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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조크에서의 푸쉬킨의 여정과 사랑 이야기

2020-07-24 17:32

글·사진 : 이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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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쉬킨은 살아생전 토르조크를 20번 이상 찾았다. 그는 이곳 포자르스키 호텔에서 만들어주는 돈가스에 반해 친구들에게 꼭 먹어야 한다는 편지를 썼다. 올레닌의 딸과는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하려 했다. 주변 마을에는 그의 친한 친구가 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푸쉬킨의 여인 중 한 명인 ‘안나 케른’의 묘지가 토르조크에서 7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살아생전 파란만장한 삶을 산 푸쉬킨에게 토르조크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자는 그의 여정이 참 궁금하다(토르조크의 푸쉬킨 흔적에 관련된 사진은 전무하다. 그래서 사진의 일부는 구글에서 퍼왔다. 일부는 토르조크의 사진으로 대체한다.)


푸쉬킨 초상화.JPG
푸쉬킨 초상화

 *‘사랑의 달인’ 푸쉬킨

필자는 앞으로도 푸쉬킨(1799~1837) 이야기를 여러 번 할 것이다. 푸쉬킨은 38세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여러 지역에 흔적을 남겼다. 이미 “모스크바”와 “트베리”에서도 푸쉬킨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곧 이어 “프스코프”의 푸쉬킨의 영지에 대해서도 말할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편에서도 말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푸쉬킨은 당대의 여행작가였을 것이다.


“토르조크의 푸쉬킨”에 대한 한국어 자료는 전무해서 그냥 ‘푸쉬킨 박물관’이 있으니 찾으면 좋아‘라고 말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자료를 찾고 또 찾게 된다. 소개를 하는 이유는? 독자들은 필자처럼 아무것도 이해 못하고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푸쉬킨과 결혼이 오간 안나 올레니나.JPG
푸쉬킨과 결혼이 오간 안나 올레니나

 토르조크에는 푸쉬킨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랑이야기가 있다. 안나 올레린(Anna Olenina)과의 사랑 이야기다. 푸쉬킨은 나탈리아 곤차로바와 결혼하기 전까지 무수한 여인들과 사랑에 빠졌다. 푸쉬킨은 곤차로바가 113번째 사랑이라고 말했다. 자료에 드러난 ‘공식’ 여성만 해도 엄청나게 많다. 그러니 토르조크의 사랑이 그의 기억에 남아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의 사랑스타일은 거의 엇비슷하다. 종이에 여성의 얼굴(주로 옆모습)을 스케치를 하고 낙서를 끄적인다. 그리고 연서를 보낸다(그의 연서들은 현재 시로 남았다).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 세기적으로 유명한예술가들은 ’예술적 영감‘ 얻는 다는 핑계로 무수한 여성들과 사랑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푸쉬킨은 그 수치가 엄청나게 높아 이탈리아 카사노바나 스페인의 돈주앙도 울고 갈 지경이다. 푸쉬킨이 일찍 죽지 않고 더 오래 살았다면 글을 쓰는 필자로서는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었을 게다.


푸쉬킨공원에서의 토르조크.JPG
푸쉬킨공원에서의 토르조크.

 *20번 이상 토르조크에 머물다

작가들은 글을 남긴다. 본인의 경험이 자연스레 글에 배어 나타나게 마련이다. 푸쉬킨도 시집, 편지 및 스케치에 "토르조크(Torzhok)"라는 지명을 남겼다. 푸쉬킨의 대표 명작 소설인예브게니 오네긴(Eugene Onegin)이 토르조크의 ‘제빵사 및 재단사’의 주인이었다는 설도 제기된다. 푸쉬킨이 남긴 토르조크에 대한 몇 가지의 기록들을 모아 본다.


토르조크마을.JPG
토르조크마을

 푸쉬킨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동안 토르조크에 머물렀다. 1811년~1836년까지 25회(혹은 27회) 토르조크를 찾았다. 1년에 한번 꼴이다. 첫 방문은 푸쉬킨 12살 때다. 모스크바에서 삼촌(Vasily Lvovich)과 함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차르스코예 셀로(Tsarskoye Selo Lyceum) 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르러 가는 길이었다. 1826년(27세)에도 토르조크를 방문한다. 노보로시야(우크라이나 남동부 지역)로 가는 길에 친구 울프(Pavel Ivanovich Wulf, 1775~1858)의 영지로 갔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때 토르조크의 유명 특산품인 자수제품과 벨트를 구입했다. 푸쉬킨은 토르조크에 오면 자수품 매장을 꼭 방문했는데 그 날은 상품들을 신중하게 보고난 후에 호텔 방으로 돌아와서도 자수품 구입에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고. 마침내 마리 바실치코프(Marie Vassiltchikov, 1813~1849) 공주에게 생일 선물을 골랐다며 공주에게 쓴 편지가 남았다.


