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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생각도 한끗 차이

  • 기자명 이연숙
  • 입력 2022.09.24 08:58
  • 수정 2022.09.24 09:01
  • 댓글 0
  • 사진(제공) : 이연숙

 

 
명절 전날이면 시댁 큰집으로 음식 준비를 하러 갔다.
설 추석 상관없이 녹두는 두 말을 담가 전을 부쳤고
설에는 만두를 끝도 없이 빚었으며 추석에는 송편을 또 그 만큼 빚었다.
사촌형님은 만두에, 녹두에, 꽂이전에 들어가는 고기가 거의 돼지 한 마리는 된다며
뿌듯한 표정으로 싱글거렸지,만
나는 부쳐내도 끝없이 나오는 녹두 반죽을 볼 때마다 명치가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아침 아홉 시쯤부터 밤 열 시까지 전을 부치고 음식을 만들고 나면
온 몸이 기름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메슥거렸다.
추석에는 아침 여섯시에 차례를 지냈다.
차례상을 치움과 동시에 성묘하러 갈 음식을 각각 세 묶음으로 챙겼다.
한국전쟁 때 월남을 한 가족이다 보니 산소가 모두 제각각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큰 시숙이 사업용으로 사용하는 트럭 뒤에 타고 김포로 강화로 용인으로 털털거리며 달렸다.
하늘은 더 없이 맑았고 코스모스는 길 가에 함박 피었으며 바람은 기분 좋게 상큼했는데
그게 좋다는 생각을 해 볼 여유는 없었다.
15년쯤이었나? 거의 20년이었을까?
사촌형님이 둘째 며느리를 들이고서야 사촌과 함께하는 명절 이벤트는 끝이 났다.
 
+++
 
 

내비게이션이 일을 안 한다.

차는 지금 자동차 전용도로 위에 있는데 얘는 자꾸 좌회전을 하라고 한다.
껐다가 다시 켰다.
여전히 그 자리에서 이번에는 우회전을 하라고 하더니 이내 잠잠해진다.
사방팔방 정체가 되면 내비도 회로가 엉키는 모양이다.
요즘 컨디션이 바닥인 K는 역시나 막힌 길이 뚫리기를 기다리는 대신
어디라도 빠지는 길이 보이면 냅다 그 길을 따라 간다.
결국은 가고자 하는 방향의 다른 길에서 다시 정체 대열에 합류하게 되면서도 말이다.
정체에도 끝은 있었다.
제천 쪽이 고향인 사람들은 아직 나서지 않은 것인지 미리 간 건지
광주 시내 체증을 빠져나오자 제법 순탄하게 달리기 시작한다.
먼저 가서 텐트를 치고 있겠다던 K1도 이제 막 도착해서 장비를 내리는 중이었다.
추석에, 캠핑을 하기로 했었다.
전을 부치고 , 송편을 빚고. 상을 차리고, 상을 치우는 개미지옥 대신
주변은 산이고 바로 눈앞에는 시원한 물소리를 내며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 내가 있었다.
귀성 체증에 대한 두려움 반, 추석에 여행을? 하는 설렘 반에서
설렘의 깨끗한 한 판 승이었다.
차박을 하기에는 공간이 적당하지 않아서 지난 번 K2네가 썼던 버섯 텐트에서 자기로 했다.
텐트를 치는 동안 간식으로 떡볶이를 만들었다.
가래떡에 어묵 달걀에 집에서 만들어온 양념장을 듬뿍 넣고 라면 사리도 넣었다.
한 번 해 봤다고 전 보다 제법 익숙하다.
부탄가스를 연결한 스토브도 켤 줄 알고 불 조절도 잘 했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에야 대형 타프와 대형, 중형 텐트가 완성이 됐다.
K1이 넉넉하게 준비해 온 제철 새우를
한 쪽에서는 소금구이로 다른 쪽에서는 감바스를 만들었다.
하필 연휴에도 일을 하는 건진센터 덕분(?)에 연휴 마지막 말에 대장내시경 예약이 돼 있던 터라 안하던 편식을 해야 했던 게 옥의티 였다.
그 바람에 새우 한 입에 맥주 한 모금 마시고는
 
“크으~ 맛없다. 맥주가 이렇게 맛없을 수가.”
 
라지를 않나, K1은 한 술 더 떠
 
“어머니, 한 캔 정도 드셔도 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위스키 드실래요?”
 
라며 애처로운 눈빛을 발사한다.
 
‘아 진짜 요것들이..’
 
라고 생각하며 눈을 흘겼지만 그조차 즐겁다.
세상에, 추석이 즐거운 수도 있다니.
 
 

 

처음 시도하는 텐트 잠도 나쁘지 않았다.
일교차가 심해서 밤에 잠시 한기가 들었던 것 말고는 대체적으로 편안했다.
물소리와 함께 맞은 아침은 상쾌했다.
송편 대신 베이글에 스크램블 에그와 크림치즈를 발라 커피와 먹었다.
살갗에 닿는 산뜻한 아침 공기가 기분 좋다.
새로 산 등받이가 긴 의자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책을 읽었다.
글이 눈으로 들어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캠핑 허세를 있는 대로 부려봤다.
저녁에는 이틀째 장작에 불을 지폈다.
첫날에는 가래떡을 구웠고 둘쨋날에는 머시멜로를 구워 먹었다.
의자에 길게 기대 고개를 한껏 젖혀 하늘을 봤다.
추석 달이 떴다.
달무리가 달 주변을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별의 점을 이어 우리가 아는 모양을 찾느라 열심히 눈으로 좇았다.
연기가 내게로 온다.
눈물이 난다.
그래도 좋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다.
30여 년 전 그 때처럼 파랗게 높은 하늘에는 구름이 흩어져 있었고
바람은 여전히 상큼했는데 기분은 그 때와 달랐다.
달라진 게 어디 기분뿐이겠나.
우리는 지금, 그 때보다 나이 들었고
얼굴도 모르는 조상님께만 정성을 들이기보다 스스로를 먼저 챙길 줄 알게 되었으며
명절을 보내는 우리의 자세를 교정하는 중이다.
그건 결국 생각의 한 끗 차이였다.
 
 
 
편집/이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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