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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천년고도 토르조크에서 만난 르보프 건축가

2020-07-28 11:59

글·사진 : 이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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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조크 트베르차 강변 쪽으로 가면 무수히 많은 교회가 눈에 띈다. 강과 수도원, 거기에 아름다운 가옥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가히 그림 같다. 여행자의 묶은 시름을 한 눈에 녹일 만큼 빼어난 풍치다.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은 예전에 비하면 ‘새발의 피’. 한때 이 곳에는 수도원이 50개가 넘었다고 한다. 교회의 건축물에는 아름다움과 함께 엔티크한 분위기가 물씬 난다. 이 곳의 수도원 건축에는 당대의 유명한 니콜라이 르보프가 있었다.(일부 사진은 구글에서 퍼옴)
트베르차 강에서 바라본 수도원.JPG
트베르차 강에서 바라본 수도원

 *트베르차 강과 수도원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토르조크

이제는 본격적으로 토르조크 여행을 해야 할 시점이다. 아주 기분 좋게 토르조크 안쪽으로 여행을 떠난다. 푸쉬킨 공원에서 미리 위치를 파악해두었다. 교회의 둥근 종탑이 여러 개 눈에 띄었기에 그 곳을 방위 삼는 중이다. 10여분 정도 걸으니 트베르차 강 줄기가 모습을 드러낸다(트베리는 볼가강과 트베르차 강의 합류지점이지만 토르조크는 볼가 강의 지류다). 강을 사이에 두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눈 앞에 있다. 특히 수도원, 교회 건물이 많다. 이 작은 마을에 왜 이렇게 많은 수도원이 있을까? 자료에 의하면 한때 50개가 넘었다고 한다. 분명코 이 도시의 입지가 무척 중요했거나 강성했었기 때문이리라. 일단 자료를 통해 토르조크의 역사부터 살펴봐야 한다.


*13~14세기 무역 거점지, 침략 많아

토르조크의 최초 기록은 1139년, 러시아 연대기에 처음 등장한다. “신규 협상(New Bargaining)”과 “토르조크(Torzhok)”라는 이름이 연대기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러시아 고고학자들의 의견은 다르다. “토르조크는 이미 10세기부터 고대 마을이 있었고 1038년, 북쪽에서 트베르차 수로를 따라 볼가 강에 이르기까지 슬라브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강변 옆의 ‘살만한 터전’에는 작은 한적한 마을들이 생겼다”고 주장한다.


토르조크는 15세기 후반까지 노브고로드 공국에 속했다. 당시 토르조크는 수즈달에서 곡물이 배달되는 유일한 통로였다. 노브고로드와 수즈달 사이의 중요한 무역 루트인 토르조크의 경로가 차단되면, 노브고로드는 곡물과 기근 현상을 겪게 되는 상황이다. 그만큼 토르조크는 경제 중심지로 중요했다. 토르조크라는 도시 이름은 토르그(torg) 또는 트레이드(trade)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 거래 장소, 지역, 시장(place of trade, area, market)"이라는 단어다.


중요한 무역 중심지는 침략도 잦고 영토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다. 1238년, 몽골-타타르의 바투 칸은 그해 2월 21일부터 3월 5일까지 토르조크를 공격했다. 토르조크는 끝까지 버텨냈다. 토르조크의 저항으로 바투 칸은 노브고로드를 점령할 수 없었다. 또 리투아니아 군대에게도 자주 공격당했다 1333년, 1334년에는 모스크바 공국에게도 두 차례 침입을 받았다. 1372년, 트베리 왕자 미하일 알렉산드로 비치(Mikhail Alexandrovich)의 공격을 받았다. 결국 1478년, 노브고로드 공국의 나머지 지역과 함께 모스크바의 대공국(통치자 이반 3세)에 통합되었다.


17세기, 토르조크는 폴란드 군주인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Wladysław IV Vasa 1595~1648)의 군대가 주둔했다. 그 때 이 마을은 많이 파괴되었다. 교회와 수도원은 강탈당했으며 많은 주민들이 살해당했다 보리스글렙 수도원의 고대 브베덴스키(Vvedensky) 교회는 사람들과 함께 불살라졌다.


*18세기부터 확고한 무역 중심지로 자리잡아

1703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 이후, 토르조크는 두 수도 사이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모스크바~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구간의 중요한 역참로였다. 1775년, 토르조크는 시로 승격되었다. 1897년, 토르조크에는 약 1만 3천 명의 주민이 거주했다. 21개의 공장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증기 분쇄기(Steam mill, 토르조크는 빵의 주요 거래지였다)와 8개의 제혁소(製革所)다. 특히 수공예품이 발달했다. 레이스와 소위 "노보토르치(Novotorzh) 바느질"이 유명했다.


