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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칸트 이야기

2021-05-12 15:47

글·사진 : 이신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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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시계 맞춤’이다. 칸트가 산책하는 시간이 너무 정확해서 시계를 맞췄다는 이야기다. 칸트는 결혼을 안했다. 결혼의 실익을 계산하다가 놓쳐 버렸다는 일화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지나치게 정교한 타입이라서 숨 막힐 듯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 그는 다방면에 지식이 많고 강의를 잘해서 타지에서도 일부러 찾아올 정도였다. 유명한 만큼 칸트에 대한 자료도 많다. 이곳저곳 정보를 모아 함축해서 칸트의 80년 삶을 소개한다.(자료마다 똑같지 않은 정보들이 있으니 감안해서 봐야 한다. 사진은 구글에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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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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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초상화.

 

가난한 마구 만드는 집안에서 출생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칸트(Johann Georg Kant, 1682~1746), 어머니 안나 레기나(Anna Regina, 1697~1737)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홉 자녀들 중 넷째로 태어났는데 성인으로 살아남은 자녀는 칸트를 포함해 네 명이었다. 아버지는 말안장 등 마구(馬具)를 만드는 장인으로 메멜(현재 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에서 살다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주했다.

 

칸트의 아버지는 칸트의 할아버지가 스코틀랜드에서 왔다고 믿었고, 칸트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말안장에 브랜드를 찍을 때 Kant가 아닌 스코틀랜드 식으로 Cant로 새겼다. 그런데 후에 연구해 보니 칸트라는 성은 칸트바겐(Kantwagen)이라는 동네에서 왔고 칸트의 뿌리는 쿠르스족이라고 하는 유럽 중부 해안가의 소수 민족으로 알려졌다. 그렇게 믿고 성장해서 그런지 칸트는 후에 영국 상인들과 돈독한 친분을 유지했다. 칸트 집안은 독실한 루터교. 칸트는 에마누엘’(Emanuel)이란 세례명을 받았는데 히브리어를 공부하고서는 임마누엘’(Immanuel: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로 바꾸었다.

 

청년시절, 가정교사 등으로 돈 벌어

칸트는 유년시절부터 머리가 좋았다. 부모는 칸트를 일찍부터 공부시키기로 작정해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1732년 칸트는 어머니와 친분 있던 신학자 슐츠가 지도하는 프리드리히 김나지움(Collegium Fridericianum)에 입학했다. 규칙을 원칙으로 하는 이 학교에서 라틴어를 비롯한 종교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1737년 그가 열 세 살일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해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입학했다.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칸트는 대학에서 6년 동안 공부했다. 공부를 못 해서가 아니라 공부하고 싶은 게 많아서였다.

 

스물 두 살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아버지도 사망했다. 칸트는 그때부터는 자력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생계를 위해 가정교사로 취직했다. 그는 1747년부터~1750년까지 유첸(Judtschen) 마을(현재는 체르냐홉스크의 Wessjolowka)로 가서 가정교사를 했다. 다니엘 에른스트 안데르쉬(Daniel Ernst Andersch, 1701~1771) 목사와 주교 요한 야콥 샬렛(Johann Jacob Challet, 1686년경~?) 목사의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칸트가 가정교사로 일했던 칸트하우젠(Kanthausen)은 폐허로 남아 있다가 20188월부터 임마누엘 칸트 박물관(Musej Immanuila Kanta. Dom pastora)이 되었다. 폐허상태의 집은 2013년 칼리닌그라드 대학을 방문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의해 재건축되었다.

 

교수에 임용되지 못 해

생업과 공부를 병행하다가 1755(31)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으로 돌아와 박사 학위를 땄다. 그는 가정교사 시절에 써 놓은 논문 일반 자연사와 천체이론(General Natural History and Theory of Heaven)’을 발표했다. 형이상학적 인식의 제1원리에 관한 새로운 해명이라는 교수자격논문을 써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1756년 지도 수학과 교수였던 마틴 크누첸(Martin Knutzen, 1713~1751)38세의 나이에 일찍 사망했다. 전임자가 죽어야만 겨우 자리가 나는 교수 자리다. 칸트는 교수직에 응모했지만 임용되지 못했다. 당시 칸트는 지도교수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칸트의 공부량은 엄청났고, 분야를 가리지 않았지만 어느 한 전공분야에서 특출나다는 평가를 받진 못했다. 크누첸의 미망인은 2살 더 많지만 대학동기인 프리드리히 요한 벅(Friedrich Johann Buck, 1722~1786)을 추천했다. 칸트는 1758년에도 교수직에 응모했지만 실패했다.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난 본 적 없는 칸트

당시 칸트는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닥치는 대로 강의했다. 철학, 논리학, 수학, 물리학, 윤리학, 법학, 신학, 천문학, 지리, 역사, 화학, 광물학 등을 가르쳤다. 오늘날 우리가 지구과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의 창시자는 사실상 칸트다. 그는 모든 과목의 강의를 지나치게 잘했다. 어찌나 강의를 잘 했는지 소문이 퍼져 다른 대학 학생들이 칸트의 수업에 원정을 올 정도였다. 심지어 자기 전공 수업을 칸트에게 들으러 외국에서 여행 온 학생도 있었다.

