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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섬, 어부의 마을

2021-03-30 17:17

글·사진 : 이신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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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섬의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에서 ‘허니문 다리’를 건너면 올드타운(Altstadt)으로 이어진다. 올드타운은 ‘어부의 마을’로 통한다. 어부의 마을 쪽은 역사 깊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대성당보다 훨씬 아름다운 강변 타운이다. 강변을 따라 들어선 독일식 가옥은 여느 아름다운 유럽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멋지다. 아름다운 강변 타운에서 맛있는 해산물을 먹는다는 부푼 마음만 한가득 안고 찾아간 곳. 하지만 이곳에는 유대인의 애환은 물론 프레골랴 강의 ‘곡선 법칙’을 부수겠다는 8번째 다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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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타운과 강(위), 올드타운 옛모습.

 

율리우스 루프 동상

유서 깊은 건축물은 보는 것은 좋으나 그 역사를 찾아내 원고를 써야 하는 일이 머리를 묵직하게 만든다. 굳이 현장에서까지 고민할 이유는 없다. 성당을 벗어나 그 유명하다는 해산물 타운으로 빨리 가서 맛있는 해산물을 먹을 생각 뿐이다. 어촌으로 가는 쪽 성당 앞에 율리우스 루프(Monument to Julius Rupp, 1809~1884)의 동상이 있다. 신학자이자 대학 교수였던 율리우스는 복음주의 공동체(free community, 자유 교회(Freikirche))의 창시자다. 정통 교회에 속하지 않은 다른 교파들, 유대인, 자유 사상가들에게 열린 공동체를 만든 이다. 이 조각은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의 작품이다. 케테 콜비츠는 율리우스 루프의 외손녀로 당시 유명한 독일의 조각가이자 판화가다. 1909, 루프의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조각을 그녀가 맡았다. 케테는 루프의 얼굴 조각 아래에 그가 믿는 진리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진리 자체의 가장 위험한 적이라는 글을 새겼다. 기념비 원본은 제2차 세계 대전 때 파괴되었기에 현재의 기념비는 복사본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칸트 섬에는 동상이 워낙 많아서 율리우스 루프의 기념비는 살짝 스쳤을 뿐. 원고를 쓰기 위해 자료를 찾다보니 케테 콜비츠는 1980년대 대한민국의 민중미술에 큰 영향을 미친 예술가였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독일인 케테 콜비츠. 참여미술의 선각자로도 불리는 그녀의 멋진 작품 속에는 참 서글픈 인생사가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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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문 브리지.

 

다리, 허니문 브리지

대성당을 벗어나 올드타운(Altstadt, Old town)의 어부 마을(Fishermans Village)로 가려면 허니문 브리지(Honeymoon bridge)를 건너야 한다. 10m, 길이 6.5m의 철다리는 그저 강을 잇는 다리로 보인다. 그러나 허니문 브리지는 칸트 섬에서 프레골랴 강을 잇는 총 8(처음에는 7) 다리 중 전쟁의 폭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장 오래된 다리다. 이 다리는 알프레히트 공작의 통치시절인 1542, 크네이포프와 알슈타트를 잇는 첫 목조 다리였다. 1879~1882년에 도개교 철교로 바뀌었는데 당시는 독일 최초의 유압식 이동식 교량 중 하나였다.

 

이 다리에 허니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가 있다. 오베르부르그라프 베젠라데(oberburggrаf Bezenrade)라는 사람이 크네이포프(현재 대성당 구역) 시 의원에게 꿀로 매수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다. 이 점에 화가 난 알슈타트 사람들이 크네이포프 주민들을 꿀 핥기(honey-licking)’라고 해 꿀 다리란 이름이 생겼다. 그런 연유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리 난간에는 많은 자물쇠가 걸려 있다. 신혼부부(혹은 연인)들은 으레 이곳에 와서 자물쇠에 이름을 써 교량에 걸고 열쇠는 물속에 던져 버린다. 자물쇠에 사랑을 넣고 열쇠로 꽉 잠가 날아가지 못하게 하는 행위다. 그러다 사랑이 깨지면 물속에 들어가서 열쇠를 찾아와서 열어야 할까?