토로조크의 바느질 수공품은 모로코와 벨벳 천에 금, 은 및 실크 실로 자수를 놓았다. 당시 29개의 교회, 젬스트포(zemstvo, 농촌 자치 단체) 병원, 10개의 학교가 있었다. 1917년 10월부터 소련 점령기에 들어간다. 1929년 7월, 트베리 지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작은 시골 마을은 생각보다 그 역사가 깊다.


르보프가 설계한 보리스글렙 수도원.JPG
르보프가 설계한 보리스글렙 수도원

 *대건축가 르보프의 동상과 로툰다

일단 트베르차 강을 연결하는 보행자 다리(Pedestrian Bridge)를 건넌다. 이 다리는 열쇠가 주렁주렁 달린 그냥 평범한 강 다리로 보이지만 그 유서는 깊다. 19세기 말에 세워졌다. 얼마나 견고하게 만들었는지, 제 2차 세계 대전 중, 난민은 물론 탱크 및 중장비 기둥의 무게를 이겨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구조적인 힘을 크게 잃지는 않았지만 변형이 생기기 시작하자 1990년대에 수리를 했고 이제는 보행자 다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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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보프초상화1780년

 다리를 건너자마자 만난 것은 로툰다 예배당((Rotunda, Holy Cross Chapel)과 니콜라이 르보프(Nicolai Alexandrovich Lvov, 1753~1803)의 흉상이다. 흰색이라서 느낌이 이상한 시내버스가 로툰다(1814년)를 가리고 있어 제대로 볼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이 낡은 예배당은 르보프의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건물로 꼽힌다. 12개의 흰색 기둥과 노란색이 칠해져 있는 이 예배당은 르보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르보프 사후 11년 후에야 완공 된 건축물이다. 니콜라이 르보프의 건축물을 접한 것은 로툰다 예배당이 처음 아니다. 트베리에 승천교회가 있고 푸쉬킨의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올레닌의 집도 그의 작품이다. 특히 보리스글렙 수도원을 비롯해 르보프의 작품이 토르조크에는 아주 많다. ‘르보프’에 대해 알고 여행을 떠나야 훨씬 풍요로운 여행이 된다.


르보프의 집.JPG
르보프의 집

 *토르조크 가난한 시골 태생 르보프의 청년 시절

자료에 따르면 르보프는 류리크 왕국의 왕족 후손으로 토르조크에서 16km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인 니콜스코예(Nikol'skoye)에서 태어났다. 르보프는 10살 때,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육군 연대(regiment)’에 들어갔다. 1770~1771년(17세~18세),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이즈마이로프스키(Izmaylovsky) 연대에서 훈련을 받는다. 그는 군대와 외무성의 외교 특사로 고용되어 독일공국 및 덴마크를 1775년(22세)까지 여행한다. 그해 7월, 모두 사임했으나 1년 후 다시 외교관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번에는 런던, 마드리드, 파리 및 네덜란드를 여행한다. 그때 파리에서는 자주 연극 공연을 즐겼고 이반 켐니츠(Ivan Khemnitser, 1745~1784, 군인, 외교원, 우화작가)와 바쿠닌(Bakunin) 가족과 친하게 지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 그는 바쿠닌 주택을 기반으로 개인 극장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의 월급으로는 아파트 임대료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1779년(26세)까지 친구들의 집에 얹혀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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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르보프부인, 1778년작)

 *르보프의 세기의 러브 스토리

그 즈음(1778년 또는 1779년 경), 마리아 다코바(Maria Dyakova)(그녀의 셋째 여동생(Alexandra)은 바실리 카프니스트(Vasily Kapnist, 1758~1823)와 약혼. 귀족 바실리는 시인, 극작가로 르보프와 평생 절친이었다)와 사랑에 빠진다. 마리아의 아버지는 당시 유명한 정치가로 르보프를 첫 눈에 불신하고 있었기에 이 둘은 1780년(27세) 11월 8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한 교회에서 비밀리에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에도 마리아는 3년을 더 부모 집에서 산다. 1783년(30세), 이들의 결혼은 발각되었는데 당시는 르보프의 사회적 지위가 약간 올랐기에 마지못해 결혼을 승낙하게 된다(이 둘의 러브스토리는 소설의 주제가 되었다. 우크라이나 화가인 드미트리 레비츠키(1735~1822)가 그린 마리아의 초상화(1778년 작)가 남아 있다). 몰래 결혼한 1년 후인 1781년(28세) 4월, 르보프는 작센 왕국 드레스덴의 러시아 대사관의 비서로 임명되었다.


