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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2세와 바르바라의 세기적인 러브 스토리

2021-06-14 10:45

글·사진 : 이신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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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형 새벽문 위에 금빛으로 빛나는 성모 이콘. 성 테레사 성당의 성모 이콘이다. 이 성모 이콘은 바르바라 라지비우 왕비를 모티브로 해서 그렸다고 전해온다. 야기에워 왕조의 마지막 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의 아내였던 바르바라 라지비우. 이 둘의 사랑은 영화, 드라마, 책 등 많은 작품의 소재가 되어 현세에서도 ‘세기적인 러브 스토리’로 회자된다. 평범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는 재미가 없다. 분명코 우여곡절이 많은 러브 스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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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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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라 라지비우 초상화

 

지그문트와 바르바라의 만남

카우나스의 카우나스 성을 소개할 때 잠시 언급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Zygmunt II August, 1520~1572)와 바르바라 라지비우(Barbara Radziwił, 1520~1551). 이들은 어떤 사랑을 한 것일까?

 

152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의 지그문트 1(1467~1548)가 지배하는 시대에 두 아이가 태어난다. 한 아이는 지그문트 1세와 보나 스포르차(1494~1557)의 외동아들로 크라쿠프 바벨 성에서 태어났다. 그 아이가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왕이다. 지그문트 2세는 야기에우워 왕조의 유일한 상속자로 10살 때부터 아버지와 공동 통치자였다. 당시 아버지 나이는 53세였고 어머니는 26세였다. 부모의 나이 차이가 28세였다. 당시 빌뉴스는 황금기였다. 아버지는 통치를 잘해 국고를 늘렸다. 또한 예술 애호가인 아버지, 이탈리아 출신의 어머니. 보나 스포르차 왕비는 결혼과 함께 이탈리아의 궁정인과 예술가, 수공업자들을 폴란드로 데리고 왔다. 이탈리아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폴란드 왕궁과 귀족들 사이에서 이탈리아 문화와 풍습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일찍 폴란드에 르네상스 문화가 보급되었다. 그런 시대에서 태어난 그는 최고의 위치에서 최고의 삶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죽으면 바로 왕으로 등극하는 위치다.

 

빌뉴스(혹은 Dubingiai)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한 여자 아이는 바르바라(1523년 생이라는 설도 있다). 바르바르는 매우 아름다웠다. 그녀는 패션과 화장품에 관심이 있었고 향수와 페이스 파우더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녀는 가족에게서 교육을 받아 크게 지적이진 않았다고 한다. 여느 귀족 집안처럼 그녀는 1537(17)에 결혼을 한다. 엄청난 재력의 가문이라서 지참금을 두둑하게 들고 13살이나 많은 귀족(Stanislovas Goštautas, 1507~1542)과 결혼했다. 그러나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1542(22), 결혼 5년 만에 남편이 갑자기 죽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자 빌뉴스의 사촌 오빠의 성(Hieraniony)에 정착했다. 당시 자녀가 없는 미망인은 법에 따라 재산을 나라에 바쳐야 했다. 그 재산을 받으려고 성을 방문한 지그문트 2. 둘은 그렇게 만났고 연인이 되었다고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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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2세 초상화

 

홀아비가 된 지그문트

왕족인 지그문트 2세는 본인이 원하는 대로 결혼할 수는 없다. 지그문트 2세가 아버지와 공동 통치자가 된 1530(10), 페르디난드 1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1526~1545)와 결혼을 조약했으나 어머니 보나 스포르차의 반대로 자꾸 지연이 되었다. 그러다 1538(18) 12세의 신부가 사는 인스브루크에서 약혼식이 열렸다. 그럼에도 계속 결혼을 반대하는 어머니 보나 탓에 정작 결혼은 4년이 지난 1543(22) 55, 크라쿠프 바벨성에서 이뤄졌다. 당시 엘리자베스의 나이는 16. 결혼식은 2주 동안 계속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 보나는 며느리를 상대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 부부는 왕실에서 멀리 떨어진 빌뉴스로 거주지를 옮긴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은 처음부터 실패했다. 지그문트 2세는 엘리자베스가 매력적이지 않았다. 특히 엘리자베스가 간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더 멀어졌다. 그는 여러 여자들과 계속 혼외 관계를 유지했다. 그중 한 명이 바르바라였다. 남편의 무관심과 시어머니의 학대로 인한 스트레스 등으로 발작이 더 심해진 엘리자베스. 지그문트 2세는 엘리자베스를 버리고 지참금을 받기 위해 크라쿠프로 돌아왔다. 그는 엘리자베스가 병들고 빠르게 악화되고 있음을 알고 페르디난드의 의사들에게 장거리 여행을 하하도록 보냈다. 그녀는 여행에서 돌아와 결국 154518세의 나이로 간질 발작으로 사망했다. 결혼 2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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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테레사 교회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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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테레사 교회의 성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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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이콘들

