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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 이신화의 유럽 인문 여행71]마더 테레사의 고향, 마케도니아 스코페

2021-05-26 15:12

글·사진 : 이신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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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에게 마케도니아(Macedonia)에 대해 물어봤을 때 가장 먼저 연상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알렉산더 대왕의 고향? 아니면 마더 테레사가 태어난 곳? 하지만 이 답변은 절대적으로 마케도니아에 관심을 갖고 있는, 국내 소수 마니아급들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말일 것이다. 많이 낯설어서 설레는 나라. 바로 마케도니아다. 정이 넘치는 사람들이 그리움 되어 에코처럼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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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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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다리.

 

도심 속 무수한 동상들, 약소국의 과시?

마케도니아 수도인 스코페(Skofje)는 이 나라의 최종 여행지다. 이미 오흐리드~비톨라~프릴레프~게브겔리아를 둘러본 후 그리스로 떠났다가 테살로니키에서 스코페에 도착한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와 경계지점의 나라지만 쉽게 그리스로 이동할 수 없었다. 여행 중에 만난 그리스인들은 마케도니아 인들을 미워했고 마케도니아 인들은 그리스가 우리나라를 싫어한다고 말했다. 이 두 나라는 오래된 역사의 애환이 골수속에 깊숙이도 박혀 있었다. 유고연방이 무너지고 1991년 마케도니아가 독립하면서 더 크게 불거졌다.

 

마케도니아는 경상북도보다 약간 넓은 면적(25700)210만의 인구를 가진 약소국이다. ‘마케도니아 공화국(Republic of Macedonia)’이란 나라 명을 갖기까지 인근 그리스의 대국과의 갈등은 아주 깊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알렉산더 대왕시대의 나라 명을 쓴다는 원조싸움이 컸다. 알렉산더에 대한 역사 이야기는 차후로 미루기로 한다. 단지 알렉산더 대왕에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는 이유는 알렉산더는 우리나라 사람이야를 못 박으려는 듯 거대한 동상이 가는 곳곳마다 있다.

 

어쩌면 현재의 마케도니아는 고대 그리스하고는 무관할 수도 있다. 많은 민족지(民族誌) 학자들은 마케도니아 인을 불가리아 인이라 여긴다. 불가리아 정부도 공식적으로 마케도니아인은 불가리아 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대 그리스에는 마케도니아가있었다. 알렉산더 아버지인 필립 2세 때부터 이 지역을 지배하고 영토를 확장한 위대한 영웅의 나라 이름이었다. 국명으로 쓰고 싶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쨌든 여행객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의 나라간 분쟁이지 여행객의 문제는 아니니까 말이다.

 

스코페에는 옛 흔적들과 현대가 함께 공존하고

오래전부터 스코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발칸반도의 교차로였다. 이웃나라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와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의 중간 지점에 거의 정확하게 위치한다. 바르다르(Vardar River) 강이 에게 해로 유입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이 지역의 중요성을 로마인들은 빨리 인식했다. 다르다니아(Dardania) 주의 중심지에 스추피(Scupi)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이후 슬라브, 비잔틴, 불가리아, 노르만, 세르비아인 등이 1392년까지 점령했다. 이후 오스만 투르크가 1912년까지 점령해 우스쿠브(Uskub)라는 국명을 붙였다. 이후 스코플리에(Skoplie)로 변경되었고, 1950년대 이후 스코페(Skopje)로 불리었다. 1963년 대지진 후 유고슬라비아의 다른 지역에서 쏟아져 들어온 원조로 현재의 도시 모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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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페 시내전경.

