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이벤트
예스24교보문고알라딘인터파크
COLUMN
  1. HOME
  2. COLUMN

[날마다 앞북 어쩌다 뒷북 13]응급실 의사의 60가지 사랑 이야기

남궁인의 <제법 안온한 날들>

2020-03-11 14:30

글 : 이상문 부장

  • 트위터
  • 페이스북
  • 카카오스토리
책 읽는 사람이 준다고들 하지만 편집부로 배송되는 책이 여전히 많다. 온라인 서점에 가보면 매일 쏟아지는 책이 부지기수다. 세상에 던져진 소통과 공감의 노력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건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여전히 안타까운 일이다. 가능하면 하루 걸러 한 번씩이라도 새 책을 소개하기로 했다. 신간을 앞서 소개하니 '앞북'이다. 손이 빌 때마다 집 서가에, 회사 책꽂이에 쌓인 밀린 책들도 소개하려 한다. 뒤에 읽는 책이니 '뒷북'이다.

 

'생이 길어질수록 이해할 수 있는 고통의 가짓수가 늘어간다...'

저자는 책 속 어디쯤에 이런 말을 남겼다.  그처럼 의사가 아니더라도 우리 또한 공감하는 얘기 아닐까. 물론 생이 길어져 비로소 터득하는 지혜도, 보태어지는 행복도 있긴 하지만, 우리는 대개 고통 몇 가지씩은 쥐고 산다. 

 

저자는 글쓰는 응급실 의사다.  이미 두어 번 책을 낸 적 있는 작가인데 난 그를 몰라봤다. 생과 사, 상처와 치유가 반복되는 치열한 현장 이야기를 쓰겠거니 짐작이 된다. 방송으로 치면 현장 25시 같은 다큐물이 될 공산이 큰, 유쾌하진 않은 감동을 강요(?)할 듯한 책 같아 선뜻 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책을 놓았다가 다시 집어든 것은, 온라인서점 책 소개를 통해 그가 가진 단련의 시간이 꽤 길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감정의 골에서 무너질 듯 말듯 겨우 지탱하는 어리고 심약한 의료인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직 어리고 심약할지도 모를, 내 조카녀석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조카 역시 대학병원 응급실에 근무하는 젊은 의사다.   

 

01242015061902029332.jpg

서울시내 한 대학병원 응급실. 사진/조선 DB

 

의사가 왜 하필 사랑 이야기를 들고 왔을까. “우리가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에 가장 후회할 일은 뭘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얼추 답이 보인다. 갖지 못한 돈? 누리지 못한 권력? 명예와 인기? 아마도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호스피스 병동에 있던 분들이 증언한 사례도 많지 않았던가. 죽음을 눈 앞에 둔 분들의 이야기들, 그 수많은 회한 중엔 예전에 끝내 못다 한 사랑, 소중한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 망설이고 미루다 놓쳐버린 마음. 그런 것들이 후회로 남았다. 그러니 늘 생사의 벼랑 끝에 선 마음으로 일하는 의사가 사랑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럽다.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일터에서 목격한 사랑은 때로 강철 같은 의사들의 눈시울마저 젖게 할 만큼 감동적이다. 평생을 해로한 할아버지가 갑작스레 아내를 떠나보낸 후 마지막으로 아내의 손을 꼭 잡고 하는 고백, 가족보다 더 끈끈하게 지내던 환경미화원이 동료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는 대목, 화재 현장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맨몸으로 버틴 아버지의 이야기 등은 일상에 파묻혀 살아가는 동안 잊고 있던 사랑의 소중함을 보여준다.

이번 책은 그의 전작 <만약은 없다>, <지독한 하루>와 결을 조금 달리한다. 이전엔 응급실에 현미경을 들이대듯했다면 이번엔 안온한 일상으로 물러나 고통 이후 찾아오는 인간의 회복을 멀리서 응시한다. 예컨대, 가장이 쓰러져 휠체어에 앉게 됐지만 남은 가족은 그를 돌보며 슬픔을 딛고 건강하게 회복하고 성장해가는 이야기 같은 것이다. 저자는 이런 가족들을 관찰하고 그 이야기를 통해 타인이 함부로 재단하지 못할 인간의 불행과 행복, 생명력에 대해 설명한다. 

