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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화가, 시인, 타라스 셰브첸코 동상

2021-06-08 09:56

글·사진 : 이신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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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뉴스 홀 마켓 건너편에 있는 작은 공원. 관광객들도 현지민들도 무관심한, 한적한 곳에서 라즈디누 펠레다 자매의 동상을 만났고 또 한 명의 저명한 예술가 타라스 셰브첸코의 화강암 동상을 조우한다. 그냥 한 유명인의 기념비라며 무심하게 지나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삶이 파란만장하다. 동상은 타라스 셰브첸코의 젊은 모습이다. 빌뉴스와 타라스 셰브첸코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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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뉴스 타라스 동상

 

타라스 셰브첸코의 빌뉴스의 젊은 동상

소공원의 라즈디누 펠레다 자매의 동상을 기준하여 새벽 문 쪽으로 걸으면 타라스 셰브첸코(Taras Shevchenko(후에 Kobzar), 1814~1861)의 화강암 동상이 있다. 201193일 우크라이나 조각가인 비탈리 안드리안노프(Vitalii Andriianov)가 만든 작품이다. 그런데 셰브첸코의 사진 이미지를 이미 본 사람일지라도 이 동상이 라고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긴 코트를 입고 망토를 바람결에 휘날리면서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받치며 걷는 모습의 형상의 동상. 문학적인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스타일이다. 금시초문이다. 농노 태생의 그가 빌뉴스에서 대학생활을 했을까? 자료를 찾아보니 이 동상은 당시 빌뉴스 대학생을 표현한 것이란다. 책을 들고 바람 속으로 걸어가는 청년들을 상징한 것이다. 자료를 더 찾아본다. 타라스 셰브첸코는 1828년 가을부터 1831년 초까지 거의 2년 반 동안 그의 주인 폴 엥겔하르트(Paul Engelhardt, 1798~1849)와 함께 빌뉴스에 머물렀단다. 그들의 빌뉴스 여행의 세부 사항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829~1830년에 거주(필레스, Piles(Castle) 거리 10번지)했던 집에 명판이 걸려 있단다.

 

타라스가 빌뉴스에서 대학생이 된 것을 알아내기 위해 그의 인생을 쫒기 시작한다. ‘그냥 동상이 있다라고 쓰면 그만일 텐데 그의 삶을 알아낼수록 손을 놓을 수 없다. 결국 그가 쓴 유언이라는 시를 읽고 나서는 울음을 섞는다. 여행이란, 알면 알아서 더 알고 싶은 게 많아지고 모르면 그 또한 자꾸만 알고 싶어진다. 결국 원고는 자꾸만 지체된다.

 

조실부모한 가엾은 농노 셰브첸코

타라스 셰브첸코는 우크라이나에서는 국민 시인이자 화가, 저명한 예술가로 손꼽힌다. 한국 서점에는 오래전 타라스 셰브첸코에 관련된 책들이 제법 번안되어 있다. ‘아 우크라이나여! 드네프르강이여!(2005)’라는 제목으로 셰브첸코의 시 77편이 번역(김석원)되어 소개되어 있다. 그렇지만 과연 그의 시집이나 그림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필자처럼 러시아 푸쉬킨은 알아도 이름조차 낯선 이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필자는 빌뉴스 말고도 우크라이나 여행을 했기에 타라스 셰브첸코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알아본 것은 여행 후에 원고를 쓰면서다. 그런데 그의 삶을 들여다보니 지나치게 드라마틱하고 파란만장하다. 탁월한 그림 실력과 눈물을 머금게 하는 시는 자꾸만 그를 알고 싶어지게 한다.

