제게 손을 내밀어준 몇 안 되는 선배 중 한 사람이었죠.”

허경환은 “그래도 야무진 코너(두분토론) 하나 했으니 잘 버틴 거다”라고 다독인다. 그 막막함은 경험해본 이만이 알 것이다. 김영희는 급기야, 첫 방송이 나가는 걸 확인하고는 눈물까지 보였다.

“사실 녹화해놓고 현장 반응이 좋아도 수정하는 경우가 있어 방송이 안 나갈 수도 있어요. 제가 영희에게 ‘이번 주에 코너가 나가는지 확인해봐라’고 시켰더니, 전화해서는 방송이 나가게 됐다고 막 우는 거예요. 왜 우느냐고 물으니, ‘너무 기쁘고 고마워서 그런다’ 하더라고요.”

힘든 시간을 보낸 만큼 김영희는 이번 코너에 특별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 ‘두분토론’처럼 말로 푸는 형식이 아닌, 콩트라 더 반갑다.
“제가 사실 네일아트나 패디큐어를 굉장히 좋아해요. 코너를 시작하기 전 벗겨지지 않는 젤리시 네일아트와 페디큐어를 받았는데, 거지를 연기하게 된 거예요. 사람들은 (페디큐어가 안 보이게) 양말을 신으라고 했는데, 저는 돈 들여서 다 지우고 손톱, 발톱을 검은 물로 염색했죠.”

“거지 분장이 좋다”는 김영희는 회를 거듭할수록 더 리얼한 거지 스타일을 완성하고 있다. 무대의상은 커피를 흘리거나 음식이 묻어도 절대 빨지 않는다. 허경환은 “정말 냄새가 난다. 더러워 죽겠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도 거지 스타일에 흠뻑 빠졌다.

“솔직히 거지 의상 정말 편해요. 옷에 따라 사람의 행동이 달라지는 거 아시죠? 정말 거지처럼 행동하게 되더라고요. 누가 쳐다보면, 예전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제는 ‘이씨, 뭘 봐!’ 하고 반응하게 되죠.”

김영희는 “그동안 공부하듯 일해왔는데, 허경환 선배를 통해 무대를 즐기는 법을 배웠다”고 털어놓는다. 허경환은 선배답게 “무대에 나갈 때는 ‘완전 빵 터지게 해야지!’ 하고 다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즐기는 거다”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일주일의 피로를 싹 가시게 하는 <개그콘서트>의 인기 비결이었다.

  

ⓒ woman.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
  • 페이스북
  •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