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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 리가의 에스플라나데 공원 동상에서 인생을 읽다

2021-01-22 21:39

글·사진 : 이신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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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의 신 시가지에서는 급할 이유가 없다. 긴 역사의 흔적보다는 공원이 많아 산책하듯이 즐기면 되는 곳이니 말이다. 에스플라나데 공원도 그런 곳이다. 휴식하듯 공원을 산책하면서 거대한 러시아 정교회도 기웃거려 보고 유명인들의 동상들을 보면서 그 인물의 삶을 궁금해 하면 그만이다. 신 시가지 여행에서 가장 좋은 점은 구 시가지에 비해 식당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일 게다. 영악한 여행자는 저녁 만찬을 신시가지에서 즐긴다. 현명한 여행자는 리가에서 가장 높은 호텔에 올라가 공짜 야경을 감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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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플라나데 공원

 

 

에스플라나데 공원

아르누보 거리를 비껴서 자유의 광장 쪽으로 되돌아 나오면 에스플라나데 공원(Esplanade Park)이다. 애써서 찾는 공원이 아니다. 자유여신상을 오가면서 스치듯 만나게 되는 평범한 공원이다. 도시 운하나 바스테칼나 공원과 가까이 있어 연장된 공원 같은 느낌도 든다. 2만6,000평으로 제법 크고 근처의 공원 중에서는 가장 늦은 1950년에 조성되었다. 그래도 공원에는 나름 볼거리가 있다. 작가 라이니스(Rainis)의 조각상, 바르클라이 드 톨리(Michael Andreas Barclay de Tolly)의 청동상, 라트비아 첫 군사령관인 오스카르 칼파크스(Oskars Kalpaks, 1882~1919) 기념비가 있다. 가장 인상적인 동상은 화가 야니스 로젠탈스 동상(Monument to Janis Rozentals)이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 정교회 성당(Christ Orthodox Cathedral),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 및 라트비아 미술 아카데미(Art Academy of Latvia)가 있다.

 

에스플라나데 공원의 역사

에스플라나데 공원은 리가의 오랜 역사서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헨리의 리보니아 연대기(Henry of Livonia,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역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 문서. 1180년~1227년의 리보니아의 역사적인 사건을 묘사한 라틴어 문서. 헨리는 성직자였다)”에 따르면 이곳은 12세기(1198)에 첫 언급된다. 쿠베(Kube) 산이 있었고 숲이 둘러싼 모래언덕은 적들의 공격 준비지점이었다. 리보니아 전쟁(십자군과 리브인(Livonians, 라트비아의 원주민)의 전투) 때, 리가 두 번째 주교 베르톨즈(Bertolds)가 이곳에서 죽었다.


14세기에는 주민들은 산을 임대해 양봉을 쳤고 밭을 일구고 초지를 만들었다. 1784년, 리가 수비대의 훈련장이 되면서 평평한 모래땅이 된다. 군대 퍼레이드 등을 펼치던 이곳은 1901년, 리가의 700주년 기념 행사 때부터 사실상의 공원이 된다. 공원 건설 중에 15~17세기의 공동 묘지가 발견되었다. 16세기 후반, 전쟁 때 죽은 마을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추정한다. 흑사병으로 죽은 이들은 석회로 덮여 있었다. 리가의 전염병은 1315년, 1600년, 1603년, 1654년, 1660년, 1710년에 발생됐다. 발트해 독일 문화 사학자이자 지역 연구원인 요한 브로체(Johann Christoph Broce, 1742~1823)의 판화에는 1657년의 묘지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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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바클라이 드 톨리 동상

 

 

러시아 제국의 육군 원수이자 국방부 장관의 동상

 

 
현재 에스플라나데 공원에는 미하엘 안드레아스 바클라이 드 톨리(Michael Andreas Barclay de Tolly, 1761~1818) 동상이 있다. 나폴레옹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멋지고 화려한 복장을 입고, 긴 이름을 가진 바클라이 드 톨리의 동상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자료에 따르면 바클라이의 동상은 1913년에 세워졌으나 2년 후 도시가 약탈당하면서 바다에 던져졌다. 2001년, 원래의 화강암 받침대에 새로운 동상을 세웠다.

