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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그로보와 스뱌토고르스키 수도원

2020-11-17 12:03

글·사진 : 이신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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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롭스코예 영지에서 삼나무 숲길을 따라 곧추 직진하면 부그로보라는 전형적인 러시아 시골마을이 있다. 또 푸쉬킨스키예 고리에는 스뱌토고르스키 수도원이 있다. 부그로보나 스뱌토고르스키 수도원이나 푸쉬킨 살아생전에 많이 찾던 곳. 푸쉬킨은 스뱌토고르스키 수도원에 묻혀 있다. 그의 묘역에는 헌화로 꽃 물결을 이룬다. 푸쉬킨은 사후에도 여전히 사람들 가슴속에 살아 남았다.
프스코프 강변과 나무들.JPG
프스코프 강변과 나무들.


일명 ‘푸쉬킨 마을’, 부그로보 마을

필자는 미하일롭스코예 영지에서 트리고르스코예 영지 길을 포기하고 여행 안내소의 타냐가 그려준 약도를 따라 직선으로 이어지는 삼나무 숲길을 따라 걷는다. 수령이 오래되고 빽빽한 삼나무 숲길 산책로는 최고다. 가는 길 중간중간에 간간히 벤치가 놓여 있고 십자가 무덤도 만난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 삼나무 숲길을 푸시킨은 말을 타기도 하고 상념에 빠져 걸었을 것이다. 숲길의 끝은 길지 않다. 이내, 찻길도 있고, 주차장도 있고, 영문판 마을 안내도가 있는 부그로보(Bugrovo, 1.3km)라는 마을을 만난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많이 서 있고 앞 쪽으로는 오래된 러시아 나무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룬다. 물레방앗간, 주택, 별채, 헛간, 정원 등이 한 마을을 이룬다. 1800년대, 러시아 촌락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작은 민속촌처럼 보인다.

 

부그로보 마을은 미하일롭스코예 영지와 스뱌토고르스키와 사빈카 언덕 중간에 있는 시골마을이다. 주변의 미하일롭스코예나 트리고르스코예 마을처럼 귀족들의 영지가 아니라 농노, 노동자들의 마을이다. 푸쉬킨은 이 마을을 방문해 농민들과 소통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의 시에도 언급했다. 푸쉬킨 시대에는 호수가에 제분소가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이 마을의 물레방아간의 첫 기록은 1761년. 당시 기장, 호밀, 메밀 및 기타 곡물을 빻아 밀가루로 만드는 방앗간이었다. 연못의 물이 흘러내리는 지점에 만들어진 물레방아간은 볼만하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전통가옥이 모여 있다. 가옥의 구조는 트리 로우(three-row, trehryadki) 형태다. 집은 세 개의 건물로 나뉘어져 있다. 검은 색과 흰색 집으로 나누고 그 옆에는 각종 도구를 보관하는 헛간과 외양간이 있었다. 지붕은 짚으로 덮었고 화재 안전을 위해 흙을 얹었다. 당시 프스코프 지방 농민들의 집 구조 형태다.

 

현재 이 마을은 부그로보라는 지명과 함께 “푸쉬킨 마을”로 불린다. 문학 민족학 박물관이 있는데 가이드 투어로 방문할 수 있다. 지역 공예품 전시관에서는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강과 핀스키 공원 그리고 주현절교회.JPG
강 너머로 보이는 핀스키 공원과 주현절교회.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온 가족 차에 동승

부그로바를 지나 아리나 알(Arina R.) 호텔까지 걷는다. 타냐는 이 호텔을 기점으로 푸쉬킨스키예 고리로 가는 지름 길이 있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초행인지라 지름길 찾다가 길이라도 잃으면 더 낭패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일단 호텔에서 밥이나 먹고 방법을 찾자는 생각으로 다가선다. 그때 막 식당(cafe" Basket)에서 나온 듯한 한 가족을 주차장에서 만나게 된다. 그냥 생각없이 ‘음식 맛있니?’라고 질문했을 뿐인데 그 말로 인해 푸쉬킨의 묘지가 있는 스뱌토고르스키 수도원까지 동승을 하게 된다. 그들은 이곳에서 수도원까지 걸어가기에는 거리가 멀기에 태워주겠단다. 막연하게 걸어야 하는 일이 힘들었는데 차를 태워준다니 먹는 것은 차후 문제다. 이 상황에서는 얼른 타야 한다. 그들은 그 순간 구세주다. 핀란드에서 작은 사업을 해서 영어를 좀 한다는 50대의 아버지와 부인, 그의 아들과 며느리(안톤과 율리아). 그리고 손녀(바실리자)가 함께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여행 온, 가족들이다. 한 눈에도 단란해 보이는 이 가족은 모두 성격들이 활달하고 유쾌하다. 