 

바르바라와 비밀 결혼

아내가 죽자 지그문트와 바르바라는 자유로운 연애를 즐겼다. 1546(26), 지그문트 2세는 223일 동안을 사냥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로맨틱한 만남, 사냥 및 파티에 대한 소문은 장안에 확 퍼졌다. 그의 부모는 새 신부를 찾고 있었다. 공국의 의회 하원의원(Sejm) 들이나 부모는 왕족과 결혼하기를 원했다. 몇 명의 후보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미 바르바라에게 사랑에 빠진 지그문트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어머니 보나 스포르차의 반대는 정도를 넘어설 정도가 되었다. 어린 시절 내내 엄마의 감시가 지겨웠을 것이다. 지그문트 2세는 1547(27) 비밀리에 결혼해 버렸다. 1548(28) 22, 부모에게 결혼 사실을 알렸다. 이 소식이 파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보나 스포르차는 분노를 터트렸고 의회에서도 바르바라와 헤어지지 않으면 충성할 수 없다는 초강수까지 두었지만, 지그문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해 지그문트 1세가 사망한다. 아버지의 장례식 참여하기 위해 빌뉴스로 왔다가 폴란드 왕좌에 오르기 위해 크라쿠프 바벨 성으로 돌아갔다. 바르바라는 빌뉴스에 머물렀다. 그러나 둘의 결혼은 여전히 순조롭지 않았다. 귀족, 의회, 어머니, 민중들의 반대로 사회는 들끓었다. 바르바라가 후손을 낳을 수 없는 불임이라는 것도 큰 이유였다. 그럼에도 지그문트 2세의 마음은 확고부동했다. 1549(29) 213일 이 둘은 바벨성에 입성했다. 바르바라는 바벨 성에서 호화로운 생활과 값 비싼 선물을 즐겼다. 그해 5월에는 카우나스 성을 비롯해서 많은 영토를 하사 받았다. 바르바라는 1550(30) 127일 바벨 성당에서 폴란드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몰래 결혼한 지 약 3년만이다.

 

그러나 그녀의 여왕 기간은 불과 5개월이었다. 그녀는 사실 1547년 결혼식 이후 건강이 좋지 않았다. 특히 복통이나 내부 결석을 호소했다. 대관식 이후 그녀의 건강은 더 악화되었다. 그녀는 열, 복통을 앓았고 식욕을 잃었다. 그녀의 배에서는 고름이 가득한 덩어리가 나왔다. 지그문트 2세는 아내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바르바라는 15515831세 나이로 죽었다. 그녀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에 따라 빌뉴스 대성당에 묻혔다. 첫 번째 부인 옆이다. 왕은 빌뉴스로 가는 거대한 여정 동안 관 옆에서 걸었다고 전해진다. 바르바라가 죽자 지그문트 2세는 남은 생애 동안 검은 옷을 입었다. 전설에 따르면 지그문트 2세는 외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벨라루스의 냐스비주 성(Niasvizh Castle, 1533년부터 라지비우 가문 소유의 성)으로 여행을 했고 마법사를 통해 바라바라의 영혼을 불렀다. 마법사는 영혼이 나타나면 움직이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바르바라를 보았을 때, 그는 몸을 던졌다. 그녀는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바르바라의 질병에 대해 동시대와 역사가들이 논의했다. 그녀는 시어머니 보나 스포르차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지속적으로 떠돌았다. 피임이나 성병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현세에서는 자궁경부암이나 난소암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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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첫 번째 부인 엘리자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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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2세의 세 번째 부인 캐서린

 