 

바클라이는 러시아의 입지전적인 군인이었다. 바클라이 가문의 기원은 스코틀랜드. 당시 러시아 제국 령이었던 리보니아(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일부인 북쪽)의 발트 독일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처음으로 러시아 귀족으로 인정받았다. 바클레이는 1776년, 15세의 어린 나이에 러시아 제국 츠코프 카리비너 여단에 들어갔다. 그는 1788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오차코프를 점령하는데 큰 공을 세워 그리고리 포템킨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는다. 이후 그는 제1차 러시아-스웨덴 전쟁에 참여했다. 1794년, 그는 코시치우슈코 봉기에 참전해 빌뉴스를 점령하는 공을 세웠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에서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풀츠크(Pułtusk, 프로이센 왕국) 전투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여주었다. 1807년 아일라우 전투에서는 러시아 육군의 철수를 엄호하던 중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 부상으로 인해 그는 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다음 해 그는 핀란드 전쟁에서 스웨덴에 맞서 성공적인 작전을 펼쳤다. 그는 얼어붙은 보트니아 만을 통과하는 강행군을 통해 러시아 군대를 진격시켰다. 이후 러시아 제국 정부는 그의 공을 인정해 그를 핀란드 대공국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1810년부터 1월 20일부터 1812년 9월까지 그는 러시아 제국의 전쟁부 장관으로 일했다.

 

1812년, 러시아 조국 전쟁 때, 바클라이는 나폴레옹을 상대하는 가장 큰 부대인 제1서부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청야전술(Scorched Earth,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을 펼쳤다. 이러한 그의 작전에 대해 러시아인들은 달갑지 않게 여겼다.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한 이후,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불만은 커져 갔으며 알렉산드르 1세 황제는 그를 대신해 총사령관으로 미하일 쿠투조프를 임명했다. 그러나 쿠투조프 역시 청야전술을 계속 이어나갔고, 보로디노 전투가 발발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철수했고, 바클레이의 전략이 결정적으로 성공함으로써, 러시아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여겼다. 1813년, 쿠투조프의 사망 이후, 바클라이는 다시 한 번 사령관이 되었고, 1814년 파리 전투에서 파리를 점령하는 지휘관이 되었다. 이 공으로 그는 육군 원수가 되었다. 이후 그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다가 1818년 독일 방문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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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니스 동상

 

 

라이니스 동상

 

 
에스플라나데 공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야니스 라이니스(Jānis Rainis/야니스 필리엑샨스, Jānis Pliekšāns, 1865~1929)의 동상이 있다. 약 5m나 되니 라이니스의 동상은 오며가며 꼭 보게 된다. 기념비 앞, 낮은 직사각형 블록에 "Rainis"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어떤 인물인지 금세 알 수 있다. 분홍빛이 도는 회색 광택의 화강암 의자에 앉아 있는, 이 기념비는 매우 사실적이다. 1965년, 시인 100주년 기념일에 제막된 동상은 당시 유명한 조각가 칼 젬데가(Karl Zemdega, 1894~1963)의 작품이다. 2007년에 복원할 때는 젬데가의 예술학교의 제자인 라이모니스(Laimonis Blumbergs, 1919~2014)와 아이바스(Aivars Gulbis, 1933~)가 맡았다. 라이니스는 뛰어난 시인이자 셰익스피어에 견줄만한 극작가였을 뿐 아니라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자 철학자였다. 라트비안 국민적 자각의 증대와 국가 건설의 기초를 닦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리가 여행때는 라이니스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가야 할 것이다.