 

주차장에 내리자마자 부인은 필자에게 야생 국화 꽃 한 다발을 선물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 친절은 뭔가 했는데 알고 보니 푸쉬킨 묘지에 헌화하라고 사준 것. 참으로 좋은 사람들 덕분에 큰 짐처럼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볍다. 푸쉬킨스키예-고리의 버스 정류장이 가까워졌으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야생 들꽃 다발을 들고 그 가족들과 함께 수도원으로 들어선다. 일단 묘지 쪽으로 숨가쁘게 계단을 따라 오른다. 평평한 곳에 푸쉬킨 묘비가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 헌화를 한 흔적이 가득하다. 많은 들꽃들은 묘비 주변을 꽃바다를 만들었다. 필자도 푸쉬킨에게 헌화하고 픽업해준 가족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그들과는 헤어진다.

 

수도원 건물과 수도사들.JPG
수도원 건물과 수도사들.

 

스뱌토고르스키 수도원

푸쉬킨의 가족 묘지 옆에는 스뱌토고르스키(Svyatogorsky Monastery, 신성한 가정 수도원, Holy Assumption Monastery) 수도원이다. 푸쉬킨스키예-고리의 외곽에 있는 스뱌토고르스키 수도원은 스뱌티에 고리(Svyatyie Gory, 성스러운 산)의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다. 푸쉬킨의 영지 미하일롭스코예에서 남쪽으로 4.5km 떨어진 지점이다.

 

스뱌토고르스키 수도원은 1569년, 이반 4세 때 보로니치 요새를 보호하기 위해 세웠다. 프스코프의 건축가(Voivode Yuri Tokmakov)의 솜씨로 ‘프스코프 건축 스타일’을 따른다. 17세기 중후반까지는 매우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수도원이었다. 그러다 러시아 국경이 발트해 연안으로 이동했을 때 위상은 급격히 쇠퇴한다. 특히 1764년 예카테리나 2세의 법령 이후에는 수도원에는 소수인원만 존재했고 사무실도 오포크카(Opochka)로 옮겨졌다. 1924년에는 수도원은 폐쇄되었다. “러시아 애국 전쟁” 동안에는 수도원 건물이 심각하게 파괴되었고 1949년에 복원되었다. 수도원은 1992년에 러시아 정교회로 되돌아왔다. 현재 수도원에는 25명의 수도사와 수련생이 살고 있다. 러시아 국가 문화적 기념물이다.

 

크지 않은 이 수도원에서는 멋진 동종을 볼 수 있다. 원래는 이반 4세와 미하일 1세 표도르비치(Tsar Mikhail Fedorovich, 1596~1645년) 왕이 하사한, 고리유노프(Goryunov)라고 불리는, 복음(Gospel)이 새겨진 15개의 동종이었다. 현재의 동종은 1753년, 모스크바의 공장(Tyulenev)에서 주조한 동종으로 종 한 개는 문 입구에 부서진 채로 남아 있다.

 

가정성전의 종탑.JPG
가정성전의 종탑.

 

 

푸쉬킨과 수도원

수도원 경내로 들어서는 길은 홀리 게이트와 니콜스키 문(Nikolsky Gate)이 있는데 보편적으로 쇼핑센터가 있는 니콜스키 문으로 들어선다. 쇼핑센터 안뜰에서 수도원 성역으로 연결된다. 두 개의 돌 계단은 가정 대성당과 푸쉬킨 가족 묘지(Hannibals-Pushkins)로 이어진다. 푸쉬킨의 묘는 동쪽 제단 벽의 언덕 가장자리에 있다. 절단되지 않은 석판의 가파른 46계단을 올라서야 한다. 묘비 양쪽에는 작은 돌판 울타리가 있다.