바르바르 사후 지그문트 2세의 삶

바르바르 사후, 지그문트 2세는 1553(33) 730 오스트리아 대공 부인 캐서린(Catherine, 1533~1572)과 세 번째 결혼을 한다. 오스트리아-러시아 동맹을 피하기 위한 순전히 정치적 연합에 의한 정략결혼이었다. 그녀는 첫 번째 아내 엘리자베스의 여동생이었다. 캐서린은 이전 여왕들과는 달리 둔하고 비만 스타일이었다. 지그문트 2세는 그녀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캐서린은 언니를 대했던 방식에 분개하고 그를 비난했다. 두 사람은 함께 하는 동안 순전히 공식적이고 정치적으로만 관계가 유지되었다지그문트 2세는 세 번째 결혼에서 후손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 후손이 없어서 야기웨어 왕조는 멸망 위기에 처하자 그는 가장 아름다운 시골 여성(Barbara GizaAnna Zajączkowska)를 통해 후손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임신시킬 수 없었다. 야기웨어 왕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병약한 지그문트 2

지그문트 2세는 아버지와 달리 병약했다. 50세가 되기 직전에 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됐다. 역사가들은 그가 많은 일에 관여했고, 많은 여자들과 놀아나 성병에 걸려 불임이 되었다고 말한다. 16세에 그는 말라리아에 걸렸고 1558년에는 통풍을 앓았고 1568년부터 신장 결석을 앓았다. 이는 엄청난 통증을 유발했다. 그는 수많은 의료진, 치료사 또는 돌팔이 의사를 고용하고 이탈리아에서 값비싼 연고를 수입했다. 그의 생애가 끝날 무렵 왕은 아마도 결핵으로 인해 치아와 활력을 잃고 있었다. 그가 추기경을 맞이할 때 지팡이 없이는 계속 서 있을 수도 없었다.

 

1572(52)  그는 몸에서 열이 났다. 치료받지 않은 결핵은 그를 약하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크니쉰(Knyszyn)에 있는 그의 개인 휴양지로 여행을 떠난다. 크니쉰에서 병이 치료되기를 희망했지만 폐병(consumption)으로 각혈을 했고 가슴과 요추에 통증에 시달렸다. 그는 157277 크니쉰에서 죽었다. 그의 시신은 바르샤바를 통해 크라쿠프로 이송되었다. 바벨 대성당에 묻히기 전까지 티코친(Tykocin) 성에 보관되었다가 1574210일에 바벨 대성당에 묻혔다. 그의 유일하게 남은 여동생 안나 야기엘론(Anna Jagiellon, 1523~1596)이 참석한 장례식은 폴란드 왕국의 마지막 광경이었다. 1596, 동생 안나의 죽음으로 야기엘론 왕조(1386~1596)210년 만에 막을 내렸다.

 

문학 작품 속 비운의 여주인공

내용을 읽어보면 둘이 왕권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던 것 같다. 그러다 당대에도 그랬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 많은 것들이 미화되고 윤색될 수도 있다. 바르바라의 삶은 많은 소문과 신화에 둘러싸여 있다. 그녀는 현세에도 바르바라 라지비우는 성 테레사 성당의 새벽 문 위에서 만인의 수호신이 되어 있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이콘 앞에서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하며 소원을 빈다. 당대는 손가락질 당하고 수군거림에 몸서리를 쳐야 했고 파란 많은 삶을 살다가 그리도 원하던 왕비가 된 후 5개월 만에 죽어 버렸던 그녀가 성모로 화해서 리투아니아를 지켜주고 있다. 바르바라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 왕국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가장 인정받는 여성 중 한 명이다. 이제는 전 세계에서 유명하다.

 

파란만장하고 우여곡절이 많은 사랑 이야기는 대중에게 큰 관심을 받는다. 그것이 허구가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면 더 절묘해진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이야기는 영화, 드라마, 책 등, 많은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많은 예술가들은 시, 연극, 영화 및 기타 작품을 만드는데 영감을 얻었다. 18세기부터 바르바라는 다양한 문학 작품 속에서 전설의 여 주인공이 되었다. 바르바라의 비극적인 연애는 낭만화 되어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낸다로 귀결시켰다. 시어머니 보라 스포르차는 주요 악녀로 등장해 양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몇 세기가 흘러도 여전히 회자된다. 역사는 끝나는 날이 없으니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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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보나 스포르차

 

시어머니 보나 스포르차

여기서 보나 스포르차에 대해 짚고 가자. 지그문트 1세에게는 아내가 되고 지그문트 2세에게는 어머니가 된다. 바르바라에게는 시어머니다. 이미 짐작했던 것처럼 보나 스포르차(Bona Sforza)는 이탈리아 밀라노 공국의 스포르차 가문이 맞다. 스포르차 가문은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 밀라노를 거점으로 지배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일족이다. 이탈리아의 그녀가 어떻게 폴란드 왕비가 되었을까? 복잡하고 긴 이야기지만 그 또한 흥미진진해서 초 간략하게나마 알고 가자.