공원담장의 낙서벽.jpg
공원담장의 낙서벽

 

타라스 셰브첸코는 러시아 제국의 모린치(Moryntsi, 현재는 우크라이나 체르카시 주의 즈브니호로드카(Zvenyhorodka))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노 집안의 5남매 중 3번째였다. 타라스 2살 때 아버지는 모린치에서 선조의 고향인 키리비브카(Kyrylivka, 현재는 Shevchenkove) 마을로 이사한다. 가족 전설에 따르면 타라스의 조상은 코자크(Cossacks)였다(그의 시에 코자크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다). 이사 후 동생 두 명이 더 태어났다. 타라스를 돌봐준 큰 누나가 시집을 가버리던 그해(1823), 얼마 되지 않아 9살 때 엄마가 죽는다. 엄마가 죽자 아버지는 애 셋 달린 모린치의 여자와 재혼했는데 의붓 엄마는 타라스를 특히나 잔인하게 대했다. 11(1825)일 때 아버지마저 죽었다. 의붓 엄마는 바로 고향으로 떠났고 홀로 남겨졌다. 12살 때부터 그는 말과 군인의 그림을 그렸다.

 

14살의 그는 지주인 폴 엥겔하르트를 만나기 전까지 갖은 일(선착장, 양떼몰이, 과일장사 등)들을 해내야 했다. 폴 엥겔하르트는 당시 조상대대로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부유한 지주였다. 그를 노비로 들인 지주는 그의 그림 재주를 알고 있었다. 그를 가문의 농노 화가로 써도 되겠지만 그의 재주를 인정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허드렛일을 시켰다. 요리와 카자조크(kazachok, 16세기 코자크에서 시작된 전통적인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민속 무용) 마스터 역할을 하게 했다. 그는 여가 시간에만 그림을 그렸다.

 

주인 소피아의 배려로 빌뉴스 대학에서 공부

그러다 1829126(15) 집안에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이후 주인의 신뢰를 얻게 되었다. 아니 주인이 아니라 여주인 소피아(Paul Engelhardt Sofia)가 타라스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이 자리를 뜨는 날에는 서재에서 책을 읽도록 해주었다. 소년이 폴란드 언어를 이해 못하는 문장이 있으면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타라스가 읽은 첫 작품은 아담 미키에비치의 작품이었다. 또한 프랑스 여선생에게도 수업을 받게 했다. 소피아는 타라스 그림 능력을 인정했다. 타라스가 빌뉴스 대학을 가게 된 데에는 소피아가 있었다. 타라스는 대학에 들어갈 자격이 되지 않았지만 소피아가 힘을 썼다. 타라스는 빌뉴스 대학의 유명한 초상화가인 요나스 루스테르마스(Jonas Rustemas)에게 크로키를 배웠다. 어린 타라스가 소피아 엥겔 하르트를 숭배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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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의 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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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스 셰우첸코

 

타라스는 주인과 함께 방을 얻어 빌뉴스 대학에서 미술 교육을 받는다. 학교에서 친구(Franek Gusikovskiy)를 사겼고 친구의 누이 자드지아(Jadzia)와도 가깝게 된다. 그는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첫 사랑이다. 둘은 분명히 진지한 관계였지만 결국 그 여인에게 배신당한다. 1831(17) 초 주인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떠난 후에 사건이 일어난다. 타라스는 농노를 탈출해 자유인으로 살려고 문서를 준비하고 숨어 있었다. 그러나 연인 자드지아는 타라스가 폴란드 봉기 혁명(1830~1831)에 학생들과 합류하기를 바랐다. 타라스는 원치 않았다. 타라스를 고발한 것은 자드지아였다. 그는 도망자가 되어 주인이 있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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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스가 살았던 빌뉴스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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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스가 살았던 집 명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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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스 고향의 집 스케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농노를 벗어나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미술 교육을 받게 된다. 바실리 시리야예프(Vasiliy Shiriayev)에게 그림을 배우면서 그의 아파트(Zahorodnii prospekt, 8)에서 4년을 살았다. 여가 시간인 밤에는 여름 별장(Summer Garden)을 방문해 동상을 그렸다. 그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1833(21) 그의 주인 폴의 초상화(현재 타라스 셰르첸코 국립 박물관 소장)를 그렸다. 그러나 주인은 여전히 그를 농노로 묶어 두었다. 주인은 종속 화가를 데리고 있으면서 명성을 과시하고 싶어했다. 당시 영향력 있는 러시아 화가들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농노의 신분으로부터 셰브첸코를 해방시키기 위해 힘을 썼다. 러시아의 화가 카를 브률로프(Karl Briullov)가 친구인 러시아의 시인 바실리 주콥스키(Vasily Andreyevich Zhukovsky)의 초상화를 그려 경품으로 내놓았다. 그 수입으로 183855일 셰브첸코를 농노의 신분으로부터 해방시켜 마침내 그는 자유민이 되었다. 24살이었다. 농노 신분이 풀어지기까지 10년이 걸렸다.