그는 드레스덴 대신 바르샤바와 비엔나로 정부 사업을 위해 떠났는데 이때 이탈리아(리보르노, 피사, 피렌체, 볼로냐, 베니스)를 개인적으로 여행한다. 이탈리아 여행 중에 베네치아의 데메트리오 모세니고(Demetrio Mocenigo, 1723~1793) 백작을 포함해 러시아 법원과 관련된 여러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1783년 5월, 그는 외무부에서 우체국으로 옮겨 1797년까지 알렉산더 베즈보로드코(Alexander Bezborodko, 1747(6)~1799, 장관, 수석 건축가) 밑에서 복무한다. 그의 예술과 과학 업적은 대부분 정부와 함께 이루어졌다. 1783년 그는 러시아 아카데미의 첫 36명의 회원의 일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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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보프가만든가치나의궁전

 *르보프가 만든 건축물과 작품들

르보프의 건축 작품 목록에는 87개의 건물과 국가 영지가 있다.

첫 번째 작품은 1776년(23세) 여름, 파벨 1세(Paul I)의 신부인 뷔르템부르그(Württemberg)의 소피아 도로시아(Sophie Dorothea)를 위한 집안 인테리어를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의뢰받는다. 그러나 르보프의 대부분 작품은 1780년대. 당시 실세 정치인 베즈보로드코(Alexander Bezborodko), 시인 데르자빈(Derzhavin), 올레닌의 다차(Olenin Dacha), 정치인 코추베이(Kochubey), 보론초프(Vorontsov) 및 시인 뱌젬스키(Vyazemsky)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의 집을 건축했다.


1780년(27세), 베즈보로드코는 르보프를예카테리나 여제에게 소개한다. 여제는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모길료프(Mogilev, 현 벨루루시)에 있는 성 요셉 교회를 르보프에게 의뢰한다. 이 프로젝트로 그는 황실 아트 아카데미(Imperial Academy of Arts(1786))의 명예 회원이 되었다. 신고전주의 원형 홀 교회는 1798년까지 그의 감독 하에 건축되었다. 이 교회는 1802년에는 성당이 되었고 1934년에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가 1937년에 철거되었다.


같은 해인 1780년, 르보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피터 네바 게이트(Peter Neva Gate)와 폴 요새(Paul Fortress)의 재설계를 맡았다. 1784년~1787년까지 오래된 목조 건물을 허물고 화강암으로 바꿔 요새 벽을 완벽하게 만들었다. 네바 게이트의 토스카나(Tuscan) 포털은 최고의 건축 작품은 아니었지만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1783년 르보프는 우체국 국장이 된 베즈보로드코를 위해 새 건물을 설계한다. 1789년에 완공된 베즈보로드코 궁전은 큰 프로젝트였다. 궁전이 완공된 후, 르보프 가족들은 궁전 북쪽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재건 된 이 건물은 현재까지도 남아 인기를 누린다. 사무국장 베즈보로드코는 1799년 사망할 때까지 르보프의 진정한 후원자였다. 많은 개인 및 공공물을 그에게 맡겼다.


또 다른 고위 고객은 도자기 공장 국장인 표트르 뱌젬스키(Pyotr Vyazemsky, 1792~1878, 푸쉬킨의 가장 친한 친구) 왕자였다. 그에게 ‘영지’ 건축을 맡겼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삼위일체교회를 쿨리치(Kulich, 빵)와 파스카(Paskha, 러시아 축제요리)(1785~1787)로 부른다. 주요 원형 홀은 이탈리아 로마의 베스타 신전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피라미드 종탑 스타일은 러시아 건축 형태와는 많이 다르다. 그는 알렉산더 1세 시대의 제국 스타일과 고대 이집트 건축물의 부흥 선구자였다.


보리스와 글렙 수도원.JPG
보리스와 글렙 수도원

 *토르조크의 보리소 글렙스키 수도원 설계

같은 시기에 르보프는 토르조크의 보리소 글렙스키(Borisoglebsky) 수도원을 설계했다. 순수한 신고전주의(네오클래식) 5돔 건축 스타일(루소-비잔틴(Russo-Byzantine) 포함)은 르보프의 사후에도 수십 년 동안 따라했다. 이 수도원의 종탑은 르보프의 마지막 디자인이었다. 이 종탑은 르보프 사망 후 표도르 아나닌(Fyodor Ananyin)에 의해 1811년에 완공되었다. 1798년, 르보프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유명한 건축가인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 1508~1580의 건축 사서(建築四書,1570년 출간)를 번역해 본인의 의견을 담아첫 번째 책을 출판했다.