 

푸쉬킨은 조상들의 묘역에 참배하러 왔다. 고대 돌담으로 둘러 쌓인 울타리, 정통 교회의 연철((鍊鐵) 문을 포함한 수도원의 모든 옛 것들이 시인을 사로 잡았다. 시인은 수도원 도서관을 자주 이용했는데 그 안에서 흥미로운 자료들을 발견했다. 손으로 쓴 책들, 문서, 연대기 등. 푸쉬킨은 수도원 생활을 익히고 승려의 태도 및 특성을 배우고 수도원 주변 시람들의 옛 이야기들을 모았다. 그의 인기 있는 역사 드라마인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의 등장 인물들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 당시 이오나(Iona) 수도사는 푸쉬킨의 고해신부였다.

 

스파소-미로쉬스키 수도원의 변형성당.JPG
스파소-미로쉬스키 수도원의 변형성당.

 

 

푸쉬킨은 죽기 1년 전인 1836년, 스뱌토고르스키 수도원에 어머니를 매장했다. 죽을 것을 예측이나 했을까? 그때, 푸쉬킨은 본인이 묻힐 땅을 사두었다. 푸쉬킨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매장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그 도시를 무덤으로 만든 습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해인, 1837년 1월 29일, 푸시킨은 “예브게니 오네긴”의 주인공처럼 결투로 죽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스뱌토고르스키 수도원으로 관이 옮겨졌다. 푸쉬킨 매장 전날 밤 관이 서 있었던 자리가 현재 그의 무덤이다.

 

1837년~1840년까지는 단순한 검은색 십자가와 "푸쉬킨"이라는 흰색 글자만 새겨진 무덤이었다. 그러다 1839년 말, 미망인 곤차라바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조각가(A.M. Permagorov)에게 대리석 오벨리스크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1840년 가을, "1799년 5월 26일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알렉산더 세르게예비치 푸쉬킨은 1837년 1월 29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습니다"라는 비문을 새긴 새 무덤이 만들어졌다. 이곳에서는 매년 7월 첫째 일요일에 푸쉬킨 축제가 열린다.

 

올긴스카야 예배당 (2).JPG
올긴스카야 예배당.

 

 

푸쉬킨 동상과 푸쉬킨 과학 문화센터

스뱌토고르스키 수도원을 벗어나 대로변으로 나오면 길 건너편에 푸쉬킨 동상이 있다. 기념비는 눈에 띄는 곳에 있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밝은 회색 화강암으로 만든 청동상과 받침대가 있다. 받침대에는 “A. S. Pushkin 1799-1837 "라는 비문이 적혀 있다. 이 기념비는 1959년, 도로의 분기점(Lenin St., Novorzhevskaya St.)에 설치되었다. 마치 푸쉬킨은 수도원으로 가는 길목에 앉아 다음 작품을 구상하는 모습이다.

 

동상을 보고 맨 처음에 도착한 터미널까지 걸어온다. 버스가 많다고 해서 염려하지 않았는데 표가 매진상태다. 오후 3시도 안되었는데 표는 6시20분이다. 보편적으로 버스가 매진 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이곳 터미널의 시스템은 또 다르다. 좌석이 없으면 입석으로는 버스를 탈 수 없다는 것. 어쩔 수 없이 3시간을 떼워야 한다.

 

그래서 푸쉬킨 묘지에서 걸어오면서 본 푸쉬킨 과학 문화센터(Scientific and Cultural Centre)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이곳이 어떤 곳이야’라고 질문했을 뿐인데 그 말을 알아 듣는 이가 아무도 없다. 왜 사이언스(과학관)라 불리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느낌으로는 지역 관공소로 일종의 지역 박물관인 듯하다. 스태프들은 이미 다녀온 푸쉬킨 영지, 미할콥스키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어차피 언어가 통하지 않은 나라이니 실랑이 할 생각은 없다. 이야기 통하든, 안통하든 별 상관없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으니까. 그냥 시간 떼우기였을 뿐이었고 이 박물관을 티켓 사서 구경할 생각도 추호도 없었다. 관심 하나도 없는 ‘과학관’이라지 않은가?

