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 여성조선 정기구독 이벤트
TODAY`S PICK
  1. HOME
  2. TODAY`S PICK
  3. travel pick

라트비아 리가 신도시는 아르누보 건축물 타운

2021-01-14 10:06

글·사진 : 이신화 작가

  • 트위터
  • 페이스북
  • 카카오스토리
리가 신도시에서 요새 가장 인기를 끄는 곳은 앨버타 거리다. 그 거리에는 아르누보 양식의 고층 건물이 도로 양 안으로 열지어 있다. 웅장한 건물들이 엇비슷한 형태로 타운을 이루는 모습이 장관이다. 1899년~1914년 사이의 건축물들은 이제 신도시의 명물이 되어 관광 필수코스가 되었다. 리가를 독일식 아르누보 고장으로 알리게 한 데는 미하일 에이젠스테인이 있었다.
뵈르만 정원의 탈스.JPG
뵈르만 정원의 탈스

 

 

리가에서 가장 오래된 뵈르만 정원

운하를 벗어나기 위해 강 다리를 건넌다. 라트비아 대학을 지났더니 또다른 공원을 만난다. 운하 옆에서 실컷 공원을 봤기에 무심하게 지나치려 했으나 오벨리스크 기념비와 ‘미하일 탈스’라는 이름이 새겨진, 조각이 매우 독특하다. 또 벌통(kukainu maja), 예쁜 화단 등이 눈길을 끄는, 예사롭지 않은 공원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1814년에 만들어진 뵈르만 정원(Vērmane Garden)이다. 리가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으로 운하 주변의 바스테칼나 공원보다 먼저 조성되었다.

 

뵈르만 공원은 리보니아 군인이자 정치인인 필리포 파울루치(Philip Paulucci, 1779~1849)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 당시 프로이센 총영사였던 요한 크리스토프 뵈르만(Johann Christoph Wöhrmann, 1784~1843)과 그의 어머니 안나 거트루드 뵈르만(Anna Gertrud Wöhrmann, 1750~1827)이 자금을 지원했다. 뵈르만 가문은 직물업과 은행 등으로 돈을 번 사업가이자 재력가였다. 공원 조성은 독일 정원사이자 원예 기업가 및 식물 학자였던 요한 헤르만 지그라(1775~1857)가 맡았다. 이국적인 나무들을 심고 장미 정원을 만들고 레스토랑도 있는 1만5000평의 영국식 정원이었다. 1829년, 안나 뵈르만 사후에 화강암 오벨리스크 기념비를 세우면서 공원을 더 확장시켰다. 1836년, 리가 화학자 및 약사 협회(Riga Chemist and Pharmacist Society)가 주체가 되어 공원 식당에서 광천수를 팔았다. 그 이후 건축가 하인리히 쉘이 맡아 재건축(1863~1864, 1870~1871)하게 된다. 1869년, 해시계와 분수가 설치되었다. 1881년부터는 게오르그 쿠팔트(Georg Kuphaldt)가 맡아 공원을 확장한다. 파르테르(parterres)식 화단에 이국적인 나무들을 심고 풀숲을 만들어 아름다운 정원으로 만든다.

 

뵈르만정원의 벌통.JPG
뵈르만정원의 벌통

 

 

체스 선수, 미하일 탈스의 기념비

제2차 세계 대전 때 파괴된 뵈르만 공원은 2000년에 재정비에 들어간다. 2001년, 체스 선수, 미하일 탈스(Michail Tals, 1936~1992)의 기념비를 만든다. 미하일 탈스는 러시아-라트비아의 체스 그랜드마스터(국제 체스 연맹에서 부여하는 체스 선수의 최상위 칭호)이자 제8대 월드 체스 챔피언(1960~1961).

 