 

 

자료에 따르면 라이니스는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리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에서 수학하면서 철학, 역사 등 많은 부분을 공부하면서 작가로서의 소양을 닦았다. 그후 리가로 돌아와 라트비아 독립을 위한 사회운동에 참가했다. 1891~1895년에는 일간지(Dienas Lapa) 편집자가 되었다. 1896년에 그는 일시적으로 옐가 바(리가에서 남서쪽으로 41km 지점)와 베를린에서 살다가 파네베지스에서 공증인으로 일했다. 1897년 5월 비밀 반정부 조직인 뉴 커런트에 소속된 혐의로 체포되었다. 체포된 12월, 리가에서 시인이자 극작가안 야스파지야(Aspazija, Johanna Emīlija Lizete Rozenberga, 1865~1943)와 결혼했다. 그는 5년(1897~1903) 동안 프스코프와 슬로보드스크로 추방되었을 때, 부인 야스파지야는 남편을 따라 갔다. 추방 기간 동안 부부는 괴테의 "파우스트(1898년) 등, 세계 문학의 고전 걸작을 라트비아어로 계속 번역했다. 첫 번째 시집 "푸른 저녁의 긴 기분"(1903)도 출판했다. 망명지에서 돌아온 이 부부는 부인의 친정인 옐가바나 리가, 여름별장이 있는 유르밀라에서 살았다. 1905년, 라이니스는 사회운동가로 라트비아 독립을 위한 사회운동에 참가했다. 두 번째 시집 "폭풍의 뿌리(Sow of the Storm)"을 출간하고 드라마 불과 밤(Fire and Night)을 썼다.

 

혁명의 실패로 그는 아내 아스파지야와 함께 스위스로 이주(1907~1920)해 루가노(Lugano) 교외의 카스타놀라(Castagnola (Carlo Cattaneo)에 정착했다. 망명 중, 많은 책을 집필했다. 1920년, 부인과 함께 라트비아로 돌아와 다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라트비아 독립 후 국회의원, 국립극장장, 문교부장관 등을 역임했다. 라이니스는 1929년 유르밀라의 여름 별장에서 사망했다.

 

라이니스 부인, 작가 아스파지야

라이니스의 부인인 아스파지야도 라트비아에서 위대한 인물이다. 신시가지의 대로변 이름에 그녀의 이름이 붙여진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아스파지야는 라트비아어 시인 및 극작가다. 그녀는 옐가바 근처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청소년기를 보냈고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를 남기고 학교를 떠났다. 1886년(21세), 빌헬름 맥스 발터(Wilhelm Max Valter)와 결혼했다. 그녀는 주로 독일 작가들의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7년, 그녀의 첫 번째 칼럼이 신문(Dienas Lapa)에 실렸다. 1891년, 그녀는 남편과 이혼했고 1893년까지 옐가바 교구(Jaunsvirlauka)에서 개인 교사로 일했다.

 

1893년(28세), 리가에 정착하고 언론인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1894년, 그녀의 첫 연극(Vaidelote와 Zaudētās tiesības)이 리가에서 공연된다. 그녀는 몇 년 동안 라트비아 새로운 흐름(New Current) 운동을 하면서 라이니스와 교류했다. 1897년, 동갑내기인 라이니스와 결혼한다. 그 해 첫 번째 시집을 출판한다. 결혼한 그해 또 라이니스는 5년 형(1897~1903)을 선고 받고 투옥된다. 아스파지야 남편을 따라 갔다. 부부는 함께 괴테의 많은 작품을 라트비아 어로 번역했다. 제 1차 세계 대전 후 독립한 라트비아로 돌아 왔을 때 아스파지야는 페미니스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녀는 또한 라트비아 사회 민주당에 가입했고 헌법 의회에 선출되었다 1929년, 남편 사후에는 리가와 유르말라의 두불티(Dubulti) 여름 별장에서 지냈다. 그녀는 1943년 11월 5일 두불티에서 사망하고 리가의 공동묘지인 남편 옆에 묻혔다.

 

그리스도 정교회 건물.JPG
그리스도 정교회 건물

 

 

그리스도 탄생 대성당

에스플라나데 공원에는 그리스도 대성당의 탄생(Nativity of Christ Cathedral)이라는 화려한 금빛 돔 대성당이 있다. 공원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정교회는 리가에서 상징적 랜드 마크다. 진짜 금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더 반짝이는 느낌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성 피터 앤 폴 대성당보다 더 웅장해 보인다.