 

그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이 허가되어 카를 브률로프의 워크숍에서 지도를 받았으며 미술 활동을 계속했다. 셰브첸코는 왕립 예술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에서 풍경화로 은메달을 수상했다. 1840년 첫 번째 유화인 개에게 빵을 주는 거지 소년으로 은메달을 다시 받았다. 그림 뿐 아니라 1840(26)에는 첫 시집 <코브자르>를 발표했다. 1841년에는 서사시 <하이다마키>를 발표했다. 희곡도 썼다.


고향 우크라이나로 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는 동안 셰브첸코는 1843, 1845, 1846년에 우크라이나를 세 번 방문했다. 형제, 자매, 친척 말고도 저명한 작가(Yevhen Hrebinka, Panteleimon Kulish), 역사학자(Mykhaylo Maksymovych)를 만났으며 레핀 왕자 가족과도 친하게 지냈다. 타라스는 우크라이나 인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했다. 그는 미콜라 코스토마로우를 비롯한 키릴-메토디우스 형제단과 같은 러시아 제국 내 정치적 개혁을 주장하는 비밀 정치 결사 조직 단원과 자주 만났다. 이 조직이 탄압을 받으면서 타라스도 1847(33) 체포되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감옥으로 보내졌다.

 

그는 다시 군인 신분으로 멀리 우랄 산맥 최남단에 위치한 오렌부르크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는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의 명령에 따라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지 못하도록 감시를 당했다. 유배 생활 10년 만인 1857(43)에야 풀려났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1859(45) 5, 우크라이나로 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정착할 생각이었지만 7월에 다시 신성모독죄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말년에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판화를 만들거나 초기의 작품들을 편집하며 보냈다. 그러나 유배지 생활과 망명 생활의 후유증으로 1861(47),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병사했다. 농노 해방이 선언되기 7일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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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스 힐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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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스의 묘지

 

그의 시 유언처럼 고향에 다시 묻히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스몰렌스크 묘역에 묻혔다. 그해 58, 그의 친구들은 타라스의 시 유언’(Zapovit, 1845년 작)을 받들어 유해를 싣고 고향으로 향했다. 기차로 모스크바로 이동한 다음 마차로 고향으로 갔다. 드니프로 강(Dnipro River)과 카니프(Kaniv) 근처의 체르네차 호라(Chernecha hora, Monk's Hill, 현재는 타라스 힐(Taras Hill))에 재매장 되었다. 이제는 카니프 박물관 단지(Kaniv Museum-Preserve)의 기념관이 된 그의 무덤 위에 높은 마운드가 세워졌다.

 

평생 가슴에 간직한 빌뉴스

타라스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빌뉴스에서의 시간은 짧았지만 젊은 예술가에게는 변혁적이었다. 당시 빌뉴스의 젊은이들은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연애를 밥 먹듯이 했고 불투명한 미래를 불안해하면서 고뇌했다. 대담하고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 ‘우리와 당신의 자유를 위해라는 폴란드 저항 분자들의 슬로건을 이해했으며, 나중에 그것을 우크라이나 현실에 적용했다. 그는 나중에 떠올렸다. 나는 왜, 비참한 농노 종족은 다른 자유민과 같은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하는 것를 깨달았다고. 당시 상황을 짐작해보면 타라스는 빌뉴스의 그런 모습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그가 빌뉴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영광으로 가득 찬 도시’(Vilna, Glorious garden)라는 시에서 표현된다. “Vilno내 마음에 깊은이라고 썼다. 그의 이런 표현의 시어는 빌뉴스 대학교 역사 학부의 문집에 실렸다.

