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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메멜 제국의 흔적이 남은 올드 타운

2021-02-05 17:59

글·사진 : 이신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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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시, 클라이페드. 올드 타운도 작아서 한갓지게 여정을 즐기기에 참 좋다. 관광객 인파에 시달리지 않고 천천히 골목을 누비면 되는 곳. 그곳에는 긴 메멜 도시 역사의 흔적이 남아 현재까지 이어온다. 또 골목에는 크고 작은 동상들이 숨어 있어 마치 숨은 그림 놀이를 하는 재미가 있다. 거기에 극장 광장의 분수대에 새겨진 17세기의 유명한 작가 사이먼 다흐와 안나 네안데르의 소녀상에 얽힌 사랑 이야기는 여행자의 호기심을 크게 유발시킨다.

골목 조약돌.JPG

 

빈 터에 남은 옛 교회 사진과 범종 한 개

본격적으로 올드 타운이 시작된다. 오래된 돌 조약돌이 그대로 박힌 올드 타운의 골목 길. 그러나 활황은 오래전에 사라진 듯, 여느 도시보다 썰렁한 느낌이다. 더 이상의 발전을 포기하거나 원치 않은 그런 도시의 느낌이 드는 것은 필자 뿐일까? 골목으로 들어서기 전,넓은 빈 터에 성 존 교회(St John's Church, St. Jono Baznycia) 사진과 범종 한 개가남아 옛 터를 쓸쓸히 지키고 있다. 그래서 이곳을 ‘잃어버린 클라이페다(Pražuvusi Klaipėda, The lost Klaipėd)라는 이름을 붙였나보다. 그렇다고 볼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열린 미니어처 옛 가옥을 만들고 그 안에 사람들의 모형을 만들어서 옛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시대를 한참 거슬러 올라간 옷이나 생활상이지만 모형마다 특색을 잘 살려서 마치 동화책을 읽는 듯 생생하다. 그 당시의 생활이나 풍습 등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역사가 없는 도시는 없다. 이 장소에서는 클라이페다의 역사를 알아봐야 할 시점이다.

 

 

관광객.JPG
클라이페다를 찾은 관광객들

 

 

프로이센의 땅 메멜

발트 해에 있는 리투아니아의 유일한 항구 도시, 클라이페다. 현재 리투아니아 현지민들의 휴양지로 인기가 높은 마을이다. 자료에 따르면 클라이페다는 1252년, 리보니아 공국의 튜턴 기사단이 만든 도시다. 튜턴 기사단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되었다. 1422년~1919년까지 프로이센의 도시였다. 프로이센과 리투아니아의 국경은 1422년부터 497년간이나 이어졌다.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경계선이다.

 

클라이페다는 프로이센 시대에는 메멜(Memel)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라틴어로는 '카스트룸 메멜레(Castrum Memele), 독일어로 메멜부르크(Memelburg)라고 기록되어 있다. 1629년~1635년에 스웨덴 공격을 받은 후에는 오랜 시간 동안 도시를 복구했다. 1871년, 통일 독일제국이 형성되면서 독일의 최북동단에 위치한 도시가 되었다. 옛 독일의 국가 자료에도 ‘독일에서 가장 끝에 있는 지방’으로 기록하고 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지면서 메멜은 프랑스 령이 되었다. 1923년, 리투아니아의 공격으로 프랑스 군은 도시를 떠났다. 1939년에는 나치 독일이 최후통첩을 보내자 독일에 반환돼 다시 독일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인 1944년, 메멜에 사는 독일인들 대부분이 도시를 떠났다. 1945년 1월, 텅 빈 이 도시를 소련의 붉은 군대가 점령한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독일인들 대부분 시베리아나 독일로 추방당했다. 1991년까지 소련의 지배를 받다가 9월 독립했다. '클라이페다‘는 칼리닌그라드와는 다르게 러시아 령이 되지 않고 리투아니아에 병합되었다. 결론은 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지만 프로이센의 메멜의 역사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도시다.

