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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흙과 불로 빚어온 30년 인생, 흑자도예가 김시영

  • 기자명 이상문 기자
  • 입력 2019.12.13 17:50
  • 수정 2023.09.23 13:55
  • 댓글 0

자의든 타의든 한평생 외길을 걷기란 쉽지 않다. 제대로 철들고 난 후 반평생만이라도 한길을 걸을 수 있다면 외롭지만 행복한 일이다. 한 가지 일에 투신해 세상과 싸우고 견디고 사랑하고 행복을 찾은 곳곳의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다. 무릇 전문가라 할 만한 이들을 만나는 이 여정을 Tour de Veteran이라 이름 붙였다. 첫 번째 인물은 도예 명인 청곡 김시영이다.

“고려에는 청자와 함께 흑자도 있었지만 조선시대 500년 동안 백자가 지배하며 흑자는 밀려났습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백자가 주류이고, 시장이 그렇게 형성되고, 그러니 작가들도 유행을 따르는 것 아닐까요?”

‘왜 당신이 유일한 흑자 도예가인가?’ 10년 전 만났던 인터뷰이를 다시 만나자마자 던진 질문에 그는 어눌해 보일 정도로 겸손하게 화답했다. 늘어난 도예촌에 젊은 작가들이 넘쳐나고 생활도자의 저변도 넓어졌을 텐데 흑자 도예를 한다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이런 이유로 미디어들은 당연한 듯 청곡 김시영을 유일무이한 흑자 도예가로 칭하고 있던 터였다.

 

흙의 물성, 불의 온도를 마주한 끊임없는 도전

흑자는 기원전 4~5세기 제기로 쓰이던 흑도라 불리던 검은 도기로 시작해 통일신라 말 청자 가마에서 부수적으로 만들어져온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차츰 그 명맥이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분청사기는 가마 온도가 1230℃, 청자는 1270℃, 흑자는 1300℃에서 구워진다. 작업 과정이 쉽지 않고 불의 변화를 세밀하게 따라잡아야 해서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검은색 도자, 즉 흑자는 왜 대중화되지 못할까. 청곡 김시영과 조소 전공 두 딸의 얘기를 종합하면, 무엇보다도 ‘어렵다’는 게 첫 번째이자 마지막 이유다. 흙의 물성과 불의 성질을 오래 겪어 간파하고 질긴 싸움을 견뎌내야 ‘청곡흑자’만 한 작품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까만색이거나 고동색을 띠는 옹기류의 흑자와 달리 그가 빚는 흑자는 오묘하고 다채로운 빛깔로 유명하다. 검은색은 세상의 모든 색을 다 품고 있는 색이라고 그는 말한다.

“예로부터 검은색은 음색이라고 해서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검은색 자기는 제사 때 사용하거나 집안의 액을 쫓는 용도로 활용했다는군요. 검은색에서 모든 색이 다 나오는데, 우리 문화가 그 가치를 낮게 여겼습니다.”

흑자를 기피하는 이유는 지난한 공정 때문에 ‘작품’이 나오기 어렵다는 이유 말고도 여럿 있다. 대중이 선호하질 않으니 돈이 되질 않는다. 그러니 상품화되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홍보도 어렵다. 수요가 많지 않고 아는 이조차 적어서였다. 평범한 백성은 손에 쥐기가 힘들었고 중국 송나라 왕실에서나 수려한 빛깔의 고급 흑자가 쓰였다고 하니, 오래전부터 대중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셈.

흑자 또는 흑유는 여느 도자가 다 그렇듯 불의 온도에 민감하다. 온도 차에 따라 내는 빛과 색이 세세하게 다양해지는데 흑자는 특히 인위적인 착색과 규칙적인 착질이 쉽지 않다. 다년간 수십 수백 번의 경험을 거쳐야 비슷한 색을 다시 구현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흙을 빚고 불과 싸우는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 다른 도자에 비해 단연 길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그의 작업 공간인 ‘가평요’ 가마 주변엔 깨진 항아리가 늘 수북하다. 의도한 빛깔을 내는 데 실패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우연히 발견되는 오묘한 색과 빛에 반하여 새 작품으로 내기도 하지만, 대개는 당시의 영감을 구현하는 데 힘을 쓴다.

 

 

 

 

작가들이 흑자의 전통을 구현하기 힘들어하는 이유는 뭔가. 특별한 기술을 요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내력의 한계일까. “흑자를 굽다 보면 붉은색, 노란색, 파란색 등 여러 톤이 나오게 된다. 새로운 흙을 찾고 만들기도 하고 불과 싸워 다양한 온도에서 나오는 빛을 기다려줘야 한다. 기술 차이냐 인내력의 차이냐는 딱히 구분할 수 없다. 같은 말이 아닌가. 까다롭고 지루한 공정을 꾸준히 이겨내야 하는 인내력도 필요하고, 기술은 그 과정에서 발견되는 것이니 둘 다 맞는 말이다.”