“미하일스 탈스는 라트비아 리가 지방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 의사이자 의학 연구인이었던 아버지에게서 8살 때부터 체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 파이오니아(Young Pioneer, 소련과 공산권의 소년단) 체스 클럽의 단원이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실력이 특출 나지 않았으나 부단한 노력으로 챔피언을 거머 쥐었다. 그의 경기 스타일은 즉흥성과 예측 불허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59년, 당시 19살인 살리 란다우(Salli Landau)와 결혼했다가 1970년에 이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뵈르만 공원에 미하일 탈스의 기념비를 만든 데는 이유가 있다. 체스 붐이 일던 1950년대~1980년대, 체스 아마추어들은 이 공원에 모여 체스를 즐겼다. 어린 시절의 미하일 탈스도 다른 아마추어들과 함께 이 공원에서 체스를 즐겼다. 그래서 체스 협회에서는 세계 챔피언을 기리고 리가를 ‘체스 도시’로 알리기 위해 기념비를 만든 것. 그런데 2.8m 높이의 기념비는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독특하다. 거칠은 화강암을 검은 색과 흰색으로 구분시켜 체스판을 형상화했고 돌 위에 미하일 탈스의 청동상이 박혀 있다. 기념비는 매우 창조적이고 독특해서 체스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필자의 눈에는 저명한 예술가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 기념비는 조각가 올레그 스카라이니스(Oleg Skarainis, 1923~2017)의 작품이다. 기념비 뒤쪽에는 이런 안내판이 있다.

 

“리가 출신의 하임 코간(Haim Kogan, 1938~2005, 지역에너지 회사 사장)과 빅토르 크라소비키스(Viktors Krasovickis, 1953~은행가)는 1960~1961년의 세계 체스 챔피언에게 감사를 표한다. 조각가 Oleg Skarainis. 2001년 8월 10일”.

 

그 외 이 공원에는 2003년에 재거되었다가 다시 설치한 필리포 파울루치 기념비도 있다. 또 라트비아 작가(Krišjānis Barons, 1835~1923)의 동상도 있다. 작지만 탈스의 기념비만으로도 찾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공원이다.

 

성 거트루드 올드 교회.JPG
성 거트루드 올드 교회

 

 

성 거트루드 올드 교회

뵈르만 정원을 벗어나 신도시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가 본다. 성 거트루드 올드 교회(St. Gertrude Old Church)를 만난다. 눈에 확 띌 정도로 독특하고 웅장한 네오고딕 스타일의 건축물이다. 붉은 벽돌과 뾰족한 고딕식 탑이 두드러진다. 안으로 들어가 본다. 다소 어둠침침한 실내에는 신도는 없고 지킴이 한 명 뿐이다. 이 교회는 무료 입장이었지만 리가의 대부분 교회들이 입장료를 받기에 헌금하는 마음으로 초를 사고 불을 켠다. 의자에 한참을 앉아 있는다. 교회는 많이 걸어서 아픈 다리를 쉬어 가는 여행자의 쉼터 역할을 한다.

 

역사가 깊어 보이지만 경내는 치장이 많지 않아 결코 화려하지 않다. 화려해야 할 스테인레스 유리창도 소박하다. 자료에 따르면 성 거트루드 올드 교회는 창건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418년까지 이곳(혹은 이 근처)에 돌 예배당으로 존재했다가 철거됐다. 리가의 역사에 맞물려 파괴되고 재건되기를 여러번. 1866년~1869년에 벽돌 교회를 지었다. 20세기 초, 신도들이 몰려 들자 1903년~1906년에 근처에 성 거트루드 신교회(St. Gertrude New Church)가 새로 지어진다. 현재 성 거트루드 교회는 라트비아 교회의 중심지다. 수호성인은 독일 헬프타의 성녀 거트루드(Gertrude of Helfta, 1256~1302)다. 거트루드는 독일 가톨릭 교회의 베네딕토회 수녀이자 신비가, 신학자, 성녀다.

 

아르누보 거리 (2).JPG
아르누보 거리

 

 

앨버타 거리의 아르누보 건축물들

교회를 비껴 신 시가지에서 꼭 다시 가보고 싶은, 아르누보 거리(Alberta Iela)로 향한다. 이미 가본 적 있는 곳이라 찾는 데는 어렵지 않다. 아르누보 거리를 꼭 다시 가보고 싶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여행 후 원고를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이 놀라웠다. 리가의 아르누보 거리를 만든 건축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는 유대인인 미하일 에이젠스테인(Mikhail Eisenstein, 1867~1920)이다. 그는 20세기 초(1899년~1914년), 리가에 아르누보 건축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가장 활발한 건축가다.