 

이 다리 한 가운데에는 홈린 할아버지의 작은 동상(Monument to Grandfather Homlin, 20186)이 있다. 참고로 앰버 박물관에는 할머니 홈린이 있고, 해양박물관 근처에는 어린이 홈린이 있다.

 

크네이포프 올드 타운 역사

허니문 다리를 건너면 올드 타운 구역에 들어선다. 올드 타운은 1324, 상인들이 정착하면서 발전했다. 1327, 튜턴기사단의 17대 단장인 베르너 폰 오르셀(Werner von Orseln, 1280~1330)때 쿨름(Kulm, 시정촌)으로 허가됐다. 시정촌은 섬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접근의 편의를 위해 13세기~14세기, 크네이포프와 알슈타트를 연결하는 다리들이 만들어진 것. 특히 크네이포프는 한자 동맹에 가입해 활발한 무역을 했다. 1367, 쾰른 연맹(Confederation of Cologne)에 가입해 덴마크의 발데마르 4(Valdemar IV, 1320~1375)를 상대로 싸웠다. 1701, 프로이센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724, 프로이센의 왕 프레드릭 1(Frederick William I)에 의해 섬 전부(Altstadt, Löbenicht, Kneiphof 및 각각의 교외 지역)가 쾨니히베르크에 합병됐다. 활발한 무역 활동으로 부를 많이 축적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유대인 역사

이 올드 타운에 유교회당(2018년에 복원)이 있다. 유교회당 옆의 붉은색 건물은 유대인 고아원(Jewish Orphanage Building With Evening School) 건물로 현재는 게스트하우스다. 겉보기에는 그냥 건축물이지만 아픈 유대인 역사가 흐른다. 슬쩍 지나쳐 버릴 건축물에는 깊고 깊은 쾨니히스베르크 유대인의 역사가 깃들여 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유대인의 역사는 1530년대 알브레히트 지배시절에 시작된다. 이 도시에 정착한 첫 번째 유대인은 이삭 월(1538)과 미셸 아브라함(1541)이었다. 1680(또는 1682), 프리드리히 빌헬름 1(Frederick William I, 1688~1740)가 유대인 거주지를 허용했다. 첫 유대인 첫 정착지는 올드 타운의 남쪽(Vordere Vorstadt, Moskovskiy 지역)이었다. 그곳에 몰려 살았다. 1704년에는 유대인 공동묘지도 허락 받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유대인들에게 많은 제한이 있어 18세기 중반까지는 인구가 500명 정도였다. 19세기에 들어서 제한이 완화되면서 유대인 공동체는 1880년 인구 5000명을 기록했다. 20세기에는 큰 유대인 공동체까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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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고아 학교.

 

유대인 공동체가 만든 회당과 고아원

19세기 후반 쾨니히스베르크는 발트 해에서 가장 중요한 곡물 수출 도시였다. 1860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러시아 제국까지 직행 철도가 연결되면서 그 중요성은 커졌다. 증권 거래소에선 많은 곡물이 거래되었고 1924년까지 수입 곡물이 저장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곡물창고에서 일하거나 여러 개의 곡물창고를 소유한 부유층들도 있었다. 리투아니아 또는 벨로루시 지역의 상인들이었다.

 

1756년 유대인 거주지에 첫 작은 회당(Alte Synagogue, 올드 시나고그)이 생겼다. 이 회당의 설립자 중 한 명은 벨로루시 민스크에서 온 상인(Max Mordechai Perlmann)이다. 그는 이곳에 5개의 창고를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약 1000명의 유대인이 살았다. 첫 회당은 1811년 화재로 전소되었고 1815년에 재건되어 1942년까지 있었다.

