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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ur de Veteran 22]예술의 숲에서 자유를 만나다

<방구석 미술관> 작가 조원재

2021-09-06 20:55

글 : 이상문  |  사진(제공) : 안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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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미술관> 1, 2편 연작이 30만 부 가까이 팔렸다. 흠모하던 미술의 숲은 불안의 도피처이자 자유의 개척지였다. 예술가의 작품과 삶을 좇다가 진정한 ‘나’를 발견했다는 청년작가 조원재는 쉼 없이 꿈틀댄다. 벅찬 감흥으로 늘 흥건한 듯하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언택트’가 일상화됐다. 더불어 ‘방구석’ 라이프가 유행이다. ‘방구석 세계여행’, ‘방구석 1열’이라는 콘텐츠가 귀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방구석 미술관>도 빼놓을 수 없다. 코로나 이전인 2018년에 출간됐고, 그 이전부터 팟캐스트가 나왔으니 꽤 선배 격. 당시 젊은 작가 조원재(36)의 시리즈 책이 서점계와 미술계의 시선을 모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날개 제목이 말하듯 ‘가볍고 편하게 시작하는 유쾌한 교양미술’ 책이기 때문이다. 1편이 드가, 마네, 모네, 세잔, 피카소 등 거장들이 망라된 프랑스 오르세미술관 투어라면, 2편은 이중섭과 김환기, 유영국, 이응노, 나혜석 등 한국 화가들의 작품과 인생 투어. 말 그대로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어 미술의 문턱이란 게 원래 있기나 했나 싶을 정도다. 

 
그렇다고 현실에 미술의 문턱이 없는 건 아니다. 조원재의 리드를 따라가다가 책 밖으로 나오면 미술은 여전히 어려울 것이다. 명화를 만날 기회가 흔하지 않은 데다 기회가 온다 해도 나서기에 멀고 귀찮을 수도 있기 때문. 우여곡절 끝에 당도하여 이윽고 작품 앞에 섰을 땐 또 어떤가. 바른(?) 애티튜드, 정확한(?) 해석에 신경 쓰느라 목에 너무 힘을 주는 수도 있다. 그러지 말아야 할 테지만 정녕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방구석에서 먼저 그와 함께 미술을 만나는 걸 권한다. 안내에 따라 작품 이면의 작가의 삶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내게도 예술가의 영혼을 이해하는 공감력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썩 빼어난 도슨트, 해설자, 길라잡이이자 스스로 예술가인 듯도 하다.  

<방구석 미술관> 후속편을 준비 중인 그를 만났다. 인터넷에 떠도는 작가 소개 글은 주로, 지나치게 자주, ‘미술을 사랑’해서 ‘미술관 앞 남자’가 된 남자. 줄여서 ‘미남’이라고 불린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직접 만나보니 진짜로 미남이자 훈남, 게다가 달변이었다.

‘제주도 1년 살기’에 도전하고 있다고 들었다. 제주는 원래 좋아했고 자주 여행하다 보니 이미 오래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꼭 가고 있었다. 아예 이사를 갈까 고민하다가 우선 1년 살아보기를 하기로 했다. 자연의 품에서 작업하니 자유롭고 유연해서 너무 좋다.

날마다 벌어지는 일은?  바뀐 건 주거공간뿐인데 일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을 한다. 가능하면 외식 안 하고 직접 해먹는다. 차를 꼭 마시고 커피를 직접 내려서 마신다. 4층 집에서 바닷가가 바로 보여 좋다. 바다를 보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날씨 너무 좋은 날엔 바다로 나가 수영을 한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자유롭고 여유로운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3편을 준비 중인가? 미술의 새로운 이면을 보여드리려고 구상하고 있다. 많이 읽혀 시리즈로 나간다고 엇비슷한 걸 계속 복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예술가의 창조 과정을 소개하는 게 책의 콘셉트이니 일관성은 유지하되 미술을 새로운 앵글로 보여드리고 싶다. 무거운 문체보다 편한 문체로 소개해드릴 것이다.

1, 2권을 보니 자료수집 작업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사실 자료수집은 되게 간단하다. 모든 게 책에서 나온다. 책 읽는 건 습관이다시피 하다. 대학 시절부터 책을 굉장히 많이 읽었다. 고등학교까지는 공교육 체계에서 배워야 하는 걸 배웠는데 대학 와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었다. 