 

그의 정규직 취직은 프로이센의 국가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1764년 프로이센의 문교부가 나섰다. 문교부 장관이 제안한 자리는 할레(Halle-Wittenberg, 독일 작센안할트주 할레와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문학부 교수였다. 정부 관료들은 모든 분야에서 명강의를 구사하는 비결을 칸트의 언어적 재능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칸트의 관심사는 오직 철학(18세기까지도 수학과 물리학은 자연철학으로 간주되어 철학 영역에 속했다)이었다. 거절의 대가는 곤궁한 생활이었다.

 

1766년 칸트는 대학에서 제안한 왕립도서관 사서로 취직했다. 칸트는 대학에서 주는 첫 번째 봉급을 받았다. 도서관 건물에 딸린 조그만 방에서 혼자 살았다. 사서로 근무하면서 몇 번 교수직 제안을 받았으나 칸트는 번번이 거절했다. 그는 사서로 마흔 여덟 살까지 까지 근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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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친필.

 

죽을 때까지 집필

사서일 때인 1770, 칸트는 원하던 대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철학 교수직을 얻었다. 정교수가 되기까지 무려 15년이나 걸렸다. 이때 발표한 교수취임논문은 칸트 비판 철학의 시작점이 되었다. 그때부터 저축도 가능했다. 생활은 안정되었지만 강의지옥은 한층 더 심해졌다. 칸트는 강의가 연잇는 나날에 진력을 냈지만 학생들의 찬사는 이어졌다. 칸트는 괴로웠지만 강의는 인기 폭발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사랑을 받은 과목은 세계지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칸트는 평생 쾨니히스베르크 반경 30km를 벗어난 적이 없고 이 도시를 벗어나기 싫어했다. 그는 엄청난 암기력으로 외국 도시의 다리를 나사 개수까지 설명할 수 있었던 것. 일에 치인 칸트가 본인의 철학을 집대성한 때는 1781(57). <순수이성비판>을 첫 출간했다. 집필까지 1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 대작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책은 잘 안 팔렸다. 그러나 칸트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 책은 인정받을 거요라고 했다. 결국은 칸트의 말대로 됐다.

 

이후 에세이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Beantwortung der Frage:Was ist Aufklärung?, 1784),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Metaphysische Anfangsgründe der Naturwissenschaft, 1786)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명성이 쌓였다. <순수이성비판>(초판:1781, 재판:1787),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비판>(1790)에서 그의 비판철학의 정수를 선보였다.

 

눈부신 학문적 성취와 더불어 1786~1788년에는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총장에 선출되는 영예를 누렸다. 1796년 칸트는 대학 강단에서 은퇴한다. 은퇴하고도 저술활동은 이어진다. 학부들의 논쟁(Conflict of the Faculties, 1798), 1797년에 전반부만 출판된 도덕 형이상학(Metaphysics of Morals)도 그해 완성했다. 또 다른 작업으로 그는 지금까지 행했던 그의 강의록을 출판하고자 기획했다. 그러나 칸트는 그 작업은 완수하지 못하고 1804, 80번째 생일을 맞지 못하고 죽는다. 미완성된 원고는 20세기 초(1936~1938)에 유작(Opus Postumum)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칸트처럼 많은 존경을 받는 서양 철학자는 없다

그의 사상은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칸트가 살아있을 때부터 칸트 철학에 대한 비판과 반발이 있었다. 칸트는 이성의 능력과 종교를 모두 비판했고, 이러한 비판은 당시에 이성을 신뢰하던 철학자나 종교를 믿던 종교인에게는 매우 불만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책은 1780년대에서 1790년대까지 레인홀드(Reinhold), 피히테(Fichte), 셸링(Schelling), 헤겔(Hegel), 노발리스(Novalis)에게 영향을 끼쳤다. 칸트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글쓰기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철학 운동은 독일 관념론으로 알려졌다. 칸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참 많다. “칸트 이전의 철학은 칸트에게 흘러들어갔고, 칸트 이후의 철학은 칸트로부터 흘러나왔다.” 이 유명한 평가 그대로, 칸트는 서양 철학의 제왕이다. 역사상 칸트처럼 많은 존경을 받는 서양 철학자는 없다고 평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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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박물관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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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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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옛집.