 

그러다 사업에 성공한 상인, 은행가, 보석상들이 회당을 짓는데 투자했다. 특히 호박 보석으로 큰 돈을 번 거물 모리츠 베커(Moritz Becker. 1830~1901)와 부인 헨리에트 베커(Henriette Becker)1893년에 자체 회당인 아다스 이스로엘(Adass Jisroel)을 만들었다. 그는 일부 신자들이 너무 자유롭다고 여겼기에 정통적인 유교회당(Israelitische Synagogengemeinde)을 설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8968, 쾨니히스베르크의 주류 유대인들은 신 유교회당(Liberal Neue Synagoge)을 건축한 모리츠 베커도 회당 건설을 위해 많은 돈을 기부했다. 신 유교회당은 베를린 건축사무소인 크레메르와 울펜스테인(Cremer & Wolffenstein)에서 설계했는데 눈에 띄게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신 유교회당이 생기면서 아다스 이스로엘은 자연스럽게 올드 회당(Old Synagogue)이 되었다. 1904, 신 유교회당 쪽에 유대인 고아원 학교를 지어 1905년에 새 건물로 이전했다. 주로 동 프로이센에서 교회를 지은 독일 건축가였던 프리드리히 헤이트만(Friedrich Heitmann, 1853~1921)의 작품이다.

 

크리스탈 나이트로 파괴된 고아원과 유교회당

그러다 1938119~10, ‘크리스탈 나이트(Crystal Night, Kristallnacht)’를 겪게 된다. ‘크리스탈 나이트는 유대인 소유 상점, 건물 및 회당의 창문이 부서져 깨진 유리가 거리를 뒤덮은 것을 말한다. 게슈타포들은 유대인 가정, 병원 및 학교, 회당 등을 망치로 건물을 부수면서 약탈했다. 이곳의 고아원과 유교회당도 당했다. 다행히 고아원 건물은 많이 불타지 않아 복원을 거쳐 1942년까지 유대인 학교로 사용되었다. 신 유대회당도 194211월 이후 완전 폐쇄되었다. 이 사건 이후 유대인 아이들 구하기 운동(Kindertransport)이 펼쳐졌다. 이곳에는 HAPAG(Hamburg American Shipping Line)가 있었다. HAPAG는 미국 이민자에게 선박 표를 판매했다. 많은 유대인 가족이 기차를 타고 쾨니히스베르크까지 와서 이곳에서 배를 타고 뉴욕으로 항해했다. 나중에는 아이들을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배에 태워 보냈다. 네덜란드에 도착한 사람들은 나중에 살해되었지만 영국에 도착한 사람들은 살아남았다.

 

현재 고아원 건물의 벽에는 러시아어, 유대교, 독일어로 된 기념패가 있다. 동상도 있다. 신 유교회당의 재건축은 2011년에 재단이 설립되었다. 파괴 80주년을 맞아 2018118일에 개관했다. 회당에는 도서관이 있는 박물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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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에 새겨진 옛그림.

 

옛 독일식 건축물이 늘어선 어부 마을의 종탑

유교회당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아름다운 건축단지가 있는 어부 마을(Fishing Village, Rybnaya Derevnya)로 접어든다. 어촌마을 입구 호텔에 있는 그림은 어촌 마을 입구를 알려준다. 강을 앞에 두고 멋진 가옥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은 가히 아름다운 어부 마을. 이 곳을 현대적인 민족지학(民族誌學) 및 무역 공예(trade-craft)단지라 부른다. 2006, 옛 독일 어부들의 정착지에 15세기의 독일 주택을 재현해낸 마을이다. 옛 독일 건물이 4분의 1정도 차지하니 마치 18세기~20세기의 북유럽 또는 중부 유럽에 온 듯, 이색적이며 화려하고 아름답다. 건물 대부분은 호텔이나 레스토랑이다.

 

건물 사이에 종탑 등대(Species Tower Lighthouse)가 있다. 높이 33m의 이 등대는 3세기의 어촌 마을을 상징한다. 133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파노라마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다. 탑 위에는 알을 품고 있는 행복의 새(The Bird of Happiness) 조형물이 있다. ‘새를 문지르고 동전을 놓으면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전해진다. 또 이 등대에는 박물관이 있다. 어부 마을 개발 중에 발견된 유물 전시관이다. 19~20세기의 스페인 파르티잔(Partisan, 도끼창), 한국과 중국의 양손 검, 삼지창, 격투 검을 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다. 16세기 주민들의 신발, 엔티크 접시, 도구 등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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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 해산물 요리(위)와 벽에 걸린 유명인사 사진들.