자료수집과 집필 작업의 비중을 나눈다면? 책을 읽고 구상하고 연구하고 수집하는 시간이 당연히 더 많다. 2대 1 또는 3대 1로 봐도 된다. 

유럽 미술관 여행이 참 부러웠다. <방구석 미술관>을 탄생시킨 토대이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절대 없어선 안 될 순간, 나를 완전히 바꿔놓은 시간이었다. 2011년에 휴학을 하고 카메라도 사고 그림도 배웠다. 여행을 떠나려고 준비를 했다. 처음엔 일본을 1주일 여행 했다. 당시엔 엄청나게 생각이 많았고 터져 나오던 때였다. 포텐이 터졌다고나 할까.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좋아하는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여행 중 글을 많이 썼다. 주저앉아 쓰고 벽에도 생각나는 모든 걸 썼다. 여행에서 돌아와 서울역에서 집으로 가는 전철을 탔는데, 캐리어를 끌고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여행자들의 상기된 표정을 보고 곧바로 다시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유럽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

이미 알려진 바로는, 그의 유럽 미술 여행은 독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 미술관 투어를 하고 왔다는 내용이 전부다. 하지만 그 여행을 실천에 옮기기까지 과정은 단순하지 않았다. 당장 돈이 없으니 돈을 구해야 했다. 벌어서 여행 가기로 했는데, 한국에서 버는 것보다 현지에서 버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고. 유럽 내 다양한 국가의 워킹홀리데이를 샅샅이 다 찾아보았다. 당시 무난히 갈 수 있는 곳은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스웨덴 정도였다. 딱 맞는 조건은 독일이었다. 언어소통이 쉽고 숙식제공이 가능하고 비교적 급여가 많은 곳을 골라 이메일을 전부 보냈다. 운 좋게 독일 한인식당에서 답신이 왔고 일자리를 구했다. 

“가장 돈 많이 주는 식당에서 4개월 일했어요. 그리고 곧바로 유럽 미술관 여행을 시작했죠. 먼저 파리로 갔습니다. 루브르, 오랑주리, 오르세, 로댕, 퐁비두를 다 둘러봤어요. 뮌헨,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로마, 피렌체 등 미술의 중심지를 방문했죠. 동유럽 중엔 체코를 들렀어요. 4개월간 미술관만 쏘다녔어요. 정말 강렬한 체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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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미술관>과 <방구석 미술관2>.1권은 안방에서 감상하는 오르셰 미술관 에디션이다.

 

원래 미술에 관심이 많았나? 어릴 때는 꼭 미술이라기보다 뭔가를 만들어내고 창조하는 걸 좋아했다. 중학교 때는 시나 에세이를 끄적이는 걸 좋아했다. 쓰는 걸 좋아했다는 건 생각하길 좋아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학교 백일장 때 시를 써서 상을 받았는데 부상으로 노트를 받았다. 거기에다 뭘 할지 고민하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학에 와서도 비밀 블로그나 비밀 카페를 만들었다. 글쓰기의 초석은 일찍부터 있었던 것 같다. 그림을 좋아했고 인연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 내 유화를 보고 미술공부를 권했는데 원래 하고 싶었던 경영학이 좋아 전공을 바꾸진 않았다.  

미술관 투어 때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다. 가장 강력했던 경험은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레오폴트 미술관에 갔을 때였다. 스물일곱의 난 에곤 실레를 전혀 몰랐고, 클림트의 작품을 보기 위해 갔을 뿐이다. 가로 세로 1.8m의 <앉아 있는 남성 누드>에 말을 잃고 말았다. 그게 자화상이었다. 남성의 인체를 실제와 동일시되는 크기로 보여준 의도는 ‘너란 존재를 그대로 느끼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경이로운 그 충격을 언어로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그 순간 멈추고 굳었을 뿐이다. 문자언어로 표현이 안 된다. 제주 해안도로를 달리면 한라산과 그 주변의 수많은 오름이 보인다. 그저 탄성밖에 안 나오는 그 느낌과 비슷하다.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통해 내 자화상을 보았다는 의미인가? 맞다. 내가 왜 그 작품 앞에서 그리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을까 생각해보니, 당시의 나를 거울로 보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자신만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가장 자기를 모르는 게 자기 자신이다. 그 작품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직관적으로 깨닫게 됐다. 굳이 언어로 표현하자면 ‘불안’이었다. 청춘의 본질인 불안을 깨닫게 됐다. 청춘은 파란색, 푸른색, 활기, 점프라는 이미지로 그려지지만, 사실은 다들 불안을 갖고 있을 시기다.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게 될지 불안하니까. 미지의 영역이 앞에 놓여 있으니까. 내 길 앞에는 안개만 가득해 어떻게 살게 될지 모르는 불안이 있었다. 불안을 해소하고 나를 찾기 위해 불안을 안고 유럽으로 간 것 아닐까 생각했다. 

