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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카이 성의 역사 이야기

2021-08-26 14:40

글·사진 : 이신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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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카이에는 역사적인 지역 세 군데가 있다. 게디미나스 대공이 수도로 정한 곳을 ‘올드 트라카이’라고 한다. 이후 게디미나스 대공의 아들인 케스투티스가 세운 곳은 ‘트라카이 페닌슐라 성’이다. 마지막이 ‘트라카이 섬 성’이다. 굳이 트라카이 성이라고 하지 않고 ‘섬 성’이라고 칭한 이유다. 그런데 대부분 관광객은 갈베 호수에 있는 ‘트라카이 섬 성’만 보고 오고 만다. 그래서 트라카이에 대한 시대적 배경이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마을과 성을 잇는 목조교.JPG
마을과 성을 잇는 목조교.

다른 국적 사람들에 의해 건설된 트라카이 마을

유람선 여행을 마치고 빌뉴스로 돌아오려고 마을을 걷는다. 영업장소 아닌 민가는 소박한 목조 가옥들이다. 이상하리만큼 초루하다. 화려한 빌뉴스와의 비교할 수도 없고 여느 시골 마을보다 못 한 모습이다.

 

그 이유를 알려면 중세 리투아니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세기 리투아니아는 다양한 정체성이 어우러진 국가였다. 야기에우워 왕조가 시작되면서 리투아니아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리투아니아 민중 사이에서는 발트 토속 신앙과 가톨릭이 이중 신앙 형태로 공존했다. 또 정교회를 믿는 루테니아인들도 어느 정도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유대인들도 별도 자치권을 부여 받았다. 타타르인들의 무슬림들에게도 상당히 관대했다. 유능한 지도자 ‘비타우타스’의 통치방식이었다. 모든 이교도들을 수용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를 존경했고 타타르인들은 ‘비무슬림 국가에서 무슬림들을 보호해주는 정의로운 통치자’로 대를 이어 기념했다. 트라카이는 이교도들의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 현재도 그 맥락을 크게 변화하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섬성.JPG
유람선에서 바라본 섬성.

트라카이 성의 흔적은 세 군데

마을을 스치듯 보다가 성탑 하나를 보게 된다. 이미 트라카이 섬 성에 매료되어 마을 속의 낡은 성탑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원고를 쓰면서 자료를 찾아보니 마을 안쪽에 남은 성탑은 비타우타스의 아버지인 케스투티스(Kęstutis, 1297~1382) 대공이 세운 트라카이 페닌슐라 성(Trakai Peninsula Castle) 터라는 것이다. 여기서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트라카이는 1321년~1323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다. 게디미나스(1316~1341) 대공은 케르나베(Kernavė, 빌뉴스에서 북서쪽으로 35km 지점)에서 트라카이로 천도했다. 게디미나스는 3년 만에 트라카이에서 빌뉴스로 빠르게 수도를 옮겼다. 그렇다면 ‘트라카이 페닌슐라 성터’가 게디미나스가 공국의 수도로 삼은 곳일까? 아니었다. 게디미나스가 수도로 삼은 곳은 올드 트라카이(Old Trakai Lord's Revelation, Senieji Trakai Castle, 2008에 문화재로 지정됨)였다.

 

올드 트라카이

올드 트라카이는 트라카이에서 동쪽으로 3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게디미나스가 빌뉴스로 천도하자 올드 트라카이에는 게디미나스의 아들 케스투티스 대공이 살았다. 당시 케스투티스 대공은 형 알기르다스(Algirdas, 1296~1377)와 공동 통치자였다. 형 알기르다스는 동쪽을, 케스투티스는 서쪽을 맡아 주로 튜턴 기사단을 방어했다. 그는 올드 트라카이에서 팔랑가(Palanga, 클라이페다 북쪽마을) 출신의 비루테(Birutė, 1317~1382)를 납치해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그 둘이 결혼한 해는 정확하지 않으나 장남 비타우타스(Vytautas, 1350~1430)가 1350년에 태어났으니 1349년이거나 그 전일 것으로 추정한다. 케스투티스는 약 52세였고 비루테는 32세였다. 그들은 20살 차이로 둘 사이 3남 3녀를 두었다. 올드 트라카이는 1391년 튜턴 기사단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뉴 트라카이 성이라 불리는 페닌슐라 성이 만들어졌기에 재건되지 않았다. 이후 1405년, 비타우타스가 베네딕트 수도사들에게 이 부지를 주었다. 15세기에 지어진 수도원 건물이 남았고 이 수도원에 게디미나스 성의 유적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조각상이 있다.

마을과 페닌슐라 성자리.JPG
마을과 페닌슐라 성자리.