이 지루한 싸움을 자처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좀 더 쉬운 길을 가도 예술의 옷을 입힐 수 있지 않았겠나. “개인적으로 흑자와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운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잘나거나 못난 것과는 관계없이 그냥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운명 같은 내 일이 돼버렸다. 그게 30년이 넘었고 결국 나라에서 큰 상(대한민국 화관문화훈장)까지 주는 일이 벌어졌다. 이건 큰 사건인데, 아마도 눈길 돌리지 않고 우둔하게 작업해온 덕을 보는 것 같다. 이제야 비로소 예술가로서의 소명이나 책무 같은 걸 느낀다. 그러니 난 아직 멀었다. 100세 가까운 90대 명장들도 있지 않은가.”

조소를 전공한 두 딸의 얘기로는, 아버지는 늘 불과 씨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게 너무 위험하고 처절한 싸움이라서 걱정스럽다고 하는데…. “대개의 도예작가들은 형태에 집중한다. 말하자면 디자인이다. 시장이 그걸 원하기 때문일 거다. 흑자는 형태에 집중하기보다 불과 싸워가며 빛깔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요즘엔 도자가 불의 예술임에도 불구하고 가마 쪽 영역은 ‘그냥 굽는다’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딸들 얘기론 젊은 미술대학 학생들은 직접 불과 싸우지 않는다더라. 가마를 다루고 구워주는 아저씨는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힘들고 위험하니까. 도예과를 나와도 불을 어떻게 때는지, 어떻게 굽는지 잘 아는 이들이 점점 줄어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어릴 때부터 직접 불을 다뤄왔다. 그래서 거부감이나 겁이 없다.”

‘겁 없는 아버지’는 공업고등학교 시절 용광로를 배웠다. 대학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선 세라믹을 연구했다. 지질학 지식도 쌓았다. 금속과 흙의 물성을 연구하고 불의 변화를 탐구하는 일에 너무 익숙했던 것. 밤낮으로 그래프를 그려가며 공부하고 가마에서 뜨거운 ‘불산’과 마주했다.

 

 

 

가마를 땔 때 타오르는 불을 ‘불산’이라 부른다고 들었다. 산악부 출신다운데, 정말 가마의 불이 산처럼 느껴질 때가 있나? “대학 산악부 시절에 두려움 없이 많은 산을 다녔다. 산은 저마다 황홀했다. 가마를 다루며 목격한 불구덩이는 그 이상이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수려하고 오묘한 산이다. 땀 흘리고 살을 데여가며 가마를 때던 어느 날 ‘저건 산이다’ 느낀 순간 ‘불산’이라고 이름 붙였다.”

공고를 다녀 불을 일찍 알았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아버지가 서예가였던 걸로 아는데, 공고로 진학했다니 좀 어울리지 않는 느낌도 있다. 성장기에 특별한 사연이 있을 듯하다. “가평에서 나고 자랐다. 좀 복잡한 가족사 때문에 일곱 살에 서울로 불려가 의붓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당시 삼성가 이병철 회장도 알 정도로 유명한 서예가셨다. 일본에도 자주 오가며 이름을 알리셨고 본인의 서체를 따로 만들어 유명해질 정도였다. 어린 시절, 내가 주로 한 일은 아버지 먹 갈아드리고 목욕탕에서 아버지 등 밀어드리는 거였다. 일본에 다녀오신 아버지가 어느 날 ‘일찍 자립하려면 공고를 가라’고 추천하셨다. 출장 다녀올 때마다 대패, 끌, 망치 등 일제 공구와 연장을 사다주셨다. 말씀대로 공고에 진학했더니 나중엔 ‘그냥 기술자보다 예술 쪽으로 가는 어떠냐’고 물으셨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고려흑자가 남아 활성화돼 있는데 한국은 드문 것 같으니 네가 해보라’는 거였다. 무엇이 됐든 예술자기를 해보라는 권유였다. 대학에서 금속과 세라믹을 공부하고 나니 글로벌한 시각에서 많은 조언들을 아끼지 않으셨다. 내가 복이 많았다. 의붓아버지가 그렇게 잘해주시기가 힘든 건데, 늘 애착을 가져주셨다. 돌아보니 내겐 주변에 의인들, 은인들이 많았다.”