에곤 실레의 불안이 유난히 크게 보인 건 왜일까? 그 그림이 20대에 그려졌다. 결국 고작 스물여덟 살에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기도 했다. 스페인 독감으로 요절하기까지 20대의 실존을 그대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20대라고 누구나 다 그렇게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할 순 없다. 자기만의 조형언어로 내면을 적나라하게 잘 표현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실레의 불안이 100년이 지난 뒤 나의 불안과 만난 것이다. 희열이자 충격이었다. 예술가의 정신이 캔버스에 뱉어낸 똥을 만난 것이다. 지극히 순수하고 극적인 순간 아닌가. 그 순간을 미학적 개념으로 말한다면, 스탕달 신드롬이랑 비슷하다. 실레가 아니어도 좋은 작품을 만나면 언제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스탕달 신드롬이란, 아름다운 그림 같은 뛰어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서 심장이 빨리 뛰고, 의식 혼란, 어지러움증, 환각 등의 증상을 경험하는 현상이다. 지나친 황홀경에 빠지는 경우를 말한다. 대학 휴학 중 20대 초반에 맞닥뜨린 에곤 실레는 초유의 만남이자 너무 강렬한 만남이었다. 그가 단순한 해설사를 넘어 공감하고 창조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는 증거가 얼핏 보이기 시작한다. 

미술 여행이 그저 낭만적인 미적 탐구가 아니었나 보다. 생각보다 진지하고 치열하다. 내게 미술은 낭만적인 것도 아니고 로맨틱한 것도 아니다. 사물을 만나 그것과 대화를 나누는 삶의 체험이다. 그 세계는 무한대여서 우주와도 같다. 흔히들 말하는 ‘사람 다 똑같다, 거기서 거기다’라는 말에 점점 동의하지 않게 된다. 사람은 저마다 다 다르다. 생리와 욕구만 같을 뿐 다를 수밖에 없다. 예술가들은 더 그렇다. 그들을 만나는 일은 그래서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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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손에 꼽고 싶은 작가와 작품은?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인 체험은 에곤 실레였고, 다른 장르로는 추상회화의 거장 김환기를 정말 좋아한다. 달항아리로 유명했던 그분은 후기에 점화를 그렸다. 점화의 미학은 너무 감동적이다. 환기의 점화는 그 감흥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지경이다. 무엇보다 그분의 내면의 순수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어릴 때부터의 순수성을 한 치도 버리지 않고 유지한 예술가였다. 버리지 않고 오히려 확대하고 키워낸 것 같다. 그 순수의 절정이 점화다. 한 가지 더 들자면, 가장 근래에 경험한 고야의 작품이다. 2019년 코로나 터지기 전에 다시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6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미술관을 쏘다녔다. 체력이 고갈돼 주저앉을 정도였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프라도 미술관에서 고야의 작품에 충격을 받았다. <블랙 페인팅 연작>이라는 작품이다. 고야가 죽기 전에 마드리드 근교 조그만 집에 칩거한 시기가 있었다. 귀가 어두워진 말년에 그린 그 집의 벽화가 죽고 나서 발견됐다. 벽면을 그대로 뜯어와 미술관 방 하나에 360도 원형으로 전시해놓았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찌릿한 전기에 감전된 느낌이었다. 관람객이 많아 찰나의 순간에 갈등이 일었는데 결국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30분 가까이 울었다. 슬퍼서가 아니라 그냥 왠지 모를 울림이 자꾸 눈물을 흘리게 했다. 마냥 더 울고 싶었는데 문 닫을 시간이라 나왔고, 바깥 벤치에 앉아서도 동요된 감정이 한동안 안정되지 않았다. 직접 가서 보길 강력히 추천한다.

