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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 돌려 입었어?

  • 기자명 이연숙
  • 입력 2022.01.18 14:58
  • 댓글 0
  • 사진(제공) : 이연숙
 
 
 
아침에 방에서 나오니
평소에는 겨우 고개만 돌려 눈이나 마주칠지 말지 하던 K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빤히 쳐다본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심쿵.
 
“바지 돌려 입었어?”
“끄응....”
 
와이프가 커트를 하고 웨이브펌을 해도 못 알아보던 사람이
이럴 땐 또 겁나 예리하다.
 
“일부러 그랬지, 무릎이 나와서 말이야. 그리고 뒤에 있던 주머니가 앞으로 오니 편하네 뭘.”
 
의연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당황했다.
문 옆에 있는 전등 스위치 켜기가 귀찮아
어둠 속에서 어제 벗어 두었던 옷을 되는대로 주워 입고 나왔더니 이 모양이다.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어떤 날은 티셔츠를 돌려 입은 적도 있었고
뒤집힌 줄 모르고 카디건을 입고 나온 적도 있었다.
갈수록 부실해지는 감각 때문에 생기는 오류에 대해
같이 나이 들어가는 처지이니 서로 지적하지 말자고 했었다.
대표적인 것이 건망증이고
고쳐지지 않는, 혹은 고치고 싶지 않은 습관
일테면, 물 틀어놓고 설거지하기,
볼 일 볼 때 화장실 문을 다 닫지 않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거실에 앉아서 확인하게 하기,
음쓰 버린다는 빌미로 담배 피우기,
힘 조절 실패인지 집 안의 모든 문, 소리 나게 닫기(냉장고 문 포함)
정도가 K의 것이라면
나의 문제는 귀차니즘에서 기인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안경을 쓰면 보일 것을 찾아 쓰기 귀찮아서 일단 안 보이는 건 K에게 미룬다.
낮에 혼자 있으면서 마신 커피 잔 물 컵 등을 귀찮아 개수대에 놓아두었다가
설거지 담당 K가 올 때까지 그대로 있을 때가 많다.
 
 

 

아침에 입은 옷만 해도 그렇다.
밴딩 조거팬츠와 맨투맨 티셔츠가 주된 홈웨어이자
산책 패션이다.
합성섬유 알러지가 있어 면제품으로만 입다보니
하루만 입어도 무릎이 나오기 일쑤다.
티셔츠를 돌려 입었을 때는 앞뒤 목의 패임이 달라 답답해서 바로 돌려 입었는데
느낌이 다르기는 바지도 마찬가지였으나
그 때 문득 어렸을 때 일부러 돌려 입던 내복 생각이 났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
겨울이면 두껍고 무거운 빨래들을 물을 데워가며 해야 했다.
물론 엄마가 하는 빨래를 옆에서 거드는 수준이지만
어쨌든 실내도 아닌 수돗가에서 하는 겨울 빨래는 춥고 시렸다.
(도대체 왜!
엄마는 건장한 사내아이들은 뜨끈한 아랫목에 모셔두고
연약한 딸래미만 그 추위에 떨게 했을까? 같이 했으면 좋았잖아.)
해서 엄마는 옷 더럽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을 뿐 아니라
어지간하면 오래 입게 했다.
겨울 필수 품목인 내복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서
엉덩이와 무릎이 S자로 튀어나온 것을
돌려서 일주일을 더 입었던가?
팔꿈치가 나오는 윗도리는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날 하루는 돌려 입은 조거팬츠를 그대로 입고 지났다.
다음 날 다시 제대로 입으려고 보니 어쩐지 좀 평평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다시 입으려다 빨래통에 넣었다.
 
모 프로그램에서 한 때 청춘스타로 유명했던 배우가
싱글대디로 소개되어 나왔다.
토크를 하는 녹화세트에서와
미리 녹화해놓은 리얼 상황의 모습이 전혀 다른 사람인 것을 보고
출연자들이 모두 놀라서 한마디씩 놀리는 말을 했다.
그래도 왕년에는 베스트드레서 상도 받았다면서 이게 무슨 일이냐며.
좋아했던 배우는 아니지만
정말로 예전의 개성 있고 풋풋한 모습은 어디 가고
고집스러운 외골수의 중년의 모습이 되었다.
문득, 아침에 내 모습이 K에게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이제 바지 앞뒤도 구분 못하나?’
 
라는 의심에 그렇게 빤히 쳐다본 걸까?
 
“서방님, 안심하십쇼!
쫌 귀찮은 거 말고는 저는 아직 멀쩡합니다.”
 
 
편집/이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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