 

당대 리가의 아르누보 건축 스타일을 주도했던 건축가는 미하일 에이젠스테인 말고도 소수의 건축가들이 있다. 리가 태생의 콘스탄틴 펙셴스(Konstantīns Pēkšēns, 1859~1928)와 그의 제자인 에이젠 라우베(Eižens Laube, 1880~1967)다. 또 독일 건축가인 폴 만델스탐(Paul Mandelstamm), 헤르만 히비그(Hermann Hilbig), 하인리히 쉘(Heinrich Scheel)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런데 유독 미하일 에이젠스테인에게 관심이 갔을까? 리가의 아르누보 건축의 대가로서가 아니라 그가 소련의 유명 영화감독인 세르게이 에이젠스테인(Sergei Eisenstein, 1898~1948)의 아버지라는 점이다. 세르게이 에이젠스테인은 무성영화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찰리 채플린의 작품에 버금가는 천재 감독이다. 그의 작품인 전함 포템킨(1926년 작)의 오데사 계단신은 지금까지도 유명하다. 그는 ‘몽타주 기법’의 창시자로 후대의 영화학도들이나 영화감독들이 그를 따라 했다. 그러니 리가의 아르누보 거리를 더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것은 당연했다.

 

아르누보 건물.JPG
아르누보 건물

 

 

리가의 아르누보는 독일 유젠드 스타일

아르누보 거리에는 엇비슷한 건축형태의 거대한 아파트들이 밀집되어 타운을 이루고 있다.분명히 다르게 만들어진 건축물들이지만 디테일하게 그 특징을 잡아낼 수는 없다. 건축에 문외한인 필자에게는 눈에 띄는 건축물에 셔터를 누르는 것이 여행의 전부다. 그런데 리가의 '아르누보' 건축은 필자가 예상했던 스타일하고는 확연히 다른 점은 구분이 된다.

 

아르누보(Art Nouveau)란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 말로 1890년~1910년 사이 유럽 각지와 미국, 남미까지 국제적으로 유행했던 예술양식이다. 아르누보 하면 체코의 알폰소 무하의 그림이나 이탈리아 보티첼리의 화풍처럼 여성미가 물씬 나는 건물이 연상된다. 그런데 리가의 건축물은 전혀 다르다. 독창성보다는 획일화된 느낌이 드는데다, 장식들이 포효하고 울부짖고 있어서 이탈리아 카라바조의 메두사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도그럴 것이 필자가 아는 아르누보는 프랑스 스타일이었다. 독일에서는 유젠드 스타일(Jugendstyle), 이탈리아에서는 리버티(Liberty), 미국에서는 티파니(Tiffany)로 표현된다. 그러니까 리가의 아르누보는 유젠드 스타일로 초기 절충주의(early eclectic style), 수직 스타일(vertical style), 국가 낭만주의(national romantic period), 신고전주의(neoclassical)로 건축된 것을 말한다.

 

아르누보 박물관.JPG
아르누보 박물관

 

 

19세기 초, 아르누보 건축 붐이 일어난 리가

자료에 따르면 리가에 아르누보 건축 붐이 일어난 때는 1899년~1914년 사이다. 19세기 말, 리가는 급속하게 경제가 성장했다. 러시아 제국에서 5번째로 큰 도시이자 발트해 지역에서 3번째였다. 이 기간 동안의 경제 성장률은 최고 수준이었다. 경제가 성장되면서 인구는 늘어나고 구 도시는 점점 포화상태가 되었다.

 

성문과 성벽이 부서지면서 구도시를 벗어나 외곽에 새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1910년~1913년 사이에는 기존 규정과 상관없는, 새로운 스타일의 건물들이 외곽에 지어진다. 이때 건축형태를 리가의 아르누보 풍(유젠드 스타일)이라고 일컫는다. 아르누보 건물은 빠르게 유행을 타면서 도시에 정착한다. 처음에는 구시가지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내 성문 밖의 외곽의 넓은 터에 고층 건물이 생겨난다. 20세기 초, 신축 건물의 40%가 아르누보 스타일이었다. 건축가들은 외국인들과 내국인으로 나뉘었다. 내국인 건축가들은 1869년, 리가 기술 대학교(Riga Technical University)의 건축과(Faculty of Architecture) 졸업생들이 주도했다. 외국인들은 독일, 러시아 건축가였다.

 

건축에 필요한 조각품, 스테인드글라스 및 마졸리카 스토브(majolica stoves)와 같은 자재는 리가의 현지에서 제작했다. 리가의 장식품 회사는 지역은 물론 러시아 제국의 상트 페테르부르크나 에스토니아 탈린 등으로 수출할 정도로 유명했다.