아버님의 조언과 지원이 주효했겠지만, 전업 작가를 하자면 생활고 등 난관이 꽤 있었을 텐데…. “당연히 어려움이 있었다. 77학번인데 대학 졸업 후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근무하다가 수도권 중소기업에서도 일했다. 대학원에서 세라믹 공부를 하고 나서는 국립공업연구소 도자기실험실에서 일하며 도자기와 더 가까워졌다. 그러다 가평에 가마를 마련하고 전업 작가가 되고 보니 생활고가 만만치 않았다. 간호사로 일하던 아내도 내 일을 돕기 위해 일을 그만두고 내려와 있었다. 두 딸이 소질을 보여 미대를 보내기론 했는데 변변한 학원 보낼 돈도 없어서 낭패였다. 부부가 함께 울기도 많이 울었다. 나 혼자 롯데월드에 구르마 끌고 나가 자기를 팔아보려 했지만 그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2008년에 고생만 하던 아내가 세상을 떠난 거였다. 하루아침에 생이별을 하자니 정신적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생활고도 더 커졌다. 주변 은인들 힘으로 간신히 버티던 시절이 있었다.”

생활고에다 아내의 죽음까지 겪으면 전업 작가의 길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 같다. 적어도 대중적이지 않은 흑자 도예는 내려놓기라도 했어야 하는 건 아닌지…. “신기하게도 포기하거나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은 한 순간도 하지 않았다. 매일 뒷산에 오르는 습관이 있었다. 영감이 떠오르도록 재촉하는 행위였다. 나는 영감이나 꿈, 열정이 없으면 큰일 날 거라 생각하고 살았다. 항상 그걸 유지하려고 애썼다. 산악부의 초등(보통 이상의 등급을 넘음. 또는 그 수준의 등급) 정신 같은,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산 듯하다. 이왕 들어선 길, 끝까지 간다는 정신으로 버텼다.”

애초에 흑자 도예로 이끈 계기도 산이라고 들었다. 화전민 터에서 주운 흑자 조각이 인연이었다던데…. “1979년이니 40년 전, 27박 28일로 태백산맥을 종주 중이었는데 까만색 옹기그릇 파편을 주웠다. 비가 많이 와서 태백에서 3일 헤매고 머물렀을 때였다. 당시 흑자가 백자, 청자에 비해 소홀해지는 것에 대해 문제를 느끼고 있었는데, 그걸 계기로 영감을 확실히 얻고 도전해보기로 한 것 같다.”

영감과 꿈, 열정, 운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외길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특징 같다. 자신을 지탱해주는 영감과 계시를 많이 믿는 편인가? “산악부 경험 때문인지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에서 발견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미 만들어진 것보다 내가 머리에서 만든 것을 실현하길 좋아한다. 그러니 영감을 중시하는 편이 된 것 같다. 2009년에 현리에 가평요를 만들고 흙을 찾으러 다닐 때 운악산 야간산행 중 기이한 경험을 했다. 지팡이를 짚은 산신령이 나타나 길을 따라오라 해서 가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기억을 더듬어 홀린 듯 길을 찾아가니 절벽 끝 어디쯤에 진짜 까만 흙이 있었다. 가져와 가마에 구워보고 나서야 현실인 게 실감 났을 정도였다. 상서로울 서, 가평 가, 흙 토를 써서 서가토라고 이름 지었다.”

인터뷰 나흘 전, 작가는 또 신기한 꿈을 꾸었다. 딸들한테도 말하지 않았다는 꿈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표정에서 또 하나의 영감이 스친 듯한 기색이 보였다. 내용인즉 자신이 물 위를 걷고 뛰더라는 것.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수십 차례 실패하다가 마침내 태연하게 물 위를 걷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내게 새로운 변화를 계시하는 것 같다”고 했다. 초심에서 다시 시작해 새로운 도전을 행하라는 암시이자 과제처럼 느껴졌다. 100세 할아버지도 농사를 짓고 90대 명장도 건재하는 시대니 대가로 성장하는 데 10년, 20년은 더 기다려도 되지 않겠냐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지난 30년은 구도와 실험, 앞으로 30년은 비로소 소명을 깨달은 예술가의 삶이라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문화훈장 수상의 의미가 꽤 크다고 말했다. 당연히 각오와 계획이 새로울 것 같다. “예술가로서 훈장을 받는 영광은 아무나 누리는 건 아닌 걸로 알고 있다. 훈장 추서자들 명단을 보니 이미 고인이 되신 분들이 꽤 많아 깜짝 놀랐다. 어깨가 무겁고 부담스러운 사건이다.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보답인데, 만들기만 하는 게 아니라 흑자를 상품화하고 보편화하는 작업에도 신경 써야 할 것 같다. 아마도 2세들, 우리 딸들의 도움이 막중하게 필요할 듯하다.”