 

비싼 생선 레스토랑들

멋진 건축물을 따라 걸으면서 레스토랑을 기웃거린다. 어촌 마을이니 필히 해산물 요리를 즐길 생각이다. 행여 직접 물고기를 잡는, 어부집이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레스토랑을 기웃거려 보지만 찾을 수 없다. 식당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손님들의 테이블 위를 슬쩍 엿보지만 생선요리를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말이 어촌마을이지 그냥 식당가.

 

더 이상 헤매기 싫어 생선 그림과 로컬 피쉬라고 적힌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는다. 메뉴가 너무 많아서 어떤 것이 생선인지 알 수 없다. 가장 만만한 큰 새우 요리를 시켰다. 러시아 맥주는 맛이 없다는 걸 잊고 한잔 시켜 마시다가 금방 후회한다. 그래도 실패가 거의 없는 버터에 구운 새우요리의 맛이 좋아서 앱솔루트(스웨덴 보드카) 잔술을 더 시킨다. 새우로는 간에 기별도 안가서 굴 소스 버섯볶음을 추가한다. 다음 메뉴가 차려질 동안 레스토랑의 안쪽으로 들어가본다. 제법 유명한 식당인 듯, 이곳을 찾은 사람들 사진들이 벽면을 한가득 차지하고 있다. 그중 눈에 익은 영화배우 안드레이 머즐리킨(Andrey Merzlikin)의 사진이 걸려 있다. 트베리의 여학생 알리나(Alina)의 친 오빠와 친구라는 러시아 유명 배우다. 좋아하는 새우요리를 안주삼아 마신 알코올이 기분을 업시켜주니 그의 사진이 더 반갑다. 음식을 다 먹고 계산을 하니 1300루블. 러시아 여행 중에 가장 비싼 음식이었던 듯하다. 식당을 벗어나려고 하니 한 손님이 지역 생선을 시켜 먹고 있다. 단언컨대 그가 먼저 왔었다면 그 생선을 먹었을 것이다. 아쉬움은 다음을 기약하면 그만이다.

 

프레골랴의 8번째의 유비리 다리

식당을 빠져 나와 유비리 다리(Yubileyniy(Anniversary) Bridge, Jubilee(festivities) bridge)로 다가선다. 강을 건너 반대편에 서서 풍치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에서다. 유비리 다리는 튼튼해 보이는 둥근 시멘트 기둥이 다리를 받치고 멋진 등으로 장식돼 있다. 도개교이면서 보행자 다리다. 유비리 다리는 1905, 독일제국(1871~1918)의 마지막 황제인 빌헬름 2(Friedrich Wilhelm Viktor Albert, 1859~1941)때 만들어졌다. 빌헬름 2세를 고유명사처럼 카이저(Kaiser) 황제라고 부른다. 카이저가 이 다리를 건설하라는 데는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문제(Seven Bridges of Königsberg)에서 시작됐다.

 

쾨니히스베르크 시대 프레골랴 강에는 7개의 다리가 있었다. 7개 다리는 수학 문제(Test)로 유명하다. ‘7개의 다리들을 한 번만 건너면서 처음 시작한 위치로 돌아오는 길이 있는가?’ 1735, 수학자인 레온하르트 오일러(1707~1783)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1736년에 그래프 이론(Graph Theory)에 대한 첫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수학의 그래프 이론(한붓그리기)의 기원이 된다. 그래서 카이저 황제는 오일러의 수학적 이론을 해결하기 위해 다리 하나를 더 만들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유비리 다리는 전쟁 중 파괴되어 2005, 쾨니히스베르크 750주년을 기념해 재건축되었다. 다리의 집(Bridge house)은 현재 건축사무소(Modul‘-Stroygrad)로 이용된다. 강을 건너 올드 타운 건너편 길을 천천히 걷는다. 걸어왔던 그 곳들은 강 너머에서 더 멋진 풍경으로 다가선다.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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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비리 다리.

