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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큐레이터 유기선의 <자본의 방식> 14]이론이 아닌 현실

2020-05-25 15:15

글 : 유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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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평행선처럼 보이는 두 직선도 결국 어디선가 만날 수밖에 없는 비유클리드 기하학(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유클리드가 저술한 기하학에서 가지는 ‘평행선 공리’인「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 이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만족하지 않는 기하학이다.)의 세계’라고 했다.

케인스가 보기에 완전한 평면 위를 가정(곡률이 0)한 유클리드 기하학은 ‘이상’이고, 곡면 위에 놓인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눈앞에 닥친 ‘현실’이다. 완전한 평면 위가 아닌 곡면 위에 놓인 현실적인 세상 말이다. 케인스에게 시장은 심리에 의해 좌우되는 완벽하지 않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세계이다. 러시아, 북극, 캐나다에 점을 찍고 연결하면 삼각형이지만, 내각의 합은 180도를 넘는다. 180도를 넘는 것이 바로 비유클리드 기하학, 현실이다. 그가 보기에 주류경제학(신고전학파) 이론은 유클리드 기하학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과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1920년대 말,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대공황’은 시장경제가 아름답고 안정적인 체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노동자들은 해고된 채 다시 고용되지 않았고 공장들은 멈춰섰다. 대공황의 한파가 몰아치던1933년, 미국의 실질 GDP는 4년 전에 비해서 26%나 감소했고 실업률은 25%를 넘어섰다. 생산된 제품은 팔리지 않고 창고 한편에 쌓였다. 기업에 돈을 빌려준 은행들은 연쇄적으로 파산했다. 은행과 기업이 무너지자 시장 지수는 대공황이 찾아온 4년간 약 90% 하락했다. 균형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믿음이 무너진 채로 균형은 유지되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경제학자가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이다. 케인스는 고전학파가 주장하는 균형을 기다리기보다는 정부가 직접 나서야 한다고 다그쳤다. 균형을 기다리다가는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고 강조했다. 그의 대공황 진단명은 ‘유효수요 부족’이다. 케인스는 사람들이 진짜 물건을 살 것인가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물건을 살 사람이 줄어들면 공장은 생산을 줄이며 해고된 사람들로 인해 수요 부족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대공황이 도래하기 전에 세계를 지배하던 것은 세이의 법칙(Say’s law)이다. 고전학파 경제학자가 따르던 세이의 법칙은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는 것으로 생산자가 상품을 만들면 시장에서 모두 소비된다는 것이다. 공급만 하면 수요는 자연스레 창출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돈을 은행에 넣어두는 것도 현재의 소비를 미래로 미룬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어차피 미래에는 저축도 모두 투자로 소비되기 때문이다. 시중에 저축이 늘면 이자율은 떨어지고 자연스레 투자는 늘어 그동안 쌓인 저축은 해소된다. 고전학파는 뭐든지 넘치면 정리되고, 부족하면 채워지는 마법과 같은 세상을 그렸다. 이 세상은 빈곤과 실업문제가 있으면 저절로 해결되고, 완전고용과 과잉생산은 있을 수 없는 세상 말이다. 모든 것이 균형을 이루는 세상에서는 가격(물가, 금리, 임금)이라는 것도 상황에 따라서 유연하게 움직인다. 따라서 세이의 법칙에서는 대량실업이나 장기불황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선 소비자에게 호응이 없으면 제품은 팔리지 않고 폐기된다. 생산만 하면 팔린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케인스는 위기가 닥치면 고전 경제학자들의 말처럼 가격(물가, 금리, 임금)이 유연하게 움직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미 오른 휘발유 값이 국제 유가에 따라서 유연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한 번 올라간 가격은 공황이 오더라도 잘 내려가지 않는다. 케인스는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되묻는다. 당신이 사장이면 경기가 안 좋아졌다고 해서 치킨 값을 낮출 수 있느냐고 말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가격을 내려도 팔리지 않는 상황이다. 앞으로 가격이 더 떨어질 것이라고 믿는 심리가 사회에 만연하면 사람들은 소비를 미룬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싸기 때문이다. 소비가 미뤄지면 기업은 생산과 고용을 줄이고 불황은 가속화된다. 이것이 디플레이션의 무서움이다. 케인스는 불황의 가속이 경제 위기를 넘어 체제 위기로 번질 것으로 내다보았다. 민주주의가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불황이 오면 소유한 자산을 내다 팔거나 자연스레 저축을 늘린다. 개인에게 저축은 재정 안정성을 높이는 합리적인 행위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저축하면 소비는 줄고 돈은 돌지 않아 사회 전체의 부는 오히려 줄어든다. ‘절약의 역설’이다. 케인스에게 저축은 일종의 소비 실종이다. 그는 사라진 소비보다 실천하는 소비가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수요를 이끌어줄 주체인 정부 개입의 필요성과 함께.