작품을 마주할 때 순간순간의 느낌을 기록하나? 기록하진 않는다. 감흥을 문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데다, 설령 표현한다고 해도 그게 오히려 감흥을 해치기 쉽다. 좋은 방법이 아니라서 오히려 경계한다. 이성적 사고를 돌리고 있다는 의미이니 제대로 집중하는 감상은 아닐 것이다. 그냥 느낌을 기억해둔다면 언제든지 끄집어내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미리 문자화시키면 오히려 그 순간의 느낌을 억제한다.

평론 글은 전혀 읽지 않을 것 같다. 거의 안 읽는다. 평론 글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고, 그냥 평론은 평론가의 생각을 말하는 거라고만 생각한다. 

작품과 별도로 예술가의 삶 자체가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삶의 과정이 다르고 느낌도 다르고 저마다 특별하다. 우열을 가릴 수 없지만 그렇게 물어본다 해도 김환기를 꼽고 싶다. 누구나 나만의 것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걸 찾아내기가 워낙 힘들다. 못 하거나 안 하거나 포기한다. 좋은 예술가는 그걸 미친 듯이 추구하고 평생 찾아내려 하는데, 예술가로서 환기의 삶이 그랬다. 대지주인 아버지 땅을 물려받아 편하게 살 수 있는데도 소작인들에게 땅을 다 내주고 속세의 이득보다 자기 내면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투신했다. 그분은 아마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했으면 죽었을지 모른다. 세계관이 다른 사람으로 그 순수한 열정이 존경스럽다. 환기뿐 아니라 모든 진정한 예술가는 그렇게 한다. 책에 실린 분들 모두 기억에 남고 존경스럽지만 개인적으로 그분의 삶과 인성, 열정, 진정성 모두가 끌린다. 미술가만 그렇지도 않다. 스티브 잡스도 자기만의 것을 찾아낸 사람이잖나. 이를테면, 예술적 사업가였다.

그래서일까. 2권인 한국 화가 편에서 몰입도가 더 진한 듯하다. 그것도 애국심일까?(웃음). 어쨌거나 힘들고 척박한 20세기 초에 이 땅에 태어나 정말 진정한 예술가로, 순수한 인간으로 살아낸 분들의 진정성이 존경스러웠다. 순수한 열정이 뚝뚝 묻어난다. 나만의 순수한 삶과 떳떳한 표현. 그 정신이 한국 작가들에게서 유난히 더 뜨겁게 느껴졌다. 한민족이 갖고 있는 독특한 DNA 탓일까? 장인정신이라 해야 할까? 한국적인 것에는 뭔가 다른 힘이 있다.  

회화 말고 다른 장르로 콘텐츠를 확대할 계획인가? 당연히 그렇다. 미술을 여러 이면과 다양한 앵글에서 보여주는 게 내 역할이다. 

예술가의 삶을 천착하고 설명해왔다. 조원재는 커뮤니케이터인가 예술가인가? 난 이미 예술가의 삶을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이전엔 다른 삶을 살았지만 미술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 가지고 이 일을 시작하고 참맛을 알고부터는, 다른 사람들도 알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매일 넘쳐난다. 그림이나 조각을 만드는 예술적 행위가 아니지만, 내가 만드는 팟캐스트나 저술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오디오 파일과 책이라는 형태가 다른 결과물일 뿐, 예술행위이고 작품이라고 생각하며 작업한다. 20대 초중반부터 미술과 가까이하면서 예술가의 전기를 읽다 보면 자꾸 튀어나오는 것이 있었다. 발견의 기쁨이 이어졌다. 10년이 지나고 그 발견을 실천에 옮겨 결실을 맺는 것이 신기하고 만족스럽다. 시간을 관통해 작가와 작품을 접하며 소울 메이트를 만난다. 얼마나 신기한 경험인가. 이것도 예술적 행위이니 예술가 아니겠나.