1828년(29세),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토르조크를 방문했다. 그는 친구 소볼레브스키(Sergei Sobolevsky, 1803~1870, 작가)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여가 시간에 토르조크의 포자르스키(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튀긴 커틀릿을 먹고 가시오”라고.


5년 후인 1833년(34세), 푸쉬킨은 오렌부르크와 우랄스크에 이어 토르조크에 도착했다. 8월 21일,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어제 토르조크에 왔는데 소볼레브스키가 린넨 천을 더럽혔다. 오늘 우리는 8시에 일어났고 아침(돈가스)을 먹었다.”


1834년(35세), 토르초크에 푸쉬킨이 다시 등장했다. 그는 모스크바에 사는 친구 파벨 내쉬코킨(Pavel Voinovich Nashchokin, 1801~1854, 차르스코예 셀로 학교의 절친)에게 편지를 보냈다. "보니?" 1836년(37세), 2월과 5월에 두 번 모스크바로 여행했다. 그는 “토르조크에 들를 시간이 없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도 없었다”고 기록했다.


포자르스키 호텔.JPG
포자르스키 호텔

 *푸쉬킨이 머물던 포자르스키 호텔

푸쉬킨은 토르조크에 도착하면 포자르스키 호텔(Pozharsky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18세기에 세워진 이 호텔은 처음에는 여관급 수준이었다. 1834년, 포자르스키의 딸인 다리아 포자르스카야(Daria Evdokimovna Pozharskaya)가 아버지의 대를 잇게 된다. 이 호텔에 푸쉬킨이 머물면서 러시아 전역에 유명해지게 된다. 당대의 유명한 작가, 예술가 등이 찾아 들었다. 호텔 이용객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1840년 가을, 대형 호텔로 신축한다. 비싼 거울, 커튼, 그림, 가구 등으로 고급 인테리어를 했다.

 

1854년 다리아가 사망 할 때까지 이 호텔은 인기를 누렸다. 그녀의 죽음 이후 활황도 끝난다. 1857년, 상인 파벨 페두킨이 매입했지만 매출이 크게 떨어진다. 그도그럴 것이 1861년, 모스크바~상트 간 철로가 개통되자 관광객들은 굳이 토르조크에 멈추지 않았다. 여행자들이 크게 줄자 또다른 상인 바르스코프(Barskov)에게 매각된다. 그는 호텔 경영 방식을 바꾼다. 최상층의 객실 중 일부는 상인 클럽에 임대했고, 가장 큰 객실은 강당으로 이용했다. 1층에는 식당과 당구대를 들였다. 유명인을 꼽는다면 1881년, 레프 톨스토이가 이 호텔을 찾았다. 볼셰비키 혁명 후, (구)소련권이 되면서 1917년 10월 27일(11월 9일)부터 국유화된다. 이 기간 동안 호텔의 장식들은 사라졌다. 1992년, 복원되었지만 자금 부족으로 완료되지는 못했다. 설상가상 2002년 화재로 폐허가 되었다. 2011년부터 복원해 2013년 10월에 완공되어 현재는 러시아 역사 건축물로 지정되었다.


푸쉬킨 돈가스.JPG
푸쉬킨 돈가스

 *포자르스키 선술집의 ‘푸쉬킨 돈가스’

토르조크의 옛 얌스카야(Yamskaya, 현재 제르진스코고(Dzerzhinskogo)) 거리에는 선술집, 상점, 여관, 그리고 고급 식당과 호텔 등이 밀집된 다운타운이었다. 푸쉬킨이 머물던 포자르스키 호텔은 이 곳의 중심지였다. 이 호텔에는 고골(Gogol), 투르게네프(Turgenev), 시인 바실리 주코프스키(Vasily Zhukovsky) 소설가 악사코프(S.T. Aksakov), 극작가 알렉산드르 오스트롭스키(A.N. Ostrovsky), 작가 라디쉬체프(A.N. Radishchev), 비사리온 벨린스키(V.G. Belinsky) 등, 저명한 작가는 물론 왕까지 머물고 갔다. 이 호텔에 시인 묵객들이 많이 찾은 데에는 여주인 다리아의 사교적인 성격은 물론, 빼어난 음식 솜씨가 있었다(그녀의 얼굴은 칼 티몰레온 폰 네프(Carl Timoleon von Neff, 1804~1877)이 그린 그림으로 남아 있다). 더불어 푸쉬킨의 홍보 역할도 한 몫 했다.