 

케인스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굶어 죽는 사람들의 지갑을 채워주라고 다그쳤다. 저소득층은 돈이 생기면 대부분을 소비에 쓴다. 한계소비성향(추가 소득 중 저축되지 않고 소비되는 금액의 비율이다. 일반적으로 부자보다는 가난한 사람이 한계 소비
성향이 높다.)이 높은 것이다. 소비가 늘면 기업은 투자와 생산을 늘리고 경제는 선순환된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정부 지출을 대대적으로 확대했다. 공공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만드는 ‘뉴딜정책’은 케인스주의의 유효성을 입증했다. 케인스는 자신의 저서인 『일반이론』에서 뉴딜정책의 핵심을 이렇게 적었다.

 

“병에 지폐를 채워 적당한 깊이로 묻고 개인들로 하여금
그 지폐를 다시 파내게 한다면 실업은 사라질 것이다.”

 

케인스는 이론이 난무하는 허황된 공간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가정을 하는 고전학파를 질타했다. 세상은 고전학파의 가정처럼 자연스레 균형을 이루지 못한다. 오히려 극단적으로 악화된 경제 상황, 그 자체로 균형을 이룰 뿐이다. 이것은 시간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케인즈의 시각에서 고전학파는 비현실적인 가정이 맞지 않는 이유를 현실에서 찾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자들이다. 케인스는 고전학파가 굳게 믿고 있는 세이의 법칙처럼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지출은 스스로 소득을 창출한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소비가 개선될 것이라는 생각은 마치 이 세상은 스스로 완벽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불안에 떠는 사람들은 저축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고, 공포는 비합리적인 선택을 유도한다.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균형이란 이상적이며, 진정한 균형은 현실 그 자체이다. 우리는 이론이 아닌 현실 속에 살고 있다.

 

“경제학자는 보편적인 것에 비추어
특수한 것을 생각하고, 추상과 구체를 동시에 고려한다.
미래에 지향할 목적을 위해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연구해야 한다.”
_ 케인즈

 

 

 

이 글은 <자본의 방식>(행복우물출판사)의 일부분입니다.

 

경제 큐레이터 유기선은

통계학과를 졸업하고 금융시장과 경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여러 학자들의 사상을 거슬러 올라가 ‘돈과 자본이란 어디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가?’에 대한 의문을 토대로 금융의 역사와 철학, 금융을 움직이는 심리 등에 관한 글을 썼다. 그 중 인사이트가 있는 ‘자본과 관련된 48가지 이야기’를 추려서 쉽게 단순화했다. 저자가 집필한 <자본의 방식>은 ‘2019년 한국출판문화진흥원 중소출판사 출판콘텐츠 창작 지원사업’ 선정작품으로 당선되었다. 우리 삶에 가장 가까이 있지만 먼 듯한 이야기, 돈과 자본에 대한 통찰력있는 큐레이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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