두 번째는 러시아어로 출판하는 작업을 시도한다(첫 번째는 1699년, Prince Vasiliy Lukich Dolgorukov(1672~1739) 왕자가 손으로 쓴 사본이 배포 됨. 완전하지 않은 팔라디오 러시아 번역본은 1938년까지 출판되지 못했다). 이 작업은 8년이 걸렸다. 르보프는 1616년에 베네치아에서 출간된 책 200장이 넘는 원본 판본을 구리로 직접 새겼다. 르보프는 "우리나라에 팔라디오의 풍미가 번성하기를 원한다. 프랑스의 ‘비틀기’와 영국의 ‘세련미’는 이미 많은 모방자들이 있다 특히 그는 프랑스 구조를 비판했다.


*50세에 병사하다

1796년 11월, 왕위에 오른 파벨 1세(Paul I)는 어머니(예카테리나)의 정치인 대부분을 기각했지만 외무 담당인 베즈보로드코는 유지했다. 파벨은 르보프에게도 주정부의 지원과 새로운 임무를 맡겼다. 물론 빈센조 브레나(Vincenzo Brenna,1747~1820, 이탈리아 건축가이자 화가, 파벨의 집)가 맡은 작업보다는 중요하거나 수익성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1797년 4월, 파벨은 르보프를 모스크바로 파견해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Bartolomeo Rastrelli, 이탈리아 건축가)가 만든 그랜드 크렘린 궁전(Grand Kremlin Palace)의 재설계를 맡겼다. 르보프는 성채 안의 3부분을 신고전주의 궁전으로 바꿀, 방대한 계획을 세웠다. “공원과 같은 분위기의 친밀한 왕궁”이 주테마였다. 그러나 예비 작업 1년 후 프로젝트가 취소되었다. 르보프가 설계하려 했던 크렘린 궁전의 모든 변경 사항은 나중에 콘스탄틴 톤(Konstantin Thon)이 맡아 현존 그랜드 크렘린 궁전에 거의 반영했다.


1799년 4월, 베즈보로드코가 사망하자 르보프의 프로젝트도 거의 사라졌다. 르보프 자신도 1800년 9월에 병에 걸렸고 1801년 4월에 간신히 회복되었다. 1801년 7월, 르보프는 "다른 세계에서 목발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새로운 황제 알렉산드르 1세(1777~1825, 파벨의 아들)를 찾아 가서 새로운 앨범을 발표한다. 1802년 10월, 알렉산드르 대왕은 르보프에게 사법 평의원 순위를 부여하고 그를 주(State) 가구 원정대장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르보프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어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코카서스로 떠나게 된다.


남쪽으로 가는 길에 그는 타만(Taman)에 있는 츠무타라칸(Tmutarakan) 석재의 기초를 설계하고 건축했으며 베슈타(Beshtau) 지역의 산에 있는 광천에 대한 설명을 썼다. 하지만 온천욕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모스크바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망했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그는 고향의 원형 홀(1784년에 디자인하고 1790년대에 건축)에 묻혔다. 부인 마리아는 남편 사후 4년 뒤(1807년)에 사망했다. 그들의 세 딸(엘리자베타(1807년이14~18세), 베라, 프라 스코브야)중 엘리자베타 르보프(Elizaveta Lvov)는 데르자빈(Derzhavin, 1743~1816, 군인, 시인)의 비서(1809~1811)로 일했다. 그녀는 음성 회고록을 남겼다. 르보프의 두 아들은 일찍 황실에 합류했지만 주목할 만한 것은 없다.


*르보프 사촌은 유명한 음악가

르보프의 사촌이야기도 해야겠다. 표도르 르보프(Fyodor Petrovich Lvov, 1766~1836)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황실 예배당의 지휘자였다. 표도르의 아들 알렉세이(Aleksey Fyodorovich Lvov, 1799~1870)도 아버지의 뒤를 위해 황실 예배당에서 일했다. 그는 러시아 제국의 ‘국가’인 ‘God Save the Tsar(Bozhe, tsarya khrani)’의 작곡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헥터 베를리오(Hector Berlioz)는 알렉세이 르보프(Aleksey Lvov)를 "미덕을 갖춘 저명한 음악가라‘고 말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그의 재능은 놀랍다. 직접 그의 음악을 들어보라. 바이얼린 선율은 정말로 아름답고 놀랍다.(계속)


*Data

*로툰다 예배당:9th Yanvarya 광장의 4번지

*르보프의 건축물들:토르조크에서의 르보프의 건축물은 토르조크의 보리스글렙의 종탑, 이슬람 교회, 세례 요한의 침례교회 등이다. 가까이에는 르보프의 고향인 니콜스코예(Nikol'skoye)에 그의 묘지와 원형 홀이 있다. 그 외에도 즈나멘스코예-라에크(Znamenskoe-Raek, 1766년 건축)마을에 가면 멋진 교회 건축물을 볼 수 있다. 국가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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