 

스코페 여행은 걸어서 다니면 된다. 현대적인 건물이 들어선 신도시에는 유난히 많은 동상들을 만난다. 나라의 특색을 살리려 만든 동상들이지만 이름조차 키릴 문자로 표기되어 있어, 그 인물들을 알아 볼 방법이 없다. 프랑스 개선문을 닮은 마케도니아 문도 있다. 가장 번화한 마케도니아 광장(Macedonia Square)에는 말을 타고 찌를 듯 한 용맹을 보여주는 알렉산더가 하늘 높이 날고 있다. 광장에서 몇 발자국 움직이면 돌다리(Stone Bridge)’. 스코페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돌다리는 바르다르 강을 가로지르며 신, 구 시가지를 나눈다. 동로마 제국 시절 유스티아누스 1(Justinian I)에 의해 건립되었고 15세기 오스만 투르크 시절에 재건축된, 유서 깊은 돌다리다. 아치형 수문과 약간 구부러진 듯한, 옛 다리가 멋지다. 이 다리는 1555년의 대지진, 1944년 파시스트의 테러 미수 등 여러 사건을 견뎌냈고 한때는 사형 집행 장소로도 쓰였다고 한다. 다리 양쪽으로는 키릴형제의 동상이 있다. 다리 밑으로 내려가면 강에 빠진 남편을 구하는 전설의 여인상이 있다. 수모를 쓰고 수영복을 입고 있어서 수영 연습하는 여성처럼도 보인다. 강 앞으로는 신도시 개발 때 새로 만든 거대한 현대적인 건물들이 있다. 고고학 박물관과 전자, 통신 기관이다. 고고학 박물관을 잇는 새 다리에는 동상들이 줄을 잇고 있다. 다리 반대편에는 전쟁박물관과 홀로코스트 박물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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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자르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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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자르 야채코너.

 

올드 바자르로 들어서는 입구에 필립포스 2세 광장이 있다. 알렉산더 아버지인 필립포스의 동상과 함께 여인이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는 조형물이 있는 거대한 어머니 분수가 있다. 바자르를 비껴 일단 성(Skopje Fortress Kale)으로 다가선다. 성곽은 곳곳이 많이 부서진 채로 남아 있다. 2006년 말부터 발굴을 시작해 요새 밑에 감춰져 있던 집채와 기원전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목관 악기, 찰흙 장식품 등을 발굴 했다. 석회암과 라틴어 글자 등은 518년 지진으로 무너진 고대 로마 도시 스쿠피의 유적일 것으로 추측한다. 이 요새는 유스티니아누스 1(Justinian I) 때 재건하고, 10세기~11세기에 확대 건설해 완성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일부는 복원해 두었지만 아직도 미비한 성곽. 그러나 이 성곽에서는 스코페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뷰 포인트.

 

요새에서 만난 지역 주민은 친절하게도 바자르로 안내한다. 가는 길목에 무스탑하 파스하(Mustapha Pasha)가 있다. 1492년에 건립된 이 무슬림 사원은 마케도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 건축물로 꼽힌다. 바자르에는 옛 향기가 현대까지 고스란히 이어진다. 현재 유럽에 남아있는 시장들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고 한다. 시장통 구경이 재미가 있다. 다양한 고추가 시장통에 널브러져 있어 매운 가루 고춧가루를 산다. 조금만 달라했는데도 많이도 담아준다. 또 여름철에 제 맛을 내는 보라색 자두 코너로 다가선다. 더 맛있는 큰 자두가 없어서 달랑 세 개만 골랐다가 수박코너 총각의 맛이 좋다는 말을 믿고 다섯 개를 고른다. 자두가게 젊은이는 돈을 받지 않는다. 고맙게 받고 돌아 나오면서 길거리에 서 있는 꽃미남 소년에게 과일을 씻어달라고 말한다. 흔쾌히 과일을 씻어준 소년. 케바피 먹다가 사진 찍었더니 페이스 북에 올려 달라던 순박한 표정을 가진 소년. 한 외국인 아주머니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서 말을 건네 온다.