 

칸트의 말년

칸트는 60즈음에 이르면서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는다. 당시 그가 받은 봉급은 프로이센 교육계에서는 최고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는 1783년 그의 친구인 히펠(J. G. Hippel) 시장의 주선으로 도시 중심가(87-88 Prinzessinstraße)에 있는 근사한 주택을 구입했다. 칸트가 정교수가 된 13년 후의 일이다. 집의 1층에는 강의 홀과 주방이 있었다. 2층에는 칸트의 침실과 공부방, 거실, 식당이 있었다. 3층은 칸트의 하인 람페(Lampe)의 방이었다. 요리사도 따로 있었다. 칸트는 2층 식당에서 손님들과 저녁을 즐겼다. 여러 외국인들이 그의 저녁 손님이었는데 영국 킹스턴어폰헐(Kingston upon Hull) 출신의 상인 요셉 그린(Joseph Green, 1727~1786)과 로버트 마더비(1736~1801)와는 친한 친구였다. 영국인과 친하게 지냈던 것도 그의 가문이 스코틀랜드 조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최고로 잘한 강의 세계지리도 그들에게 간접으로 배운 것이리라. 칸트는 공부방에 루소의 초상화를 걸어 두었다. 칸트는 데이비드 흄장자크 루소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데이비드 흄에 의해 합리론의 독단에서 깨어났고, 루소의 저서 덕에 지식인의 오만에서 벗어났다. 특히 루소의 사상은 칸트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산책 시간에 맞춰 시계를 맞추다

한국 철학자 강신주(1967~)씨의 글을 통해 칸트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본다.

 

칸트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아침 식사로 차 한 잔과 파이프 담배를 즐겼다. 그 뒤로는 바로 오전 강의를 준비하고 일주일에 5일간 아침 7시에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가 끝나면 공부방으로 들어가 글을 쓰고 오후 330분이면 강변 산책을 했다. 산책에 나서는 시간이 얼마나 규칙적이었던지 쾨니히스베르크 주부들은 칸트가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시간을 맞췄을 정도였다고 한다. 평생 딱 두 번 빼먹었다. 한 번은 루소의 책 에밀을 읽다가 푹 빠져서 산책을 놓쳤다. 또 한 번은 프랑스 시민 혁명의 신문 기사를 읽을 때였다.

 

그의 규칙적인 산책은 건강 염려에서 비롯됐다. 어려서부터 허약체질이었지만 규칙적인 생활과 건강관리를 해왔다. 감기에 걸리면 코로만 숨을 쉬어야 한다고 믿고 자기만의 호흡법을 개발했다. 또 누에고치가 잠자는 자세로 자야 건강하다고 믿었다. 칸트는 초과된 수면 시간만큼 수명이 줄어든다고 믿었다. 칸트는 매일 정확하게 7시간 수면을 지켰다. 오후 10시에 자서 오전 5시에 일어났다. 한 번은 귀족의 마차 드라이브에 초청된 적이 있다. 귀족은 존경받는 철학자에게 시골길을 달리는 즐거움을 선사해주고 싶어서 마부에게 교외를 한 바퀴 돌라고 지시했다. 당연히 드라이브는 길어졌다. 칸트의 기준으로는 하루 일과가 엉망이 되었다. 그는 밤 10시에 집에 돌아와 분통을 터뜨렸다. 칸트의 일상수첩에는 어느 누구의 마차 드라이브에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는 항목을 추가했다. 이밖에 맥주는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에 비해 빨리 죽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와인을 너무 마시는 사람도 아예 안 먹는 사람도 이성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칸트에게 식사 초대를 받은 사람이 선물로 맥주를 꺼낸 적이 있다. 칸트는 그 맥주를 마실 거면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손님을 내버려 두는 건 자신에게 크나큰 모욕이었다.

 

칸트는 가터벨트의 창시자다. 당시 스타킹과 양말은 여성보다는 남성들의 의복이었는, 그때는 고무줄이라는 게 없다 보니 스타킹에 탄력이 없었다. 흘러내리지 않게 하려고 줄로 꽉 묶어야 했다. 칸트는 혈액 순환이 건강에 좋다는 이론을 믿었기에 과학적으로 접근했다. 혈액 순환을 방해하지 않고 스타킹과 긴 양말을 신을 수 있는 가터벨트를 만들었다. 현재 가터벨트는 페티시(fetish)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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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초상화.

 

과학적 일상 신념

칸트는 결벽증이 심했다. 모든 물건이 정확히 그 자리에, 그 각도로 놓여 있어야 했다. 가위나 주머니칼 따위가 조금 비뚤게 놓여 있으면 견디질 못했다. 의자가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했다. 칸트는 소음에도 예민했다. 옆집 병아리가 자라서 수탉이 되자 닭 울음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렸다. 결국 수탉을 피해 이사를 갔다. 이사한 집은 쾨니히스베르크 감옥 옆이었다. 감옥에서는 수감자들에게 죄를 뉘우치게 한다는 목적으로 매일 찬송가를 큰 소리로 부르게 했다. 수탉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피해였다. 얼마나 화가 쌓였는지 책에도 써서 복수했다. 칸트는 <판단력비판> 2판 각주에서 굳이 이 일을 언급했다.