 

옛지도.JPG
클라이페다 옛 지도

 

 

메멜 시대의 성 존 교회

클라이페다의 올드 타운에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성 존 교회(St. John’s Church)는 1258년, 튜턴 기사단에 의해 처음 지어졌다. 도시 정복 후 6년 만이다. 이후 1696년~1706년에 네오 고딕 양식의 교회로 크게 재건된다. 종탑(39m)에는 4개의 종이 걸렸다. 그때의 종 한 개가 빈 터에 남아 있다. 1854년 이후, 화재로 전소되자 마을 사람들에 의해 또 재건(1856~1858)됐다. 옛 교회에 기초를 바탕으로 남은 벽돌들을 사용했다. 종탑의 높이는 75m(혹은 76m)로 높아졌다. 당시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공공 건물이 되었다. 1857년부터 성 존 루터 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루터교를 믿었다. 리투아니아 인들 대부분이 가톨릭을 믿기에 이 지역 사람들의 루터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리투아니아 인들과 종교 차이로 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독일로 이주해 동화되었다 한다.

 

이 교회는 1944년, 세계2차대전 중에 파괴되었고 1945년에는 완전히 철거해 빈터로 남아 오늘에 이른다.

 

2006년부터 발굴을 시작했다. 그 과정 중에 182명의 유해가 발견됐다. 고고학자의 말에 따르면 “1291년에 쿠로니아의 에드문드(Edmund) 주교가 대성당 묘지에 주민들의 묘역을 허용했다. 세월 지나면서 점차 묘역은 좁아졌다. 16~17세기에는 특정층(사제, 고위 군인, 상인, 왕실의 하인)만 묻혔다. 그 유골들일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유골들은 클라이페다 대학에 보관하다가 나중에 요나스 힐의 지하실로 옮겨졌다.

 

이 빈터는 2027년에나 재건 될 예정이다. 대신 현재의 빈 터에서는 각종 행사를 펼친다. 해가 끝나는 12월 31일에는 종교 의식, 문화 행사(전시회, 콘서트, 박물관)가 열린다. 2012년에는 760주년을 기념했다.

 

 

 

프로이센 메멜의 요나스 언덕

성 존 교회 터 옆쪽으로 가면 요나스 언덕(Jono Kalnelis, Jonas Hill)이다. 요나스 언덕은 17세기, 메멜이 만든 방어 요새의 흔적이다. 프로이센 왕국 때인, 1627~1629년 독일 엔지니어(Rene Carracioli de Niastre)가 만든 네덜란드 스타일의 요새다. 약 3.5m 높이의 둑과 그 주변에 해자를 만들었다. 18세기에는 더 굳건히 재건했고 19세기 중반에는 도시 동쪽과 남쪽까지 요새로 둘러싸면서 북쪽의 뉴 데인 강을 보호했다. 이 요새는 스웨덴(1629~1635)과 러시아(1757~1762) 군대의 점령을 막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다 18세기 후반기에는 요새 기능을 잃는다. 둑은 무너지고 도랑은 흙으로 채워졌으며 게이트 벽돌은 다른 건축에 사용하느라 사라졌다. 그마저도 소련군에 의해 완전 파괴되었다.

 

 

지난 1990년대(1994~1997)에 옛 요새로 복원했다. 물길에 둘러 쌓인 요새는 마치 포위 된 작은 섬 같은 형상이다. 현재 요나스 언덕에서도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성 존의 날이나 사순절 전야제(Užgavėnės) 축하행사가 열린다. 휴일이면 민속 음악이 연주되고 리투아니아 민속 춤을 춘다. 여름 바다 축제(Jūros šventė) 기간 동안에도 다양한 이벤트, 컨서트 및 춤 향연이 펼쳐지는 장소다. 데인 강 유람선도 이 곳까지 들어온다.

 
탑 동상.JPG
탑 동상

 

100개가 넘은 숨은 동상이 있는 도시

빈 공터를 지나 올드 타운 안쪽으로 들어간다. 직선으로 난 골목 옆으로는 많지 않은 건물들이 이어진다. 관광객들도 몇 없어 한산하다. 흔하게 만나는 숍이나 레스토랑도 거의 없다. 몇 걸음만 떼면 그 자리가 그 자리인 곳. 급할 것 없이 천천히 배회하면 되는 올드 타운이다. 여행이 결코 어렵지 않은 곳이지만 여행 안내소가 있어서 들어가 본다. 여행 안내소에서 뜻밖의 터키 교환학생 3명을 만난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다는 이스탄불에서 온 한 학생은 특히 한국 미디어에 관심이 많다. 미디어 강국의 나라에서 사는 것은 참 자랑스럽다.