 

프랑크푸르트는 광부, 간호사 등 한국인과 연관이 많은 도시. 그녀는 개인적으로 한국인과도 친분이 있었고 중국 여행길에 한국도 여행했다고 말한다. 낯선 도시에서 한국을 좋게 생각하는 이방인을 만나니 즐겁고 고맙다. 그녀 식당 문을 나서면서 나 오늘이 56번째 생일이야는 말에 ‘happy birtday to you’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처럼 인심과 정감이 수북이 넘치는 도시다. 거기에 물건 값도 싸니 얼마나 좋은 나라인가.

 

기분 좋게 골목을 훑는다. 1466년에 지은 다우트 파샤(Daud Pasha) 목욕탕의 돔 형태의 건물을 본다. 한때 발칸반도 최대의 터키탕이었는데 그 자리는 미술관으로 변신했다. 돔 형태로 지은 6개의 방이 있다. 1824년에 만들어진 정밀하게 조각된 그리스정교회 성상(iconostasis)이 있는 스베티 스파스(Sveti Spas)라는 작은 교회가 있다. 이 교회가 건축되었던 17세기에는 어떤 교회도 이슬람사원 보다 높이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의 절반은 가려져 있다. 올드타운 구경은 이것으로 끝을 내고 다시 신시가지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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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테레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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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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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복을 입은 테레사.

 

마더 테레사 생가와 기념관

그리고 찾은 곳은 마더 테레사의 집(1910826~199795, Mother Teresa's birth house)이다. 신도시에 테레사 수녀의 기념관이 있다. 구부정한 모습을 한 마더 테레사 동상이 입구에 있다. 그녀의 샌들만 신은 발가락에 시선이 꽂힌다. 전시관 2층엔 그녀가 살던 집이 재현되어 있다. 벽에는 많은 사진이 걸려 있다. 아름답고 젊은 그녀가 사진 속에서 반짝반짝 눈빛을 빛내고 있다. “. 이렇게 젊은 시절이 있었구나”. 갑자기 눈물이 팽그르 돈다. 그저 TV 뉴스나 다큐 프로그램에서만 봤던 테레사 수녀의 얼굴은 하얀색 옷(인도식 사라)을 입고, 주름이 깊게 패인 얼굴, 허리와 어깨가 구부정해진 모습뿐이다. 그런데 사진 속의 젊은 아가씨는 수녀 이전의 한 여자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자가 아닌 평생 남을 위해 인생을 바친 한 여인의 삶이 속인의 마음에는 애닳아 보인다.

 

테레사 수녀의 일생은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1910년 스코페(당시 오스만제국의 우스쿠브)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아그네스 곤자 보야지우(Anjezë Gonxhe Bojaxhiu). 테레사 수녀의 아버지는 아르메니아계이고 어머니는 알바니아계였다. 당시 사회적인 배경은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많은 정치적 변화를 겪던 때, 그녀가 태어난 그 해 부유한 사업가이던 아버지 니콜도 정치운동에 휘말려 사망하고 만다. 오스만 제국 시절의 시민 대부분은 이슬람교였지만 테레사 수녀의 집안은 대대로 카톨릭이었다. 혼자 남은 어머니 드라나는 남겨진 아이들을 카톨릭으로 키워냈다.

 

12살 때부터 수녀가 되길 결심했던 테레사는 18세에 스코페를 떠나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의 로레타 수녀회에 들어간다. 테레사 수녀는 1928년부터 3년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기초교육과 영어를 배우고 1931년 인도의 다질링으로 갔다. 인도 콜카타에 있는 성 마리아 수녀원의 세인트메리학교(St. Mary’s School)에서 소녀들에게 1947년까지 16년간 지리학을 가르쳤다. 그 사이에 1937년 종신서원(終身誓願)을 했고, 1944년 세인트메리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러나 1946, 그녀는 삶의 목표를 바꾼다. ‘신의 목소리를 들은 테레사 수녀는 인도 거리로 나서기로 작정한다. 로레타 수녀회를 벗어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2년간 지속적으로 청원해 마침내 당시 교황이던 비오 12세로부터 수도원 외부거주를 허가받을 수 있었다.

