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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감정에 휘둘리지 말라’ LG 첫 여성 임원 윤여순

2020-12-14 09:02

취재 : 이근하 기자  |  사진(제공) : 안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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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 하나 없는 땅을 밟은 쾌감이 들었다. 내가 지나온 길이 다음 누군가의 통로가 될 것이란 설렘. 길잡이의 부재가 불안한 적도 있다. 그 모든 때를 겪어봤기에 말할 수 있다. 감정에 휘둘리지 말라고. LG그룹 최초의 여성 임원, 윤여순 전 LG아트센터 대표는 ‘우아하게’ 이겨왔다.
윤여순 전 LG아트센터 대표를 설명하려면 꼭 붙는 수식어, ‘LG그룹 첫 여성 임원’. 무엇이 그의 현재를 만들었느냐고 한다면, 그는 30대 초반의 자신을 떠올린다.

남편의 학업을 위해 미국행에 올랐다. 남편이 유학생 일상을 살아내는 동안 ‘유학생 아내’는 지루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대학 소개 책자를 읽다 문득 한 문구가 번뜩였다. 미국 주립대학에는 장학금을 받는 대학원생의 배우자에게 무료로 9학점을 이수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고 했다. 공짜로 영어 공부나 해보자 하는 심산으로 시작한 학업은 석사, 마흔 살 교육공학 박사로까지 이어졌다. 그사이 딸이 생겼고 두 가족은 세 가족이 돼 1995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이가 많아서 박사학위가 있으면 오히려 취업하기 힘들다.” “대학에서도 나이 많은 여자 교수는 채용하지 않는다.”

언젠가 주변에서 고한 충고는 틀리지 않았다. 시간강사를 해야만 했다. 기회는 그 후에야 찾아왔다. 모토로라대학교에서 6개월짜리 프로젝트를 수행해줄, 학위를 갓 끝낸 박사를 구하고 있었다. LG인화원(LG그룹 교육기관) 임원이 그의 프로젝트 결과를 지켜보곤 명함을 건넸다. 1995년, 마흔 살 윤 전 대표는 LG인화원에 부장으로 입사했다.

여성 부장은커녕 여성 과장도 몇 안 되던 시절이다. 그는 자신이 “달갑지 않은 외계인, 그것도 여자 외계인이었다”고 회상했다. 희귀종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반드시 성과를 내보여야 했다. 업계 최초의 직원 대상 온라인 교육 인프라 ‘사이버 아카데미’를 개발했다. 그 일을 계기로 2000년 상무를 달고, 2010년 전무를 거쳐 2011년 LG아트센터 대표가 됐다. “21세기가 됐는데 어떻게 그룹에 여성 임원 하나 없느냐”는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지시도 큰 몫을 했다.

‘윤여순 전무’의 수명이 2년도 채 되지 못할 것이란 예단이 지배적이었다. 한 원로 임원은 리더십 워크숍을 진행한 윤 전무를 불러 “여자가 아침부터 웬 목청이 그리 크고 높냐”고 소리쳤을 정도다. 외계인은 보란 듯이 20년 가까이 이겨냈다.

윤여순 전 대표가 이 모든 이야기를 담아 최근 <우아하게 이기는 여자>를 출간했다. 그는 “우아하단 표현은 퇴임할 무렵 듣게 된 형용사”라고 했다.

<우아하게 이기는 여자>를 읽고 있는데 옆에서 친구가 그래요. 넌 뭘 그렇게 이겨 먹으려고 이걸 읽느냐고. 아하하하. 상대를 이겨 먹으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네 자신의 꿈과 싸우고 이겨내 더 큰 꿈을 이루라는 거예요.(웃음) 환경이 척박하면 그걸 이겨내려 하고 감정에 휘둘리게 돼요. 그럼 힘들어요. 그걸 넘어서 자기만의 페이스를 갖고 나를 지켜나가야 해요.

주변 반응은 어때요? 나쁘지 않아요. 출간하고 한 달도 안 돼서 2쇄 들어갔어요. 원래는 책 쓰길 무지 망설였어요. 퇴임 때쯤 제안이 왔었는데 “내가 유관순 열사도 아니고 뭘 그렇게 대단한 일을 했다고 책까지 써”라고 생각했었어요. 사람이 바로 앞도 모르고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더라고요.(웃음) 퇴임하고 코칭 일을 하면서 여성들을 대해 보니 옛날 제 고민과 똑같아요. 일하는 엄마가 아이에게 느끼는 미안함, 승진의 갈림길에서 생기는 고충 등등. 여성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책을 쓰게 됐죠.