모든 게 변한다. 미술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누구도 정확히는 예측 못하겠지만, 앞에 놓인 미술은 더 자유로운 방향으로 갈 것은 분명하다. 19세기 초반에 낭만주의가 시작됐는데, 그 핵심은 자유다.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 없는 시대가 열렸고, 시대정신은 점점 그렇게 갈 것 같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철학도 문학도 그렇게 가지 않을까? 그걸 가장 먼저 증명하는 게 대중문화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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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조원재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뒤 졸업 후엔 IT기업에서 일했다. 미술과 음악, 글쓰기 등 문예에 관심이 많았지만 어릴 적부터 호기심을 가졌던 경영학을 고수했고 회사에선 영업직을 맡았다. 경영학을 실천의 학문으로 여긴 터라 즐겁게 현장 생활을 했다고 말한다. 창업은 해보진 못했지만 영업직을 하면서 기획과 마케팅, 팀워크 등 기본을 탄탄하게 배운 것도 좋았다. 하지만 모종의 사건 이후 2년 만에 직장생활을 접게 된다. ‘조직이 내 인생을 책임져주는 게 아니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라는데, 계기가 된 사건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한 번 사는 인생, 뭐가 되든 스스로 책임지는 인생을 살자’ 마음먹었다.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하기로 했는데, 그걸 찾기란 애초부터 어렵지 않았다. 미술이었다. 대학 시절 3년을 휴학하며 투자한 미술 여행의 경험은 가장 좋은 추억이자 제일 큰 자산이었다.

2016년 9월에 미술 팟캐스트부터 시작했고 이듬해 1월엔 정식으로 사표를 냈다는 그. 당시만 해도 글 쓰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전혀 없었다. 그냥 말로 표현하고 싶어서 팟캐스트를 열었는데 출판사로부터 예상치 않은 제의를 받은 것이다. 그때서야 문득 돌아보니 어릴 때 글을 쓰는 걸 좋아했던 기억이 떠오르더라고 했다. 동시에 대학 때 잠깐 생각했던 버킷리스트도 새삼 떠올랐다. ‘내 이름으로 책을 내자’는 목표였다는 것. 돌이켜보면, 죄다 미술을 통해 얻은 것들이다. 20대의 미술관 투어를 통해 ‘불안’의 민낯을 보았고, 황홀 앞에 눈물 흘릴 ‘자유’를 얻었다. 손을 거쳐간 거장 예술가들에게서 순수와 열정을 배우고 공감했다. 그 감흥을 올곧이 전달하는 재능 덕에 수십만의 든든한 지원군(애독자와 애청자)도 얻었다. 제주에 살을 섞고 지내는 요즘, 그는 어쩌면 ‘이보다 좋을 수 없다’를 매일 외치고 있을지 모른다.   

빨리 눈에 띄고 빨리 성장했다. 감회는? 퇴사하고 돈이 없었다. 퇴직금 2년 치 까먹으며 생활했다. 통장에 돈이 말라가니 분기에 한 번씩 생존의 두려움과 맞닥뜨렸다. 그래도 내가 원했던 일을 주체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고생했던 그때 그 경험이 너무 소중하다. 지금은 숨 쉬고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신기하고 소중하다. 1권을 집필한 10개월 동안, 정말 미친 듯이 글을 썼다. 밤낮도 없었고 제대로 된 끼니도 없었다. 폐인 같은 생활을 했지만 글을 쓸 때의 쾌감이 너무나 컸다. 책 본문을 다 쓰면 서문을 쓴다. 새벽 3시쯤 글을 다 쓰고 눈물을 쏟았다. 태양이 내리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지평선이 360도로 보이는 구간이 있었다. 환희와 희열, 감사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꼴값 떤다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저절로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나라는 먼지 같은 존재가 우주에 다가가 호흡하는 느낌, 세상과 만나는 느낌이랄까… 지금 내 일을 하면서도 그러고 있다. 이런 경험을 하게 해준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이런 경험을 하게 만든 세상에도 감사한다. 난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에 눈물 흘리며 감사한 적이 수없이 많다.

 
제주살이 ‘한 달 초짜’는 이날, 본가에 다녀가기 위해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서울 서교동 좁은 골목 카페를 찾아와준 수고에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초면인 그와 인사를 나누고, 그를 통해 미술의 숲으로 들어가, 순수와 열정의 화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자유와 우리의 자유에 대해 교감한 시간 100분. 쉬지 않고 보낸 그 시간이 종을 칠 즈음에야 그가 끌고 온 캐리어가 눈에 보였다. 

‘오다가 또 공항으로 향하는 이들을 보았을 것 아닌가…. 돌아오는 길에 또 떠날 꿈을 꾸었을 저이는 얼마나 마음 설렜을까….’ 

부러우면 지는 건데, 떠오른 그림이 사정없이 부럽더라는. 

조원재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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