 

그때 손을 부들부들 떠는 중년 남자가 다가 왔다. 이 관공서 직원이란다. 영어를 좀 하는 그였지만 서로 소통에는 애로가 있었다. 그 직원은 “카레아는 처음이고 카레아 악센트를 이해 못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유러피안 영어 악센트에만 익숙다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상황이지만 따져 물을 필요가 없다. 그를 이해시키는 방법은 필자의 블로그를 보여 주는 게 더 낫다. 어차피 박물관은 폐장되어 셔터가 내려 있었고 관람할 생각도 없어서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웬일로 문을 열어 관람하게 해준다. 굴러온 떡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전시된 많은 그림 중에 푸쉬킨을 연상할 수 있는 것들만 대충 사진 찍는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 과학 문화 센터는 1992년에 푸쉬킨 보호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과학 문화 센터의 설립은 1924년. 과학 아카데미의 푸쉬킨 하우스가 조직되었고 1969년 이후부터 수년 동안 많은 전시회가 열렸다. 푸쉬킨 테마는 물론 예술가들의 개인 전시회가 열렸다. 음악 속의 푸쉬킨", "푸쉬킨과 체호프", "푸쉬킨과 러시아 작가의 그림" 등. ‘연구 및 교육 센터의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는 동시에 문화 역사 기념물의 국가 아카이브’로 현대적인 건축물이다.

 

예배당에서 본 크렘린.JPG
예배당에서 본 크렘린.

 

 

버스 터미널 앞 카페에서 시간 떼우기

과학 문화센터를 보고 나서도 시간은 아주 많이 남았다. 터미널 근처에는 마땅한 식당도 없다. 어렵사리 찾은 곳이 ‘울프스’라는 작은 카페다. 카페의 젊은 여성은 매우 친절하지만 뭔가 안절부절하다. 그때 나타난 여주인 나탈리아(54세). 그녀는 영어를 잘하는 편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고급 호텔 매니저였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돈을 모아서 현재 울프스라는 카페를 두 군데 갖고 있단다. 가장 궁금한 것이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의 사유재산과 고용제도였다. 그동안 다녔던 숙소는 주인을 볼 수 없었고 시간제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집은 주인이 있고 아르바이트 생이 있는 민주주의 경영형태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결국 원하는 답변은 듣지 못했다. 그녀가 구사하는 단어는 어려워서 말 뜻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사적인 이야기만 묻게 된다. 그녀는 25년 전에 이혼 후 재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과 지금은 애인으로 지내고 있단다. 결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단다. 나탈리아에게는 딸이 있는데 프로 사진가란다.

 

시간은 흘러가게 마련이다. 지루하게 3시간이 흘러갔고 프스코프행 버스에 오른다.

이렇게나마 푸쉬킨의 흔적을 본 것만으로도 다행이지만 주마간산으로 보고만 푸쉬킨의 흔적들이 깊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행여 다시 갈 기회가 된다면 며칠간 이곳에 여장을 풀고 다시 여행하고 싶다.(계속)

 

Data

부그로보 마을(village Bugrovo)

주소

Bugrovo Village 1a, 181385 푸시킨스키예 고리

전화 

+7 811 462-14-54

 

스뱌토고르스키 교회

주소

Pushkinskaya Ulitsa, 1, 푸쉬킨스키예-고리

전화

+7 811 462-33-89

웹사이트

https://svyatogorsky.org/e-mail:monastery@svyatogorsky.org

개방시간

6시 30분~21시

 

푸쉬킨동상 주소

Lenina St., Pushkinskie Gory

 

숙박정보

부그로보 마을(Gostevoy Dom V Bugrovo)과 근처에 푸쉬킨의 유모 이름을 아리나호텔(Arina R, 주소:1A, der. Bugrovo, 전화:+7 811 462-11-00) 등이 있다.

 

여행 포인트

푸쉬킨스키예-고리에서 각 여행지를 도보로 이동하기는 쉽지 않다. 대중교통편도 거의 없다. 이럴 때는 택시기사의 번호를 따서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2일 정도 머물면서 따로따로 찾아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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