 

이 성당은 러시아 제국 알렉산더 2세 대왕 시절에 네오 비잔틴 양식으로 건축(1876년~1883년)된 리가의 러시아 정교회다. 발트해 지방에서 가장 큰 정교회 성당이었다. 러시아 건축가인 니콜라스 채긴(Nikolai Chagin, 1823~1909)과 로버트 플루그(Robert Pflug, 1832~1885)가 설계했다. 아우구스트 볼츠(August Volz)의 회사에서 만든 장식으로 치장했 다. 지역 총재 표트르 바그라티온(Pyotr Bagration)가 재정을 지원하고 베니아민 카렐린(Veniamin Karelin)주교가 감독했다.

 

이 성당은 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군들은 루터교 교회로 바꿔 버렸다. 라트비아가 독립(1921년)되면서 원래대로 돌아온다. 최초의 라트비아 대주교인 야니스 포머스(Jānis Pommers, 1876~1934) 대주교는 정교회에 극도로 비우호적이었던 라트비아 정부로부터 방어를 잘 해낸 인물로 꼽는다. 그러나 1960년대 초, 소련 당국은 대성당을 폐쇄하고 천문관으로 개조했다. 현재는 1991년, 소련에게 독립된 후 복원된 모습이다.

 

특히 이 성당의 이콘이 유명하다. 이콘의 일부는 바실리 베레샤긴(Vasili Vereshchagin, 1842~1904)이 그렸다. 바실리 베레샤긴은 러시아 제국의 가장 유명한 ‘전쟁 화가’로 해외에 널리 알려진 최초의 러시아 화가다. 그의 전쟁 그림은 사실적이어서 놀랍다. 단 내부 사진 촬영은 허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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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니스 로젠탈스 동상

 

 

화가 야니스 로젠탈스 동상

 

 
에스플라나데 공원에서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 및 라트비아 아트 아카데미 쪽으로 쭉 들어가면 화가 야니스 로젠탈스 동상(Monument to Janis Rozentals)을 만난다. 크리스야나 도로(Krišjāņa Valdemāra Street)쪽이다. 동상은 붓과 팔레트를 들고 있어 화가의 청동상 임을 금세 알게 한다. 동상 받침대 앞면에는 하프를 든 여자의 청동 부조가 있다. 야니스 로젠탈스의 ‘전설’(Teika, 1899년 작품)이라는 작품을 새겼다. 1936년, 라트비아 조각가인 부르카르드스 드제니스(Burkards Dzenis, 1879~1966)의 작품이다. 야니스 로젠탈스(1866~1916)는 이미 아르누보 거리에서 한번 언급했던 인물이다. 그가 살던 집은 현재 박물관이 되었다.

 

 

잘생긴 얼굴은 물론 핀란드 가수와 운명적으로 결혼한 스토리 등, 그의 인생이야기가 흥미롭다. 자료에 따르면 야니스 로젠탈스는 러시아 제국의 발트해역의 쿠클란드(Courland Governorate) 주의 베리 파름스테드(Bebri Farmstead. 현재는 라트비아) 근처의 살두스 교구(Saldus parish)에서 가난한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공부할 여유가 없었기에 15세에 생계를 위에 고향을 떠나 리가로 나왔다. 웨이터로 일했지만 3루블의 설탕 케이크를 레스토랑 바닥에 떨어트리면서 그는 해고되었다. 그림에 관심이 있던 소년은 운 좋게도 곧 화가의 보조원이 되었다. 몇 년 동안 허드렛일을 하다가 마침내 벽과 천장을 칠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는 순전히 스스로 노력해서 1888년(22세), 상트 페테르부르크 예술 아카데미에 합격해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그의 졸업 작품(After Church, 1894년, 28세)은 많은 관심을 끌었다. 1899년(33세)에 라트비아로 돌아 왔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살두스에 집을 짓고 그림을 그렸지만 그 작은 도시는 이미 성장해버린 예술가에게 답답한 곳이었다. 2년 머물고 1901년(35세)에 리가로 이주했고, 그는 1년 뒤 운명적으로 핀란드 가수인 엘리(Elli)를 만나게 된다.