 

에이젠스테인 건축형태.JPG
에이젠스테인 건축형태

 

 

리가 아르누보 거리의 중요 건물들

이 거리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1901년, 하인리히 쉘(Heinrich Scheel)과 아우구스트 쉬펠(August Friedrich Scheffel)이 공동으로 지은 가정 집(Alberta iela 1)이 있다. 이 집은 젠타 마우리나(Zenta Mauriņa, 1897~1978) 작가가 살았다.

 

미하일 에이젠스테인의 대표 건축물은 1903년(Alberta iela 8), 1904년(Alberta iela 4)이 있다. 또 1906년(Alberta iela 2a)의 집은 이사야 베를린 경(Sir Isaiah Berlin, 1909~1997, 러시아-영국 철학자)의 가족이 1905~1915년에 살았다. 이 중 1903년에 건축된 미하일 건물이 가장 눈에 띈다. 최고급 유젠드 스타일 하우스(Jugendstyle House)라는 전문 용어는 이해 못해도 푸른색이 나고 외관의 장식품과 치장이 남다르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 외 헤르만 히비그(Hermann Hilbig)의 신 바로크 건물(Alberta iela 4)이 있다.

또 1903년, 콘스탄틴 펙셴스와 그의 제자인 에이젠 라우베가 만든 건물(Alberta iela 12)이 있다. 이 건물은 현재 아르누보 박물관(2009년 4월에 개관)과 화가 야니스 로젠탈스와 작가 루돌프 블라우마니스 박물관(Janis Rozentals and Rudolfs Blaumanis' Museum, Alberta iela 12-9)이 되었다. 9번 아파트에는 야니스와 엘리 포셸 부부가 1904~1915년까지 살았다. 1906년~1908년까지 아니스의 친구였던 루돌프 블라마니스(Rūdolfs Blaumanis)가 함께 거주했다(화가 야니스 로젠탈스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호에 설명하기로 한다).

 

미하일의 1906의 집 조형물.JPG
미하일의 1906의 집 조형물

 

 

리가 아르누보 건축의 대가, 미하일 에이젠스테인

아르누보 거리를 다 보고 나오다가 ‘아르누보 거리’를 알리는 표시 앞에서 미하일 에이젠스테인(Mikhail Eisenstein, 1867~1921)의 흉상을 만난다.

 

궁금한 마음에 미하일 에이젠스테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본다. 이곳 저곳을 자료를 정리해보면 그는 빌라 트세르크바(Bila Tserkva, 현재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주)에 있는 유대인 상인 아버지와 스웨덴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가족들은 일찍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사했고 바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다. 그는 대학에서 토목 공학(1887~1893)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1893년, 26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로 이사했다. 그는 리보니아 주 지방 당국의 교통 도로 부서에서 일했다. 1895년과 1900년에 부서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공무원 생활하면서 여러 번 공로상을 받을 정도로 성실했다.

 

그는 공무원이면서 독립 건축가로도 일했다. 그는 14년(1897년~1911년) 동안에 리가에서 19개 이상의 고층 석조 주거용 건물을 지었다. 그중 6개가 앨버트 거리에 있다. 그의 건축물 거의 절반이 현재 국가 건축 기념물이 되었다.

 

그의 첫 번째 건축은 부유한 변호사 친구인 레베딘스키(Lebedinskij)가 부탁한 3채의 주택이었다. 젊은 미하일은 당시 남부 유럽에서 유행하던 아르누보의 특징(꽃, 곤충 및 파충류를 사용한 장식) 대신 독일 유젠드 스타일로 변형했다. 팜므파탈 형의 기이한 조각이 새겨진다. 그의 집 외관은 신비롭고 슬프고 부드럽고 매혹적인 여성 가면으로 가득하다. 새겨진 얼굴들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앞서 말한대로 장식들이 포효하고 울부짖고 있어서 이탈리아 카라바조의 메두사 같은 느낌을 받는다. 모든 작품 속에는 작가의 감성이 배어 들게 마련이다. 미하일이 건축가로 성장가도를 달리던 시기는 그의 아내와의 사이는 지독하게 복잡했고 외아들이 태어난 시점이었다.

 

미하일 탈스 동상.JPG
미하일 탈스 동상

 

 

불행한 결혼, 울부짖는 건축물

그는 1897년(30세)에, 가족들의 소개로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상인의 딸인 줄리아 코네츠카야(Julia Konetskaya)와 결혼한다. 결혼 전, 둘 다 각자의 러브 스토리가 있었다. 젊은 미하일은 리가의 부유한 상인 집안의 메르텐스와 사랑에 빠졌지만 집안의 반대로 헤어졌다. 줄리아도 다른 청년과 사랑에 빠졌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깨졌다. 이 둘은 집안 친척의 소개로 만나 축복 받으며 결혼했지만 애정은 없는 정략결혼이었다.