 

옛 증권거래소와 미술관

강변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서 처음 시작했던 차도 근처에 도달한다. 다리 밑에는 낡은 느낌이 덕지덕지 배인 증권거래소(Königsberg Stock Exchange) 건물이 있다. 건물이 낡아 보이는 이유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살아남은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쾨니히스베르크는 무역이 활발했던 도시다. 1619, 최초 증권 거래소가 지어졌고 그 뒤에 세 번 더 건축되었고 현재 증권 거래소는 네 번째(1870~1875). 무역이 발달되면서 자꾸 커진 증권거래소. 현존하는 증권거래소는 독일 브레멘의 유명한 건축가인 하인리히 뮬러(Heinrich Müller, 1819~1890)가 설계한, 고전주의와 이탈리아 네오 르네상스 스타일의 멋진 건축물이다. 건물 외관은 또 다른 유명 독일 조각가인 에밀 훈드리에서(Emil Hundrieser, 1846~1911)의 조각품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는 유럽, 아시아, 미국 및 아프리카의 4개 대륙의 상징적인 조각으로 치장하고 건물로 오르는 계단에는 사자 방패 조각상을 세웠다. 낡았지만 건축의 화려함이 남은 곳. 자꾸만 눈길을 잡아끈다.

 

이 곳은 사업 활동 외에도 컨서트와 정치 회의를 주최했다. 1차 세계 대전 때는 우편 서비스 대신 전시회장이 되었다.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대다수의 폐허 건물들은 철거되었지만 소련 당국은 러시아 신고전주의 건축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며 국가의 중요한 건축 기념물로 지정했다. 부서진 건물은 영화(1959), (1961), (1964)) 촬영지로 인기를 누렸다. 1967, 보수공사를 시작해 건물 외관은 보존하고 내부 인테리어를 새로 했다. 1973년 재건축 후 해양 문화 센터로 재건했다. 2018년까지는 지역 청소년 문화 센터로 이용하다가 닫았다. 그리고 칼리닌그라드 지역 미술관을 이곳으로 이전했다. 상설 전시 외에도 박물관은 여행 전시회, 미술 워크숍이 열린다.

 

칼리닌그라드의 숙소

미술관을 끝으로 빨리 숙소로 돌아온다(매우 긴 이야기였지만 실제로 첫날은 주마간산 여행이었고 후에 보충 취재를 한 것). 숙소로 서둘러 돌아온 이유는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회 티켓을 구입했기에 하루 더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이틀 밖에 예약을 하지 않아 그 문제부터 빨리 해결해야 한다. 부족함이 하나도 없는 KD 호스텔에서 더 있고 싶었지만 확인해 보니 컨서트 날짜에는 예약이 꽉 차 있는 상황. 숙박지기는 예약취소 하는 상황도 생기니 기다려 보란다. 일단 지켜보기로 한다. 그 때,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에서 스치듯 만난 노년의 한국인 60대 중반 부부를 만나게 된다. 그들은 하루 먼저 와서 이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반가워야 할 동족인데 이틀간의 참으로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된다.(계속)

 

Data

허니문 다리주소 Ulitsa Kanta, 칼리닌그라드/LindenstrasseOktiabrskaia Str./https://visit-칼리닌그라드.ru/en/entertainment/bridges1101/honey-bridge

유대인 고아 피난처 건물Ulitsa Oktyabr'skaya, 3, 칼리닌그라드

유교회당주소Ulitsa Oktyabr'skaya, 1а, 칼리닌그라드웹사이트:https://jewsineastprussia.de/project-synagogue-in-kaliningrad-konigsberg/

종탑 등대Ulitsa Oktyabr'skaya, 2А, 칼리닌그라드

피시 빌리지(Rybnaya Derevnya):Ulitsa Oktyabr'skaya, 6А, 칼리닌그라드/전화:+7 (4012) 30 72 02 (business centre "On the island")

어촌마을 레스토랑 카이저호프(Kaiserhof, 황실): 주소 Ulitsa Oktyabr'skaya, 6а, 칼리닌그라드/전화: +7 401 259-22-22

주비리 다리(Jubilee bridge): Ulitsa Epronovskaya, 12, 칼리닌그라드

아트 미술관(Art Gallery, Khudozhestvennaya Galereya): Prospekt Leninskiy, 83, 칼리닌그라드/월요일 휴관/웹사이트:kaliningradartmuseum.ru

홈린 피규어(Homlin Figure On A Trestle Bridge): Prospekt Leninskiy, 칼리닌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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