지난 30년을 돌아보면 가마 그리고 흑자와 함께한 도전과 실험으로 요약된다. 앞으로 뭔가 새로운 발견을 위해 새로운 실험을 할 듯도 한데…. “안 그래도 어제 애들과 회의를 했다. 직업이 도예가이니 달항아리를 계속 만들어내고 조그만 잔을 200개씩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주변에선 예술훈장을 받은 작가가 조그만 잔이나 많이 만드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다 큰 작품을 내야 하는 거 아니냐고들 한다. 꼭 그래야 하는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훈장까지 받고 나니 하던 대로 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요즘은 달항아리 연작을 계속 하면서 추상 작품을 만들고 있다. 글로벌한 아티스트로 성장해야 한다는 다짐이 생겼다. 새로운 흙도 연구하고 개발하고 있다. 큰 욕심 없이 우둔하게 일해온 나에게는 큰 변화다.”

 

 

 

강원도 홍천 가평요는 청곡 김시영의 치열한 일터이자 재미있는 놀이터다. 가마도 있고 갤러리도 있고 살림집도 마련돼 있다. 작품을 체험하러 오는 손님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 서울 사는 두 딸이 아버지의 비서 겸 매니저 노릇을 하느라 줄곧 내려와 있다.

 

세상에 없던 흙을 만들다

달항아리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세계가 추상 조소로 옮겨가는 과정은 말만 들어도 흥미롭다. 우선 물레를 사용하지 않는 성형조소가 눈에 띈다. 흙 반죽을 물레에 놓고 돌리는 것은 원심력을 활용해 정형을 만드는 작업과정이다. 물레를 거두고 수작업 성형을 한다는 것은 비정형의 세계에 눈을 돌린다는 뜻. 추상으로 들어선 이상, 정형의 한계를 탈피해 무한한 영감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다.

배합한 흙을 땅에 구덩이를 파고 넣어두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화학작용을 일으킨 흙덩이를 가마에 굽고 기다린다. 1300℃에 이르는 동안 가마에선 예상치 못한 빛깔과 형태가 만들어진다. 입 모양이 찌그러지고 푹 가라앉은 달항아리가 나오기도 하고, 은하계를 옮겨놓은 듯한 기묘한 빛깔과 문양이 탄생하기도 한다.

태토(도자기를 만들 때 밑감이 되는 바탕흙)에 새로운 성분을 섞어 기존에 없던 새로운 흙을 만드는 작업도 ‘재미’와 ‘소명’이 얽힌 일거리다. 한 가지 흙과 다른 흙의 작용이 실험되며, 요리에 양념을 치듯 흙에 다른 성분을 첨가하는 작업이 반복된다. 큰딸의 귀띔으로는 무기재료학을 전공한 지인의 연구논문도 뒤진다고. ‘아버지는 늘 공부 중’이다.

아버지의 도전정신이 귀감이 되지만 딸들은 걱정스러운 점이 많다. 초등정신 운운하며 물불 안 가리는 아버지가 위태위태하게 느껴지는 것. 고열의 불과 싸우다 보면 데이거나 쓸리는 상처는 물론 점막이 말라붙어 무호흡증까지 일으킨다. 지난주에도 과식을 한 상태에서 무호흡증이 와 가족들을 잔뜩 긴장시킨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노여워하는 두 딸 앞에서 “앞으론 과식을 피하겠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운동을 좋아하는 체질이라 산악자전거와 록 클라이밍도 한다. 얼마 전에도 자전거로 한계령을 넘었다는데 약간의 부상을 입었던 모양. 딸들은 질색하지만 핸들과 페달을 놓을 기색은 영 보이지 않는다. 두 딸의 지청구를 들을 때마다 음식은 조금씩, 막걸리는 데워서 먹겠다는 약속으로 때우고 만다.

청곡의 흑자는 문화훈장 수상에 즈음하여 세계로 퍼져 나가는 중이다. 얼마 전 영국의 한 갤러리에서 작품 소장 전시를 결정했다. 흑자에 정통한 큐레이터가 부족한 요즘, 마침 흑자의 매력에 흠뻑 빠진 파란 눈의 큐레이터가 주선한 결과였다. 독일에서도 전시가 예정돼 있고 뉴욕도 소장 전시가 결정됐다. 내년엔 스코클랜드에서 전시가 열릴 예정이다. 아쉬운 것은 흑자를 이해하는 전문가가 드물다는 것인데 이는 오히려 해보다 득이 될 공산이 크다. 더 글로벌한 예술로 승화하기에도 오히려 족한 환경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주변에선, 특히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은 왜 굳이 어려운 일을 하냐, 달항아리에 주력하고 추상조소는 굳이 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그런데 제 추상작품을 인정해준 것을 보고 자신감이 생겼어요. 딸들이 조소 전공인 것도 조금은 영향이 있을 듯도 하네요. 달항아리 만드는 흑자 도예가이자 글로벌한 예술가로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지켜봐주세요.”

‘우둔한 은둔자’가 이제 세계적인 대가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사진(제공) : 조지철, 노고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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