트라카이 페닌슐라 성

트라카이 페닌슐라 성은 트라카이 마을 안쪽에 있다. 케스투티스는 비타우타스가 태어나던 해(1350년)에 페닌슐라 성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 리투아니아는 독일 튜턴 기사단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튜턴 기사단과 리투아니아는 100여 년 동안 싸움을 벌였다. 케스투티스는 튜턴 기사단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다. 갈베 호수와 루카(Luka) 호수 사이 가장 큰 섬 위에 성을 건축했다. 10m 높이의 벽으로 연결된 7개의 탑을 만들어 그중 큰 세 개는 가장 취약한 남서부 측면을 보호했다. 1377년, 성이 완공되자 거주지와 보물 창고를 옮겼다. 이곳을 뉴 트라카이 성이라고 불렀다.

 

이 성은 1422년, 멜노(Melno, 또는 Lake Melno) 조약(튜턴 기사단과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평화 동맹) 이후 방어 구조로서의 중요성을 잃었다. 16세기에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러시아-폴란드 전쟁(1654~1667) 동안 파괴돼 재건되지 않았다. 1770년에 도미니칸 수도원과 교회가 지어졌다. 현재는 성벽의 일부와 탑만이 보존되어 있다. 2005년, 도미니칸 수도원에서 전례 미술 작품전(Liturgical Art Works Exhibition)이 열렸다.

트라카이 마을.JPG

 

트라카이 마을 (2).JPG
트라카이 마을.

케스투티스 가족 트라카이 섬 성으로 이사

현재 트라카이 섬 성은 15세기의 모습이다. 최초의 성 건립 연도를 14세기 후반으로 추정한다. 케스투티스 대공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케스투티스가 페닌슐라 성에서 현재의 트라카이 섬 성으로 옮긴 이면에는 아내 비루테에 대한 사랑의 힘이 있었다. 비루테는 현재 크로니안 석호가 있는 ‘팔랑가’ 태생이다. 그녀가 물가에서 살았기에 물 가까이에 살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트라카이 섬 성의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시 상황과 역사를 알아야 한다. 케스투티스 형 알기르다스가 죽자 1377년 형의 아들 요가일라(Jogaila)가 왕위를 계승한다. 1380년 요가일라는 케스투티스 지역이었던 사모기티아 지방의 지배권을 튜턴 기사단에게 인정하는 비밀조약을 했다. 이를 안 케스투티스는 1381년(84세) 조카 요가일라를 투옥하고 본인이 대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요가일라는 탈출해 반격했고 그때 케스투티스와 아들 비타우타스가 체포되어 크베라 성(Kreva Castle, 현재 벨라루시)에 감금되었다. 일주일 후 케스투티스는 죽은 채 발견되었다. 85세의 그가 자연사였는지 살해당했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암살이라는 자료가 많다. 아들 비타우타스는 탈출했다. 한편 비루테는 남편이 죽자 브레스트(Brest, 현 벨로루시)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녀는 1382년(65세) 가을에 익사했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고향 팔랑가의 언덕 아래에 묻혔다고 전해온다. 그녀는 사후에 여신 또는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케스투티스가 암살된 이후에도 요가일라 대공과 비타우타스는 리투아니아 대공의 자리를 놓고 권력 투쟁을 벌였다. 당시 트라카이 섬 성은 요가일라와 비타우타스가 양측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요가일라와 비타우타스의 화해

그러다 요가일라와 비타우타스가 화해(1384년, 34세)하게 된다. 요가일라는 1386년(27세) 2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 왕국의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해 브와디스와프 2세 왕이 된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같이 지배하는 ‘야기에우워(Jagiellonowie) 왕조’의 시작이다. 튜턴 기사단을 방어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폴란드와 동맹을 맺은 것이다. 이에 튜턴 기사단은 폴란드의 왕관을 위해 거짓으로 개종했다고 주장하면서 계속 공격했다. 이에 1392년, 브와디스와프 2세(40세)는 사촌 형인 비타우타스(42세)에게 리투아니아 총독 자리를 제안하자 받아들였다. 이 둘은 힘을 합쳐 튜턴 기사단을 완전히 물리쳤다. 특히 비타우타스(60세)는 1410년, 그룬발드(Grunwald) 전투(영어로는 타넨베르크(Tannenberg) 전투, 리투아니아어로 잘기리스(Žalgiris)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전투를 이끈 비타우타스는 트라카이 섬 성에서 7일 동안 화려한 연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그룬발드 전투의 승전의 대가로 브와디스와프 2세는 1413년 비타우타스를 정식으로 리투아니아의 대공으로 인정했다.