 

스포르차 가문은 특히나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독살을 당하자 삼촌(루드비코 스포르차, Ludovico Sforza, 한국판 단종, 세조)이 정치를 맡고 결국 그냥 하라는 대로 하다가 아버지 지안 갈레아초 스포르차(Giovan Galeazzo Sforza)는 감옥에서 일찍 죽었다. 엄마는 나폴리 아라곤(Aragon) 공국에서 시집온 이사벨라(Isabella of Aragon, 1470~1524).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모델이라고 추정된다. 힘없는 남편 밑에서의 고생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남편은 죽고 아들과 딸이 남았다. 아들은 프랑스 루이 12세에게 맡겼으나 죽었다. 이사벨라는 딸을 데리고 친정 나폴리로 왔다. 그녀는 후에 바리로사노통치자가 된다. 그때 지그문트 1세가 홀아비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참금 바리바리 싸주면서 딸 보나를 폴란드로 시집보낸 것이다. 지그문트 1세와 보나는 나이차가 27. 결혼 당시 지그문트 1세의 나이는 51. 보나는 24세였다. 엄마 이사벨라보다도 3살이나 많았다. 지그문트는 154881세까지 살았다. 부인은 당시 54세였으니 30년을 함께 했다. 15녀를 낳았다.

 

보나는 가장 신뢰자에게 독살 당해

외동아들인 지그문트 2세가 바르바르와 사랑에 빠졌으니 그녀가 악녀 시어머니가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게다가 그녀가 밀라노 공국에서부터 받은 억압과 서러움. 거기에 왕비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을 보면 그녀 성에 차는 며느리는 없었을 것이다. 어떤 며느리를 들이더라도 악역은 도맡아 했을 터. 첫 번째 며느리와의 결혼도 반대했고 바르바르가 죽었을 때는 시어머니인 보나가 며느리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도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도 보나는 폴란드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문화와 예술의 발달에 큰 일조를 했다. 남편 지그문트 1세는 예술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보나는 결혼(1518)과 함께 이탈리아의 궁정인과 예술가, 수공업자들을 폴란드로 데리고 왔다. 이탈리아 문화의 영향으로 인해 폴란드 왕궁과 귀족들 사이에서 이탈리아 문화와 풍습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일찍 폴란드에 르네상스 문화가 보급되었다. 특히 미술과 건축, 조각 애호가였던 지그문트 1세는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을 크라쿠프로 초청했고 그들이 남긴 훌륭한 작품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폴란드에서 색다른 모습으로 꽃피게 했다. 르네상스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바로 크라쿠프의 바벨 성이다. 이때에 지어진 지그문트 예배당의 지붕은 화려한 황금장식으로 꾸며졌고, ‘알프스 북쪽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의 진주라고 불리고 있다.

 

또 음식이다. 폴란드는 음식이 맛있는 나라다. 보나 왕비가 일조를 했다. 그때까지 폴란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채소들을 가져왔다. 토마토, 브로콜리, 아티초크, 콜리플라워, 강낭콩, 배추, 당근, 상추, 시금치 등. 지금까지도 폴란드 음식에 이탈리아식 모듬 야채’, ‘이탈리아식 야채수프등의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이외에도 마카로니와 파스타를 비롯하여 다양한 양념과 향신료를 폴란드에 소개했고 폴란드 사람들이 와인을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것도 보나 왕비가 폴란드에 온 이후부터다. 그렇다면 보나 스포르차의 마지막은 어땠을까?

 

15562월 보나는 38년 동안 쌓아온 보물을 가지고 폴란드를 떠나 고향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녀는 엄마의 공국인 바리에 도착해 공작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63세로 사망했다. 가장 신뢰했던 재무담당자(Gian Lorenzo Pappacoda)에게 독살 당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적이라는 말이 틀림없다. 그녀는 폴란드에서 일생을 다 보냈지만 죽어서는 고국 바리의 성 니콜라스 대성당에 묻혔다. 보나의 인생을 그려보면 그녀가 살아가는 방법은 그럴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현재는 폴란드에서 어떤 이미지로 비쳐주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빌뉴스는 볼거리 뿐 아니라 얘깃거리가 많은 도시다. 그 이야기는 다음 회에 계속 이어진다.(계속)

 

Data

새벽의 문과 테레사 성당: Aušros Vartų g. 14, 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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