푸쉬킨은 호텔의 왼쪽 날개에 있는 2층의 유리창이 있는 방을 단골로 이용했다. 호텔 베란다에서 주변을 살펴보는 일을 즐겼다. 방 벽에는 푸쉬킨이 쓴 콰트레인(quatrain, 4행시)을 남겼다. 특히 푸쉬킨은 이 호텔 식당의 돈가스를 아주 좋아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에서는 "포자르스키의 선술집에서 식사를 시작하십시오“라고.


실제로 이 돈가스는 “포자르스키 돈가스(Pozharskie Kotleti)”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황제 니콜라이 1세(1796~1855) 가족도 이 집의 돈가스를 먹고 반해서 다리아를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전까지 여러 번 초청했다고 한다. 포자르스키 돈가스의 레시피는 하룻밤 호텔비를 지급 못한 한 프랑스인에게 받은 설이라고 전해온다. 그러나 소비에트 시절을 거치면서 음식 맛은 쇠락했지만 아직까지 명맥을 이어가는 식당이 토르조크에는 남아 있다.


푸쉬킨의 연인이었던 안나 케른.JPG
푸쉬킨의 연인이었던 안나 케른

 *‘올레닌 살롱’은 시인묵객의 집

옛 얌스카야 거리(현 푸쉬킨 박물관)에는 러시아 황실 공립 도서관 관장인 알렉세이 올레닌(Alexei Olenin)의 집이 있었다. 당시 잘 나가던 알렉세이 올레닌은 유명한 작가들과 자주 교류했다. 바실리 주콥스키, 이반 크릴로프(Ivan Krylov), 니콜라이 카람진(Nikolai Karamzin) 및 기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을 자주 방문했다. 일명 ‘올레닌 살롱’이라고 했다. 푸쉬킨도 올레닌의 집을 두 번 방문했다. 올레닌에게는 막내 딸 안나 올레닌(Anna Olenin, 1808~1888)이 있다. 푸쉬킨은 1819년(20세), 안나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그때 11살이었다. 두 번째 만남은 1827년(28세). 푸쉬킨의 망명 생활이 끝났을 때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옐리자베타 키트로보 여자 백작(Yelizaveta Khitrovo)의 무도회장에서 둘은 만나게 된다. 안나가 푸쉬킨에게 춤을 신청하자 푸쉬킨은 소녀의 청을 받아 들였다.


1828년(29살) 말, 푸쉬킨은 안나(19세)에게 청혼을 하지만 거절 당한다. 거절 이유는 여러 설이 전한다. 안나와 가족들은 푸쉬킨의 프로포즈를 받아 들였는데 약혼식 하기 전에 마련된 식사자리에 푸쉬킨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신부의 아버지가 화가나 거절했다고. 또 다른 설은 공무원인 아버지가 푸쉬킨의 정치적 신념을 신뢰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전자의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결혼하려고 애를 쓰던 노총각 푸쉬킨이 프로포즈까지 해놓고 식사자리에 오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어쨌든 실연한 푸쉬킨은 1829년(30살) 4월, 나탈리아 곤차로바에게 청혼한다. 곤차라바는 1828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표트르 요겔의(댄스 마스터) 무도회장에서 처음 만났다. 절색미인인, 14살 어린 곤차라바는 처음에는 거절했다가 두 번째는 받아들였다고 한다(곤차라바 이야기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편에 소개하겠다).

한편 안나 올레닌은 푸쉬킨이 죽을 때까지 미혼이었다. 푸쉬킨 사망 후, 3년 뒤인 1840년(32세), 프랑스 귀족인 테오도르 안드라울트(Teodor Andrault de Langeron, 1804~1885)와 결혼(36세)했다. 그는 안나와 결혼하기 위해 러시아로 귀화했다. 후에 그는 폴란드 총재 특별 임무 담당관으로 임명되었고 바르샤바 대통령(1847년~1862년)이었다. 부부는 45년간 해로 했다. 안나는 남편 사망 후 수녀(Koretsky Holy Trinity Convent)가 되었다. 올레닌의 가문에서 푸쉬킨과의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가족 전통으로 내려왔다. 푸쉬킨은 안나에게 작별을 고하기 전에 쓴 시("Her Eyes", "You and You", "Premonition“)가 남아 있다.