 

트라카이 섬 성, 비타우타스에 의해 2·3차 재건

트라카이 섬 성의 2단계 건설은 요가일라와 비타우타스가 화해(1384년, 34세)하면서 공사가 시작된다. 본격적인 공사는 그룬발드 전투 4년 전(아마도 1406년)부터 시작되었다. 튜턴 기사단과의 휴전 기간 동안 기사단의 석공(Radike)이 감독했다. 이때는 붉은 고딕 벽돌이 사용되었다. 또 유리 타일로 만든 지붕, 구운 벽돌,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사용되었다. 2단계 공사 이후,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을 포함한 고딕 건축 양식의 성이 되었다. 3단계 건설은 15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공사는 1409년(59세)까지 계속되었다. 총 15년 간 성을 복원했다. 트라카이 섬 성이 확장되었을 때 갈베 호의 수면 높이는 현재의 높이보다 몇 미터 정도 높은 편이었다. 비타우타스 대공은 이 성에서 살다 80세에 죽었다.

 

15세기 모습으로 복원돼

17세기에 일어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모스크바 대공국 간의 전쟁으로 인해 트라카이 섬 성은 크게 파괴되었다. 여러 차례 복원 계획이 진행되었으나 본격 재건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였다. 1946년, 종전과 함께 대규모 재건 계획이 시작되었고 1951년부터 1952년까지 공사가 크게 진행되었다. 1961년에 재건 공사의 대부분이 마무리 되었다. 트라카이 섬 성은 비타우타스 대공시절인 15세기의 건축 양식으로 복원되었다. 1962년, 트라카이 역사 박물관(Trakai History Museum)이 되었다. 박람회, 전시회, 콘서트, 축제 및 축하 행사가 펼쳐진다. 매년 수천 명의 방문객이 성을 방문해 관광수입을 높여주고 있다. 중세기에 태어난 비타우타스 대공은 지금까지 성에 살고 있는 것이다.

 

시인 마이로니스의 ‘트라카이’

리투아니아 시인 마이로니스(Maironis, 1862~1932, 카우나스 편에서 소개)는 1892년 ‘트라카이’라는 제목의 시를 출판했다.

곰팡이와 이끼로 자란/트라카이는 명예로운 성입니다!/고위 통치자들은 무덤에서 잠들어 있고/여전히 서 있습니다./(중략)

성! 당신은 수세기를 크게 보냈습니다!/그리고 당신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거인을 주셨습니다!/당신은 비타우타스의 위대한 힘을 보았습니다.(중략)

모두가 버려둔 고요한 벽/경비도, 무기도, 사람도 없는! 로드 에이지/(중략)

내 마음은 아파서 울부 짖습니다./눈물의 눈물이 그녀의 뺨을 씻고/푸른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그리고 헛된 정신을 진정시키고 싶었는지/어두운 밤에만 주위를 보았습니다.

성모 탄생 정교회의 성모.JPG
성모 탄생 정교회의 성모.

트라카이 성모 탄생 정교회

트카이 성 여행을 마치고 버스 터미널로 오는 길목에서 작은 교회를 만난다. 마이로니스(Maironis)와 비타우타스 거리(Vytautas St)의 모퉁이에 위치한 ‘성모 탄생의 트라카이 정교회(Trakai Orthodox Church of the Birth of the Holy Marry)’. 마을 중심에 서 있는 이 정교회는 낡고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하다. 자료에 따르면 이 정교회는 폴란드-리투아니아 11월 봉기(1830년 11월 29일~1831년 10월 21일)의 패배를 기념해 지어졌다. 

 

성모 탄생 정교회.JPG
성모 탄생 정교회.

 

 

성모 탄생 정교회 내부.JPG
성모 탄생 정교회 내부.

1861년,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황후인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Maria Aleksandrovna, 1824~1880)의 기부금(6,000루블)과 철도를 건설한 아델선(Adelson)의 5만 개의 벽돌로 건설되었다. 1862년 주립 부동산 엔지니어인 알렉스 폴로조프(Alex Polozov)가 건설 감독이 되어 1863년에 봉헌했다. 이 교회는 세계 1차 대전 중에 독일군이 마을 내 러시아 진영에 총격을 가해 교회 탑과 지붕이 파괴되었다. 칙칙한 정교회를 끝으로 트라카이 여행은 끝을 낸다.(계속)

 

Data

트라카이 페닌슐라 언덕: 주소 Kęstučio g. 2, 트라카이

도미니칸 수도원(Domininkonų vienuolynas): 주소 Unnamed Road, 트라카이

올드 트라카이(Senieji 트라카이): 주소 Pilies gatve 10, Senieji 트라카이/ 전화 +370528 55907/ 웹사이트 http://www.senujutrakuvienuolynas.org/vienuolyno-istorija.html

트라카이 역사 박물관: 주소 Kęstučio g.4 트라카이/ 전화 +370528 55297/ 개관시간(2월~4월:10:00-18:00, 5월-9월:10:00-19:00, 11월-2월:9:00-17:00/ 웹사이트 http://www.senieji트라카이.lt/news/https://트라카이muziejus.lt/

성모 탄생의 트라카이 정교회: 주소 Vytauto g. 34, 트라카이

트라카이 웹사이트: https://www.트라카이.lt/index.php?10598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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