일하는 여성의 고민은 왜 시대가 변해도 여전할까요? 여성의 사무직 비율은 늘었어요. 하지만 여성 임원이 3%도 안 돼요. 아직도 너무 적고, 별로 늘지 않은 거죠.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과 어떻게 같이 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부족한 것 같아요.

8년 전 인터뷰에서 “일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 때 언론에 목소리를 내는 게 순리인 것 같다”는 답변을 읽었어요. 첫 여성 임원이 됐을 때 여성잡지 17군데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어요. 이미 신문에 ‘여성이 임원이 됐다’고 짧게 기사가 나갔잖아요. 근데 여성지에선 몇 페이지를 쓰겠다고 해요. 내가 일한 게 없는데 쓸 얘기가 뭐가 있어요. 일 좀 하고 성과를 인정받으면 취재해달란 의미였어요.

일로서 말하겠다는 거네요. 스스로 ‘이 업무’ 참 잘했다 하는 건요? 구체적인 ‘일’을 들기보단 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유는 다들 안 된다는 일을 해냈기 때문이에요. 안 된다는 일을 하고 나서 보니 ‘안 돼요’는 내부 장벽이었어요. 고정관념. 그걸 부수는 게 외부환경이 어려운 상황보다 훨씬 힘들었어요. 긴 호흡이 필요해요. 주변을 설득해야 하고 그들이 들어줄 만한 카드를 만들고, 완벽히 준비가 됐을 때 딱 내밀면서 “합시다”라고 해야 돼요. 실패한 일도 당연히 있었죠. 그땐 명분만 갖고 열심히 만들었거든요.


여자가 아침부터 큰 목소리를 낸다고 혼난 일화는 황당했어요. 실은 그보단 더한 얘기도 많아요.(웃음) 그 말을 딱 듣고 뭐라도 (반격)하고 싶은데 최초 여성 임원이고 모든 남성, 여성 후배들이 지켜보는 거예요. 너무 어린 여성들의 시선이 느껴지니까 어깨가 무거웠고 섣불리 행동하고 싶지 않았어요. 오래 임원할 거라곤 꿈도 못 꿨어요. 제 존재가 상징적인 의미로 만들어졌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어요. 길어도 4년 하면 끝나겠구나, 근데 1년이든 4년이든 이왕 하는 거 제대로 성과를 내보자 싶었죠.

화가 쌓였을 것 같아요. 그럼요. 억울한 일을 많이 겪었어요. 분명히 부당한 차별이니까 내가 외치고 싸울까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마이너스에요.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말해봤자 받아들여질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그리고 가만 보니 이 사람들이 내게 의도적으로 대하는 것도 아녜요. 그냥 몰라요. 여성을 상사로 모신 적이 없었던 거예요. ‘당신은 별 생각 없이 하는 행동이겠지만 동료 여성은 이렇게 느낄 수 있다’는 걸 알려줘야겠더라고요. 한 발 물러서 얘기를 하고 오히려 제가 놀란 게 “뭐라고?” 하는 반응일 줄 알았는데, “아~ 그래요?” 하는 사람이 더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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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엄마, 나의 엄마, 나의 큰언니 배우 윤여정

임원이 된 엄마는 열 살 된 딸을 두고 있었다. 딸은 엄마가 필요하다고 읍소했다. 육아와 커리어 사이 갈등이 부풀 즈음, 아이에게 ‘퀄리티 토크(Quality Talk)’를 약속했다.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는 대신 얘기에 더욱 집중하겠다고 했다. 엄마는 야근, 회식을 한 날도 약속을 지켰다. 그는 어머니의 삶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교육이라고 했다. 자신 어머니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는 딸 셋을 홀로 키우셨다. 윤 전 대표의 큰언니는 배우 윤여정, 작은 언니는 뉴욕에서 교직 생활을 했다. 어머니는 생전 “(세 딸과 같은) 복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곤 했다.