 

칸트는 진보적인 인물이지만 예측 불가능한 변화는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공포스러워했다. 칸트는 집사에게 무려 10년 동안 같은 옷만 입도록 명령했다. 한 가지 옷차림만 고수하기엔 너무나 지겨운 나머지 집사는 딱 하루 자기 취향대로 옷을 입었다. 칸트는 충격을 받아 실신 직전까지 갔다. 칸트는 일상의 소소한 문제에 과학적으로 접근했다. 시도 때도 없이 가설을 세우고 이론을 수립했다. 칸트는 평생 동안 자신의 이론을 철석같이 믿었다. 칸트는 자기 이론이 틀리면 상처받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눈곱만한 의심도 불쾌하게 여겼다.

 

평생 독신으로 산 칸트

칸트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 떠났다. 여성에 관한 그의 일화는 유명하다. 칸트는 마르고 운동을 못 하고, 이마는 넓고 안색은 창백하고 등은 살짝 굽었다. 키는 155cm였다. 스스로 외모를 볼품없다고 평가했기에 결혼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청혼한 여인이 있었다. 칸트는 생각을 좀 해볼 테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사랑과 관련된 책을 모두 읽고 결혼을 해야 할 이유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모두 정리해 기록했다. 마침내 결혼을 해야 할 이유가 4개 더 많이 도출되었다. 칸트는 청혼을 받아들이려고 여성을 찾았을 때는 7년 후였다. 여성은 이미 결혼해서 애까지 있었다. 청혼한 여성은 한 명 더 있다. 역시 칸트는 시간을 들여 학문적으로 접근했고, 승낙하려고 하니 그녀는 이미 다른 도시로 이사 간 상태였다. 상처받은 칸트는 심술이 났는지 결혼 생활은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이론을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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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에 새겨진 칸트.

 

칸트는 79세에 쓰러졌다. 의사는 시름시름 앓는 칸트에게 곧 완쾌될 거라며 매일 안심시켰다. 칸트의 친구가 병문안을 와서 병세가 어떠냐고 묻자 그는 그제야 의사를 비판했다.

나는 날마다 나아지고 있는데 그 때문에 죽어가고 있네.”

 

칸트가 사망하기 4일 전. 마지막으로 방문한 의사가 방 안에 들어서자 칸트는 병상에서 힘겹게 일어났다. 그는 인사를 나누고도 여전히 서 있었다. 의사가 제발 앉으라며 권했지만 칸트는 불안해하며 머뭇거렸다. 칸트를 돌보던 친구는 의사에게 먼저 앉으라고 했다.

손님이 먼저 자리에 앉아야 따라 앉을 것입니다.”

 

의사는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몰라 안절부절했다. 마침내 칸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부디 저로 하여금 타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게 해주십시오.”

의사는 감격과 슬픔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손님 앞에서 보여야 할 예의는 사소할지 몰라도 그만큼 칸트는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였다.

 

칸트는 1804212. 하인에게 포도주 한 잔을 청해 마시고 좋다(Es ist gut)!”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뒤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 날 쾨니히스베르크 시 전체가 휴무에 들어갔고 운구 행렬에 수천 명이 뒤따랐으며 시내 모든 교회가 같은 시간에 조종(弔鐘)을 울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나를 놀라움과 경건함으로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요, 다른 하나는 내 마음속을 지키고 선 도덕법칙이다.’

그의 묘비명에 새겨진 말이다.

 

칸트를 만나러 떠난 칼리닌그라드. 미흡했지만 원하는 칸트를 만났고 원고를 쓰면서 칸트의 삶을 들여다봤으니 좋다(gut)’. 다음 회부터는 리투아니아 빌뉴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계속)

 

Data

임마누엘 칸트 묘지:주소 Kanta St, 1, 칼리닌그라드/전화 (+7)4012 63 17 05/sobor-kaliningrad.ru

칸트 박물관:주소 Vessjolowka Chernyakhovsk district, 칼리닌그라드/ 웹사이트http://www.ostpreussen.net/ostpreussen/orte.php?bericht=185

칸트 벤치:주소 Petra Velikogo Emb, 칼리닌그라드

칸트 동상(Kant's monument):주소 Ulitsa Universitetskaya, 2, 칼리닌그라드

칸트의 집:주소 Leninskii Prospekt 40-42A, 당시 주소 87-88 Prinzessinstraß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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