 

이 부부는 리가 중심부의 큰 아파트에 살면서 결혼 1년 후 아들 세르게이를 낳는다. 이들은 도시 상류층과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아들 세르게이의 회고록에 따르면, “아버지는 국제적인 사람이었다. 러시아어 외에도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사용했다. 그는 역사와 문학에 관심이 있었다. 그의 서재에는 고굴, 톨스토이, 에밀졸라, 듀마, 휴고의 책들이 있었다. 현대 건축에 대한 관심 외에도 그림에도 조예가 있었다. 특히 러시아의 이동파의 한 사람이었던 콘스탄틴 마코프스키(Konstantin Makovsky)의 그림에 감탄했다”고 쓰고 있다.


아들이 말한대로 미하일은 리가에서 가장 열성적인 연극 관람객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팜므 파탈의 악마 숭배는 보헤미안 연극계에서 인기가 있었다. 그는 오페라와 문학에 열광했다. 그의 건물 정면을 장식하는 여성 조각은 당시 인기 있는 오페라 디바들의 얼굴을 새겼다. 언론에서는 그 디바가 누군지가 누군지를 화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미하일의 사회적인 입지는 성공적이었을지 모르나 집안의 스캔들은 멈추지 않았다. 미하일의 아들 세르게이의 어린 시절 회고록에 따르면 “어머니가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기 위해 계단을 뛰쳐 나온 날을 분명히 기억한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다시 데려왔을 때도 기억한다”라고 쓰고 있다. 이 부분을 보면 부부는 심한 성격의 차이를 겪고 살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가정사는 그가 만든 집들이 ‘울고 있다’는 느낌으로 전이된 것이리라.

 

줄리아가 장군과 바람을 피운 후, 부부는 1909년에 별거에 들어가고 4년간의 긴 법정 공방을 거쳐 1912년(45세), 정식으로 이혼했다. 15년의 결혼 생활의 종지부를 찍었다. 법원은 아들 세르게이는 아버지가 키우게 판결했다. 이혼 후 줄리아는 가족을 떠나 프랑스에서 살았다.

 

미하일은 아내와 이혼 후 심신의 평화와 고요를 되찾았지만 건축일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지역 건축 공동체는 미하일에 대해 입방아를 쪄댔다. 그럼에도 리가의 부유한 시민들과 국제 외교관들은 즉시 모든 미하일이 만든 집을 차지했다. 부유한 부동산 개발자들은 계속 건축의뢰를 했지만 그는 손을 놓았다. 그는 1917년(50세)까지 리가에서 계속 살았다. 미하일은 러시아 내전 이 끝난 후, 24년 살던 리가를 떠나 베를린에 정착해 1920년(53세)에 사망했다. 그는 베를린-테겔 러시아 정교회 묘지에 묻혔다.

오늘날 리가의 건축물은 아르누보 스타일의 보석이다.(계속)

 

Data

뵈르만 정원:Tērbatas iela 2D, Centra rajons, 리가

 

성 거트루드 올드 교회

주소:Ģertrūdes iela 8, Centra rajons, 리가

전화:+371 67 275 707

 

성 거트루드 신 교회

주소: Brīvības iela 119, Centra rajons, 리가

전화: +371 67 377 236

 

앨버트 거리:Alberta iela 10, Centra rajons, 리가

 

아르누보 빌딩:Alberta iela 13, Centra rajons, 리가

전화:+37180000800

 

야나 로젠탈과 루돌프 블라우만 박물관(Jana Rozentala un Rudolfa Blaumana muzejs):Alberta iela 12-9, Centra rajons, 리가

전화:+37167331641

 

아르누보 건축타운:https://en.wikipedia.org/wiki/Art_Nouveau_architecture_in_Riga

 

Copyright ⓒ woman.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
  • 페이스북
  • 카카오스토리
  • 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1. 메인으로
  2. 기사목록
  3. 맨 위로
댓글달기
글쓴이    비밀번호 (숫자 4자리를 입력해주세요)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이번호 커버이미지
이번호
서점 이벤트
  • 예스24
  • 교보문고
  • 인터파크
  • 알라딘
  • 이달의 목차
  • 지난호보기
  • 정기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