안나케른의 묘역과 프루트냐 부활교회.JPG
안나케른의 묘역과 프루트냐 부활교회

 *푸쉬킨의 여인, 안나 케른의 무덤

푸쉬킨의 무수한 러브스토리 중에 안나 케른(Anna Kern, 1800~1879)을 뺄 수 없다. ‘푸쉬킨의 여인’ 중 한 명이다. 푸쉬킨의 마지막 유배지(어머니의 영지인 미하일롭스코예(프스코프 주))에서 사랑에 빠진 여인이다. 안나 케른은 당시 푸쉬킨의 무수한 여인 중에 한 명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푸쉬킨이 남긴 케른에게(To Kern, 1825년)라는 시 때문에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케른에게’라는 시는 러시아어의 최고의 사랑 시로 유명하다(푸쉬킨과 안나 케른의 사랑 이야기는 복잡하고 길어서 프스코프 편에서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실제로 토르조크는 푸쉬킨과 케른과의 연계성은 없다. 그런데 안나 케른의 무덤이 토르조크에서 북쪽으로 겨우 7km 떨어진, 미티노(Mitino, 4km) 마을 근처의 승천 교회(prutnya, 1777년, 르보프 건축) 마당에 묻혀 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안나 케른의 묘지가 이곳에 있는 것을 설명하려면 장황화다. 케른의 삶은 구구절절하다. 그녀의 첫 결혼은 17세. 52살이나 되는 군인 장교였다. 케른이 푸쉬킨을 만난 때는 1825년(25살). 푸쉬킨이 어머니의 영지에서 유배중일 때다. 둘의 불장난은 잠시였을 뿐이다. 그녀는 나이 36세(1864년)일 때, 16세의 사촌을 만나 두 번째 결혼했고 79세까지 그 남편과 함께 했다. 그 사이에 생활고에 시달려서 푸쉬킨의 편지를 5루블에 판 적도 있다. 그녀 78세 때, 남편이 먼저 죽었다(1879년). 남편 죽은 이듬해, 모스크바에서 케른도 죽는다. 케른은 남편 옆(프르모우민 노보토르스키, Pryamukhin Novotorzhsky)에 묻히길 원했다. 케른의 관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왔고 푸쉬킨 광장의 동상 앞을 지나친다. 그때가 둘의 마지막 재회였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 옆에 묻히지 못했다. 봄 해빙기로 남편의 묘지까지 도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티노의 프루트냐 성당에 묻힌 것이다. 그녀의 숙모와 조카의 묘지가 있는 성당이다.


케른의 회고록에 따르면, “바늘 향기가 나는 소나무 숲과 맑은 트베르차 강물이 반짝거리는 모습이 너무 좋다. 이웃 마을인 프루트냐 성당까지 걸어가 먼 친척들의 묘지에 앉아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녀가 살아생전 좋아했던 그곳. 오늘날 그녀의 무덤은 현지 신혼 부부를 위한 순례지가 되었다.


*파벨 이바노비치 울프의 영지

토르조크에는 푸쉬킨의 "가장 친한 파벨 울프(Pavel Ivanovich Wulf, 1775~1858)가 있었다. 푸쉬킨은 친구 파벨에 대해 "가장 사랑스러운 파벨 이바노비치라고 썼다. 파벨 울프는 19세기 중반, 토르조크에 정착했다. 푸쉬킨은 토르조크에 오면 파벨의 영지인 포크로브스코예(pokrovskoe)를 방문했다. 토르조크에서 남쪽으로 12km 떨어진 현재 그루지니 마을(Gruziny)이다. 친구 파벨은 토르조크의 테크로니컬 묘역에 묻혀 있다.(계속)

*Data

토르조크 푸쉬킨 박물관:주소:Dzerzhinskogo str. 71/전화:8(48251)9-20-60

프루트냐 승천교회/안나 케른의 묘역:4X66+46 Prutnya, Tver Oblast

토르조크 돈가스 호텔과 카페:트베르차 호텔(Tvertsa Hotel)/유르베스 카페(Yurves Cafe, Ulitsa Mira, 34, Torzh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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