 

야니스로젠탈.JPG
야니스 로젠탈

 

 

야니스와 엘리의 세기의 러브 스토리

1902년, 36살의 야니스 로젠탈스는 31살의 핀란드 가수 엘리 포르쉘(Elli Forssell, 1871~1943)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엘리의 컨서트 장에 갔다가 둘은 첫 눈에 반했고 며칠 만에 약혼을 했다. 둘은 당장이라도 결혼하고 싶었으나, 정작 1년 후인 1903년 3월. 핀란드 헬싱키의 독일교회에서 결혼했다. 로젠탈스는 결혼식 초대장을 직접 그렸다. 그 1897년의 작품(Teiksma, Tale)을 기반한 것. 둘은 14년 결혼생활 동안 아이 셋을 낳았다. 1941년 세계1차대전이 터지자 엘리의 고국으로 가서 살았다. 작가는 1916년(50세)에 심장마비로 헬싱키에 죽었고 1920년 고향 땅에 묻힐 수 있었다. 부인 엘리는 남편보다 27년을 더 살고 1943년(66세) 리가에서 심장 질환으로 사망해 남편 옆에 묻혔다. 이 지면에는 다 풀 수 없는 길고 긴 인생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야니스 로젠탈스와 엘리를 모른체 리가 여행을 한다면 많은 것을 놓치고 말 것은 확실하다.

 


텍스멕스 음식.JPG
텍스멕스 음식

 

 

미국식 멕시코 음식 먹고 호텔에 올라 야경보고

공원을 벗어나 찾은 곳은 전날 찾아냈던, 맛있는 음식점 텍스멕스(Tex-Mex)다. 텍스멕스(Tex-Mex, 텍사스와 멕시코를 결합한 단어)는 미국 남부 지방에서 유행하는 요리의 하나로, 멕시코 이민자들이 처음 시작해 유행시켰다. 멕시코 요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주로 미국 남부 텍사스 주에서 인기가 많다. 그 프렌차이즈가 신시가지에 들어선 것이다. 물론 텍스멕스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우연히 찾아들어간 음식점이었지만 한국인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은 긴 여행에 지친 여행자의 피로를 풀어준다. 큰 새우와 해물이 들어간 볶음밥에 매운 타바스코 소스를 곁들이니 감동이나 다름없다. 두 번째, 같은 레스토랑을 찾아 똑같은 메뉴를 주문하고 지역 맥주 한 잔을 곁들인다.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충만해진다. 식당을 벗어나 찾아간 곳은 래디슨 블루 호텔 라트비아(Radisson Blu Latvija Conference & Spa Hotel)이다.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는 고급 호텔이지만 이곳에 간 이유가 있다. 호텔의 24층에 있는 바에 가면 야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바를 이용하지 않고 야경을 훔쳐 볼 수 있어서 좋다.

 

숙소 근처인 구시가지로 들어서면서 라이브가 울려 퍼지는 근처의 벤치에 앉는다. 같은 장소를 두 번 방문하는 일은 생각보다 좋다. 기억을 더듬는 것도 좋고, 보지 못한 곳들을 재발견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현장에서 본 것보다 원고를 쓰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리가 여행. 분명코 세 번째, 네 번째에는 아주 깊숙한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리가의 마지막 밤이 깊어간다.(계속)

 

Data

에스플라나데 공원:주소:Reimersa iela 1, Centra rajons, 리가/연락처:+371 67 772 211

 

그리스도 대성당:Brīvības bulvāris 23, Centra rajons, 리가

 

미하일 바클라이 드 톨리 동상:Brīvības bulvāris 23A, Centra rajons, 리가

 

추천 식당:Tex-Mex Republic:Dzirnavu iela 59, Centra rajons, 리가/

전화:+37167242065

 

래디슨 블루 라트비아 컨퍼런스 & 스파 호텔, 리가:주소:Elizabetes iela 55, Centra rajons, 리가/전화:+3716777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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