 

금쥐.JPG
금쥐 동상

 

 

올드 타운을 걷다가 몇 개의 눈에 띄는 동상을 만난다. 금쥐(혹은 마법의 쥐) 동상(Sculpture Golden Mouse, The Magical Mouse)은 아이들이 생쥐 모형을 만지고 있지 않았다면 못보고 놓쳐 버렸을 정도로 앙증맞다. 생쥐의 귀에 소원을 빌면 이뤄준다는 말이 전한다. 그것 말고도 탑(Sculpture "Tower")조각도 있다. 상당히 멋진 이 조각은 1990년, 리투아니아 조각가(Algirdas Bosas, 1943~)가 만든 작품이다. 그 외에도 우편 동상(Post Old Town)이 있다. 편지 봉투와 비둘기를 묘사한 우편물 동상이다. 또 고양이 조각도 골목 속에 숨어 있다. 그 이후에도 많은 동상을 만나게 된다. 데인 강 주변에서는 소년과 강아지, 키스 소녀, 어부 동상(Monument To Fisherman) 등. 나중에 안 일이지만 클라이페다에는 116개 이상의 조각상이 숨어 있다고 한다. 기억하지 않으면 놓치고 말 동상들이 수태 있다. 클라이페다에서는 동상 찾는 여행만 해도 하루로는 부족할 듯하다. 숨은 그림 찾듯이 동상 찾기 여행을 하면 참 재미가 있을 듯하다.

 

극장광장.JPG
극장 광장

 

 

클라이페다 드라마 극장 광장 앞의 분수대

올드 타운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이 클라이페다 드라마 극장(Klaipedos dramos teatras) 광장 앞에 있는 소녀상이다. 아름다운 소녀가 공중에 우뚝 서 있어, 저절로 다가서게 된다. 가까이 다가가 보면 분수대다. 사이먼 다흐(Simon-Dach)의 얼굴이 새겨진 받침대 위에 소녀 안나 네안데르(Anna Neander)가 서 있다. 분수대 이름은 사이먼 다흐 분수대(Simon-Dach-Brunnen)다. 분수대 뒤에는 단아한 극장 건물이 있다. 사이먼 다흐와 여인은 분명히 극장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여느 도시에서는 그 나라, 그 도시를 빛낸 인물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기념비는 꼭 있게 마련. 그렇게 따지면, 클라이페다의 사이먼 다흐나 안나 네안데르도 간과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클라이페다에는 역사적인 인물 동상이 거의 없다. 그래서 자료를 찾다보니 필자가 감명 깊게 봤던 독일 영화 “신의 이름으로 가라(2002년)”의 ost까지 연관이 된다는 것을 알아낸다. 영화 속에서 심금을 울리던 그 찬송가는 독일 시인이자 찬송가 작곡가인 게오르그 노이마르크(Georg Neumark, 1621~1681)가 만든 곡. 게오르그가 당시 영향을 받은 인물이 사이먼 다흐라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놓칠 수 없다.

 

사이먼 다흐.JPG
사이먼 다흐

 

 

프로이센 공국의 유명한 시인이자 찬송 작가, 사이먼 다흐

필자가 아는 것은 분수대에 새겨진 이름 사이먼 다흐 뿐. 여러 자료를 찾아 정리해보면, 사이먼 다흐(Simon Dach,1605~1659)는 프로이센 공국 때 유명한 시인이자 찬송 작가였다. 그는 메멜(Jūros g. 7, 현재 게스트 하우스로 사용함)의 가난한 법원 통역사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쾨니히스베르크(현재 칼리닌그라드)의 라틴학교(Wittenberg와 Magdeburg)에서 고전을 공부했다. 1626년(21세),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그해, 30년 전쟁과 전염병을 피해 단찌히(Danzig, 현재 그단스크)로 갔다가 쾨니히스베르크로 다시 돌아왔다.