 

1948년 홀로 인도의 거리로 나선 그녀. 기초 간호학을 속성으로 수료한 뒤 캘커타의 빈민가에서 고통 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검은 수녀복을 벗어 던지고 인도의 여인 중 가장 가난하고 미천한 여인들이 입는 흰색 사리 옷을 입었다. 맨 처음 5명의 가난한 아이들을 시작으로 병든 사람들을 간호하고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이 보살핌을 받으며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집을 지었다. 미혼모와 고아들을 위한 집이 만들어지고 나병환자들이 모여 재활의 기회를 마련할 수 있는 마을이 생겼다. 그녀의 노력은 1950사랑의 선교 수녀회(Missionaries of Charity)’로 이어지고 후원 단체도 생겼다. 카톨릭 교단과 교황도 그녀의 활동을 지지했으며 세계 각국에서 기부금이 모아졌다. 많은 유명인사들이 테레사 수녀를 만나기 위해 인도를 방문했고 그때마다 거액의 기부금을 내놓았다.

 

그러나 테레사 수녀는 들어오는 기부금은 통째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썼고 본인은 다 낡아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역력한 흰색 사리 하나만을 걸친 채 나병 환자를 씻기고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런 그녀를 지켜본 세계인들은 테레사 수녀를 살아 있는 성녀라고 불렀다. 테레사 수녀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시상식에도 평소와 같이 흰색 사리와 늘 신는 샌들 차림이었다. 그녀는 상금을 받으면서 이 돈으로 빵을 몇 개 살 수 있을까요?” 라고 했다. 그녀는 이 상금을 콜카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두 썼고 시상식 만찬을 거부하고 그 비용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세계 평화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기자이 질문에는 집에 돌아가 가족을 사랑해주세요라고 답했다.

 

199787세의 테레사 수녀는 죽음을 맞이한다. 당시 더 나은 의료 시술을 거부한 채 자신이 돌보았던 환자들과 똑같은 치료를 해줄 것을 원했다고 한다. 테레사 수녀의 장례는 인도의 국장으로 치러졌다. ‘허리를 굽혀 섬기는 자는 위를 보지 않는다는 수녀. 자신의 몸을 가장 낮은 데로 낮추어 인류애에 대한 희망을 보여준 어머니. 테레사 수녀가 태어난 고향에서 만난 젊었을 적 사진을 보면서 자꾸만 눈시울이 적셔질 수밖에 없다. 사후 200310월 교황청으로부터 성자(聖者) 바로 아래 단계인 복자(福者)로 서품되었고, 선종한 날인 95일이 축일로 제정되었다.

 

박물관을 나와 걷다가 덥기도 하고 다리도 아프고 화장실도 가고 싶어서 들어가 커피를 연거푸 두 잔이나 마셨다. 그리스 체인점 숍의 스태프는 내게 초콜릿에 땅콩 박힌 것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시립 국립박물관 앞의 석관에 대해 젊은이 두 명하고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피아니스트. 한명은 7살 때부터 피아노 연주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싱어라고 말했다. 작년에 졸업해 현재 돈을 벌고 있지만 아직 유학은 생각 못하고 있단다. 한국에 와서 연주하는 게 그의 꿈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세계 연주자가 되고 싶다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스코페에서 코소보를 나라를 이동했다. 마케도니아 대형 슈퍼가면 신라면 있다고 하고 찾아갔지만 없었다. 마켓의 지배인은 내 무거운 가방을 지켜 봐줬고 신라면 파는 곳이 어디느냐며 관심을 보여줬다. 또 시내 버스 안에서 나보다 더 걱정하면서 길을 가르쳐준 젊은 여성. 너무 친절해서 걱정안해도 된다고 했는데 그녀는 잽싸게 택시를 잡아타고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커피라도 사주고 싶었는데 말이다. 모두들 고맙다. 마케도니아여.