 

'... 내가 세상만사를 슬픔에 찬 눈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동안, 휠체어에 앉은 그는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세상을 견디고 있었으며, 가족들은 그를 돌보며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일을 했다. (…) 그 시절 나는, 가족들이 전부 건강하고 이렇다 할 좌절도 없었다. 그럼에도 응급실에서 절규하는 사람을 본다는 이유로 불행을 재단하는 습관을 이어왔다. 그러나 싹은 어디에서든 피어난다. 그리고 척박한 곳에서 움튼 싹은, 오히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한다. 우리는 주저앉는 존재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슬픔을 안고 당당하게, 당연하게 살아가고 있다. 병원을 나간 사람들은 시련을 극복하고 때로는 미소를 지으며 살아갈 것이다. 한참 고된 생활에 취한 나는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사람은 일방적으로 불행하지 않다.' (194~195쪽)

이 책에는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의사 자신의 이야기도 있다. '의사도 병원에 가는 게 두려울까?'라는 물음을 스스로 던져본다. 누구나 한 번쯤 궁금해해봤을 법한 질문이다. 결론은 의사도 병원 가는 게 두렵다.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고 병원을 찾는 환자들보다 더 두려울 수도 있다. 병원에서 만나는 의사는 하얀 가운을 입고 근엄하게 환자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지만, 사실 진료가 무섭고 아프면 힘든 건 똑같다. 인간 보편의 고통 앞에서 그가 보이는 모습은 의사의 인간미를 보여준다. 그는 무릎을 크게 다치고 끙끙거리며 혹시 수술을 하게 될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어렸을 적 유난히 아프던 발가락 마취의 기억을 떠올리며 주사 맞으러 온 자기 환자에게 “이거 진짜 완전히 너무 아픈 겁니다. 아휴, 꼭 잘 참아주세요. 이거 정말 진짜 아파요”라고 거창한 예비 선언을 하기도 했다.


'... 타인의 고통을 많이 경험하고 지식을 쌓은 의사도 좋은 의사가 될 수 있겠지만, 더불어 자신의 삶을 오래 경험하고 예민하게 지켜본 의사도 좋은 의사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보통 사람이 나이 지긋한 의사에게 더욱 신뢰감을 느끼는 것은, 의학은 반복으로 공고해지는 경험의 학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사 개인이 인생 굴곡을 통과할수록 그의 삶도 많은 고통으로 풍성해지기에 의사가 환자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가기 때문일 테다. (…) 삶이 흘러갈수록 나는 더욱 실재하는 고통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점차 내 환자들 전부가 아닌 일부에게라도 더 깊이 공감하며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고통을 내가 겪은 일처럼 조금 더 이해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나이가 들어가며 다양한 고통의 편린을 마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122~123쪽)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러면 좀 느끼할 수도 있는데,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는 동안 가슴에 온기가 전달된다. 의사인 주제에 이 사람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무엇보다, 실재하는 고통을 남(환자)의 일로만 다루지 않는 공감력, 그 마음이 순탄하게 읽혀 참 좋다. 진정성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극성이라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책을 읽다 말고는, 뭣에 홀린 듯 온라인서점 사이트를 열고, 꽤 오랜만에 책 주문을 넣었다.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800x0 (1).jpg

<제법 안온한 날들> 남궁인, 문학동네. 2020/3

 

 

 

Copyright ⓒ woman.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트위터
  • 페이스북
  • 카카오스토리
  • 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1. 메인으로
  2. 기사목록
  3. 맨 위로
댓글달기
글쓴이    비밀번호 (숫자 4자리를 입력해주세요)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이번호 커버이미지
이번호
서점 이벤트
  • 예스24
  • 교보문고
  • 인터파크
  • 알라딘
  • 이달의 목차
  • 지난호보기
  • 정기구독