 

학위를 취득한 후 한동안 개인 교사로 일하다가 1633년(28세)에 교사(Kollaboralor)로 임명된다. 1636년(31세), 대성당 학교(Domschule)의 공동 책임자가 되었다. 1639년(34세), 쾨니히스베르크의 알베르티나(Albertina) 대학(쾨니히스베르크의 전신으로 1544년, 프로이센 알버트 공작에 의해 설립된 대학. 세계에서 두 번째 개신교 아카데미)의 시 학장(Chair of Poetry)으로 임명되었다. 1640년, 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공식적인 임무 중 일부는 동료들과 대학 축하 행사, 프로그램, 토론 및 장례식 시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라틴어나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1644년(39세),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소르부이사(Sorbuisa) 희곡을 썼다.

 

다흐는 시인, 찬송작가, 음악가 등으로 구성된, 12명의 쾨니히스베르크 시 모임(Königsberg Poetic Society)의 회장이 되었다. 멤버의 일원이었던,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하인리히 앨버트(Heinrich Albert, 1604~1651)의 여름 별장(Kürbishütte)은 이 모임의 만남의 장소였다. 그들은 새로운 찬송가를 만들고 자작시를 읽었다. 이 그룹은 1638년~1650년까지 시와 노래를 엮어 8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대략 200 개의 시와 노래 중에서 다흐 작품이 125개나 되었다. 이 책 속의 노래와 찬송가, 특히 다흐의 노래는 독일 전역에서 불려졌다. 하인리히는 저작권을 보호하려고 애를 썼지만 해적판이 성행했다. 1639년, 친구 로베르틴(Roberthin,1600~1648, 시인)의 영향력으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시 교수로 임명되었다. 1656년(51세)에 대학 총장이 되었다. 2년 후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근처의 영지(Kuikeim)를 받았다. 다흐는 총장이 되기 두해 전(1654년, 49세)에 결핵에 걸렸는데 5년 후인 1659년(54세)에 죽었다. 그는 당대에 성공적인 삶을 살다 갔다.

 

분수대동상 실제모델.JPG
분수대동상 실제모델 안나 네안데르

 


분수대의 소녀상은 안나 네안데르

극장 광장 분수대의 소녀상은 안나 네안데르(Anna Neander, 1615~1689)다. 자료에 따르면 안나의 아버지는 마틴 네안데르(Martin Neander) 목사였다. 그녀는 30년 전쟁 기간인 1629년(14세)에 부모 모두를 잃었다. 그래서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삼촌과 대부 스톨젠베르그(Stolzenberg)와 함께 젊은 시절을 보냈다.

 

안나는 1636년(21세), 요하네스 포르타티우스(Juan Partatius) 목사와 결혼했다. 그들은 동프로이센의 다르케멘(Darkehmen, 현 칼리닌그라드의 오조르스크 군) 지구의 트렘펜(Trempen, 지금은 러시아 Novostrojewo)에서 목사생활을 했다. 1646년(31세), 라비아우(Labiau) 지역의 라우키츠켄(Laukischken, 현 칼리닌그라드 Saranskoje)에 있는 교회에서 남편이 사망했다. 남편 사후 그녀는 후임인 크리스토프 그루브(Christoph Grube) 목사와 결혼했다. 결혼 6년(1952년) 만에 남편이 또 사망하자 다음 계승자인 요한(Johann Melchior Beilstein) 목사와 결혼했다. 당시는 교구에서 과부를 보살펴야 하는 게 관행이었다. 그녀는 1676년(61세), 인스터부르크(Insterburg, 현재는 체르냐홉스크(Chernyakhovsk))에 있는 지방 루터 교회(도시 교회)의 목사였던 장남(Friedrich Portatius)에게로 갔다. 그곳에서 사망하고 체르냐홉스크 공원 묘지에 묻혔다.

 

타라우 안헨 소녀상.JPG
타라우 안헨 소녀상

 

 

사이먼 다흐의 찬송가 타라우의 엔헨

사이먼 다흐는 총 150편이 넘는 찬송가와 많은 시를 썼다. 찬송가와 시의 주역이었다. 다흐 본인 책은 따로 출간하지는 않았지만 타라우의 엔헨(Anke van Tharaw)은 오늘날까지도 불려지고 있는 독일의 유명한 민요 가곡이다. 사이먼 다흐의 17개의 연애 시 중 한 개가 ‘타라우의 엔헨’이다. 이 시는 1636년, 안나 네안데르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시였다.