 

Travel data

항공편:스코페에서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도시들로 가는 직항 편이다. 오흐리드에도 국제공항이 있다.

현지교통: 스코페의 국제버스정거장에는 소피아, 티라나, 이스탄불, 베오그라드행 버스가 매일 있고, 뮌헨행은 일주일에 2번 있다. 크로아티아를 오가려면 베오그라드와 헝가리를 경유해야만 한다. 알바니아를 오갈 때 버스로 스코피예와 티라나를 여행하거나, 걸어서 오흐리드 근처의 스베티 나움에서 국경을 넘을 수 있다. 스코피예와 베오그라드 간에 급행기차가 니스(Nis)라는 곳을 경유하여 하루 5회 운행한다. 스코피예와 테살로니키 사이는 하루 두 번 기차편이 있다. 그리스로 들어가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면 테살로니키까지만 편도표를 사고, 다시 거기에서 아테네행의 표를 사는 것이 좋다. 마케도니아와 불가리아를 연결하는 직행 기차 편은 없다. 소피아와 스코피예 간의 기차여행은 유고슬라비아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하고 비자도 필요하기 때문에 권하고 싶지 않다. 국내 교통편 스코피예에서 오흐리드, 비톨라 등으로 가는 버스편은 꽤 자주 있으며, 마케도니아에서 버스여행은 잘 발달돼있다. 오흐리드를 오가는 버스는 항상 미리 예약하는 것이 좋다. 그에 비해 마케도니아 기차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하다. 예를 들면 지방기차로 스코피예에서 비톨라까지 230km거리를 가는데 4시간이 소요된다.

 

먹거리:음식이 보편적으로 맛이 좋다. 케바치를 비롯해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마케도니아 음식은 남부 발칸의 음식과 유사한데 구운 고기(‘Skara’라고 부름)가 있다. 한국과 달리 레스토랑등에서 ‘Skara’ (꼬치구이 형태)를 시켜 먹을 마케도니아의 요리는 발칸반도와 마케도니아 지방의 특징을 살린 요리로서 터키 요리와 그리스 요리, 중부 유럽요리의 특성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탈리아 요리와 지중해식 식단이 다수 존재하며 헝가리 요리의 형태도 널리 수용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온화한 기후 덕택에 채소류나 허브, 과일이 아주 많아 관련 요리도 많다. 채소류와 과일을 한데 모아 만든 쇼프스카를 주식으로 삼으며 포도주와 라키자, 마스티카라고 하는 주류가 소비되고 있다. 다른 주식으로는 마케도니아의 전통 음식인 타브셰-그라브셰(구운 콩에 고기를 얹은 음식)가 있다. 후식으로는 튀김반죽에 시럽을 넣어 만든 투룸바나 복숭아, 딸기 등을 설탕에 절인 컴포트 등을 먹는다. 아이바르는 파프리카를 구워 껍질과 씨를 제거한 후 오일과 함께 끓여서 만들어진다. 아이바르는 보통 빵에 발라서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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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바피.

 

주류정보: 마케도니아 맥주 스콥스코역시 시원스럽게 넘어갔고 거품이 풍부했으며 향도 달콤했다. 자두나 청포도를 원료로 만든 증류주 라키아도 마케도니아를 포함한 발칸반도를 대표하는 술이라 할 수 있다. 알코올 도수가 50~60도를 넘나드는 독주지만, 탄산수나 소다수로 희석해 마시면 깔끔한 맛을 내고, 다음날 숙취도 거의 없는 게 특징. 여기에다 동네 슈퍼에서 판매하는 수십 종의 포도주도 빼놓을 수 없다. 오흐리드엔 가격은 싸고 품질은 좋은 포도주가 지천이니 그걸 거부할 이유가 없다.

 

숙박정보:시내에 다수 있다. 등급 있는 호텔이 아니고서는 가격이 저렴하다.

화폐정보: 데나르(MKD, Den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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