 

그의 작품과 삶은 전 세계 우크라이나인 들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우크라이나 문학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우크라이나 화폐(100Hryven)에 그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특히 타라스 셰브첸코의 유언1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나 죽거든 부디/그리운 우크라이나/넓은 벌판 위에/나를 묻어 주오/ 그 무덤에 누워/ 끝없이 펼쳐진 고향의 전원과/드네프르 강 기슭/험한 벼랑을 바라보며/거친 파도 소리 듣고 싶네/ 적들의 검은 피/우크라이나 들에서/파도에 실려/푸른 바다로 떠나면/나 벌판을 지나/산언덕을 지나/하늘나라로 올라/신께 감사드리겠네/내 비록 신을 알지 못하나,/이 몸을 땅에 묻거든/그대들이여/떨치고 일어나/예속의 사슬을 끊어 버려라/적들의 피로써/그대들의 자유를 굳게 지키라/그리고 위대한 가정/자유의 새 나라에서/날 잊지 말고 기억해다오/부드럽고 다정한 말로/날 가끔 기억해주오.

-타라스 쉐브첸코, 김석원 번역,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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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문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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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문 앞의 풍경

 

올드타운의 유일한 성문, 새벽의 문

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벽의 문(Gate of Dawn)이다. 새벽문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시절인 1503~1522년 사이에 지어진 방어 요새 문이다. 16세기 쌓았던 성벽 출입구의 10개 성문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리투아니아 역사 및 문화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나머지 문들은 18세기 말 정부의 명령에 의해 파괴되었다. 성문을 통과하면 골목 양 안에는 묵은 향기가 가득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1994) 된 구시가지로 들어섰으니 서리서리 배인 옛 향기가 품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올드타운의 시작점인 새벽문 앞 골목은 시청사까지 이어진다. 첫 여행 때는 주마간산으로 골목을 오갔지만 두 번째 방문 때는 더 열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일단 몸을 뒤로 돌려 성문 위를 바라본다. 성모마리아 이콘이 있는 자리다. 보편적으로 16세기 성문에는 도시를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여행자를 축복하기 위한 종교적 유물이 설치되었다. 이 성모 이콘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가톨릭과 정교회 주민들 모두에게 이 도시의 상징이자 숭배의 대상이었다.

 

성 테레사 성당의 성모 이콘

특히 이 성모상은 리투아니아 역사상 최고의 미인으로 손꼽히는 바르바라 라지비우((Barbara Radziwił, 1520~1551)의 얼굴을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흐른다. 성모를 가까이서 보려면 성 테레사(Church of St. Theresa) 성당 안으로 들어서야 한다. 테레사 교회 입구에는 교회 명과 함께 1633~1654년이라고 써있다. 건축 연도일 것이다. 현재 모습은 18세기, 이탈리아 건축가에 의해 바로크 스타일로 재건축되었다. 경내로 들어서면 여러 성모 이콘과 요한 바오로 2세의 흉상도 있다. 1978년 교황으로 선출된 요한 바오로가 첫 기도를 드렸단다. 가장 관심이 가는 새벽 문에 걸린 성모 이콘을 자세히 봐야 한다. 성당 내부에서 계단을 따라 성문 위로 올라서야 한다. 사람들은 성모 앞에서 성호를 긋고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화려한 금색으로 치장된 얼굴. 그 아름다움이 눈부시다. 여느 성모와는 구분이 될 정도다. 리투아니아 인들이 사랑하는 바라바라의 세기적인 사랑 이야기는 다음 회로 이어진다.(계속)

 

Data

타라스 셰우첸코 동상: 주소 Arklių g. 26, 빌뉴스

새벽의 문과 테레사 성당: Aušros Vartų g. 14, 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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