어머님이 세 자매를 혼자 키우신 걸로 알아요. 비무장지대 어느 땅이 다 우리 것이라 할 만큼 굉장한 자산가 집의 종손 며느리셨어요. 6·25전쟁이 터지면서 그 땅을 전부 두고 내려왔죠. 아버지는 어머니 서른셋에 폐결핵으로 돌아가시고 그야말로 풍비박산 난 거예요. 어머니가 살 길은 오로지 당신 힘으로 정직하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뿐. 정말 굴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딸 셋을 보란 듯 잘 키워내겠단 마음이 있으셨어요. 양호교사셨는데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열심히 하시던 분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것들이 우리 어머니 유산이에요.

어머님을 추억하면 가장 기억에 남는 모습은요? 하여튼 잠시도 쉬지 않으셨던 분. 큰언니랑 같이 사셨는데 시간만 나면 정원을 가꾸시고 그 연세에 직접 바느질을 하셨어요. 한가하게 멍 때리는 모습을 못 본 것 같아요. 그게 참… 우리 엄마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여겼어요. 바빠서 용돈만 드리고 교감하는 시간은 적었죠. 퇴직하고서 엄마 옆에서 똑같은 스토리를 수천 번, 수만 번 귀담아들으면서 비로소 우리 엄마 마음이 그때 그랬구나. 엄마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얼마나 힘드셨을지 새삼 느껴지고.

책이 나오고 얼마 안 돼서 떠나셨죠? 7월에 입원하고선 완전히 쇠해서 우리 엄마가 올해는 못 넘기겠구나 알았어요. 옛날 같으면 책 내용을 듣고 “그건 그것이 아니다, 그때는 이래서 이랬던 거야”라고 말씀하실 분인데 “어… 어…” 하시더라고요.

언니 분이 윤여정 씨인 건 인터뷰 사전 조사를 하다 알았어요. 8년 차이 나는 우리 언니.(웃음) 어머니가 큰언니를 남편처럼 생각하셨어요. 언니는 뭐랄까, <토지>에 나오는 서희 같았어요. 엄마가 굉장히 의지하는 딸이었고 동생들 눈에도 언니가 정말 커 보였어요.


몇 년 전 케이블 채널에서 ‘명품 DNA를 자랑하는 스타의 엘리트 형제자매’ 1위로 꼽히셨더라고요. 그때 주변에서 알려줘서 방송을 봤었어요. 너무 재밌고 신기한 게 제가 나온 대학교 캠퍼스 사진까지 다 나와요. 자료 조사를 정말 열심히 하시는구나 했어요.(웃음)

세 자매가 함께 늙어가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편안하고 좋아요. 엄마 돌아가시면서 뉴욕에서 언니도 나오고. 엄마가 우리를 열심히 키워주셨음에 더욱 감사하게 돼요.

훌륭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딸도 성인의 딸을 두고 있어요. 엄마가 필요하다고 울던 딸은 이제 뭐라고 해요? ‘퀄리티 톡’을 하면서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고서 잘 자라줬어요. 애하고 진하게 제대로 대화를 나누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낼 수 있을 것 같단 확신이 있었어요. 애가 중고등학생 땐 엄마가 일하는 걸 너무 행복해 했어요. 친구들이 너만이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서(웃음) 부러워했대요. 잘 자라서 프리랜서 그래픽디자이너가 됐어요. 일을 아주 즐겁게 잘하고 있어요. 우리 딸 결정이라면 다 믿어요.

내 딸에게 나는 어떤 엄마로 기억될까요? 확실한 건 딸이 일하는 엄마를 굉장히 자랑스러워해요.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할 때 엄마 얘기를 많이 떠올린대요. 나중에 어떻게 기억될지는 뭐, 아휴, 민망하네요.(웃음) 제가 한 만큼이겠죠.

올해로 예순여섯,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은요? 저를 찾는 후배 여성들이 있다면 어디든 가겠어요. 도움만 될 수 있다면 그게 여생의 보람이에요.

윤 전 대표는 체구가 무척 작다. 목소리는 크다. 이력이 화려하다. 차림은 꾸밈없다. 그 갭이 그의 오라(Aura)를 만든다. 머리 단장은 3분 드라이, 화장은 눈썹 다듬기 정도다. 꾸미기에 관심 없기도 하거니와 사람의 분위기는 속에서 전해오는 것이라 했다. 인터뷰 당일도 딸이 그려준 아이라인을 빼곤 변함없는 헤어스타일이었다. 그가 말하는 ‘우아함’을 좀 더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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