 

다흐와 네안데르가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기록이 없다. 둘은 10살 차이가 난다. 짐작컨대 사이먼과 안나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만났을 것으로 짐작한다. 다흐는 안나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것 같다. 미국의 유명한 작가 워즈워드 롱펠로우가 번역한 시를 보면 다흐의 절절한 마음을 알 수 있다.

 

Annie of Tharaw, my true love of old,/She is my life, and my goods, and my gold.

Annie of Tharaw/Annie of Tharaw, her heart once again/To me has surrendered in joy and in pain./Annie of Tharaw, my riches, my good,/Thou, O my soul, my flesh, and my blood!

 

사이먼이 쓴 이 연애 시에 1642년, 작곡가 하인리히 알버트가 곡을 붙였다. 1778년, 요한 고트프리에드 헤데르(Johann Gottfried Herder)가 가사를 수정했다. 오늘날 가장 많이 알려진 버전은 1827년, 작곡가 프레드릭 실러(Friedrich Silcher, 1789~1860)의 곡이다. 1878년, 타라우의 엔헨의 오페라가함부르크의 도시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오페라는 리가, 브르노, 그라츠, 로테르담, 바젤에서 다시 공연되었고 1886년에는 베를린의 두개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상영되었다. 타라우의 엔헨(Anke van Tharaw)은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불려지고 있다.

 

타라우의 엔헨의 분수대

클라이페다에서는 메멜 태생인 사이먼 다흐를 기리지 않을 수 없다. 1912년, 독일 조각가 아놀드 쿤네(Arnold Künne, 1866~1942)가 만든 분수대가 극장 광장에 만들어진다. 분수대는 국가의 지원 없이 순전히 주민들의 기부금으로 만들어졌다. 조각가 아놀드 쿤네는 산드크루거 듀넨메이스트(Sandkruger Dünenmeisters, Sandkruger dune master, 스밀티네마을의 시장인 듯)의 딸인 게르다(Gerda Schiweck, 당시 14세)를 모델로 삼았다. 분수대를 개막할 때 메멜의 프리드리히 시인 팀은 유머러스한 4개의 연시를 썼다고 전한다.

 

그러다 1939년, 이 기념비는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소비에트 시절인 1945년에는 스탈린 흉상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1988년, 클라이페다 시민들은 새로운 타라우의 엔헨 기념관을 짓기로 결정한다. 리투아니아 출신의 서독 시민(Hainc Radzivil)의 지원을 받고 조각가 하랄트 하케(Harald Haacke, 1924~2004)가 동상을 복원하게 된다. 원본이 사라졌기에 게르다의 옛 사진과 현장에서 발견된 작은 회반죽 인형만으로 청동상을 만들어낸다. 1989년 11월 18일, 극장 앞의 광장에 개막됐다. 받침대의 가장 높은 지점에 비문이 있다. 어떻듯,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는 마음을 뒤흔든다.(계속)

 

Data

요나스 언덕(Jono Kalnelis):주소Turgaus street 37, 클라이페다

 

금쥐 동상(The Magical Mouse):55.708563, 21.132176, 클라이페다

 

탑 동상(Sculpture "Tower)":Jono g. 9, 클라이페다

 

극장광장의 분수대(Annie of Tharau Fountain):Kurpių g. 9, 클라이페다

 

드라마 극장(Klaipėda Drama Theatre):Teatro g. 2, 클라이페다

 

클라이페다 웹사이트

https://www.klaipeda.lt/lt/https://klaipedatravel.lt/cat/kultura/http://www.lnkc.lt/http://www.klaipedainfo.lt/

 

참고

구시가지에서 투르가스(Turgasus) 거리를 재건축한 비타우타스 슬리고스(Vytautas Sliogris)의 발 석판이 극장 광장에 있다. 그는 건축가이자 역사가였으며 도시 개발에 많은 기여를 한 전문가. 그는 발 예술가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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